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감)산(憨山) 대사-주1)
운곡 대사(雲谷大師)의 휘(諱: 법명)는 법회(法會)고, 운곡은 별호(別號)다. 절강성 가선현(嘉善縣)의 서산(胥山)에서, 명(明)나라 효종(孝宗) 홍치(弘治) 13년 경신(庚申: 1500)년, 회씨(懷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출가(出家)에 뜻을 두었는데, 고향 대운사(大雲寺)의 모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처음에는 요가(瑜伽)를 배웠다.
대사는 늘 “출가수행에는 생사(生死)의 중대사가 가장 절실한데, 어찌 구차하게 사소한 의식주를 생계로 삼는단 말인가?” 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경책했다. 그러다가 나이 19세가 되어 곧 참선 공부에다 결연히 뜻을 두고, 그 뒤 얼마 안 되어 교단(敎壇)에 올라가 비구의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천태종(天台宗)의 소지관법문(小止觀法門)을 듣고서, 이것을 닦고 익히는 데 오로지 정진하였다.
당시 법주제(法舟濟) 선사(禪師)가 경산(徑山)의 도맥(道脈)을 이어, 그 군(郡)에 있는 천녕사(天寧寺)에서 폐관수행(閉關修行)을 하고 계셨다. 운곡 선사가 천녕사에 참방(參訪)하여 고두(叩頭)의 예를 올리면서, 그때까지 닦은 바를 말씀드렸다. 이에 법주제 선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지관법(止觀法)의 요체(要諦)는, 몸과 마음의 기식(氣息)에 의하지 않으며, 안과 밖으로 초연히 해탈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네가 닦은 것은 말단 하승(下乘)으로 흘러버렸으니, 어찌 달마(達磨)가 서쪽에서 온 뜻이겠는가? 도를 배우는 것은 반드시 마음 깨닫는 것을 으뜸으로 삼는다.”
이 말을 들은 운곡 선사는 그를 슬피 우러러보며, 가르침을 더 보태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법주제 선사는 염불(念佛)로써 화두(話頭)를 절실히 참구(參究)하라고 가르쳐주며, 또한 의심스런 생각일랑 몽땅 내려놓으라고 명하였다. 운곡 선사는 그 가르침에 귀의하여, 밤낮으로 참구하면서 침식(寢食)을 모두 잊었다.
하루는 공양을 받는데, 공양이 다 끝났는지도 알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그릇이 홀연히 땅에 떨어지면서 갑자기 깨달았는데,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황홀하였다. 다시 가르침을 더 청하자, 법주제 선사가 마침내 인가(印可)를 내렸다. 이에 종경록(宗鏡錄)을 열람하고, 유심(唯心)의 종지(宗旨)를 크게 깨달았다.
이때부터 모든 경전의 가르침과 여러 조사(祖師)의 공안(公案: 화두)들에 이르기까지, 마치 집안에 놓여 있는 옛 물건들을 구석구석 눈으로 훤히 보듯이 명료해졌다. 이에 총림(叢林)에서 자취를 감추고, 육지에 가라앉아(은둔하여) 천한 일을 도맡았다.
하루는 심진집(鐔津集)-주2) 을 뒤적이다가, 명교 대사(明敎大師)가 불법(佛法)을 보호하는 깊은 신심(信心)으로 처음 관음대사(觀音大士: 관세음보살)에게 예배할 때, 밤낮으로 그 칭호를 10만 번이나 염송한 사실을 알았다. 이에 운곡 선사는 그 수행을 본받고자 발원하여, 드디어 관음보살상에 예배를 올리며 밤새도록 용맹 정진하였다. 그 뒤로도 예배와 경행(經行)은 종신토록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 강남 지방에는 불법(佛法)과 선도(禪道)가 끊어져서, 전혀 들리지도 않는 형편이었다. 운곡 선사가 처음 강소성(江蘇省)의 금릉(金陵)에 이르러, 천계사(天界寺) 비로각(毗盧閣)에 여장을 풀고 기숙하면서, 도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그를 보는 사람마다 도(道)가 대단하다고 칭송했다. 위국선왕(魏國先王)이 이를 듣고서, 서원(西園) 총계암(叢桂庵)에서 공양을 올리고자 청했다. 이에 운곡 선사가 거기에 머물면서 사흘 밤낮 동안 선정(禪定)에 들었다.
