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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상감응편 중판 서문

운명을 뛰어 넘는 길. 부록

by 明鏡止水 淵靜老人 2022. 12. 4.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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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경전에 모든 법은 인연으로 생겨난다.(萬法因緣生.)라는 말이 있다. ()이란 결과()의 이전 원인(前因)이며, ()이란 결과의 4종 연분(四緣: 因緣, 次第緣, 緣緣, 增上緣)이다. 천지자연의 건곤 만상(乾坤萬象)과 구계 만사(九界萬事)를 총괄하여 법()이라고 부르고, 법을 이루는 것이 결과()이니, 무릇 결과가 이루어짐에 무엇인들 인연(因緣)을 말미암지 않겠는가?

단지 그 일이 현저함도 있고 은밀함도 있으며, 근접함도 있고 요원(遙遠)함도 있어서, 지혜로운 사람은 은밀하고 요원한 것도 밝게 통찰할 수 있는데, 보통 사람은 단지 현저하고 근접한 것만 알아볼 수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까닭에, 부처님께서 비로소 중생을 5(五乘)으로 분류하여 설법하였다. 인간과 천상의 평범승(凡乘)은 쉽게 드러나 보이는 세간의 인과이나, 보살과 성문(聲聞)의 성현승(聖乘)은 밝히기가 어려운 출세간(出世間)의 인과이다.

중생의 근기(根器)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일시적인 권의(權宜: 方便)와 항상적인 실체(實體: 實相)는 반드시 그 기미(機微)에 부합하여야 한다. 따라서 권의란 잠시 빌려 실체를 드러내는 수단 방편이고, 5승이란 궁극에 하나의 깨달음으로 귀결하도록 인도하는 길이다. 만약 오로지 유일승(唯一乘)만을 꼭 고집하고 방편 법문을 베풀지 않는다면, 이는 계단도 없이 누각에 오르고, 꽃도 피지 않고 열매 맺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그렇게 누각에 오를 수 있는 사람과 열매 맺을 수 있는 나무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은 도가(道家)에서 권선징악(勸善懲惡) 하는 글이다. 그 문장은 질박한 걸 숭상하여 화려한 수식이 없으며, 그 말은 구체적인 일을 예로 들어 공덕과 죄악을 밝히고 있다. 때문에 부녀자와 어린애도 능히 깨우칠 수 있고, 우아함과 통속성 모두 다치지 않고 보존하고 있다. 정말로 지극히 완고하고 어리석은 자가 아니면, 이를 듣고서도 화를 피하고 복으로 향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이 세상의 풍속 교화를 돕고, 인간과 천상 사이의 길을 열어줌에, 어찌 그 효험이 적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 불교계에서 고지식하게 막힌 인사들은, 이 글이 세간의 유위적(有爲的)인 수행 방법이고, 더구나 우리 불교의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대부분 무시하고 소홀히 대하는 듯하다. 심지어는 이 글이 널리 퍼져 읽히도록 칭송하고 서문을 친히 쓰신, 우리 정토종(淨土宗)의 인광 대사(印光大師)를 비방하기까지 한다.

오호라! 그들이 사려가 깊고 넓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록 유위의 선행이지만, 이를 기꺼이 수행하려는 자는 이미 인간과 천상의 평범승(凡乘)에 들어선 것이다. 또 이들을 다시 잘 유도해 정진하도록 이끈다면, 이 어찌 최상의 불승(佛乘: 보살승)으로 이어지는 교량이 되지 않겠는가?

하물며 불교의 문중(門中)에는 어떠한 한 법()도 버림이 없지 않는가? 타인의 선행이 있으면, 이를 칭찬하고 도와 완성시켜 주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인연 따라 교화를 베푸니, 이것이 바로 수시로 권의(權宜)를 베풀어 모든 중생을 널리 포섭하는 위대한 방편법문이 아닌가?

옛날 명()나라 말엽에 우익 대사(蕅益大師)는 일찍이 주역(周易)과 사서(四書)를 연구하여 주석서를 내었고, 몽안 개사(夢顔開士)-주1) 는 도가의 음질문광의(陰騭文廣義)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불교의 대장경(大藏經) 가르침 안에는, 매번 바라문(婆羅門)을 경시하지 말라는 훈계(訓誡)가 있다. 이는 불교가 그들의 선을 함께 더불어 포용하고, 그들의 정진을 긍정하지 않음이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즉, 바로 선은 내가 선하게 대하고, 정진은 내가 정진으로 장려한다.”는 공자의 가르침과 같다. 무릇 욕망이란 나쁜 것인데도, 오히려 타산지석(他山之石)의 귀감으로 빌려 쓸 수 있거늘, 하물며 이 글처럼 선량한 말이 어찌 교량으로 삼기에 적합하지 않단 말인가?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에서 설법하는 내용이 대부분 세간의 인연임을 한번 생각해 보라. 그 설법 당시를 살펴보면, 세존(世尊: 부처님)께서 막 열반에 드시려던 때였다. 오호라! 화엄경(華嚴經)과 법화경(法華經)의 두 경왕(經王: 경전 중의 으뜸 왕) 사이에는 서로 40년간의 시간 간격이 있다. 그 사이에 설법하신 뭇 경전은 항하(恒河: 갠지스 강)의 모래알처럼 수많은 미묘한 의리(義理)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최후에 부처님께서 명명백백한 인과응보의 법칙으로 복귀한 사실은, 어찌 심오한 의미를 함축하지 않겠는가?

