또 하나 생각나는 큰 죄가 있다. 대학원 석사과정에 다닐 때, 지방 국립대를 졸업한 고교동창이 대학원을 서울대로 진학해 와서 만났다. 그 친구는 생물학을 전공하며 생체실험을 하는데 실험용 작은 쥐를 사육하지 않는지, 큰 집쥐를 생포해 실험한다며 나한테 쥐덫을 건네주며 자취집에 쥐 좀 잡아 달라고 부탁했다. 부엌 수채 구멍에 쥐가 들락거리는 걸 본 적이 있는 나는 무심코 흔쾌히 동의하고, 몇 마린지 잘 모르지만 잡아다 준 기억이 있다. 이른바 ‘불법 체포 및 감금죄’와 ‘살생방조죄’를 저지른 것이다. 물론 시골서 어릴 적에 ‘쥐 박멸’운동에 동참해 쥐약을 놓아 살생공범도 저질렀다.
근데, 대도시 아파트 살면서 최근 또 쥐와 악연을 맺었다. 운암동 주공아파트는 지은 지 꽤 오래되어, 계단식 기와지붕 형 5층짜리다. 2001년 대학에 취직하면서 처음 전세 들어온 뒤 9년째 줄곧 5층집에 살고 있다. 재작년 겨울에 전주에 한 시인스님을 만나러 가서 얘기하다가, 허름하지만 1층 한옥이 아담하고 포근해 보여 나도 이런 집에 좀 살고 싶다고 부러워했다. 그러자 그 분은 집이 오래되어 쥐가 들락거려 소란스럽다고 대답했다.
그 뒤 귀가해 한참 지났는데, 겨울이라고 뒷 베란다에 내어놓은 쌀 포대와 대봉감 상자가 쥐한테 약탈당한 것을, 한참 뒤에사 알아차렸다. 종이포대를 입으로 뚫어 쌀이 널브러지고, 감을 온통 짓밟고 입댄 것이다. 문자 그대로 유린(蹂躪) 그 자체였다. 화까지 치민 것은 아니지만,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그 무렵 천장에 달그락 달그락 쥐 기어 다니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차 싶었는데, 어떻게 알고 어떻게 침투했는지, 일념(一念)의 인연으로 빚어지는 법계(法界)의 조화다 싶어, 생각할수록 신묘하게만 여겨졌다. 어쨌든 자업자득일 테니, 화낼 일은 아니었다.
“만장회도(慢藏誨盜)요, 야용회음(冶容誨淫)이라!” 갈무리를 허술히 하면 도둑을 꾀고, 얼굴을 야하게 치장하면 음란을 꾄다. 일찍이 주역을 읽을 때 인상 깊어 늘 염두에 두고 학생들한테도 곧잘 일깨우는 격언이다. 근데 나 자신이 그대로 된통 당한 꼴이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창피할 뿐이었다.
바로 난장판을 수습하고 자리를 옮겨 갈무리했다. 먹이가 없어지면 들락거리지 않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겠지 기대했다. 근데도 천장에서 소리는 가끔씩 들리고, 봄이 무르익고 날씨가 따뜻해져 뒷문을 열어 놓고 외출하거나 잠자는 시절이 되자, 이제는 쥐가 마루까지 들락거리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내가 수행자로서 불살생의 계율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줄 쥐도 아는 듯했다. 어쩌면 내가 몇 번 먹이를 뒤 베란다 바닥에 놓아준 게 잘못이었을까? 이제는 두려움이나 겁도 없이 대담하게 출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단 1마린 줄 알았는데, 나중에 어머님이 와서 본 말씀을 하시길래, 유심히 살펴보니 여러 마리 가족이 분명해 보였다. 쥐는 토끼처럼 번식력이 엄청나게 빠르고 강한 줄 알기에, 이대로 놓아두었다가는 쥐떼의 소굴이 되겠다 싶어 몹시 고민에 빠졌다. 이웃이나 관리사무소에서 알면 당장 박멸하려 들 테고, 언젠가 내가 떠나고 다른 사람이 이사 오면 어차피 또 손을 쓸 게 틀림없다. 쥐들이 자발로 떠나길 기대하기는 내 기도염원의 힘이 지금 너무 미약한 줄 스스로 잘 안다.
때마침 촛불시위가 한창 들불처럼 크게 번지며, 공교롭게도 여론과 언론에도 자주 쥐가 오르내렸다. 나로서는 죄악과 형벌고통의 본질의미를 화두처럼 들고 한참 사유 궁리하는 시절인연이 겹치기도 했다. 깊어가는 고민 속에, 마침내 나는 기도와 명상을 통해 나름대로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쥐들이 남의 눈에 띄어 살해당하기 전에, 내가 방편을 써서 생포해 다시 멀리 방생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2008년 6월 21일 토요일 하지 날 비가 제법 내리고, 오후 무등산에 갔다 오는 길에 말바우시장 들러, 20여 년 전 친구한테 받아쓴 적이 있는 쥐덫을 한 개 3천원 주고 사왔다. 그때보다 조금 작아 보이지만, 철망은 더 튼실해 보였다. 집에 와서 밤에 덫을 놓았는데, 이튿날 아침에 영락없이 새끼 쥐 1마리가 갇혀 있었다.
우선 디카로 현장사진을 찍었다. 걸어 놓은 미끼는 채 먹히지 않은 채 바닥에 떨어져 뒹굴고, 쥐는 불안과 공포에 떨며 안절부절못하더니, 내가 사진을 찍고 쥐덫을 봉지에 담으려고 들 때는 요란하게 찍찍거리는 소리가 무척 애처롭게 들렸다. 빨리 풀어 주어야겠다는 일념에서, 힘들지만 오전 일찍 봉지에 겹겹이 싼 쥐덫을 배낭에 넣어 등 뒤에 맨 뒤 집을 나섰다.