운곡 선사가 그곳에 거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마침 나(이 전기를 쓴 憨山 大師)의 선태사조(先太師祖: 즉 돌아가신 큰 스승님) 서림옹(西林翁)께서 승록(僧錄)을 담당하시면서 보은사(報恩寺) 주지를 겸하고 계셨는데, 운곡 선사를 만나러 가서 본사(本寺)의 삼장전(三藏殿)에 머무르시라고 청하였다. 그리하여 운곡 선사는 자리를 잡고 우뚝 앉아서, 외부인과 접촉을 완전히 끊었다. 그렇게 문지방을 넘어가지 않은 지가 3년이나 되어, 사람들이 통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권세 있고 고귀한 사람이 놀러왔다가, 선사가 단정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는, 무례하다고 욕하며 오만하게 굴었다. 이에 선사는 지팡이를 끌고 다시 섭산(攝山)의 서하(棲霞)로 들어갔다.
서하는 량(梁)나라 때 달마 대사(達磨大師)가 처음 와서 문을 연 곳이다. 량(양)무제(梁武帝)가 천불령(千佛嶺)을 뚫은 이래, 역대 왕조들이 계속 충분한 전지(田地)를 공양으로 하사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도량(道場)이 황폐해지고, 대웅전(大雄殿)과 법당(法堂)은 호랑이와 이리의 소굴이 되었다. 선사는 그곳이 그윽하고 깊숙함을 좋아하여, 마침내 천불령 아래의 띠(포아풀과의 여러해살이 풀)를 베어 오두막을 짓고, 자신의 그림자조차 산 밖에 드러내지 않으며 칩거했다.
그런데 이때 도적이 선사의 거처에 침범하여, 있는 것을 모조리 훔쳐가 버렸다. 도둑이 밤중에 달아나다가, 날이 밝을 무렵 암자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았을 때, 사람들이 그 도둑을 잡아 선사에게 압송해 왔다. 그런데 선사는 그에게 음식을 먹여주고, 그 도둑이 훔쳐갔던 것을 모두 주어 돌려보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소식을 들은 자들은 모두 감복(感服)하였다.
태재(太宰)인 오대(五臺) 륙공(陸公)은 처음 사부(祀部: 祭禮를 관장하는 곳)의 주정(主政: 主事의 별칭)이 되어, 옛 도량들을 참방(參訪: 순례)하다가 우연히 서하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선사의 기운과 집이 비범함을 보고서, 아주 특별히 존중하였다. 거기서 이틀 밤을 묵고 나서, 산중에 그 절을 중흥하려고 마음먹고, 선사에게 주지가 되어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선사는 한사코 사양하며, 대신 숭산(嵩山)에 있는 선공(善公)을 천거하여, 그 명에 응하도록 하였다.
선공은 있는 힘을 다하여 절의 옛 모습을 복원하였고, 가옥과 토지를 점거한 호족과 백성들을 내쫓았다. 방장(方丈)이 되어 참선당(參禪堂)을 건립하고 강습을 열어, 사방 각지에서 온 사람(수행자)들을 받아들였다. 강남 총림(江南叢林)이 이때부터 시작하였는데, 이 모두가 선사의 힘이었다. 도량이 열린 다음 왕래하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자, 선사는 다시 산의 가장 깊은 곳으로 옮겨 들어가(移居) 천개암(天開庵)이라고 불렀는데, 쓸쓸한 그림자가 처음과 같았다.
