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 자체가 방대한 념불 법문이다
이 념불 법문은, 하늘이 만물을 고루 덮어 감싸듯, 땅이 만물을 두루 실어 떠받치듯, 어느 한 사람이나 어느 한 법도 그 안에 포함되지 않고 그 바깥으로 벗어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마치 한 부의 『화엄경(華嚴經)』 전편이 비록 오주사분(五周四分)31)의 차이는 있지만서도, ‘인과(因果)’ 두 글자로 빠짐없이 망라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오주사분(五周四分): 『화엄경』 전편의 법회를 신(信)·해(解)·행(行)·증(證)의 사분(四分)으로 나눔과 동시에, 소신인과주(所信因果周; 信分과 일치. 처음부터 비로자나품까지), 차별인과주(差別因果周; 解分 중 여래명호품부터 26품은 차별인에 해당하고, 佛不思議품부터 3품은 差別果에 해당), 평등인과주(平等因果周: 解分 중 보현행원품은 平等因에 해당하고, 여래출현품은 平等果에 해당), 성행인과주(成行因果周: 行分과 일치, 離世間品), 증입인과주(證入因果周: 證分과 일치, 入法界品)로 나누는 전체 구조분석법을 가리킴.]
즉 41위(位)의 원인 자리 마음[因心]32)은 어느 하나 궁극의 과보인 깨달음[果覺: 成佛]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 게 없으니, 그 41위에서 닦아가는 온갖 법문 수행이 어찌 모두 다 념불 법문 수행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화엄경』의 맨 끝에 이르면, 보현보살님께서 십대원왕(十大願王)을 가지고 모두 극락세계로 귀착(왕생)하도록 인도하시는 게 경전 전편의 대단원을 마무리 짓는 핵심 경혈(經穴)이지 않습니까?
[41위인심(位因心): 『화엄경』의 52위 가운데, 맨 위의 묘각(妙覺)은 궁극의 부처님 과위(果位)이고, 맨 처음 십신(十信)은 외범부(外凡夫) 자리로 제외하면,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의 삼현(三賢)과 십지(十地)와 등각(等覺)보살의 성위(聖位)를 합쳐 41위 원인 자리[因地: 佛果를 향해 수행하는 경지]가 됨.]
또 화엄(경)이란, 원인 자리 꽃[因華]이라 할 수 있는 온갖 수행[萬行]으로 궁극의 유일 차원인 부처님 과위[一乘佛果]를 장엄하게 성취하는 것일진대, 이러한 온갖 수행이 바로 념불 수행이 아니겠습니까?
화엄(경)에 보면, 바수밀녀(婆須密女)나 무염족왕(無厭足王)이나 승열바라문(勝熱婆羅門) 등과 같은 무량 법문이 갖추어져 있지만, 모두 비로자나 경계를 뚜렷이 보여 주고 있으니, 이러한 무량 법문도 또한 바로 념불 법문이 아니겠습니까?
『법화경(法華經)』으로 말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깨달아 들어가도록 열어보여 주고 계시는데, 이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유일한 념불 법문이 아니겠습니까?
『릉엄경(楞嚴經)』은, 맨 처음에 여래장 성품을 뚜렷이 내보이셨으니, 부처가 될 수 있는 진짜 원인을 밝히신 것이며; 그 다음으로 원만하게 통달[圓通]하는 방법들을 엄선하셨으니, 부처가 되는 미묘한 수행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 뒤 60가지 성인 자리[聖位]를 거쳐 보리(菩提)를 원만히 이루고 더 이상 얻을 게 없는 경지로 되돌아가나니, 바로 부처님 자리라는 궁극의 과보를 증득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등지면, 칠취(七趣: 륙도에 神仙을 덧보탠 중생계)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이것을 향해 나아가면, 다섯 악마[五魔]가 뒤흔들어 어지럽힌다는 것입니다.
맨 마지막엔 말씀하시길, 사람 몸이 네 가지 중죄나 열 가지 바라이[十婆羅夷]33)를 짓게 되면, 눈 깜박할 사이에 금방 여기 세계와 다른 세계의 아비지옥(阿鼻地獄)을 거칠 뿐만 아니라, 시방세계의 모든 무간(無間)지옥을 죄다 거치지 않는 게 없는데; 만약 일념(一念)으로 이 『릉엄경』의 법문을 말겁(末劫: 말세) 중의 배우지 못한 중생들한테 알리고 일깨워 준다면, 이 사람의 죄악과 업장은 한 생각에 깨끗이 소멸되고, 지옥에 들어가 고통 받을 원인이 안락국토(극락정토)에 왕생할 원인으로 변화한다고 합니다.
