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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3. (1) 진에번뇌업장대치 瞋恚煩惱障對治

새 책 소개. 부처님 마지막 가르침 유교경

by 明鏡止水 淵靜老人 2023. 1. 14. 23:42

본문

論曰:

첫째 업장대치는 진에번뇌업장대치瞋恚煩惱障對治인데, 인욕‧감내하는 도리(堪忍道)를 나타냅니다. 수행보살은 인욕‧감내 자리(堪忍地)에 머물면서, 경중을 가리지 않고 온갖 고뇌를 모두 인내하고 대치對治할 수 있어야 합니다.

1) 그래서 經에서?汝等比丘, 若有人來, 節節肢解, 當自攝心, 無令瞋恨?이라고 설합니다. 이는 환화법신성취幻化法身成就를 나타냅니다. 또 경전에?亦當護口, 勿出惡言?은 구업을 청정하게(口行淸淨) 하고 항상 부드러운(유연한) 말(軟語)을 하라고 권합니다.

【절요】갈기갈기 찢겨도 화내지 않음(肢解無瞋)은 몸과 뜻이 청정함(身意淨)이고, 나쁜 말을 뱉지 않음은 입이 청정함(口業淨)입니다. 그런데 여기 외침(一唱: 일갈)은 만약《금강경》을 예로 든다면, 규봉대사가 론소論疏에서 말한 18주住 가운데 제13주인 인고주忍苦住로서, 신행지信行地에 해당합니다.

《대승기신론》에서도?이승二乘 관찰지혜(觀智)는 처음 발심한 보살과 같다?고 말하는데, 그 소疏에서는?삼현三賢보살이 이승과 같기 때문이다?고 풀이합니다. 그렇다면 이 경전은 화신化身불이 설하시어, 지地에 이르지 못한 보살도 포섭함을 알 수 있습니다.

《범망경》은 보신불報身佛이 연설하시어, 이미 보살지地에 오른 성인을 섭수攝受하십니다. 그래서《화엄경소(疏)》에서“《범망경》은 노사나불盧舍那佛이 천 닢 연꽃자리에 앉아 리구지離垢地의 계戒바라밀을 섭수攝受하신다?고 말합니다. 옛 사람이 이《유교경》은 장통藏通보살이 함께 품수한다고 본 것은, 마명보살(《기신론》)의 심오한 뜻에 부합하지만; 만약《범망경》이 별원別圓보살이 스스로 품수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청량국사(《화엄경소》)의 깊은 글에 어긋날 것입니다.

【보주】성내지 않음(無瞋)은 오로지 뜻에 속할 것 같은데도, 몸과 뜻이 청정(身意淨)하다고 말한 것은, 갈기갈기 찢김(肢解)에 머물면서 손발로 막거나 저항하지 않으므로 몸도 청정함을 나타냅니다.

 

그리고?若縱恚心, 則自妨道, 失功德利?는 자신과 남한테 모두 이로운 도덕에 장애가 되는 악법(自他利道德障法)을 일깨웁니다.

【절요】만약 성을 낸다면, 스스로 자기 도업에 방해가 될 뿐 아니라, 남을 교화하는 이타행도 잃습니다.

 

2)?忍之爲德, 持戒苦行所不能及?은 공덕과 지혜 두 가지 마음행위(心行)가 청정함을 명시하며, 인욕이 온갖 부수적 수행보다 훨씬 뛰어남을 비교ㆍ형량衡量합니다. 여기서 수행자는 삼매공덕三昧功德으로 고뇌를 대치하는데, 세 가지 업嶪의 청정과 뛰어난 모습을 비교ㆍ형량하여, 수행시 알아야 할 고뇌를 편안히 여기는 도道를 보여줍니다.

【절요】제2지에 지계고행이 제3지에 인욕덕행에 미치지 못함을 일컫습니다.