한때 륙공(陸公)의 인도로 말미암아, 참선의 도에 대해 아는 게 많았던 고관대작이나 재가 거사(在家居士)들이, 선사의 도풍(道風)을 듣고 나서 자주 찾아와 알현했다. 무릇 참배하고 가르침을 청하는 자가 한번 알현하면, 선사는 곧 일상사(日常事)가 어떠한지 물었다. 그리고 귀천과 승속(僧俗)을 불문하고, 방에 한번 들어온 사람에게는 반드시 방석을 바닥에 던져주었다. 그 자리 위에 단정히 앉은 채로 자신의 본래 진면목을 되돌아보게 한 것이다. 심지어 종일토록 말 한 마디 않고 철야정진을 시키기까지 하였다. 작별할 때가 되면 완곡하고 간절한 어조로, “정말로 허송세월하지 마시오.”라고 당부하였다.
그 뒤 다시 만나면, 작별하고 귀가하여 어느 정도 마음을 내어서 공부했는지, 그 난이도가 어떠했는지를 반드시 물어보았다. 그러므로 황당하게 여긴 자는 망연자실(茫然自失)하여 응답할 수가 없었다. 이는 운곡 선사의 자비로운 마음이 더욱 간절할수록, 그 엄숙함이 더욱 장중한 때문이었다. 비록 문과 뜰은 따로 만들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선사가 거처하는 산 끝을 쳐다보면, 날씨가 춥지 않아도 온몸에 전율(戰慄)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선사는 한결같이 똑같은 마음(平等心)으로 서로 감싸주었고, 언제든지 사람을 맞이함에는 시종 부드러운 말과 낮은 목소리로 대했다. 한결같이 평상심을 유지하면서, 일찍이 말이나 기색으로 나타내는 법이 없었다.
선사에게 귀의한 사대부도 나날이 더욱 늘어갔다. 사대부 중에는 더러 산에 들어올 수 없어, 알현을 청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선사가 도(道)로써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한다는 자비심에서, 친히 가서 만나 주었다. 1년에 한 번 정도 성(城) 안을 왕래하였는데, 이때는 반드시 회광사(回光寺)에서 주석(主席)했다. 매번 선사가 회광사에서 머물 때마다, 재가 선남자 선녀인들이 와서 귀의했는데, 마치 부처님의 연화좌(蓮華座)를 둘러싸는 듯했다.
선사는 대중을 한번 보시면, 마치 마술사처럼 사람들을 교화했는데, 일찍이 일념(一念)의 분별심도 없었다. 그래서 친근하게 대하기가, 마치 어린애들이 자애로운 어머니 옆에 있는 것과 같았다. 운곡 선사가 성(城)을 나서면 대부분 보덕사(普德寺)에서 주석하였는데, 구학 열공(臞鶴悅公)-주3) 이 진실로 그 가르침을 받았다. 작고하신 태사(先太師)께서 매번 방장실(方丈室)로 불러들여 열흘이나 한 달 정도씩 머물게 했다.
그때 나는 아직 철모르는 동자(童子)였다. 내가 가까이서 스승을 시중들면서 선사께 수고를 끼쳐드려도, 선사는 나를 가르치고 깨우쳐 주시는 데 싫증내는 법이 없었다. 당시 내 나이가 열아홉이었는데, 출가하지 않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선사께서 이걸 알고 물으셨다.
“너는 어찌하여 초심을 배반하느냐?”
이에 내가 “단지 세속을 싫어할 따름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선사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속이 싫어졌다면, 어찌하여 고승대덕(高僧大德)들을 본받지 않느냐? 옛날의 고승은 천자(天子)조차도 신하로 대하지 못했고, 부모조차도 자식으로 기르지 않았으며, 천신(天神)이나 용왕(龍王)이 공경해도 그것을 기쁨으로 여기지 않았다. 모름지기 전등록(傳燈錄)이나 고승전(高僧傳)을 구해서 읽어보면, 곧 알게 될 것이다.”
내가 곧 책 상자를 뒤적여서 중봉광록(中峰廣錄)-주4) 한 부를 찾아, 이것을 가지고 선사께 가서 사뢰었다. 그러자 선사께서 보시고, “이것을 잘 익혀 음미하면, 곧 도 닦는 승려가 귀함을 알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이로부터 머리를 깎고 잿물들인 승복을 입기로 결심했는데, 이것은 모두 진실로 선사의 인도와 가르침을 받은 것이었다. 이때가 명나라 세종(世宗) 가정(嘉靖) 43(甲子: 1564)년이었다.
