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황(袁黃: 趙田逸農 - 12월 26일 生, 1533-1606)은 자(字)가 곤의(坤儀)이고, 호(號)는 본디 학해(學海)였는데, 나중에 료범(了凡)으로 바꿨다. 도교(道敎)의 공과격(功過格: 공덕과 죄과를 기록하는 표)을 부흥시킨 인물로, 강남 오강(吳江: 蘇州) 출신이지만, 조상들의 고향(先鄕)은 절강(浙江)의 가선(嘉善)이었다.
원기산(袁杞山)으로 알려져 있는 그의 고조부는, 황자징(黃子澄: 1350-1402, 본명은 湜)이 1402년 연왕(燕王) 주체(朱棣: 1360-1424, 후의 明 成祖, 永樂帝)의 정변에 대항하여 일으킨 거사에 함께 관여하였다. 그런 인연으로, 그는 정든 고향을 떠나 오강(吳江)으로 옮겨야 했다. 또 이러한 연유로, 원씨 집안에서는 3대 동안 관직에 종사하거나 과거에 응시한 사람이 없었다.
증조부 원호(字는 孟裳, 號는 菊泉)는 오강(吳江)에서 수(殳)씨 집안에 데릴사위로 장가들었는데, 혜제(惠帝: 1377-1402, 본명은 朱允炆, 연호는 建文, 明太祖의 손자)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연왕한테 폐위(廢位)당한 군주(惠帝)를 칭송하는 주덕편(主德篇)이라는 글을 지었다.
그와 그의 아들 원상(袁祥: 字는 怡杏), 그리고 그의 손자 원인(袁仁: 字는 良貴)은 의사이면서 학자로서, 여러 방면에 많은 글을 남겼다. 원씨 집안의 또 다른 전통은 점술(占術)이나 생리학, 그리고 도교와 같은 민속 신앙을 신봉하는 일이었다.
원황은 이 전통을 무너뜨리고 집안에서 맨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간 사람이다. 그는 1550년 18세에 수재(秀才)가 되었지만, 북경에 있는 국자감(國子監)의 공생(貢生)이 된 것은 무려 17년 뒤인 륭경(隆慶) 원년(丁卯 1567, 35세)에 이르러서였다. 륭경 4년(庚午 1570, 38세) 그는 주인(主人)을 획득하였지만, 전국 규모의 과거시험을 통과하여 진사가 되기까지는 16년이 더 걸렸다.(萬曆 14년, 丙戌 1586, 54세)
첫 발령은 순천부(順天府) 보지(寶坻)현의 지현(知縣: 현감)으로 나서, 1588년(56세) 여름에 공무를 시작하였다. 그는 매우 양심 바른 관리로서, 행정 문제와 백성들의 고통을 해결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보지현에서 세운 가장 유명한 공로는 토지세를 1무(畝)당 은(銀) 0.237냥에서 0.146냥으로 낮춘 것이다.
보지현이 사실상 북경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던 까닭에, 조세미(租稅米)와 궁궐 부근 공사용 목재를 수송하는 일이 백성들의 부담을 크게 가중시켰다. 그는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그 지역에 닥치는 홍수나 가뭄 같은 재난을 해결하려고 매우 힘썼다. 그는 관심이 다양하여, 당시 국가의 위급한 현안이었던 변경 수비와 해양 운송뿐만 아니라, 과거에 응시하려는 유생들의 시험 준비에도 마음을 썼다.
일본인들이 조선(朝鮮)을 침략했을 때(1592), 조선의 왕은 중국에 급히 도움을 청하였다. 명(明)나라 조정(朝廷)은 처음에는 송응창(宋應昌)을 건주(建州)와 료동(遼東)의 총독으로, 리여송(李如松)을 제독으로 임명하였다. 이 무렵 원황은 병부의 직방사(職方司: 地圖와 사방의 職貢을 관장하는 부서) 주사(主事)로 승진하였다. 그는 병부의 동료였던 류황상(劉黃裳: 字는 玄子)과 함께 조선으로 가는 원정군의 군사자문으로 임명받았다. 둘 다 젊지 않은 나이여서, 원황은 60세였고, 류황상은 이미 환갑을 넘었다.
1593년 초에 그들은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당도하였다. 리여송이 초기에 승전(勝戰)을 계속하면서 그들은 평양으로 옮겨갔지만, 불행하게도 전세는 곧 불리해지기 시작하였다. 전황은 뒤바뀌고, 남북 세력 사이에 다툼이 생겼으며, 북경에서는 추문과 우유부단으로 어수선하였다. 원황과 류황상은 이러한 실패에 대한 비난과 책임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뒤집어쓰고, 곧 면직(免職)당하여 물러났다.
