련(연)지대사(蓮池大師)
나는 어렸을 때 태미선군(太微仙君)-주1) 의 공과격(功過格: 공덕과 죄과를 기록하는 표)을 보고는 몹시 기뻐한 나머지, 곧장 인쇄하여 보시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세속을 떠나 출가 수행하기 시작하면서, 훌륭하다는 선지식들을 참방(參訪)하여 가르침을 청하느라 바쁘게도 돌아다녔다.
긴 참방의 유랑(流浪)에서 돌아와 깊은 계곡에 은둔하면서, 비로소 선정(禪定) 수행에 전념하여 전혀 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제 늘그막에 불현듯 어지럽게 쟁여진 옛 글 보퉁이를 뒤적이다가, 그때 찍은 공과격이 예전 모습 그대로 간직되어 있는 것을 다시 찾아내었다. 이에 기쁜 나머지, 그 내용을 더러 조금 빼기도 하고, 더러 모자란 점을 덧보태기도 하여, 새로 인쇄하게 되었다.
예전에 태미선군(太微仙君)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통 사람들은 마땅히 이 공과격을 침상 머리맡에 놓아두고, 매일 저녁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루 동안의 공덕(선행)과 과오(죄악)를 살펴 적어야 한다. 날이 감에 따라 달이 차고, 달이 감에 따라 해가 차면서, 더러는 공덕으로 과오를 맞춰 보고, 더러는 과오로 공덕을 견주어 본다. 그렇게 많고 적음을 서로 견주어보면, 복을 받을지 벌을 당할지는, 점괘로 길흉을 물어 볼 필요도 없이 스스로 알게 된다.”
지극하시도다, 이 말씀이여! 또 옛 성현은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사람은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게 가장 불쌍하다. 스스로 아는 자는, 자기가 나쁜 줄 알면 두려워 그치고, 자기가 착한 줄 알면 기뻐 더욱 힘쓰게 된다. 그러나 스스로 알지 못하는 자는, 감정과 욕망에 따라 제멋대로 방자히 굴면서, 서로 다투어 짐승처럼 타락한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짐승인 줄은 깨닫지 못한다.”
이렇게 마음을 내어 붓을 들고 행실을 살펴 적게 되면, 신령스런 마음자리(靈臺)를 속일 수 없으며, 거짓되고 나쁜 짓과 올바르고 착한 것이, 마치 맑은 거울로 모습을 비추듯 훤히 드러나게 된다. 그러면 스승이 아니라도 근엄하고, 벗이 아니라도 다투어 충고하며, 상과 벌이 아니라도 권선징악하고, 시초(蓍草)나 거북이 등가죽으로 점을 치지 않아도 화를 피해 복으로 나아가며, 천당과 지옥이 아니라도 올라갈지 가라앉을지 저절로 드러난다. 이렇듯이 익숙하게 길들여 나간다면, 도(道)를 닦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그리하여 ‘공과격(功過格)’이라는 종래의 이름을 ‘자지록(自知錄: 스스로 아는 기록)’으로 바꾸게 되었다.
이 자지록은 낮은 근기의 어리석은 중생(下士)이 얻으면, 크게 비웃고 거들떠보지도 않을 터이니, 어떻게 매일 적기까지 바라겠는가? 그러나 보통 평범한 중생(中士)이 이를 얻으면, 반드시 부지런히 기록하며 지킬 것이다. 그리고 최상 근기의 지혜로운 사람(上士)이 이를 얻으면, 단지 스스로 어떠한 죄악도 짓지 않고 뭇 선행을 받들어 행하는 경지에 노닐면서, 기록은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그만이다. 왜 그러한가?
선행은 본디 마땅히 행할 일이며, 복을 구하기 위해서 행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죄악은 본디 마땅히 짓지 않아야 하며, 단지 벌이 두려워 안 짓는 것이 아니다. 온종일 죄악을 멈추고, 온종일 선행을 닦으면서, 밖으로는 선행과 죄악의 이름이나 모습조차 보지 못하고, 안으로는 죄악을 멈추고 선행을 닦는 마음까지 보지 않는다. 복조차 받지 않고, 죄악 또한 본성이 텅 비어 있으니, 이러한 경지에 이른 사람이야 선악을 굳이 적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물며, 두 부서의 동자와 육재일(六齋日: 음력 매월 8, 14, 15, 23, 29, 30일)을 지키는 제천(諸天)이, 세간에서 말하는 삼태성(三台星)-주2) 및 팽조(彭祖)와 함께 밤낮으로 유람하며, 인간의 화복과 운수를 주고 뺏으며, 삼원(三元)-주3) 이나 명절과 섣달그믐 등에 우리 앞뒤와 좌우에 삼엄하게 늘어서서 두 눈을 부릅뜨고 우리를 지켜봄에랴! 설사 우리가 스스로 공덕과 죄과를 기록하지 않더라도, 저들 신명이 기록하는 내용만으로도, 정말로 누에고치 실보다 더 빽빽하고, 가을 터럭(秋毫)보다 더 세밀하기 짝이 없다.