2년 뒤 병인(丙寅: 1566)년 겨울에 대사는 선도(禪道)의 맥이 끓어질 것을 안타깝게 여겨서, 후학 53인을 모아 천계사(天界寺)에서 좌선수련법회(坐禪修練法會)를 열었다. 이때 대사께서 애써 나를 뽑으셔서, 대중들과 함께 동참하도록 배려하셨다. 특히 나에게 퇴전(退轉)하지 말고 위를 향하여 일로 매진하라고 지시하며, 염불로써 화두를 진실하게 살피도록 가르치셨다. 이때 비로소 문자(文字)가 없는 곳에서 생명의 본래 진면목을 참구하는 선가 종문(禪家宗門)의 일을 알게 되었다. 당시 남부 지역의 여러 사찰에 걸쳐, 제대로 선종(禪宗)을 따르는 자는 4-5명뿐이었다.
대사께서 늙음을 드리우게(垂老: 晩年이) 되자, 슬픈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셨다. 그래서 비록 가장 작은 사미승(沙彌僧)까지도 한결같이 자비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예(禮)로써 대하셨다. 무릇 사소한 기거동작(起居動作)이나 위의예절(威儀禮節)을 친히 귓가에 말하고 면전에서 타이르셨다. 누구나 하도 순순히 잘 유도하셔서, 보는 사람마다 모두 자기만 가장 친근히 대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법을 보호하시는 마음은 매우 깊었다. 처음 발심해서 배우는 사람도 가벼이 여기지 않았고, 계(戒)를 훼손하는 자도 업신여기지 않았다. 당시 많은 산승(山僧)들이 계율을 지키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선사는 무릇 율법기강(律法紀綱)을 범하는 자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파계승이 찾아와서 구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직접 가서 구제하시되, 반드시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처리하셨다.
도량의 불법(佛法)을 왕이나 대신들에게 부탁하고 위촉하여 바깥 호법(護法)으로 삼는 것은, 오직 우러러 불심(佛心)을 체득함에 있는데, 하물며 스스로 승려를 욕되게 하는 것은, 바로 부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듣는 자들은 모두 얼굴빛을 바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대사는 반드시 그가 확연히 모든 의심과 교만이 풀어져 깨달은 다음에야 그쳤다. 하지만 끝내 다른 사람들에게 들림(소문)이 나가지 않아서, 듣는 자들 또한 일찍이 훈계와 설교가 번거롭게 많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모두 그것이 인연 없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자비(無緣慈悲)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
료범(了凡) 원공(袁公)이 아직 과거에 등제하기 전에 산중의 선사를 참방했는데, 서로 마주보고 앉아 사흘 낮밤을 침묵한 채 좌선하였다. 이때 선사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운명 자립창조의 종지(宗旨)를 그에게 가르쳐주어, 료범이 그 가르침을 받잡았다. 그 일은 성신록(省身錄)에 상세히 적혀 있다.
륭경(隆慶: 穆宗의 연호) 5년 신미(辛未: 1571)년에 내가 대사께 하직하고 북쪽을 유람하게 되었는데, 대사께서는 이렇게 훈계하셨다.
“옛 사람들이 행각(行脚)할 때는, 단지 자기 자신을 밝히고 몸소 비천한 일을 행하려고 할 따름이었네. 그대는 마땅히 장차 미래에 무얼 가지고 부모와 스승과 벗을 만날 것인가 생각해야 할 것일세. 괜히 짚신 값만 허비하는 일이 없도록 신중하게나.”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예로써 작별을 고했다.
임신(壬申: 1572)년 봄, 가화(嘉禾)의 이부상서(吏部尙書)인 묵천(黙泉) 오공(吳公)과 형부상서(刑部尙書)인 단천(旦泉) 정공(鄭公), 그리고 평호(平湖)의 태복(太僕)인 오대(五臺) 륙공(陸公) 등이 동생 운대(雲臺)와 함께, 대사가 계신 옛 산에 청법(請法)하러 갔다. 이들이 함께 수시로 대사의 방에 들어와 도를 묻고 배웠는데, 매번 뵐 때마다 반드시 초와 향을 바치면서 더욱 가르침을 청하고 제자의 예를 행했다.