리여송이 공물을 책봉한다고 왜군을 속여, 왜군이 이를 믿고 방비하지 않자, 그 틈을 타서 리여송의 군대가 평양에서 왜군을 대파했다. 그런데 료범은 속임수를 써서 중국의 체면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그를 면전에서 비판했던 것이다. 또 여송의 휘하 병사들이 평민을 살륙하여 공로를 다투자, 료범은 이것도 강하게 논쟁하였다.
이에 여송은 매우 불쾌하게 여기고 분노하여, 홀로 자기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버렸다. 그러자 왜군이 료범을 습격했다. 료범은 그들을 격퇴했는데, 여송의 군대는 왜군에게 과연 패배하고 말았다. 여송은 패전의 죄에서 벗어나려고 열 가지 죄를 거론하여 료범을 탄핵하고, 결국 료범은 파직당해 귀국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황제가 바뀐 뒤, 사후(死後)에 원황은 조선의 임진왜란에서 세운 공로로 상보사소경(尙寶司少卿)의 관직을 추증(追贈)받았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중국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흥미로운 내용이 실려 있다. 원황은 음양오행(陰陽五行)과 별자리(星座) 운행의 천도(天道)를 논하면서, 새벽 하늘을 관찰하였다. 그리고는 조선의 군신(君臣)들이 모두 모인 성(城) 주위에 기운(氣運)이 울창하게 왕성하므로, 잃어버린 영토를 틀림없이 회복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중국의 점법(占法)으로 천기(天氣)를 관찰한 뒤 내린 예언은, 조선의 선조(宣祖) 임금을 꽤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더구나 원황이 개성에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열람한 뒤 몇 가지 질문을 던지자, 조선의 왕은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선조는 원황이 경국대전을 중국으로 가져가지 못하도록 막기 위하여, 경국대전이 그의 손에 닿지 않게 감추라는 명령을 관리들에게 거듭 내렸다. 이는 특히 경국대전의 내용이 중국의 비위를 건드려 난처한 일이 일어날까 염려한 때문이었다.
예컨대, 중국에서 하사하는 시호(諡號)와 별도로 독자적인 묘호(廟號)를 사용하는 점과, 일본에 통신사(通信使)를 파견하는 점, 그리고 금은(金銀)의 유통을 금지한 점 등의 문제가 특히 민감하였다. 이에 대하여 중국 측이 추궁할 질문을 예상해 보고, 그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도록 분부하기도 하였다. 조선인들이 중국 관리들을 경계하고 비판하는 의심의 눈초리로 대했음이 거의 명백한 것이다.
16세기의 많은 선비들처럼, 원황도 당시 환경과 시대 조류에 따라 유학자인 동시에 불교 신앙과 도교(道敎)의 전례(典禮), 그밖에 민간 신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유불선(儒佛仙) 삼교(三敎)의 융합을 장려했으며, 도교의 공과격을 다시 소개하였다. 불교에서는 그가 불교도였다고 늘 주장해 왔지만, 어찌 보면 그는 림조은(林兆恩)과 함께 명말(明末) 종교적인 도교를 부활시킨 양대 인물이다.
63세가 되어 원황은 자기 아들 원엄(袁儼: 본문에 등장하는 天啓)을 위해 교훈서를 썼다. 이것이 후대에 출판에 출판을 거듭하며, 훈자언(訓子言), 료범사훈(了凡四訓) 등과 같은 여러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책의 첫 편에는 흥미로운 자서전의 일부가 적혀 있다.
원황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아직 10代일 때, 어머니의 분부를 받고 과거 준비를 걷어치운 채 의학을 배웠다고 이야기한다. 그때 그는 운남(雲南)에서 온 공씨(孔氏)라는 도인(道人)을 만난다. 공씨는 그가 관직에 나아갈 운명이며, 이듬해에는 수재(秀才)가 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이에 따라 원황은 의학을 그만두고 다시 관직을 추구하였다.
이듬해에 그는 과연 모든 시험에서 공씨가 예견한 등급 그대로 급제하였다. 그러자 공씨는 전 생애에 걸친 운명을 예언해 주었다. 관료로서 제한적 지위에 머물 것이며, 53세에 사망하면서 아들이 없을 것이라는 운명이었다. 그 뒤 약 20년간 공씨가 말한 모든 것이, 심지어 그가 녹봉(祿俸)으로 받을 쌀의 양까지 맞아떨어졌다. 예언 그대로 그는 공생(貢生)이 되어 북경의 국립대학에 갔다. 수도(首都)에서 1년을 보낸 뒤, 남경(南京)에 있는 국자감으로 옮겨가게 되었다.(1569, 37세)
그러나 대학에 출근하기 전에, 남경 동북쪽에 있는 서하(棲霞)의 유명한 스님인 법회(法會) 운곡 선사(雲谷禪師: 1500-79)를 찾아갔다. 사흘 밤낮 동안 이 박학한 승려와 원황은 조용히 대좌(對坐)하였다. 그리고 법회는 원황에게 그의 삶과 생각이나, 사상․믿음에 대하여 질문하기 시작하였다. 원황은 공씨가 한 예언이 정확하여 자기가 숙명론자가 되었음을 고백하였다.