비록 그렇다고 할지라도, 천하 사람이 모두 최상의 지혜로운 선비는 아니다. 가령 최상의 지혜로운 선비가 스스로 알고서 기록하지 않는다면, 군자로서 아무 허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설사 최상의 지혜로운 선비라고 할지라도, 만약 스스로 알지 못하면서도 기록하지 않는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이는 우둔하고 무지한 자가 아니라면, 제 말만 앞세우는 외고집일 따름이다. 그러니 인간 세상에 이 자지록(공과격)이 없어도 과연 괜찮겠는가?
이러한 까닭에, 유교에서는 사단(四端)과 백 가지 행실(百行)을 주장하고, 불교에서는 육도(六度: 육바라밀)와 만 가지 수행(萬行)을 가르치며, 도교에서는 삼천 가지 공덕(三千功)과 팔백 가지 선행(八百行)을 권장한다. 이들은 모두 적선(積善)의 원리와 방법이다.
인연을 내팽개치고 의기소침하여 제멋대로 구는 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만약 선과 악이 모두 일정한 과보가 있다고 믿을 수 없다는 구실로, 남들이 자지록(공과격)에 따라 선악을 부지런히 적는 걸 보고서, “어찌 이렇게 째째한 것에 번거롭게 마음을 쓴단 말이냐?”고 오만무례하게 지껄인다면, 그 허물은 결코 작지 않다.
오호라! 세상 사람들이여! 오욕의 세속에서는 진땀 뻘뻘 흘리고 정신이 피곤하도록 온갖 잡념망상 다하면서도, 종신토록 조금도 번거롭게 여기지 않는구나. 그러면서 유독 잠자리에 잠깐 마음을 내어 언행을 반성하고 생각을 가다듬는 일이, 그토록 귀찮단 말인가? 그 미혹은 어찌할꼬?
증자(曾子)는 매일 세 번(또는 세 가지로) 자신을 반성했고, 송(宋) 나라 때 조열도(趙閱道)는 밤에 반드시 향을 사르고 하늘(上帝)에 보고를 올렸으며, 또 어떤 이는 검은 콩과 흰 콩으로 선악을 헤아렸다. 이러한 수행을 현명하고 지혜로운 옛 사람들도 버리지 않고 몸소 실천했거늘, 하물며 우리가 자지록을 적어서 손해 볼 게 뭐가 있겠는가?
주1) 태미선군(太微仙君): 옥황상제의 궁정에서 천상을 다스리는 도교(道敎)의 중요한 신선인 듯하다. 본디 태미원(太微垣)은 북두(北斗) 남쪽과 진수(軫宿) 및 익수(翼宿)의 북쪽에 자리하는 성관(星官) 이름이다. 오제좌(五帝座)를 축으로 10개의 별로 둘러싸인 병풍(담) 모양의 별자리다. 천자(天子: 옥황상제)의 궁정(宮庭)에 해당하며, 오제좌(五帝座)와 12제후부(諸侯府)가 자리한다. 북두의 북쪽에는 북극(北極)을 축으로 15개의 별이 양렬로 병풍을 이루는 자미원(紫微垣)이 대응한다. 고대 중국에서는 하늘의 별자리가 천상의 관직(天官)을 상징한다고 여겨, 각각 고유의 이름을 붙이고 인간 세상의 관직명으로 차용하기도 했다. 중국에서 많이 애용하는 점법인 자미두수(紫微斗數)도 별자리 이름에서 유래한다.
주2) 삼태성(三台星): 태미원(太微垣) 바로 위에 하태(下台)가 자리하고, 상태(上台)는 서쪽으로 문창(文昌) 곁에 나란히 있으며, 상태와 하태 사이에 중태(中台)가 있음. 각각 2개의 별로 이루어지는데, 지금 북두칠성의 6개에 해당한다고 보기도 하고, 태미원에 속한다고 보기도 함.
주3) 삼원(三元): 음력 정월 보름의 상원(上元), 7월 보름(백중) 중원(中元), 10월 보름의 하원(下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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