달관 가 선사(達觀可禪師)도, 상서인 평천(平泉) 륙공(陸公) 및 중서(中書)인 사엄(思菴) 서공(徐公)과 더불어서, 곧잘 대사를 알현했는데, 한번은 이마를 땅바닥에 조아리면서 화엄(華嚴)의 종지(宗旨)를 여쭈었다. 대사께서 이들을 위해 사법계(四法界)의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오묘함을 펼치셨는데, 그것을 듣고는 모두 다 전례 없이 크게 탄복하였다.
대사는 항상 사람들에게 특별히 일체유심조의 정토법문(淨土法門)을 하셨고, 평생 인연에 맡긴 채 일찍이 문이나 뜰(宗派나 系派)을 만든 적이 없었다. 어떤 산이든 단지 참선(參禪)과 강경(講經) 하는 도량만 있는 곳이면, 반드시 대사께 방장(方丈)의 자리에 앉으시도록 청하였다. 그러면 대사께서 이르시어 백장규구(百丈規矩)를 선양(宣揚)하고, 앞서 간 고승대덕의 전형(典型)을 힘써 밝히셨는데, 조금도 허세(虛勢)나 적당한 편의(便宜)를 부림이 없었다.
대사께서 거처할 때는 항상 편안하고 중후하여 말씀이 적으셨고, 말씀을 하실 때는 텅 빈 계곡에서 나는 소리처럼 잔잔하고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선정(禪定)의 힘으로 추스르고 지님이 아주 견고하여, 40여 년을 하루처럼 산에 거주하며 늘 맑게 닦으셨다. 옆구리가 자리(방바닥)에 닿지 않았고(이른바 長坐不臥), 종신토록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염송(念誦)하며 예불하기를 일찍이 하루 저녁도 그친 적이 없었다. 강남(江南)의 선도(禪道)가 새벽처럼 몽매한 초창기에 선사께서 사람들이 많은 곳을 출입하셨지만, 시종 선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입에 올리는 자가 없었다. 또 선사께서 마을에 3년간 머무르시는 동안에는, 교화를 받은 자가 수천 수만 명이나 되었다.
어느 날 밤 주변 사방 고을의 사람들이 선사께서 계신 암자에 큰 불빛이 훤하게 밝은 것을 보고는, 날이 새자마자 곧 달려가 보았는데, 선사께서 이미 고요히 열반(涅槃)하셨다. 이때가 만력(萬曆) 3년(1575) 을해(乙亥) 정월 초닷새였다. 선사께서는 홍치(弘治: 孝宗의 연호) 13년 경신(庚申: 1500)년에 태어나서 75세로 삶을 마치셨는데, 승랍(僧臘: 또는 法臘)으로는 50년 동안 수행하셨다. 제자 진인 법사(眞印法師) 등이 다비(茶毗)식을 거행하여, 절의 오른쪽에 안장하였다.
내가 대사 곁을 떠난 뒤로 여러 곳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도(道)가 있다는 선지식(善知識)들을 많이 만나보았다. 하지만 일찍이 대사처럼 몸가짐과 행실이 평범하면서도 여실(如實)하고, 진실하며 자비롭고, 평안하며 자상한 분을 뵙지 못했다. 매번 생각이 날 때마다, 선사의 음성․안색․모습 등이 내 마음의 눈에 여전히 선하게 나타나는데, 대사께서 주신 깊숙한 법유(法乳)에 감격하여 늙도록 잊을 수가 없다.
대사께서 발자취를 드러내어 도(道)에 입문한 인연들은, 대개 대사로부터 그 말씀을 직접 듣고 본 것들이다. 하지만 마지막 끝 구절은 어떻게 매듭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지난번 정사(丁巳: 萬曆 45년, 1617)년에 동쪽으로 나들이할 때, 심정범(沈定凡) 거사의 재실(齋室: 齋戒하고 道 닦는 淨室)에 갔다가, 서진(棲眞)에 있는 선사의 탑에 예배를 드렸다. 이 때에 시주(施主)를 모연(募緣)하여 탑(塔)과 정자(亭子)를 세우고, 이것을 관리․유지할 토지도 장만하여, 대사께 대한 추모의 사념(思念)을 조금이나마 기울였다.
