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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광대사 서문 (印光大師序)

운명을 뛰어 넘는 길. 전기 및 서문

by 明鏡止水 淵靜老人 2022. 12. 2. 11:59

본문

성현의 도는 오직 정성(誠)과 광명(明)일 뿐이다. 성인과 미치광이의 구분은 한 순간 일념에 달려 있다. 성인도 마음을 놓아버리고 망상을 좇아가면 곧 미치광이가 되고, 미치광이도 한 순간 생각을 극복하면 성인이 된다. 지조와 방종, 이득과 상실의 형상은, 비유하자면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와 같아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곧 퇴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힘써서 자기 마음을 꽉 붙잡아야 하며, 행여 터럭 끝만큼이라도 방종하고 제멋대로 내맡겨서는 안 된다.
무릇 성(誠)이라는 한 글자는, 성인과 범부가 함께 갖추고 있으며, 둘로 나누어지지 않는 한결같은 진심이다. 또 명(明)이라는 한 글자는, 보존 함양하고 분명히 성찰하는 것으로서, 범부에서 성현으로 통하는 확 트인 길이다.
그런데 범부의 경지에서는, 일상생활 가운데 온갖 상황(잡념망상)이 몰려든다. 그래서 한번 조심히 살피지 않으면, 도리에 어긋나는 갖가지 사사로운 감정과 생각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막 생겨난다. 이러한 잡념망상이 일단 생겨나면, 인간의 본래 청정한 진심이 거기에 뒤덮여 갇히게 되고, 그 상태에서 하는 것은 모두 중용(中庸)과 정도(正道)를 잃게 된다. 그리하여 한번 뼈를 깎는 듯한 절실한 반성 참회 공부로 번뇌 망상을 모두 이기고 청정하게 다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욱 타락하여 밑바닥을 모르게 된다. 단지 성인 마음만 갖추었을 뿐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어리석은 중생의 대열에 빠져들고 말 것이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그러나 성인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 스스로 그 명덕(明德)을 밝히는 데 있다. 그 명덕을 밝히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사물-주1)을 올바르게 하는 격물(格物)과, 분명히 살펴 아는 치지(致知)로부터 착수해야 한다. 가령 사람의 욕망이라는 물건은, 힘을 다해 바로잡거나 제거하지 않으면, 본래 자기 안에 갖춰져 있는 진실한 지혜도 결코 철저히 드러나기는 어렵다. 만약 진실한 지혜(진리)를 밝게 드러내려면, 일상의 말과 행동에서 항상 깨달음과 관조(觀照)를 일으켜야 한다. 그래서 도리에 어긋나는 감정적인 생각은 잠시라도 마음에서 싹트지 않게 하고, 항상 마음이 텅 비어 훤하게 밝도록 해야 한다.
마치 거울이 높은 누대(樓臺)에 걸려 명경대(明鏡臺)가 되면, 주위 경계를 있는 모습 그대로 비춰 드러내 주는 것과 같다. 다만 거울 앞에 서 있는 사물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춰줄 뿐, 그 경계(대상 사물)에 따라서 거울이 돌지는 않는다. 예쁘고 미운 것은 사물로부터 말미암으니,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앞으로 다가올 것(미래)은 미리 계산하지 않고, 떠나간 것(과거)은 연연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혹시라도 이치에 어긋나는 감정과 욕망이 조금이라도 싹트고 움직인다면, 마땅히 즉각 엄하게 공격하고 다스려서 송두리째 도려내야 한다.
마치 적군과 대치하여 싸움에, 적이 내 영토의 경계를 침범하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적장의 목을 베고 그 깃발을 빼앗아 나머지 잔당들도 섬멸해 버리는 것과 같다. 무릇 군대를 통제하는 방법은, 모름지기 엄하게 스스로 다스려야 한다. 태만하거나 소홀하지 말며, 자기를 극복하고 예법에 복귀하며(克己復禮), 공경을 다하고 정성을 보존해야 한다.
그때 사용할 군기(軍器)와 병력(방편 법문)은, 모름지기 안회(顔回)의 사물(四勿)과, 증자(曾子)의 삼성(三省)-주2) 과, 거백옥(蘧伯玉)이 허물이 아주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잘못을 알아차려 회개한 방법 등이 필요하다. 거기다가 전전긍긍(戰戰兢兢)하면서, 깊은 연못에 임하는 듯(如臨深淵), 살얼음을 밟는 듯(如履薄氷), 근신하는 마음을 더해야 할 것이다.
도리에 어긋나는 감정과 욕망을 이토록 삼엄하게 상대하면, 군대의 위엄이 멀리 떨치게 된다. 그러면 도적의 무리가 간담이 서늘해져, 멸종에 이르는 극한 참패를 당할까 두려워하고, 따뜻이 어루만져 주는 큰 은택만 바라게 될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이런 작당들이 서로 함께 투항하여 지극한 교화에 귀순하면, 옛날 마음을 완전히 혁파해 버리고, 반성참회로 새로운 덕을 닦게 된다. 마침내 장수가 문 밖에 나가지도 않고 병기(총칼)에 피를 칠하지도 않으면서, 도적이나 원수를 모두 어린애처럼 감싸 안아 양민으로 감화시키게 된다. 그러면 위에서 행동으로 보인 모범을 아래 사람들이 본받고, 모든 선비들이 다 청정하고 평안해져, 창칼을 움직이지 않고도 앉아서 태평세계를 이룰 수 있다.
