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병남 (李炳南)
주백려(朱柏廬)의 격언(格言: 治家格言으로, 흔히 朱子家訓으로 불림: 뒤의 특별 부록 참조)도 집안 자제(子弟)들을 훈계하기 위한 글이고, 원료범(袁了凡)의 사훈(四訓)도 또한 집안 자제들을 훈계하기 위한 글이다. 그런데 오직 주공(朱公)의 말만 널리 퍼지고, 원공(袁公)의 훈화는 별로 퍼지지 못해 왔다. 더러는 주공의 글은 간결하면서 알아듣기 쉽고, 원공의 글은 번잡하여 기억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 전파의 정도와 기세가 크게 차이 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단지 피상적인 논리일 따름이다.
유가에서는 “원료범의 사훈은 불교의 인과론을 지니고 있어, 우리 자제들이 배워야 할 게 아니다.”라고 배척한다. 또 불가에서는 “원료범의 사훈은 단지 불완전한 세속의 유위(有爲)의 유루법(有漏法: 煩惱가 있는 법)으로서, 출가 수행하는 우리 석가 제자들에게 절실한 것이 아니다.”라고 외면한다. 그런데 주백려의 가훈에 대해서는 정반대 입장을 보인다. 불가에서는 “세속의 법이야 당연히 그러한 것이지.”라고 인정한다. 또 유가에서는 “집안의 통솔은 진실로 이를 법도로 삼아야 한다.”고 환영한다.
이것이 바로, 두 가훈이 세간에 퍼지는 정도와 범위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도록 결정지은 가장 큰 진짜 이유다. 분명히 현실상 하나는 사람들에게 환영받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에게 외면당한다. 그렇다고 해서 환영받는 것은 그 문장이 통달하고, 외면당하는 것은 그 문장이 절름거릴(난삽할)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이는 문장의 절름거림(난삽함)이나 통달의 문제가 아니다. 문장에 통달한다고 해서 무슨 유익함이 있으며, 문장에 절름거린다고 해서 무슨 손실이 있겠는가? 이는 바로 인심(人心)의 정직과 사악, 수양과 혼란이 갈라지는 분기점이다. 그래서 성현의 말씀은 문장만 가지고 평가해서, 감히 업신여기거나 모욕하면서 스스로 방자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주역에 이르기를, “선행을 쌓으면 경사가 넘치며, 불선(不善: 죄악)을 쌓으면 재앙이 넘친다.”고 한다. 또 상서(尙書: 서경)에는 이르기를, “은혜는 길함을 인도하고, 거역을 따르면 흉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말씀만 보아도, 유가에서 일찍이 인과법칙을 배척한 적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불교도 초발심(初發心)의 인연 기미(因緣機微)와 삼귀의(三歸依: 佛․法․僧 三寶에 귀향 의지함)․육념(六念: 佛․法․僧․戒律․布施․天上에 대한 思念)부터 출발하여, 점차 오계(五戒: 殺生․竊盜․邪淫․妄語․飮酒를 금지함)에 이르고, 나아가 사섭(四攝) -주1) 을 동시에 병행하며, 마침내 육도(六度) -주2) 로써 만 가지 수행을 성취한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단계적인 수행이론은 불교도 일찍이 인간의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유위법(有爲法)을 행하지 않음이 없음을 보여준다.
무릇 사방으로 동량(棟梁)이 뻗은 고래 등 같은 누각을 짓는 일도, 한 치의 터다짐부터 시작한다. 또 수십 필(匹)의 비단 베를 짜는 일도, 한 올 실을 잣는 데서 비롯한다. 마찬가지로 인과응보의 법칙(에 대한 믿음)과 유위의 수행 노력이야말로, 도(道)와 덕(德)에 진입하는 필수 관문이다. 한 치의 터다짐과 한 올 실 잣는 일을 천박하게 여기는 자가, 어떻게 고래 등 같은 누각과 수십 필의 비단 베를 바랄 수 있겠는가? 또한 인과응보의 법칙과 유위의 수행 노력을 비방하는 자가, 어떻게 위대한 유학자(鴻儒)와 진실한 고승대덕(高僧大德)의 경지에 나아갈 수 있겠는가?
(공자․석가․노자․예수와 같은 성인도 모두 점수(漸修)를 거쳐 돈오(頓悟)에 이르렀다. 돈오와 점수는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 아니라, 오히려 성도(成道)의 양면이다. 그런데 세간에서는 돈오돈수(頓悟頓修) 이론을 잘못 곡해하여, 중생의 교만심을 자극하고 수행의 커다란 마장(魔障)으로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또 깨달은 뒤에도 수행은 계속해야 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깨달은 뒤의 수행이 진실한 수행이다. 뭇 성현과 선지식이 실제 증명하고 주장한 선오후수(先悟後修)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옮긴이 주)
과대망언(誇大妄言)은 실질이 없고, 방자무엄(放恣無嚴)은 품덕(品德)이 적다. 이런 언행이 사람의 귀에 들어가면 마음이 혼란해지고 행실이 방종해지며, 세간에 풍미하면 상서로움이 자취를 감추고 요괴스런 재앙만 흥성한다. 그 결과 국가의 장래와 세상의 운세가 장차 생각할 수조차 없는 끔찍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또한 사람들이 환영하는 것들을 살펴보면, 대개 등잔 밑에서 주고받는 한가한 잡담에 불과하다. 이러한 것에 비하면, 세속에서 외면당하는 글이 도리어 보는 사람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오히려 훨씬 낫다.