이런 상태에 갇힌 원황을 일깨워주기 위하여, 법회는 불교의 인과응보와, “하늘이 내린 화는 피할 수 있어도, 스스로 초래한 것은 피할 수 없다.”는 유교의 가르침과, 도교의 공과격을 통한 자아 수련을 이야기했다. 유불선(儒佛仙) 삼교합일(三敎合一)의 가르침에 크게 깨달은 원황은, 그때 그곳에서 이성을 통한 새 삶(再生)을 얻기로 결심하였다.
이러한 개인의 굳은 각오를 나타내기 위하여, 원황은 원래 학해(學海)였던 자기 호(號)를 료범(了凡)으로 바꿨다. 법회가 범부(凡夫)만이 운명에 얽매일 뿐이라고 일러주었기 때문에, 자기는 이제 운명의 속박에서 벗어나 ‘평범함을 끝마치겠다’는 결의를 다진 것이다.
여기에서 불교 승려인 법회가 원황에게 도교의 공과격을 가르쳤는가 하면, 또한 명나라 때 명승인 운서(雲棲)-주1) 대사가 젊었을 때(약 1550년) 공과격을 재판(再版)하고, 1604년에는 이것을 자지록(自知錄)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여 불교도들에게 알맞게 변형시켰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 이는 16세기 즈음에 이르러서 유불선(儒佛仙) 삼교(三敎)가 얼마나 서로 융합하고, 또 서로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법회와 만난 뒤에 원황은 공씨가 예언한 운명의 주술(呪術)에서 벗어났다. 3천 가지의 선행공덕(善行功德)을 발원하고, 이를 성공리에 이루었다. 그 결과 그는 지방 과거에 합격하고 주인(主人)이 되었다.(1570, 38세) 그 뒤에 그는 아들을 얻기 위하여 다시 3천 가지 선행을 발원하였고, 1581년(49세)에는 아들이 태어났다. 그리고는 승진을 위해 힘을 쏟아 진사가 되었다.(1586, 54세) 마침내 그는 정정한 채 54세 나이로 진사가 되었고, 그 뒤에도 20년 남짓 더 살았다.
보지현의 지현(知縣)이 된 뒤로는, 만 가지의 공덕을 쌓기로 한 서원(誓願)이 지지부진하여 걱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신(神)이 꿈에 나타나서, 토지세를 조금 낮춰주기만 해도 단번에 만 가지의 선행이 이루어진다고 일러주었다. 그가 아직 이 꿈의 내용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을 때, 오대산(五臺山)에서 온 스님이 조세 경감 조치로 만 명 이상이 덕을 볼 수 있다며, 그 꿈의 내용을 입증하였다.
료범은 학문을 좋아하고, 고금(古今)의 시무(時務)에 통달하여, 상수(象數)․지리(地理)․위서(緯書)․율력(律曆)․산술(算術)․병법(兵法)․행정(行政)․수리(水利) 등을 두루 연구하였다. 보지현에 재직 중에는 부지런히 민생 이익을 추구했다. 특히 현에 수재(水災)가 자주 발생하므로, 료범은 하천을 준설하고 제방을 축조하여 물난리를 막았다.
또, 백성들에게 해안에 버드나무를 심도록 분부하여, 바닷물이 몰고 오는 모래가 버드나무에 막혀 쌓임으로써 제방이 되도록 만들었다. 물도랑과 하안(河岸) 부지를 정리하고 파종 경작을 독려하여, 황폐한 토지가 날로 농경지로 일구어졌으며, 또 부역을 경감하여 민생을 평안하게 도모하였다.
원황이 남긴 저술은 대체로 세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정치-행정 관련서, 윤리-종교에 관한 저술, 그리고 과거 준비를 위한 참고 서적이다.
1605년(73세)에는 비교적 짧은 11편의 글을 료범잡저(了凡雜著)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그 중에 4편, 즉 농업에 관한 권농서(勸農書), 수도 근교의 수자원 보호에 대한 황도수리(皇都水利), 달력에 관한 역법신서(曆法新書), 그리고 그가 봉직한 보지현의 행정에 관한 정서(政書)가 첫째 범주의 대표작이다.
