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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상감응편 인광대사 서문(印光大師序)

운명을 뛰어 넘는 길. 부록

by 明鏡止水 淵靜老人 2022. 12. 4.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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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천성은 본디 선량한데, 바깥 사물을 대하고 속세의 인연에 얽혀서 점검과 단속을 소홀히 하면, 금세 각종 집착망상편견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기 쉽다. 그러면 착한 본성은 온데간데없이 파묻혀 사라지고 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까닭에, 옛 성현들은 각각 훌륭한 가르침의 말씀을 남기셨으니, 바로 사람들이 이를 실행하여 애초의 천성을 회복하도록 바라신 까닭이다. 그러한 말씀과 문자는 매우 많지만, 그 행실 내용은 격물치지(格物致知) 하고 명덕을 밝혀서(明明德) 지극한 선에 그치는(止至善)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른바 격물(格物)이란 무엇인가? ()은 격투(格鬪: 몽둥이로 치고 싸우다), 또는 한 사람이 만 명의 적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과 같다. 또 물()은 번뇌 망상으로, 흔히 말하는 인간의 욕망(人欲:  物慾)을 가리킨다. 번뇌 망상의 욕망과 싸움에는, 반드시 한바탕 강인하고 결연한 용기와 의지를 겁 없이 다짐하여야, 비로소 실효(實效)를 얻을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마음이 바깥 사물에 따라 움직이게 될 것이니, 어떻게 사물과 격투(格物)할 수 있겠는가?

()란 끝까지 밀어붙여 확충함(끝을 봄)을 일컫는다. 또 지()란 우리 인간이 본래부터 타고난 지성, 즉 부모를 사랑하고 윗사람을 존경하는 양지(良知: 선량한 알음알이, 良識)로서, 교육이나 학습을 통하지 않고서 처음부터 타고난 본능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성찰과 점검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사물에 따라 움직이고, 마침내 부모 사랑이나 윗사람 존경과 같은 양지(良知)조차 잃어버리고 만다. 하물며 이러한 양지를 끝까지 밀어붙여 확충함으로써, 만사에 두루 대응하고 자기 심성을 함양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까닭에, 성현은 사람들이 명덕(明德)을 밝혀 지극한 선에 머물도록 하기 위하여, 맨 처음 실행에 착수할 곳으로 먼저 격물치지를 거론하였으니, 그 말씀 내용과 수행은 더할 나위 없이 신묘하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이에 따라 심성을 함양수행하도록 만들려면, 모름지기 일정한 모범이 있어야 비로소 유익하게 된다. 사서오경(四書五經)과 같은 고전이 모두 그러한 모범이지만, 그러한 모범은 문자가 너무 방대하고, 또한 여러 서적에 널리 흩어져 있다. 그래서 체계 있게 분류편집하지 않으면 법도로 삼기가 자못 어렵고, 또한 글을 많이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은 더더욱 전형적인 모범으로 받들어 행할 방법이 없다.

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은 길함을 맞이하고 흉함을 피하며, 선에게 복을 주고 악에게 화를 내리는 지극한 진리를 핵심 요체만 간추려 모은 훌륭한 글로, 하늘을 밀쳐 올리고 땅을 움직이며, 눈을 비비게 하고 마음을 놀라게 하는 문장이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며, 선을 행하면 어떤 선한 보답을 받고 악을 행하면 어떤 악한 보답을 얻는지, 그 근원을 모두 파헤쳐 명약관화(明若觀火)하게 밝히고 있다. 무릇 어리석은 사람이 선을 행하지 않고 제멋대로 악을 저지르는 까닭은, 대개 사리사욕의 이기심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사리사욕으로 도리어 큰 이익을 잃고 커다란 재앙만 얻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누가 감히 선행을 실천하여 화가 사라지고 복이 모여들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이렇게 본다면, 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이 인간에게 끼치는 이익은 정말 막대하다.