【보주】어찌하여 계행이 인욕만 못하다고 할까요? 진실로 말해, 계행이 높은 자는 세상을 얕보기 쉽고, 자기를 괴롭히는 자는 남한테 화내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인욕하는 자는 원수나 친지를 평등하게 보고, 괴로움과 즐거움에 치우침이 없다. 그래서 보시와 지계는 천상에 생겨나지만, 인욕은 바로 도에 들어갑니다.(入道) 어찌 미칠 수 있겠습니까?

 

3) 다음으로?能行忍者, 乃可名爲有力大人?은 진여관청정眞如觀淸淨을 설하여 안락한 도(安樂道)를 명시하고, 관조 지혜를 갖춘 대장부 위력(觀智大人力)을 성취함을 뜻합니다.

【절요】남이 자신을 침범해 와도 잘잘못을 따지지 않으면, 세간(유교)에서 군자라 칭송합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 인내를 행하면 모두 대인이라 부릅니다.

【보주】3인忍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1. 고행인苦行忍 2. 생인生忍 3. 제1의인第一義忍인데, 지금 여기선 2에 근거합니다.

다른 하나는 1. 원한과 해침을 견디는 인내(耐怨害忍) 2. 편안히 받아들이는 인내(安受忍) 3. 관찰하는 인내(觀察忍)인데, 지금 여기선 첫째 인욕에 근거합니다.

힘 있는 대인(有力大人)이란, 범부는 남을 이기는 걸 힘이라고 여기는데, 보살은 남한테 양보하는 걸 힘으로 여깁니다. 혈기의 힘은 소인이고, 도덕의 힘이 대인입니다.(凡夫以勝人爲力, 菩薩以讓人爲力. 血氣之力爲小人, 道德之力爲大人也.)

 

4) 또 경에서?若其不能歡喜忍受?내지?智慧人也?는, 丈夫의 위력을 성취하지 못한 자는 지혜관智慧觀이 없음을 명시하고, 서로 어긋남을 통해 알아야 할 뛰어남을 드러냅니다. 이중?不歡喜?는 관조에 들어갈 믿음이 없음(無信入觀)을 나타내고,?惡罵之毒?은 무생법문無生法門 모습 안에서 법대로 받지 않음(不如法受)을 나타내며,?甘露?는 무생법문無生法門 자체의 모습을 비슷하게 비유한 것입니다. 여기서?道?는 지혜 자체를 나타냅니다.

【절요】?甘露?는 모든 천상세계에 불로장생 묘약입니다. 인력忍力이 일단 이루어지면, 법신을 이롭게 더하고 지혜생명(慧命)을 길게 늘입니다. 그래서 악한 모욕을 참고 받아들이는 걸 감로 마심에 비유합니다. 저들이 모욕하지 않는다면, 내 인욕이 어찌 드러날 수 있겠습니까? 돼지가 황금 산을 들이받는다는 비유에 깊은 뜻을 음미할 만합니다. 진실로 그러하지 못하다면, 도를 증명하는 지혜(證道智慧)가 없으니, 이를 어리석은 범부라고 부릅니다.

【보주】돼지가 황금 산을 들이받을수록, 황금은 더욱 눈부시게 빛나고; 숫돌에 칼날을 갈수록, 칼날은 더욱 날카로워집니다. 영가永嘉가“비방과 헐뜯음으로 원한과 친함이 일지 않는다면, 어떻게 남이 없는 자비로운 인내력이 드러나겠는가?(不因謗訕起寃親, 何表無生慈忍力?)?라고 읊은 게송이 이것입니다.

 

5) 또 經에서?所以者何?이하는 허물과 환난을 항상 방호하라고 설합니다. 이중,?諸善法?은 스스로 이롭게 하는 지혜 모습(自利智慧相)이고,?好名聞?은 남을 이롭게 하는 선량한 법(利他善法)의 명칭(명예)공덕이며,?人不喜見?은 자신이나 남이나 세상에 즐거운 과보가 없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防護?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자신의 선량함을 보호하는 법(護自善法)은 방화防火와 비슷한 모습으로 비유합니다.