이렇게 한다면, 격물(格物)로부터 치지(致知)에 이르고, 치지로부터 명덕(明德)을 밝힐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정성과 광명이 일치하게 되면, 범부가 곧 성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더러 타고난 근기와 재질이 낮고 모자라 이를 실행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조열도(趙閱道)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조열도는 낮 동안에 행한 것을, 밤에 반드시 향을 사르고 하느님(上帝)께 고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 고할 수 없는 것은 감히 행하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또 명(明)나라 때 원료범(袁了凡)은, 어떠한 악도 짓지 않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여(諸惡莫作, 衆善奉行), 운명을 자아로부터 세우고 복을 자기로부터 구함(命自我立, 福自我求)을 몸소 실증했다. 그래서 조물주가 혼자 권능을 독단(전횡)하지 못하도록 했다. 공과격(功過格)을 받아 지닌(受持) 뒤로는, 무릇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이며 말하고 행동하는 데 이르기까지, 선과 악을 섬세한 것이라도 모두 다 기록하였다. 그래서 착함이 날로 증가하고, 악함이 날로 감소하길 기약한 것이다.
처음에는 선과 악이 서로 반반 뒤섞였으나, 오래 지속하면서 오직 선만 있고 악은 완전히 없어졌다. 복이 없는 운명도 복이 있게 전환하고, 요절할 수명을 장수하게 바꾸며, 자손이 없는 팔자도 자손이 많은 팔자로 뜯어고칠 수 있게 되었다. 또 현생에 당장 우수한 성현의 경지에 들어가고, 나중에 죽어서는 높이 극락의 고향에 올라갔다. 그래서 그 행동은 세상의 법칙이 되고, 그 말은 후세의 정법이 되었다. 그 사람이 장부일진대, 나도 또한 그러할지니, 어찌 스스로 자신을 얕보고 자포자기하여 뒤로 물러날 수가 있겠는가?
더러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격물(格物)이란 천하 사물의 이치를 모두 다 궁구하고, 치지(致知)란 나의 지식을 끝까지 추론하는 것일진대, 반드시 하나하나 밝히 알아서 완전히 통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여 사람의 욕망을 격물의 대상으로 삼고, 진실한 지혜(眞知)를 치지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의 욕망을 다스려 극복하고, 진실한 지혜를 밖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 격물치지(格物致知)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에 대해 이렇게 답변하겠다.
“정성(誠)과 명덕(明德)은 모두 마음의 본체로부터 말하는 것이다. 이름은 비록 두 개지만, 실체는 본디 하나다. 치지(致知)와 성의(誠意)․정심(正心)의 지(知)․의(意)․심(心) 이 세 가지는, 마음(心)의 본체와 작용으로부터 함께 아울러서 말한 것인데, 실지로는 세 가지가 하나다. 격(물)․치(지)․성(의)․정(심)․명(덕)에서 쳐서 다스리고(格) 이르게 하고(致) 정성스럽게 하고(誠) 바르게 하고(正) 밝게 하는(明) 다섯 가지는, 모두 사악한 것을 막아 정성을 보존하고, 망령을 돌이켜서 진리에 되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점검하고 성찰하며 전진하는 공부에서는 명(덕)이 총강령이 되고, 격(물)․치(지)․성(의)․정(심)은 개별구체의 세목일 따름이다. 수신(修身)․정심(正心)․성의(誠意)․치지(致知)는 모두 다 명덕을 밝히는 방편이고 까닭(所以)이다.
“가령 자기 마음에 본래 존재하는 진실한 지혜가 무명(無明)의 물욕(物欲)에 뒤덮여 가려진다면, 뜻이 정성스럽지 못하고 마음이 바르지 못하게 된다. 이때 만약 물욕을 쳐서 없앤다면, 바로 ‘지혜의 바람이 업장의 구름을 깨끗이 쓸어 없애버리고, 마음의 달이 홀로 둥그렇게 하늘 가운데 낭랑하다.(慧風掃蕩障雲盡, 心月孤圓朗中天.)’는 시의 경지가 될 것이다. 이처럼 성인은 사람들에게 광범한 것으로부터 절실한 것에 이르고, 소원한 데서부터 친밀한 데에 이르는 단계적인 순서를 보여주셨다.