료범(了凡) 선생이 적은 대사의 명문(銘文)이 상세하지 못함을 보고, 이에 내가 보고들은 대사의 행적을 간략한 전기(傳記)로 서술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한다. 대사께서는 선도(禪道)를 중흥시킨 조사(祖師)이신데, 불행히 그 천기(天機)를 담은 법어(法語)는 기록이 없어져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대사께서 펼치신 신비하고 미묘한 도(道)는 안타깝게도 발휘하고 선양할 방법이 없다.
(이 전기는 함산대사집(憨山大師集)에 실린 글을 한글로 옮겼음.)
[함(감)산(憨山) 대사(1546-1623) : 휘(諱: 본명)는 덕청(德淸), 자(字)는 징인(澄印), 憨山(본디 독음이 ‘함산’인데, 우리나라에선 흔히 ‘감’산으로 잘못 읽음)은 별호. 속가의 성은 채(蔡)씨고 전초(全椒: 현재 安徽省에 속함) 출신이다. 명나라 가정(嘉靖) 25년에 태어나, 9세 때 절에서 글공부하다가 스님이 관음경(관세음보살보문품)의 “능구세간고(能救世間苦: 능히 세간의 괴로움을 구제하시며)” 구절을 독송하는 걸 듣고는 기뻐서 경을 얻어 암송했다. 19세 때 출가해 각처를 유람하다가, 동해(東海) 로산(嶗山: 牢山)에 거주하였다. 36세 때(만력9년, 1581) 오대산에서 황태자의 탄생을 기원하는 무차법회(無遮法會)를 열어 500명 스님을 초청하여, 산중 대중과 함께 1천여 명이 7일간 일사불란하게 성황리에 봉행하였다. 황실과 인연을 맺고 호국불교를 내세워 불사를 크게 일으키다가 마침내 모함을 받아, 만력 23년(1595) 사사로이 사찰을 건립한 죄로 광동(廣東) 뢰주(雷州)에 유배 가서 충군(充軍)하였다가 10여년 만에 풀려났는데, 광동에 있는 동안 조계(曹溪) 보림사(寶林寺)에 주석하여 선종을 크게 부흥시켰다. 천계(天啓) 3년에 세수 78, 승랍 59로 좌탈(坐脫) 입적했는데, 오래 지난 뒤에도 살아계신 듯하여, 육조 혜능 대사처럼 육신상으로 보존해 전해진다. 저서에 법화통의(法華通義)․릉가필기(楞伽筆記)와 로자(老子)․장자(莊子)․중용(中庸)에 대한 주해서 등이 있으며, 몽유집(夢遊集) 55권과 함산어록(憨山語錄) 20권이 전해진다. 근래 함산노인자서연보실록(憨山老人自序年譜實錄)이 ‘감산자전’이라는 제목으로 한글로 옮겨져 나왔다.]
주안사(周安士) 선생이 말하였다.
“입명(立命)의 학설은 맹자(孟子)에게서 나온 것인데, 직접 몸으로 힘써 행하여 하나하나 친히 체험한 자는 료범 선생 한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료범 선생이 줄을 고치고 바퀴를 바꾸듯(改弦易轍) 더욱 절차탁마하면서, 도(道)를 깊게 믿고 의심하지 않으면서 용맹스럽게 결행할 수 있었던 것은, 또한 운곡 선사 한 분의 가피력(加被力)일 따름이다. 누가 불가(佛家)의 공문(空의 法門) 안에서는 공맹(孔孟)의 깊고 미묘한 도(道)를 결코 펴서 밝힐 수 없다고 하는가?