쥐의 생존권 보장을 위해서는 인가 주위에 풀어 주어야겠지만, 그러면 남한테 피해를 끼치는 셈이고, 또 언제 잡혀 죽거나 독살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좀 안됐지만 멀리 무등산 동화사터 800m 고지 돌탑무더기에 방생하기로 마음먹었다. 말이 ‘방생’이지, 사실은 종족이 살지 않을 고원(高遠)지대에 추방 내지 유배시키는 꼴이다. 사람의 방 천장을 드나들며 소란을 피워 안면을 방해하고 음식물을 훔쳐 먹고 재물을 손괴한 죄책을 물어, 미안하지만 종신 유배형 내지 추방형에 처한 것이다.
먼저 원효사에 들러 지장보살상 발밑에 쥐가 든 덫을 올리고 촛불과 향을 켠 채 참회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산등성이를 걸어 올라가 돌탑 틈새에 쥐덫을 대고 문을 열자, 얼마나 두려움과 배고픔에 떨었는지 기운 빠지고 팽긴 모습으로 믿기지 않는 듯 조심스레 문밖으로 몸을 내밀어 슬며시 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나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부디 낯설고 외딴 새 환경에서 잘 적응해 살아가라고 염원하면서!
하산해 집에 와서 그날 밤 다시 쥐덫을 놓았는데, 잠자리에 들기 전 덜컥 소리가 나기에 나가보니 벌써 걸려들었다. 쥐한테 미안하지만 기다리라고 말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 쥐를 방생하러, 연달아 사흘째 무등산에 가야 했다. 피로가 쌓여 힘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책임이다. 똑같은 절차를 거쳐 방생했다. 이번 쥐는 꼬리가 문에 걸려 상처를 입어 더 미안했다. 이제 같은 곳에 두 마리를 풀었으니, 낯선 곳에서지만 두 가족이 상봉하여 조금은 위로를 받지 않았을까?
연달아 두 마리를 잃은 쥐 가족은 이제 거동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그 뒤 일주일 내내 아주 조용하고 기척도 없어서 다 잡힌 줄로 착각했다. 일찍 장마에 들어선 6월 말일 산에 갔다 왔는데, 오후에 다시 쥐 한 마리가 덫에 걸렸다. 7월1일 아침 음산한 장마구름 아래 다시 방생하러 산에 올랐다. 이튿날 비가 제법 내리고 그날 밤 다시 제법 큰 쥐 한 마리가 걸려, 3일 또 산에 올라가 똑같이 방생했다. 이번 쥐는 꼬리가 문에 걸려 잘려 나갔다. 얼마나 아플까? 소독도 못하고 풀어 더욱 미안했다.
열이틀 사이 네 마리의 가족을 잃은 쥐떼는 마침내 이주를 결심했는지, 그 뒤로는 천장에도 소리가 나지 않고 뒤뜰에도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다 잡힌 것은 아닐 거라는 느낌은 분명했다. 여하튼 멀리 떠났으면 소기의 목적은 이룬 셈이니까. 마음의 미안함은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지만, 생활의 고요와 안정은 되찾은 셈이다.
그렇게 40일 가량 평화가 이어졌다. 그러다가 광복절 직전에 쥐가 들락거리는 낌새를 알아챘다. 다시 쥐덫을 놓았는데, 어김없이 또 걸렸다. 그래서 8월15일 광복절, 음력으로는 7월 보름 백중(우란분절)이자 하안거 해제일에 지난번처럼 쥐덫을 배낭에 잘 싸서 짊어지고, 이번에는 새벽같이 집 문을 나섰다. 덕분에 산장행 첫차를 한참 기다려서야 탔다. 원효사 들러 지장보살상에 기도하고, 동화사터 돌탑에 다섯 번째 쥐를 풀었다.
내가 몹시 잔인하고 고약한 심보일 테지만, 쥐들의 안부가 자못 궁금하기도 하다. 그동안 네 마리는 안 죽고 잘 살아갈까? 이역만리 낯선 유배지에서 다섯째 가족을 만나는 감회는 어떨까? 죽는 줄로만 알았을 목숨을 건지고, 게다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실종 가족까지 재회하는 기쁨이 있을까? 귀양 온 고통이나 다른 가족과 생이별한 슬픔 및 원한이 더 사무칠까? 그 뒤 지금까지 1년 넘게 이따금씩 먹이를 갖다 놓으면 곧바로 먹어치우는 걸 보아, 아마도 상당수는 죽지 않고 살아 적응한 듯하다. 어쨌든 나는 쥐들을 부덕(不德)하게 체포감금하고 황량한 고원에 강제 추방한 죄악을 스스로 참회하고, 쥐들이 나한테 맺힌 원한업장을 해소하고 리고득락(離苦得樂)하길 기도 염원한다.
쥐띠인 내가 무자년 쥐해에, 나하고 인연 있다고 내 집에 찾아들어 보금자리를 튼 쥐들을 무자비하게 포획하여 멀리 축출했으니, 참으로 애꿎은 운명의 장난이고 서글픈 노릇이다. 나 스스로 빛고을에 학문상 귀양 온 신세인데도, 그 옛날 중죄인이나 정적(政敵)을 멀리 종신유배 보내던 절대왕권을 휘두르며, 근대 들어 체제에 반항하는 민주인사를 국외로 추방하던 독재정권을 닮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석사학위 논문으로 쓴 “조선조 전가사변(全家徙邊)”의 역사적 범죄와 형률을, 내 스스로 종(種)과 차원을 달리하여 새롭게 재현하는 것 같아 몹시 애달프고 씁쓰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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