“만약 천하 사물의 이치를 모두 궁구해서, 내 마음이 이러한 것들을 다 지식으로 명료하게 안 다음에야 비로소 ‘성의’라고 할 수 있다면, 오직 많은 책을 두루 읽어 박학다식한 사람(걸어 다니는 사전)만 ‘성의’에 해당할 것이다. 또 만약 천하를 두루 유람한 사람이라야,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명덕을 밝힐 수 있다면, 세상을 두루 다니며 견문을 얻을 수 없는 사람들은 어찌 되겠는가? 설령 순수하고 돈후한 천상(天上)의 자질과 인품을 타고났다고 할지라도, 그 대열에 전혀 낄 수 없게 될 것이다. 하물며 타고난 성품이 순후(淳厚)하지도 못한 보통 중생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러한 이치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치를 깊이 궁구하지 않은 선비들이나 무식한 사람들은 도리와 천성(天性)을 들으면, 대부분 이를 성인의 경지로 높이 밀어 올리고, 자신은 평범하고 우매하다고 자처하기 일쑤다. 그러면서 스스로 분발하거나 노력하려고 하지 않고, 인습(因襲)에 끌려 마지못해 따라가는 정도다. 그렇지만 만약 이들에게 과거․현재․미래 삼세(三世)의 인과법칙을 알려주면 어떻겠는가? 사람이 선하거나 악하거나 간에, 자기 마음과 언행에 따라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그 보답을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안다고 하자! 그러면 누구라도 악의 과실이 두려워 악의 인연을 끊고, 선한 인연을 닦아 선한 과보를 바랄 것이다.
무릇 선악이란 크게 몸의 행동(身), 입에서 나오는 말(口), 마음속의 생각(意) 이 세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미 이러한 인과를 알았다면, 스스로 몸과 입을 잘 보호하고 방어하며, 마음을 닦고 생각을 씻어낼 수 있다. 비록 캄캄한 방안이나 깊숙한 구석에 혼자 있다고 할지라도, 항상 천상 하느님(帝天)을 대면하듯이 공경하며, 감히 사악하고 비열한 마음이 싹터 죄와 허물을 저지르는 일은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크게 깨달은 세존(世尊)께서 상중하 근기의 모든 중생에게, 두루 진리를 궁구하고 뜻을 정성스럽게 하며,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도록 가르치신 대도(大道)요, 정법(正法)이다. 그러나 미치광이들은 그 구속(부담)을 두려워하여, 인과응보를 가상(假相)의 집착이라고 생각한다. 또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추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방어하려고, 인과응보가 아득하거나 허망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두 부류 사람을 제외하면, 누가 자연의 인과응보 법칙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그래서 몽동 선사(夢東禪師)-주3)는 일찍이 이렇게 설법하셨다.
“마음과 성품을 즐겨 말하는 자는, 결코 인과를 버리거나 벗어나지는 않는다. 또 거꾸로 인과법칙을 깊이 믿고 행하는 사람은, 끝내는 인간의 본래 선한 심성을 크게 밝힐 것이다.”
이는 이치로 보나 대세로 보나, 반드시 그러할 수밖에 없다. 무릇 범부의 지위로부터 성인이나 부처의 공과(功果)를 원만히 증득(證得)하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인과응보의 법칙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음을 꼭 알아야 한다. 이러한 인과를 믿지 않는 자는, 스스로 그 선한 원인과 선한 결과를 포기함으로써, 항상 악한 원인만 짓고 악의 과보를 받을 것이다. 그러면서 티끌처럼 수많은 무량겁(無量劫)이 다 지나도록 삼악도(三惡道: 지옥․축생․아귀)만을 계속 윤회할 뿐, 그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길이 없게 된다.
슬프도다! 성현들의 천만 마디 말씀이 모두, 사람들에게 자기 마음을 반성하고 잡념망상을 극복하도록 가르치지 않음이 없다. 성현은 우리 마음에 본디 갖춰져 있는 명덕(明德)이 악의 구렁텅이에 빠져서 매몰하지 않고, 우리가 친히 그것을 받아서 쓸 수 있도록 인도할 따름이다. 다만, 사람들이 인과응보의 원리를 모르는 까닭에, 늘 제멋대로 뜻과 감정을 방종하는 것이다. 그러니 설령 평생토록 글을 읽는다고 할지라도, 단지 자구와 문장만 배울 뿐이다. 이들은 성현의 위대함을 희망하고 본받을 목표가 없는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눈앞에서 일생을 허송세월하고 말 것이다. 어찌 안타깝지 않겠는가?
원료범 선생이 자식을 훈계하기 위해서 지은 네 편의 ?료범사훈(了凡四訓)?은 문장과 사리(事理)가 모두 유창하여, 우리 마음의 눈(心目)을 확 틔워 준다. 그래서 이 글을 읽다 보면, 저절로 기뻐서 흥이 나고, 마음에 법열(法悅)이 솟아오르게 된다. 그리하여 아주 빨리 이것을 법(法)으로 삼으려는 소망이 절로 생기나니, 이는 진실로 세상을 선하게 맑혀 주는 훌륭한 모범이다.
영가(永嘉: 浙江省의 溫州) 지방에 있는 주군쟁(周群錚) 거사(居士)가 이 글에 몹시 감동하고 찬탄한 나머지, 상해(上海)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에서 납판(鉛版)을 주조해서, 뜻이 같은 사람(同志)들에게 널리 읽혀지기를 발원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인쇄한 다음, 나에게 법(진리)의 인연(法緣)을 맺어 달라고 몇 권 보내면서, 아울러 나더러 여기에 서문을 써달라고 청해 왔다. 이에 자기를 극복하고 예의에 복귀하며(克己復禮), 사악을 방지하고 정성을 보존하는(閑邪存誠) 성현들의 뜻을, 요점만 간추려 적어 보았다. 단지 부탁 받은 책임에 가름할 따름이다.