“세속 사람들은 남이 힘써 선(善)을 행하는 것을 보고는, 자신은 하지도 않으면서 곧잘 비웃으며 힐난한다. ‘선을 행할 땐 모름지기 무심(無心)해야 한다. 만약 한번 집착한다면, 곧 보답을 바라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얘기는 일찍이 고명(高明)하지 않은 게 아니지만, 이것은 사람이 용맹스럽게 나아가려는 뜻을 가로막는 경우가 많다. 가령 농부가 1년 내내 부지런히 일을 했는데, 그 농부에게 ‘너는 수확을 바라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거나, 마찬가지로 또는 선비가 10년 동안 어렵게 공부를 했는데 ‘너는 공명(功名)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다면, 그들이 과연 기꺼이 즐겨 그 말을 따르겠는가?”
주몽안(周夢顔, 1656-1739): 청대(淸代) 곤산(崑山) 사람. 다른 이름은 사인(思仁), 자(字)는 안사(安土), 호(號)는 회서 거사(懷西居士). 경서와 대장경에 박통하고, 정토법문(淨土法門)을 경건히 신행(信行)함. 중생(衆生)의 죄악이 대부분 음욕과 살생의 업장으로 생기는 현실을 직시하여, 만선선자집(萬善先資集) 4권을 지어 살생금지(戒殺)를 역설하고, 욕해회광(慾海回狂) 3권을 지어 음욕절제(戒淫)를 강조함. 또 도가의 문창제군음질문(文昌帝君陰騭文)을 해설한 광의절록(廣義節錄) 상하권을 저술해 적선공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서귀직지(西歸直指) 4권을 지어 서방극락정토 왕생의 첩경을 일깨움. 건륭 4년 세수(世壽) 84세로 서거. 후세에 몽안개사가 저술한 세 책을 편집한 안사전서(安士全書)가 널리 유통함.
주1) 함(감)산(憨山) 대사(1546-1623) : 명나라 4대 고승의 한 분. 휘(諱: 본명)는 덕청(德淸), 자(字)는 징인(澄印). 憨山은 별호로, 본디 독음이 ‘함산’인데, 우리는 흔히 ‘감’산으로 잘못 읽음.
주2) 심진문집(鐔津文集): 송(宋)나라 등주(藤州: 지금의 廣西省 藤縣) 심진 출신인 석계숭(釋契嵩) 스님의 문집. 사고전서(四庫全書)본은 22권이고, 만력(萬曆) 경방각(經房刻)본은 19권이라고 함.
주3) 원문(原文) 구학 열공(臞鶴悅公)은 한문의 뜻으로 풀면, ‘여윈 학(鶴) 한 마리가 공(公)을 기쁘게 하다’는 의미다. 더러 호(號)나 자(字)가 구학(臞鶴)인 ‘열(悅)’ 성(姓)의 대부일 수도 있으나, 중국에 ‘열(悅)’ 성(姓)이 안 보이므로, 법호(法號)가 구학(臞鶴)인 ‘열(悅)’ 스님에 대한 존칭으로 ‘공(公)’을 붙인 걸로 풀이하는 게 가장 근사하게 여겨진다.
주4) 중봉광록(中峰廣錄): 온전한 명칭은 천목중봉화상광록(天目中峰和尙廣錄). 원대(元代) 특사천목산불자원조광혜선사(特賜天目山佛慈圓照廣慧禪師) 중봉명본(中峰明本: 1263-1323) 스님의 법어집으로, 문인 북정자적(北庭慈寂) 등이 편집한 30권. 시중(示衆)․소참(小參)․산방야화(山房夜話)․신심명벽의해(信心銘闢義解)․능엄징심변견혹문(楞嚴徵心辯見或問)․별전각심(別傳覺心)․금강반야략의(金剛般若略義)․환주가훈(幻住家訓)․의한산시(擬寒山詩)․동어서화(東語西話)․잡저(雜著)․게송(偈頌) 등을 수록함. 각 경전의 요지와 여러 종사(宗師)의 화두(話頭)를 널리 인용, 융합하여 선정습합(禪淨習合)과 선교일치(敎禪一致)를 주장(主張)함. 그래서 세인(世人)들이 ‘불법중흥본중봉(佛法中興本中峰)’이라고 찬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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