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때 녕파부(寧波府: 지금 강소성 일부 지역)에 손씨(孫氏) 서생은, 집안이 가난하여 학관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수입은 일년 내내 고작 황금 몇 량에 지나지 않았다.
나중에는 학관마저 잃어, 호수 서쪽에 장씨(張氏) 집에 식객(食客)으로 붙어살면서, 글 베껴주는 일을 맡았다. 어느 날 그 집에 한 하녀(여종)가 밤중에 손공에게 찾아 들었으나, 손공은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러자 그 하녀는 손공에 동료인 서석(西席)이라는 자와 눈이 맞아 야합하였다. 단오절에 서석이 학관을 그만두었는데, 그 이유는 심한 종기가 생겨 낫지 않기 때문이었다. 손공이 그 자리를 뒤이었다. 나중에 강어귀에서 자기 작은아버지를 만났는데, 작은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 들었다.
“내가 아들 병 때문에 성황당(城隍堂)에서 기도를 올렸네. 그런데 밤에 꿈속에서 성황님께서 높은 당상에 앉아, 담당 관리에게 굶어죽을 놈들 명부(饑籍)에서 빼줄 사람을 불러, 명부와 대조하도록 시키시더군. 차례로 여나믄 사람을 호명하더니, 바로 조카 자네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내가 담당 관리에게 ‘손아무개는 무슨 까닭에 굶어죽을 놈들 명부에서 빼주게 되었습니까?’ 라고 물었지. 그러자 그 관리가 이렇게 대답하더군. ‘이 사람은 본디 46세에 외출하였다가 굶어죽을 운명이었소. 그런데 올해 4월 18일 저녁, 하녀 아무개가 찾아 들어 음란을 꾀었음에도, 단호히 거절하였소. 그래서 특별히 수명을 24년(二紀)이나 늘려주고, 굶어죽을 명부에서 록봉(祿俸) 받을 명부(祿籍)로 옮겨 싣는 것이오.’ 내가 꿈속에서 이런 상서로운 조짐을 보았기에, 조카에게 크게 축하하는 걸세.”
그 뒤 손공 학관에는 수업 받는 학생들이 날로 늘어가서, 매년 수업료가 황금 백여 량(兩)에 이르렀다. 손공이 46세 때는 만력(萬歷: 明 神宗 년호) 36년(1608)이었다. 그때 쌀값이 폭등하여 굶어죽는 사람이 매우 많았지만, 손공은 넉넉하게 여유가 있었다. 나중에는 자식들에게 가산(家産)을 나누어줄 정도로 거부가 되었다. 그리고 나이가 70세 고희(古稀)에 이르도록, 질병 없이 건강하게 장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