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逸名氏)
문장에는 붓을 우뚝 세워 즉석에서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쏟아내는데도, 지극히 정교하고 절묘한 것이 있다. 예컨대, 한유(韓愈)-주1) 의 제십이랑문(祭十二郞文: 조카의 죽음을 애도한 祭文)이 그러하다. 또 문장에는 오래 전에 이미 탈고(脫稿)한 다음에도, 날이 가고 달이 지날수록 수정과 퇴고(推敲)를 거듭하면서, 백 천 번 갈고 닦아 수십 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결정본(決定本)을 완성하는 것도 있다. 우(구)양수(歐陽修) -주2)의 롱강천표(瀧岡阡表)-주3) 가 그것이다.
원료범 선생은 한유와 우(구)양수의 문필(文筆)로 한유와 범중엄(范仲淹)-주4) 의 재주를 발휘하여, 자신이 평생 체득한 경험 지혜로 이 료범사훈을 저술하였다. 수십 년간 몸과 심성을 수양(修身養性)하고, 일취월장의 견문 체험을 쌓은 데다, 수십 년간 자구단련(字句鍛鍊)의 윤색(潤色)까지 덧보태었다. 그래서 그 문장이 매우 정교하고 심오하면서도 크고 넓으며, 그 이치는 중용과 정도(正道)에 부합하면서 정밀하고 미묘하다.
‘개과(改過)의 방법’과 ‘적선(積善)의 방도’ 두 편이 이 글의 중심이 되는 본문(本文)이다. 개과의 방법은 “어떠한 죄악도 짓지 말라.(諸惡莫作)”는 정신을 발휘한 것이고, 적선의 방도는 “많은 선을 받들어 실행하라.(衆善奉行)”는 가르침을 상세히 강의한 것이다. ‘입명(立命)의 학문’ 편은 자신의 내력을 들추어 현신설법(現身說法)한 방대한 문장이다.
오직 겸허한 자만이 스스로 돌이켜 자기 내부를 성찰할 수 있고, 오직 자기를 반성하는 자만이 스스로 자신의 허물을 따지고 책망할 수 있다. 또 스스로 따지고 책망하는 자만이 잘못을 회개하는 데 인색하지 않을 수 있고, 오직 잘못을 회개하는 자만이 비로소 선행의 일이 진지하고 절실하게 된다. 그리고 오직 선행이 진실한 다음에야, 비로소 자신의 운명을 수립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처음에 어머님의 명을 받들어, 과거 준비 학업을 포기하고 의술을 배우게 되었다. 그런데 다음에 공(孔) 선생의 운수 예견을 믿고, 더 이상 인간의 의지로 추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어 담담하게 지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운곡(雲谷) 대사의 가르침을 받은 뒤, 정해진 운수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세 단락이 바로 료범 선생이 말한 것처럼, 겸허하면 가르침을 받을 여지가 있다는 의미다.
무릇 닭 무리 가운데 우뚝 선 학(群鷄一鶴)과 같이 준수(俊秀)하면서도, 고관대작의 의복을 헌옷처럼 내버릴 수 있는 걸 보면, 단지 그의 품성이 고아할 뿐만 아니라, 그 효성 또한 지극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료범의 모친이 아들에게 분부한 말은 롱강천표와 완연히 비슷하다. “나는 너를 가르칠 수 없으니, 이는 네 부친의 뜻이다.”는 단락의 말은, 표(表) 가운데 나타나는 태부인(太夫人)의 현명함이 그대로 재현한 듯하다.
료범 선생이 공(孔) 선생의 운수 산출을 믿은 것은, 함부로 맹신한 것이 아니다. 반드시 그 운수가 사소한 부분까지 모두 의심할 나위 없이 영험하게 들어맞는 것을 확인한 뒤에 비로소 독실하게 믿고, 마침내 독서할 생각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러니 이 얼마나 조심스럽고 신중한가? 공 선생의 운수 산출이 과거시험에서 등수까지 모두 정확히 부합함을 확인한 뒤, 다시 종신 운수를 점쳤다. 또 눈앞의 일이 조금도 어긋나지 않음을 보고, 비로소 먼 앞날에 대한 믿음을 견고하게 가지게 되었다. 그러니 이 또한 얼마나 안전하고 든든한가?
운곡 대사가 료범 선생에게 잘못을 회개하도록 가르칠 때 이렇게 분부했다.