복이란 오직 스스로 불러들이는 것임을 알고, 숙명론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하늘이 정한 운수도 되돌릴 수 있으며, 또한 화(禍)도 소멸시킬 수 있다. 인과율의 법망에 갇히지 않으면, 재이(災異 : 재난이변)가 무르익은 것도 전환시킬 수 있다. 마음으로 짓고 마음으로 전환시키며, 방울을 매달기도 하고 방울을 풀기도 하나니, 숙명론과 인과율은 그 조종이 오직 자아에 달려 있다. 완고하고 겁이 많거나, 비루하고 천박한 자질의 사람은, 이 도를 들으면 스스로 헤어 나올 계단을 얻는다. 그래서 청렴하고 관대하며 돈후하고 자립하는 그릇으로 변할 수 있다. 또한 출신과 환경이 불우하고 곤궁한 자도 이 도를 행하면, 회개와 혁신으로 태평을 획득할 수 있다. 원료범의 문장은 이처럼 그 효용이 위대하니, 또한 어찌 이를 배척해 버릴 수 있겠는가?
그리고 고금을 통하여 역경을 헤치고 용기를 발분한 선비들 중에는, 공과격(功過格: 선행 공덕과 과실 죄악을 매일 스스로 기록하는 표)을 기록하며 힘써 수행한 자가 실로 매우 많다. 그들은 모두 천성(天性)과 품덕(品德)을 밝혀, 세간 풍속을 돈후하게 복귀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니 가까이로 주위 사람들을 맑게 하고, 멀리는 세상을 선하게 하는 묵언의 교화와 은연중의 감화능력으로 말하면, 주자가훈의 말은 료범의 문장과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못 되는 것 같다. 도(道)를 실천하지 못한다면, 비록 문장이 아무리 널리 퍼진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또 반대로 도(道)를 실천할 수 있다면, 비록 퍼지는 범위가 협소한들, 무슨 상관이 있으리오?
오호라! “사람이 道를 널리 확대 전파할 수 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크게 키워 주는 것은 아니다.(人能弘道, 非道弘人.)” 공자의 이 말씀은 정말 진실하도다! 문장이 절름거리고 난삽하거나, 통달하고 유창한 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오직 인간의 세속 마음이 위태롭고, 도심(道心)이 미약할 따름이다.
정미(丁未: 1967)년 여름휴가 때, 제6기 자광강좌(慈光講座: 부처님의 자비광명을 전파한다는 공익의 취지에서 사회 대중을 상대로 연 공개강좌)를 개설하였다. 그때 동참한 적모위(翟慕威)라는 거사가 천지와 인간에 대한 자비 연민의 흉금을 품고, 원료범의 문장을 인쇄 발행하여, 모든 사람이 요순 성현이 되기를 바라는 큰 서원을 발하였다. 그 마음이 바로 보리심(菩提心: 道心․覺心)으로, 문화 부흥을 보필하고 세상의 인륜 도덕을 타락에서 구제하는 데 크게 기여하여, 인류와 세상 모두에게 막대한 선익(善益)을 끼칠 것이다. 바로 그가 나에게 와서 서문을 부탁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살펴보니, 이미 고인(古人)의 옛 서문도 있고, 또 나의 스승이신 인광 조사(印光祖師)의 서문도 한 편 있었다. 료범사훈의 취지(정신)와 본체 작용에 대해서는, 이 두 편의 서문이 이미 상세히 논설하고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되풀이해 읽어보아도, 내가 다른 말을 덧붙이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에 나는 인정(人情)이 기이하게 변천하여, 은밀하고 괴이한 것만 무성하게 말하는 세태를 특별히 들추어내고 싶었다. 원료범의 문장을 보는 사람들이 세상의 유행이나 업신여김에 구애받지 말고, 그칠 만한 곳(止於至善)을 스스로 알도록 하기 위하여, 굳이 내가 이 서문을 쓰는 것이다. 그 말이 속이는 게 없음을 믿고, 그 행실이 법 삼을 만함을 살피자.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나타난 결과(果: 업보)를 거울삼아, 과거에 씨 뿌린 원인(因)을 돌이켜 반성해 보자. 나아가 스스로 경각심을 일깨워 도(道)를 실천하며, 섬세한 낌새(機微)를 식별하자. 그렇게 한다면, 아마도 자립 안정의 경지에 가까워질 것이다.
더욱이 적(翟) 선생의 마음씀을 헤아려, 중생과 더불어 희비와 고락을 함께 하며, 이 글을 서로 돌려가며 계속 권장해 나간다면, 이는 선인(善人) 중에 더욱 선량한 독자가 될 것이다. 만약 단지 자기 일신(一身)의 수양과 제 가족의 훈계에만 만족하고 만다면, 이는 책을 인쇄․기증하는 시주(施主)의 발원에 부응(副應)하지 못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 서문을 쓰는 나의 뜻에도 미치지 못하고, 또한 더욱이 원료범 선생의 문장이 본래 지닌 정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편협한 자는 소승(小乘)의 경지에 안주하는 자료한(自了漢: 자기 일(도업)만 끝마치고 마는 사나이)이라고 일컬어 마땅할 것이다.
주1) 사섭(四攝): 재물이나 법을 베푸는 보시(布施), 중생의 근기에 따라 부드럽고 선량한 말로 위로하는 애어(愛語), 몸․입․뜻(身․口․意)의 선행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이행(利行), 법안(法眼)으로 중생의 근기를 살펴 그가 좋아하는 바에 따라 현신설법(現身說法)으로 이익과 즐거움을 함께 향유하도록 하는 동사(同事)의 네 가지로서, 중생으로 하여금 행위자(說法者)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자연스럽게 도를 받아들여 실행하도록 포섭하는 방법.
주2) 육도(六度):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禪定)․지혜(智慧)의 육바라밀로서, 번뇌 고통의 차안(此岸)에서 열반 해탈의 피안(彼岸)에 건너가도록 해 주는 뗏목과 같은 수행의 방편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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