요즘의 석학(碩學)들을 두루 관찰해 보면, 이른바 학문이 진전할수록 도()는 퇴보하고 있다. 또 변설(辯說)은 공리공담(空理空談)을 일삼으면서, 인과응보를 언급하는 자가 심히 적다. 심지어 이를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워하는가 하면, 점차 눈 씻고도 찾아보기 어려운 개탄의 지경까지 이르고 있다. 학풍(學風)이 이러할진대, 도리어 학문에 입문하지도 않은 자가 근신하고 성실하게 공덕을 쌓는 것만 훨씬 못하다. 세존께서 최후에 지장경을 설법하신 것도, 바로 동서고금의 공통적인 개탄이 아니겠는가?!

아들 친구인 김천탁(金天鐸) 학사(學士)는 정토종의 독실한 수행인이다. 그 선친(先親)은 유명한 고관(高官)으로, 이 태상감응편을 공경스럽게 봉행하고, 또한 그 아들에게 이 글을 인쇄보시하여 세인에게 선행을 권장하도록 유언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학사가 나에게 서문을 요청해 왔다. 이에 내가 몹시 감탄하였다.

효성스럽도다, 선친의 유지(遺志)를 실행할 수 있다니!”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 증정할지 물어보았다. 그가 믿는 사람에게 증정하겠다고 답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그에게 반론하였다.

그렇지 않소. 우매한 자에게 증정하는 편이 낫소. 대저 믿는 자들은 반드시 나름대로 실행하는 게 있소. 마치 건강한 사람은 섭생(攝生: 영양과 위생, 건강 유지) 방법을 알기 때문에, 의학을 천천히 가르쳐 주어도 되는 것과 같소. 그러나 어리석은 자와 사견(邪見)에 미혹한 자는, 마치 몹시 쇠약하면서 무서운 질병에 걸려 있는 중환자와 같아서, 의약 시술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없는 시급한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오.

삼장(三藏)의 경전을 통달하고 만 구절의 게송(偈頌)을 암송하더라도, 참선(參禪: 靜坐) 방석 절반도 닳게 하지 못하고, 염주(念珠) 한 꾸러미도 끊어뜨리지 못했으면서, 입만 열면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 활달한 공허에 빠지는 자들이야말로, 정말 우매한 자 중의 우매한 자라오. 이들은 질병이 장차 고황(膏肓: 회생 불능의 치명적인 급소)에 퍼질 위급한 환자니, 그들에게 의약을 투여함이 우선순위 중에 최우선해야 할 급선무라오.

무릇 인과법칙은 떨어지지도 않고 어리석지도 않으며, 한 마디 말로 향상하고 타락하나니, 진실로 말로써 마음의 소리(心聲)를 삼으면, 향상과 타락이 모두 마음으로 말미암아 지어지는 것이오. 그러니 이러한 태만과 공경의 기미 분별을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소? 하물며 인과법칙은 어떠한 지역이나 경계의 구분도 없지 않소? 한번 연분이 생겨나면 마음을 가리켜 성품을 보는(指心見性) 것만 못하여, 우리 불교에서 유독 존숭(尊崇)하는 종지(宗旨)라오. 이를 배척하는 언론은 이미 인과를 부정하여, 허무주의에 빠진 사견(邪見)에 가깝게 되오. 그래서 내가 우매한 자에게 먼저 증정하는 편이 낫다고 말하는 것이오.”

이에 김학사가 깜짝 놀라며 정말 그렇습니까?!”라고 묻기에, 내가 다시 장중한 말로 그의 믿음을 견고하게 북돋워주었다. 마침내 그가 좋습니다.”라고 승낙하기에, 내가 흔연히 그의 태상감응편 중판 인쇄를 위해 새로운 서문을 쓰는 것이다.

 

중화민국 계묘년(癸卯年: 1963) 중추절에 기우헌(寄漚軒)에서

직문(稷門) 리병남(李炳南) 적음 

 

주1) 몽안 개사(夢顔開士): 개사란 개오(開悟)한 선비, 또는 정법(正法)으로 중생을 개도(開導)하는 선비의 뜻으로, 본래 보살을 지칭하는 용어였으나, 나중에 스님(和尙)에 대한 존칭으로도 쓰이고 있음. 주몽안(周夢顔)은 안사전서(安士全書)를 남겼으며, 간추린 전기는 앞서 소개한 내용을 참고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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