[사중(四重)과 십바라이(十波羅夷): 네 가지 중죄는 첫째 음욕, 둘째 살생, 셋째 도둑질, 넷째 망어(거짓말)이며, 여기에 술 마시는 것, 사부대중의 허물을 말하는 것, 자기 자랑하며 남을 헐뜯는 것, 자기 물건은 아끼며 남의 물건을 훼손하는 것, 성내는 마음으로 남의 참회를 받아주지 않는 것, 삼보를 비방하는 것을 합쳐 보살의 열 가지 중죄라고 부른다.]
그러니 이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유일한 념불 법문이 아니겠습니까?
부처님 한평생 설법 교화의 자취인 삼장십이부(三藏十二部) 경전을 통틀어서 종합해 보아도, 반자교(半字敎: 소승 성문)든 만자교(滿字敎: 대승보살)34)든 임기방편[權]이든 불변실상[實]이든35), 치우쳤든[偏] 원만하든[圓]36), 단박이든[頓] 점차든[漸] 간에37), 온갖 종류의 법문들이 어느 것 하나 유심(唯心)과 자성(自性)을 뚜렷이 보여 주면서 더할 나위 없는 미묘한 깨달음[無上妙覺]을 원만히 성취시켜 주지 않는 게 없으니, 부처님 가르침 전체가 그 자체로 하내 방대한 념불 법문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반만(半滿): 범서(梵書)의 반체자(半體字)를 소승에 비유하고 성자(成字)를 대승에 비유하여, 소승을 반자교(半字敎), 대승을 만자교(滿字敎)로 부르는 구분법.
[권실(權實): 일시적인 상황에 적합하여 잠시 사용했다가 그만두는 방편 법문을 권(權)이라 하고, 궁극 본체인 항상 불변의 법을 실(實)이라고 부른다. 천태종의 지관(止觀)에서는 권모(權謀)와 실록(實錄)이라고도 명명하는데, 조금 낯익은 표현으로는 권변(權變)·권의(權宜)와 실체(實體) 정도가 괜찮을 듯하다. 권실의 구분은 모든 법문과 종파에 두루 통용되지만, 특히 천태종에서 열 쌍과 세 종류의 권실을 상세히 체계화하여, 법문의 사리(事理)와 여래의 지혜 및 여래가 설한 교법(敎法) 등에 대해 권실을 따지는 이론이 가장 중요하다. 권법(權法)의 차별에 통달함이 여래의 권지(權智)이고, 그 실상(實相)의 일리(一理)에 통달함이 여래의 실지(實智)이다. 『금강경』에서 “일체 성현은 모두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나툰다(一切賢聖, 皆以無爲法而有差別).”는 구절이 바로 이러한 의미 맥락이다.
여래가 처음에 권지(權智)로써 삼승(三乘)의 교화를 펼친 것이 권교(權敎)이고, 나중에 일승(一乘)의 리치를 보인 것이 실교(實敎)이다. 천태종의 4교로 보면, 장교(藏敎), 통교(通敎), 별교(別敎)가 권교에 해당하고, 원교(圓敎)는 실교에 속한다. 또 화엄종의 5교로 보면, 돈교(頓敎) 이하가 모두 권교에 해당한다.
한편, 권(權)은 일찍이 중국 고대 유가에서, 평상의 원칙과 정도(正道)를 변화 융통하여, 특별하고 긴급한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임기응변의 방편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쓰였다. 예컨대, 『맹자(孟子)』에 따르면, 남녀간에는 수건조차 손으로 직접 주고 받지 않는[男女有別] 것이 원칙상의 예법(禮)이다. 하지만 형수가 물에 빠져 죽게 생긴 위기 상황에서는, 시동생이 손으로 직접 건져 살리는 것이 권(權)으로서, 인정(人情)과 천리(天理)에 모두 합당한 방편법이라고 강조된다. 권(權)의 상대어로는 보통 경(經)이 언급된다. 또 중국 철학상 본체[體]와 작용[用]이라는 범주도 실권(實權)에 상응한다.]
[편원(偏圓): 교리의 우열을 판단하여, 공(空)이나 가(假)나 중(中)에 편협하게 치우친 걸 편[偏(僻)], 원만하게 일체를 두루 갖춘 걸 원(圓)이라 구분하는데, 보통 소승을 편, 대승을 원이라고 부르나, 더 세분하면 대승 중에서도 화엄종이나 천태종에서 원교(圓敎)로 일컫는 것만 원이고 나머지는 편으로 구분하기도 함. ]
[돈교(頓敎)와 점교(漸敎)의 구분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부처의 설법 일대기를 획분하는 표준으로, 화엄종의 청량(淸凉) 대사가 화엄경을 돈교, 법화경을 점돈교(漸頓敎)라 부른 것이 이에 해당한다. 점오(漸悟) 보살은 먼저 소승을 익힌 뒤 마음을 크게 돌려 대승을 배우는데, 부처가 이러한 근기의 중생에게 설법한 경전은 모두 점교에 속한다. 녹야원 이하의 대소승 경전이 그것인데, 이 가운데 소승은 점교소승, 대승은 점교대승이라고 부른다. 돈오(頓悟)에 곧장 들어가는 보살은 곧바로 부처가 되기 위해 발심 수행하는데, 이러한 근기의 중생에게 설법한 대승경전이 돈교로 화엄경이 여기에 속한다. 법화경이나 녈반경은 이러한 기준에 따르면 점교에 포함된다. 천태종에서 화의(化儀)상 법화 이전의 경전을 돈교와 점교로 나누는 것은 같은 맥락이다.