그래서 옛날 대선비(大儒)들은 이 글에 따라 묵묵히 수양하는 자가 많았다. ()나라 때 장주(長洲)의 팽응지(彭凝祉)는 어려서부터 이 글을 봉행하여, 마침내 진사(進士) 시험에 장원(壯元) 급제하고 전찬(殿撰: 翰林院修撰)에 부임하는 영예를 안았다. 그는 관직이 상서(尙書: 六曹의 장관)에 오른 뒤에도 여전히 매일 이 글을 봉독하면서, 손수 붓으로 써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증정하곤 하였는데, “장원이나 재상이 되는 자는 반드시 이 글을 읽는다.”는 표제를 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표제를 해석해 주기를, “이 글을 읽으면 곧 반드시 장원이나 재상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장원이나 재상이 되려는 자는 결코 이 글을 읽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다.”라고 부연했다. 그가 발휘한 정신은 정말 지극히 철저했는데, 과연 인애와 지혜도 각기 그 사람의 성질에 따라서 드러나기 마련인가 보다.

이 글은 궁극에는 신선(神仙)이 되는 데 멈춘다. 만약 대보리심(大菩提心: 大道正覺을 추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를 실행한다면, 충분히 평범을 초월하여 성현의 경지에 들어가(超凡入聖) 생사를 해탈하고, 3대 미혹(迷惑)-주1) 을 끊어 법신(法身: 영구 불변의 진리의 몸)을 증득하며, 복과 지혜를 원만히 겸비하여 불도(佛道)를 성취할 것이다. 하물며 구구하게 신선이 되어, 인간이나 천상의 조그만 과보를 누리는 데 비하겠는가?

이 글의 주해서(註解書)는 몹시 많다. 그 가운데 대저 청나라 때 원화(元和) 혜동(惠棟)의 전주(箋註)가 가장 정밀하고 심오하며 웅굉(雄宏)하나, 다만 박학다식한 선비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점이 애석하다. 다음으로 휘편(彙編)이 있는데, 실로 고아(高雅)한 선비나 평범한 속인 모두 동시에 볼 수 있는 최상의 주석본이다. 하지만 문장에 통달하지 못한 부녀자나 어린애는 잘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흠이다. 오직 직강(直講) 이 책만이 모든 사람에게 두루 유익하면서, 문장이 비록 그리 깊지 않아 의미가 쉽게 드러나면서도, 문자가 몹시 우아하고 아름다워 결코 속()되지 않으니, 사람들을 감동시키기가 가장 쉽다.

뜻 있는 선비들이 이 글을 인쇄하여 유포하니, 이 글이 세상 도처에 두루 퍼져서, 사람마다 온갖 선행을 닦아, 집안이 화목하고 가족이 효도우애하길 바라마지 않는다. 화와 복은 오직 사람 스스로 불러들이는 것이고, 선과 악에는 각각 보답과 감응이 따른다. 이러한 인과법칙을 안다면, 누가 감히 죄악을 저질러 화를 자초(自招)하려고 들겠는가? 이러한 기풍이 한번 크게 진작하여 선행에 선의 보답이 내려진다면, 예절과 양보가 흥성하고, 총칼의 전쟁 혼란이 영원히 잦아들며, 백성이 안락하고 천하가 태평스러워질 것이다.

원컨대, 재력(財力)이나 지력(智力)이 있는 사람들은, 더러 이 글을 인쇄하여 널리 유통시키거나, 더러 이 글을 강의하여 현신설법(現身說法)하기 바란다. 그래서 타고난 본성을 아직 잃지 않은 자들은 더욱 순수하고 천진해지며, 타고난 본성을 이미 잃어버린 자들은 한시 바삐 그 처음 천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부디 잘 이끌어주고 건져주길 바란다. 그렇게 한다면, 그 공덕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중화민국 17(1928) 석인광(釋印光) .

 

주1) 3대 미혹(迷惑): 불교에서 말하는 중생들의 세 가지 큰 번뇌. 첫째는 사견(邪見)과 탐(貪瞋癡)의 견사혹(見思惑), 둘째는 보살이 중생을 교화할 때 봉착하는 진사혹(塵沙惑), 셋째는 근본 무명의 미혹(根本無明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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