“종래의 모습일랑 모조리 다 고쳐 씻어내고, 종전의 습관 기질은 이미 죽어 버린 것처럼 여겨서, 앞으로는 새로 태어난 것처럼 날로 새로워지시오!”
그때 료범 선생은 이 말을 듣고 벌써 너무도 명료했다. 이러한 상황을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고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개과(改過)의 방법’ 편에서 이를 비통하고 절실하게 되풀이하였다. 허물을 고치는 방법으로 수치와 경외와 용기의 세 가지를 전수하고, 구체적인 사실과 추상적인 이치와 본질적인 심성 세 단계의 난이도를 강론하였다. 그리고 혹시 사람들이 자신은 고칠 잘못이 없다고 스스로 착각할까봐 염려하여, 다시 거백옥(蘧伯玉)이 과오를 고쳐나간 실례를 한 단락 기록하였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반드시 잘못이 있는데, 다만 자신이 스스로 살피지 않을 따름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강조한 것이다.
운곡 대사는 료범 선생에게 적선을 가르치면서,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곳으로부터 천지신명을 감동시키며, 잡념망상이 들락날락하지 말고, 분수 밖의 요행은 터럭 끝만큼도 바라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이 몇 구절의 말은 료범 선생이 이미 그 뜻을 모두 체득하였다. 그러나 료범 선생은 사람들이 이치는 제대로 궁구(窮究)하지 않은 채, 스스로 적선을 실행한다고 여기면서, 오히려 죄악만 짓는 줄은 모를까 걱정하였다. 그래서 ‘적선의 방도’ 편에서 이를 자세히 논하고, 깊이 있게 분별하였다.
‘적선’ 편의 전문은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눠지는데, 매 단락에는 대략 열 개의 작은 단락이 있다. 먼저 과거의 구체 사례 10조목을 서술하여, 인과응보의 법칙이 틀림없음을 입증함으로써, 후세 사람들의 모범이 되도록 제시하였다. 다음으로 8쌍의 16범주(範疇) 관점에서, 적선의 원리를 정밀 분석하였다. 사람들이 구체 상황의 시비선악을 헤아리지 않은 채, 맹목(盲目)으로 감당하고 나서는 착오를 범하지 않도록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마지막으로 10대 강령을 표시하여, 만 가지 덕행을 통솔하였다.
료범 선생은 자신의 수행 과정이, 힘써 노력하는 유위(有爲)의 단계로부터 자연스러운 무위(無爲)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스스로 서술하고 있다. 처음에 3천 가지 선행을 서원(誓願)하여, 10년에 걸쳐 비로소 완성할 수 있었다. 그 다음에 3천 가지 선행을 발원하여서는, 단지 4년 만에 모두 이루었다. 그리고 다시 만 가지 선행을 발원하여, 겨우 3년 만에 한 가지 일로써 이를 일시에 원만히 성취하였다.
그러므로 처음 선을 실행할 때는 그 곤란함을 이기지 못할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행이 익숙해지면 저절로 마음에 체득하고 손발이 척척 맞는 묘한 즐거움의 경지에 이르게 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여, 또 무엇을 거리껴 선을 실행하지 않는단 말인가?
‘입명’ 편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공 선생이 내가 53세에 액운이 있겠다고 산출했다’부터 ‘세속의 논리이다’까지의 한 단락은, 사실상 ‘입명’ 편의 종결을 이룬다. 그런데 ‘너(료범의 아들 天啓)의 운명’ 단락은, 바로 앞 문장을 이어 뒤의 여섯 생각(六想)과 여섯 사념(六思) 및 개과(改過)의 마지막 세 작은 단락이라는 잔잔한 여파(餘波)를 일으킨다.
문장에 비록 여운의 꼬리가 있지만, 말은 더욱 긴밀하고 의미는 더욱 절실하다. 여섯 가지 물러나 생각하는(六退想) 것은, 숙명의 기초 위에 겸허의 덕을 가르치고 있다. 이 문장은 겸허로 시작하여 겸허로 마치면서도, 겸(謙)자는 한 글자도 직접 언급한 적이 없다. 그래서 ‘겸덕의 효험’으로 마지막 편을 삼고 있다.
이편의 전반부는 정(丁)․붕(馮)․조(趙)․하(夏)씨 4인의 겸허한 덕성을 기록하고 있는데, 글을 읽으면 마치 그 사람들을 눈앞에 대하는 듯하다. 후반부는 장외암(張畏巖)의 오만 불손함을 서술하고 있는데, 그가 한 도인(道人)을 만나 잘못을 회개하는 단락은 하나의 작은 ‘입명’ 편을 이룬다. 여기의 도인은 그야말로 완연한 또 한 분의 운곡 대사인데, 장외암이 그를 만났으니 얼마나 복이 많은가?