 

주1) 안회의 사물(四勿): 인을 행하는 극기복례의 구체 방법으로, 공자가 안회에게 예의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며, 말하지도 말고, 움직이지도 말라고 가르친 네 가지 금지 사항.

주2) 증자(曾子)의 삼성(三省): 증자가 남을 위해 충실하지 않았는지, 벗과 교유함에 미덥지 않았는지, 스승께서 전수하신 것을 제대로 익히지 않았는지 세 가지로 매일 자신을 반성했다는 수행 방법.

주3) 몽동(夢東): ()나라 건륭(乾隆: 1736-1795 재위)가경(嘉慶: 1795-1820 재위) 연간에 법문(法門) 제일의 스님. 본래 선가(禪家)의 거장이었는데, 세상을 구제하려는 광대한 서원(誓願)으로, 염불정토종(念佛淨土宗)을 힘써 전파함. 만년에 북경 부근 자복사(資福寺)에 은거하면서 염불(念佛) 기풍을 크게 진작시켜, 최근까지 황하 이북 제일의 염불 도량이라는 법맥(法脈)을 유지함. 철오선사어록(徹悟禪師語錄)이 전해지는데, 이 법문은 필자가 한글로 옮겨 월간 불광에 연재했으며, 불광출판사에서 발행한 의심 끊고 염불하세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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