둘째, 남을 이롭게 보호하는 공덕(護利他功德)은 도적 방비와 비슷한 모습으로 비유합니다.

【절요】?所以者何?는 위 내용을 징험(증명)하려 아래서 풀이함을 나타냅니다.?선을 부순다(破善)?함은,《화엄경》에서“한 생각 성내는 마음이 일면, 백만 장애의 문이 활짝 열린다.(一念瞋心起, 百萬障門開.)?고 설한 뜻입니다.

 

6) 다음으로?白衣受欲, 非行道人, 無法自制, 瞋猶可恕?는, 어긋나기도 하고 순응하기도 하는 세간공덕世閒功德의 법으로 살아가는(受用) 중생 처지에서는, 성냄도 궁극(畢竟)에 완전히 틀리지는 않다는 뜻입니다. 여기서?無法?은 자기 번뇌를 대치할 희고 깨끗한 법(白淨法)이 없음을 뜻합니다.

【절요】서恕란 성류聲類에 보면?마음으로 사물을 헤아린다(以心度物).?고 풀이합니다. 이미 오욕五欲을 받아 붙잡고, 게다가 다시 이를 대치對治할 희고 깨끗한 법(白淨法)이 없으니, 범부는 화를 낼 수 있다고 봐줄 만합니다. 그러나 출가자는 이와 정반대니, 화를 내서는 안 됩니다.

【보주】?백의白衣?는 욕계에 여섯 천상(六欲天)까지 통틀어 말합니다. 그 위에 세계는 성냄이 없는데, 그래서 비구는 삼계三界를 벗어나려고 뜻을 세웁니다. 하물며 어찌하여 스스로 백의와 똑같이 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이와 정반대?라고 말합니다.

 

7) 그리고?出家行道, 無欲之人, 而懷瞋恚, 甚不可也.?는 출세간도出世閒道를 가리키는데, 세간에서나 살아가며 쓰는(受用) 두 법은 수행자 본분에 완전히 어긋나므로, 본받아서는 안 됨을 강조합니다.

【보주】욕망이 있는 사람은, 욕망이 순순히 이루어지면 교만하고 방자해져 성을 내고, 욕망이 어그러지면 분하고 원망하여 화를 냅니다. 헌데 욕망이 없는 수행자가 화를 내면 안 되기에,?甚不可也’라고 강조합니다. 하물며 출가자는 이를 다스릴 대치법도 있지 않습니까?

 

8) 나머지?譬如淸冷雲中, 霹靂起火, 非所應也.?는, 수도자 본분에서 있어서는 안 될 모습을 뚜렷이 나타내는 상징 비유법입니다.

【절요】맑고 차가운 구름(淸冷雲)은 수행자가 욕심 없음을 비유하고, 벽력霹靂은 진에심을 품는 걸 비유합니다. 곽박郭璞은 우레(雷)가 급하고 격렬하게 치는 게?霹靂?이라고 말합니다.

【해설】이 문단은 여섯 토막으로 나뉩니다.

첫째 토막은, 인욕하는 경지를 들되, 무거운 경우로써 가벼운 경우를 당연히 포함하는 논법論法입니다. 팔다리가 갈기갈기 찢기는 것도 오히려 참거늘, 하물며 그밖에 온갖 역경이야 어찌 개의하겠습니까?

둘째 토막은, 감내 인욕하는 모습을 곧바로 보이신 것입니다. ?화내거나 원한 품지 않으면’몸과 뜻이 청정해지고,?거칠고 나쁜 말을 내뱉지 않으면’입(구업)이 청정해집니다.

셋째 토막은, 참지 못하는 손실損失을 밝히신 것입니다. 스스로 도업에 방해가 되면 스스로 이롭게 할 수 없으며, 공덕의 이익을 잃으면 남을 이롭게 할 수 없습니다. 성내는 마음이 한번 치밀면 두 가지 이익이 동시에 사라져버리니, 함부로 할 수 없음은 지극히 분명합니다.