둘째 범주에는 아들을 위한 훈계서와, 후사(後嗣)를 비는 요체(要諦)가 담긴 기사진전(祈嗣眞詮)이 해당한다. 셋째 범주에는 중국사의 대강을 그린 것으로 1606년에 초간(初刊)한 강감보(綱鑑補)가 있다. 그의 아들이 주(註)를 단 군서비고(群書備考)는 과거시험 지망생들을 위하여 편찬한 책이다.
언제 처음 나타났는지는 명백하지 않지만, 심창세(沈昌世: 字는 文甫)가 증보하여 발행한 4권짜리 판본이 증정(增訂), 전장(全場), 이삼장(二三場) 군서비고(群書備考) 등의 여러 가지 긴 제목으로 나돌았다. 이 책은 청(淸)나라 건륭조(乾隆朝)에 국가 기밀을 누설하여 적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이유로, 북방 변경 지도들을 삭제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다행히도 완전한 판본을 보존한 채 전해지고 있다. 과거 응시자를 겨냥한 평주팔대문종(評註八代文宗)이라는 산문총서 역시 사고전서(四庫全書) 목록에서 언급하고 있다.
원황의 문집인 14권짜리 양행재집(兩行齋集)은 그가 서거한 직후에 출판한 듯한데, 그의 사상과 신앙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자면, 송응창(宋應昌)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가 원래 조선에 원정군을 보내지 말자고 반대한 사실이 나타난다. 그리고 드물게나마 언급하는 왕수인(王守仁)의 별난 제자 왕간(王艮: 1483-1541, 字는 汝止, 號는 心齋)의 전기는, 그와 왕양명학파(王陽明學派) 사이의 관계를 더욱 잘 보여준다.
어느 자료에 따르면, 그가 그의 거처 이름과 총서 제목으로 선택한 ‘양행(兩行)’이라는 용어는, 그가 유학자(儒學者)이면서 도교(道敎)와 불교(佛敎)의 가르침도 함께 따랐다는 사실을 암시한다고 주장한다. 그밖에도 명상(冥想: 參禪)에 대한 저서인 정좌요결(靜坐要訣)이 그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원황은 자선가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부유하지 못하면서도 항상 보시를 즐겨하였다. 그가 내놓는 곡식 중 70%는 불교 승려들에게, 30%는 친척과 친지들에게 돌아갔다고 한다. 그는 일상생활 속에서 거처함에, 항상 경전을 독송하거나 주문(眞言)을 염송하고, 정좌참선(靜坐參禪)을 즐겨하였다. 이러한 일과는 아무리 바쁘고 갑작스러운 일이 생겨도, 매일 끊임없이 정해진 규칙으로 실행하였다.
부인은 성품이 매우 현숙(賢淑)하여, 항상 보시 적선을 내조(內助)하면서, 스스로 그 공과(功過)를 기록하였다. 글을 쓸 줄 몰랐기 때문에, 거위 깃털 대롱으로 인주를 묻혀 달력 날짜 위에 찍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더러 료범이 세운 공로가 적은 경우에는, 곧 이마를 찌푸리며 질책하였다. 일찍이 부인이 아들에게 겨울 외투를 만들어 주려고 목화솜을 산 걸 보고 료범이 물었다.
“가볍고 따뜻한 비단도 집안에 있는데, 하필 무겁고 천한 목화솜을 사시오?”
그러자 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비단은 비싸고 목화솜은 싸기 때문에, 비싼 것을 싼 것과 바꾸면 솜옷을 많이 만들어, 추위에 떠는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입혀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에 료범은 매우 기뻐하였다.
“부인이 이와 같을진대, 우리 아들에게 복록이 없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겠소.”
과연 아들 엄(儼)도 나중에 진사가 되어, 마침내 광동(廣東) 고요현(高要縣)의 지현(知縣: 현감)에까지 이르렀다.
(이 傳記는 청(淸)나라 건륭(乾隆) 전후에 생존했던 팽소승(彭紹升)이 지은 원료범거사전(袁了凡居士傳)과 영문본(英文本) 전기를 번역하고, 여기에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다소 보충하여 종합 정리한 것이다. 영문본 전기는 대섭(大涉) 조성호 동학이 초역(初譯)하였다.)
주1) 운서(雲棲): 이름은 주굉(袾宏), 자(字)는 불혜(佛慧), 호(號)를 따라 흔히 련(연)지(蓮池) 대사라고 부름. 32종의 저서를 남겼는데, 운서법휘(雲棲法彙)라고 부름. 만력(萬曆) 43년 입적함. 연지 대사의 자지록 서문(自知錄序)은 따로 번역해 이 책에 실으니 참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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