추구하는 것 없이 담담히 지내면서 스스로 겸허한 료범 선생을, 운곡 대사가 포섭하기는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도인이 욕구 많고 자만심 가득한 장외암을 굴복시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정확히 간파하고 혹심하게 두들겨 패서, “그 심기(心氣)가 평정하지 못한데 문장이 어찌 훌륭할 수 있겠소?”라고 책망한 것은, 곧장 깊은 연못 속에 잠들어 있는 여룡(驪龍) 턱의 구슬을 찾아낸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그가 굴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가 마음에 굴복하여 가르침을 청하고, 도인이 이에 그를 가르쳐 변화시켰으니, 그 적선과 입명의 내용은 마치 운곡 대사가 료범 선생에게 말하는 것과 비슷했다.
오호라! 망망한 사바고해(娑婆苦海)에 어디서 운곡 대사나 도인 두 사람과 같은 대종사(大宗師)를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설혹 만난다고 하더라도, 또한 이처럼 맹렬하고 신랄한 훈계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선지식(善知識)의 한 조각 보살 마음을 저버리지 않게 된다. 그러니 감히 힘써 분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입명’ 편 마지막 부분에서, “안으로 자기의 사악함 막을 것을 생각한다.”는 구절이, “매일 같이 잘못을 알아차린다.”로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다. 이 한 단락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개과의 방법’ 편에 실마리를 풀어 놓는다. 다시 운곡 대사를 찬탄하여, 입명의 본 주제로 귀결하는 치밀함이 특히 돋보인다.
그래서 료범사훈은 단지 실질상의 내용으로만 천고(千古)의 명언이 아니라, 형식상의 체계로도 또한 천고의 미묘한 명문장이다. 지금까지 서술은 문장의 단락을 대략 언급한 것일 따름이다. 언어 밖의 정신과 문자 안의 의미는 붓과 혀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으니, 각자 자세히 읽고 음미해 보면 스스로 느낄 것이다.
주1) 한유(韓愈: 768-824): 당대(唐代) 문학가․철학가로 자(字)는 퇴지(退之), 자호(自號)는 창려(昌黎), 시호(謚號)는 文(公). 류종원(柳宗元)과 함께 고문운동(古文運動)을 주창하여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선구자가 되었는데, 류종원(柳宗元)이 불교까지 아우른 것과는 달리, 유가독존(儒家獨尊)의 척불론(斥佛論)으로 유명함. 송(宋)대의 주희나 우양수도 한유처럼 척불론을 견지함.
주2) 우(구)양수(歐陽修: 1007-1072): 북송(北宋)의 문학가․사학가(史學家). 자(字)는 영숙(永淑), 호(號)는 취옹(醉翁)․육일거사(六一居士), 시호(謚號)는 문충공(文忠公), 북송 고문운동(古文運動)을 영도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 신당서(新唐書)와 신오대사(新五代史)를 편수(編修). ‘歐’는 본디 독음이 ‘우’인데, 우리는 ‘구’로 잘못 읽음. 예컨대, ‘Europe’은 중국어로 비슷하게 음역(音譯)해서 ‘오우루오빠(歐羅巴)’인데, 우리는 연유도 모른 채 ‘구라파’로 읽고 있으며, ‘西歐’도 ‘서유럽’의 준말인데 우리는 ‘서구’로 통용하고 있다.
주3) 롱강천표(瀧岡阡表): 4세 때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의 근검과 인애 속에 자란 우양수가 64세 때 이르러, 이미 작고하신 부모를 위해 지은 묘도비문(墓道碑文). 그 부친이 관리로서 청렴하고 재판을 신중히 하며 부모를 효성스럽게 섬겼다는, 모친의 자상하고 간절한 훈계를 회고적으로 서술함과 동시에, 그 모친의 근검 절약하고 돈후 인자한 덕성을 질박하면서도 진솔한 감정으로 표현한 명문장(名文章)이다.
주4) 범중엄(范仲淹: 989-1052) 북송(北宋)의 정치가․문학가, 자(字)는 희문(希文), 시호(謚號)는 문정공(文正公). 개혁 정치를 주장하였으나, 보수파의 반대로 실현하지 못하였다. “천하의 근심을 맨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쾌락을 맨 뒤에 즐긴다.”는 ‘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의 유명한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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