넷째 토막은, 인욕의 훌륭한 위력을 지극히 찬탄하여 수행을 권장하신 것입니다. 무릇 계를 지니는(持戒) 자라도, 반드시 모욕을 참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허나 모욕을 참는 자라면, 결코 계를 지니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6바라밀(六度) 중에 지계가 둘째고 인욕은 셋째인데, 전자는 후자까지 겸(포함)하지 않지만, 후자는 반드시 전자를 갖추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마음으로 계를 지니면, 그 과보는 단지 인간과 천상에 있을 따름이지만;?나?가 없는 마음으로 인욕을 행하면, 곧 세간을 벗어나는 큰 도업을 이루게 됩니다. 누가 나를 침범해 와도 따지지 않고 내버려 두면, 비유컨대 광활한 바다와 텅 빈 하늘이 솔개 날아오르고 물고기 팔딱 뜀을 그대로 자연에 맡기듯, 저절로 평화롭습니다. 그래서 도력 있는 큰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다섯째 토막은, 참지 못하는 허물을 거듭 밝혀 수행자를 훈계하신 것입니다.?감로甘露?는 죽지 않게 하는 약입니다. 남이 포악한 모욕과 욕설로 내 인내력(인력)을 성취함은, 비유하자면 마치 멧돼지들이 황금 산을 들이받을수록 금은 더욱 번쩍번쩍 빛나고, 숫돌에 훌륭한 칼을 갈아댈수록 칼날이 더욱 날카로워지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래서 가리歌利왕이나 제바달다가 모두 석가모니의 진짜 선지식이라고 한답니다. 가령 포악한 모욕이나 욕설을 감로수로 여기지 못하고, 기쁜 마음으로 참고 받아들일 수 없다면, 이는 도를 듣지 못한 어리석은 자일 따름입니다. 더구나 한 생각 분노하는 마음이 치밀면, 백만 마장에 문이 일제히 활짝 열리고, 온갖 착한 법을 모조리 쳐부수게 되니, 어떻게 스스로 이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좋은 명성과 소문을 망가뜨리게 되는데, 어떻게 남을 이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금생에 두 가지 이로운 원인이 없어지고, 내생에 두 가지 이로운 과보가 사라지니, 과연 누가 보고 기뻐하겠습니까? 그래서 스스로 이롭게 하는 착한 법을 잘 방호하려면, 마땅히 성냄의 불을 잘 막아야 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공덕을 잘 방호하려면, 마땅히 성냄의 도적을 잘 막아야 합니다.

여섯째 토막은, 양보 어법을 써서 결코 해서는 안 됨을 거듭 강조하신 것입니다. 인간 세상부터 욕계 여섯 천상까지는 도에 들어가지 못한 자를 모두?백의白衣?라고 부릅니다.

이들 백의 범부중생은 두 가지 허물이 있습니다.

첫째, 애욕을 즐기는데, 애욕은 성냄(진에)과 서로 안팎으로 표리관계를 이룹니다.

둘째, 도를 닦지 않아서, 마음을 다스릴 착한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성을 내더라도, 오히려 용서할 만하다고 합니다. 이른바?속인이 죄를 짓는 것은 본분 안에 속?하니, 몹시 책망할 수는 없습니다. 허나 집을 떠나 도를 닦는 수행자는 마치 맑고 차가운 구름처럼 청량할지니, 어떻게 뇌성벽력 불길 같은 분노와 진에의 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강의】한의학에서?한번 웃으면 한번 젊어지고, 한번 성내면 한번 늙어진다.(一笑一少, 一怒一老.)?는 말은 이미 널리 알려진 명언입니다. 일찍이 칸트(Kant)도 화를 내는 것은 남의 잘못을 가지고 자신을 징벌하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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