둘째는 천태종 특유의 화법(化法)상 구분으로, 지자(智者) 대사가 지관(止觀)을 판별하는 다섯 쌍의 범주 가운데 하나인데, 법문의 본체를 논한 것이다. 원교(圓敎)는 단박에 족하고 단박에 지극한(頓足頓極) 성불의 법문이기 때문에 돈교라 부르고, 장교(藏敎), 통교(通敎), 별교(別敎)의 세 가지는 점차로 성불에 진입하는 법문이므로 점교라고 부른다. 따라서 천태종의 입장에서 보면, 법화경만이 순수히 원만한 법문으로 유일하게 돈교라고 부를 수 있다. 화엄경은 화의(化儀)상으로는 비록 돈교이지만, 화법(化法)상으로는 원교와 별교를 아울러 말하기 때문에, 돈교로서 점교를 겸한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화엄종의 관점에서는, 화엄경이 교화한 중생의 근기도 돈(頓)이고, 설한 법문도 또한 돈(頓)이기 때문에, 돈교 중의 돈교[頓頓]가 된다. 법화경은 설한 법문이 돈(頓)이지만, 교화한 근기가 점(漸)이기 때문에, 점교 중의 돈교[漸頓]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선종(禪宗)으로 말할 것 같으면, 달마(達摩) 대사가 서쪽에서 오셔서, 단지 “곧장 사람 마음을 가리켜 본래 성품을 본다[直指人心, 見性便了].”고만 말씀하셨으면 그만이었을 텐데, 그러지 않고 (본래 성품을 보고) 부처가 된다[成佛]고까지 말씀하신 걸 보아도, 선종의 법문도 또한 결국엔 념불 법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두 파[二派]의 다섯 종[五宗]에 걸쳐 쏟아진 천칠백 개 공안(公案: 話頭)은 모두 사람의 본래 근원 자리 마음 성품[本源心性]을 파헤쳐 일깨우면서, 우리가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청정법신(淸淨法身)을 뚜렷이 보여 주시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법신은 가로(공간)로나 세로(시간)로나 두루 꽉 차서, 존재하지 않는 곳과 때가 없으며, 참선하는 사람은 바로 이 법신이 어느 때건 항상 앞에 나타나고 어느 사물이건 도처에서 서로 들어맞도록 공안을 들고 참구해야 합니다. 그러한 참선(공안)이 어디에 있기에 념불 법문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부처님[佛]이란 한 글자를 나는 듣기 좋아하지 않으니, 몽둥이 한 방에 때려 죽여, 개새끼한테 처먹으라고 주리라[佛之一字, 吾不喜聞, 一棒打殺, 與狗子喫].”는 따위의 말들은, 사실은 모두 법신과 궁극의 최상 경지[法身向上]를 뚜렷이 보여 주는 훌륭하고 미묘한 방편 법문으로서, 이것이야말로 진짜 념불입니다.
이따금 무지(無知)한 무리들이 “선종 문중의 수행인들은 념불해서는 안 된다.”고들 말하는데, 이는 단지 념불이 뭔지 모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선종이 뭔지도 진짜로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단지 선종과 교종의 두 법문만 이러한 것이 아니라, 온 천하의 사농공상과 제자백가의 어느 누구라도, 설령 념불을 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심지어 부처님을 전혀 모르는 자라 할지라도, 그 역시 념불 법문 밖으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오고 가고 움직이고 고요히 있는 행위 하나하나가 모두 이 길에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일반 백성(중생)들은 날마다 쓰면서도 그런 줄을 모르는 것뿐입니다. 정말이지 옛 시에서 읊은 그대로입니다.
一氣不言含有象 외마디 말하지 않고도 삼라만상 머금었으니,
萬靈何處謝無私 만물 영장 어느 곳(누구)에 공평무사함 감사할까?
夾路桃華風雨後 좌우로 복숭아꽃 즐비한 길에 비바람 친 뒤
馬蹄無地避殘紅 어느 말발굽 땅에 진 붉은 꽃잎 밟지 않고 지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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