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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부처님을 생각할지라

철오선사어록. 철오선사어록 상

by 明鏡止水 淵靜老人 2023. 1. 8.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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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부처님을 생각할지라

 

 

첫째, 진실로 생사(륜회 해탈)를 위해 보리심을 냄은 도를 배우는 공통된 길이고[眞爲生死, 發菩提心, 是學道通途]

둘째, 깊은 믿음과 간절한 서원으로 부처님 명호를 지송함은 정토 법문의 올바른 으뜸 가르침이며[以深信願, 持佛名號, 爲淨土正宗]

셋째, 마음을 추스려 오롯이 한데 모아 념불함은 수행에 착수하는 좋은 방편이고[以攝心專注而念, 下手方便]

넷째, 지금 꿈틀거리고 있는 번뇌망상을 휘어잡아 다스림은 마음을 닦는 요긴한 급선무며[以折伏現行煩惱, 爲修心要務]

다섯째, 네 가지 무거운 계률을 굳세게 지니고 지킴은 도에 들어가는 근본 바탕이고[以堅持四重戒法, 爲入道根本]

여섯째, 온갖 고통과 시련을 이겨 나감은 도를 닦는 보조 연분이며[以種種苦行, 爲修道助緣]

일곱째, 한 마음 흐트러짐 없음은 정토 수행의 궁극 귀착점이고[以一心不亂, 爲淨行歸宿]

여덟째, 가지가지 신령스러운 서기(瑞氣)는 극락 왕생을 확인하는 뚜렷한 증거입니다[以種種靈瑞, 爲往生證驗].

이상 여덟 가지 일은 각자 간절하고 철저히 강구해야 마땅하며, 정토 법문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이를 몰라서는 아니 됩니다.

 

중생들이 수레바퀴처럼 돌고 도는 게 바로 륙도 륜회(六道輪廻)인데, 다른 다섯 군데의 중생들은 놀라고 두려워하거나 화나고 성내거나 또는 괴로워하거나 즐거워하느라 정신이 팔려, 진리[]를 향해 나아갈 겨를이 없습니다. 마음과 생각을 가다듬고 보리(菩提)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곳은, 오직 인간 세상[人道] 하나뿐입니다. 그렇지만 인간 몸을 잃는 자는 대지의 흙처럼 많고, 인간 몸을 얻는 이는 손톱 위의 티끌만큼 적습니다. 그러니 인간 몸을 어찌 쉽게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인간 세상의 중생들이 태어나서 자라고 늙어 죽을 때까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들은, 참으로 세속 홍진의 힘들고 고통스런 생사 륜회의 업장 인연이 아닌 게 없습니다. 그러니 부처님 가르침[佛法]을 어찌 쉽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 몸 받기도 이미 어렵거늘, 하물며 남자 몸을 받아 육근(六根)이 온전히 갖추어지기는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 듣기도 이미 어렵거늘, 하물며 아미타불 명호를 듣고 정토 법문을 알기는 또한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다행스럽게도 얻기 어려운 사람 몸을 얻었고, 또 얼마나 큰 복덕으로 듣기 어려운 부처님 가르침을 들었겠습니까? 그렇게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도 오히려 믿으려 하지 않거나, 믿어도 깊이 믿지 않는다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믿지 않는 자들이야 우선 놔두고, 설사 믿는다 할지라도 믿기만 하고 (극락 왕생을) 발원하지 않으면 믿지 않는 것과 같으며, 발원만 하고 실제 념불 수행이 없으면 발원하지 않는 것과 같으며, 또 념불 수행을 하더라도 용맹스럽지 않으면 념불 수행을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념불 수행이 용맹스럽지 못한 까닭은 발원이 간절하지 않기 때문이며, 발원이 간절하지 못한 까닭은 믿음이 진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진실한 믿음을 내기가 그렇게 어렵습니다. 믿음이 진실하다면 발원은 저절로 간절해질 수 있으며, 발원이 간절하다면 념불 수행은 저절로 용맹스러워질 것입니다.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에다 용맹스러운 수행력을 덧보탠다면, 틀림없이 극락정토에 왕생할 것이고, 틀림없이 아미타불을 친견할 것이며, 틀림없이 세 가지 불퇴전[三不退轉]을 증득할 것이고, 틀림없이 그 다음 생에 바로 부처님이 되는 후보 자리에 오를 것입니다.

일단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만 한다면, 시작도 없는 무수한 겁() 동안 지어온 생사 륜회의 업장 뿌리가 이로 말미암아 영원히 송두리째 뽑혀지며; 또 그 다음 생에 바로 부처님이 되는 후보 자리에 오르기만 한다면, 지극히 존귀하고 위없이 미묘한 깨달음[至極尊貴無上妙覺]도 곧장 원만히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한 생각 진실한 믿음[一念眞信]과 관련된 일이 어찌 하찮다 하겠습니까? 진실로 오랜 세월 동안 선행 공덕의 뿌리를 심고 숙세의 인연과 근기가 깊고 두터워서, 진리를 가로막는 연분이 얇고 생사 륜회의 업장이 가벼운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들이 무량겁 동안 죽 지어온 업력(業力)의 무게나 선근(善根)의 깊이는 모두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업력은 마음으로 되돌려 바꿀 수 있고, 선근은 사람이 북돋아 기르기에 달렸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가르침을 펼치는 이는 훌륭하면서도 교묘한 방편으로 간절히 일깨워 주지 않으면 안 되고, 진리를 배우는 자는 혼신의 힘을 다해 분발하여 용맹스럽게 곧장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단지 한 마디 말만 귀에 들어오고 한 찰나 생각만 마음에 움직여도, 모두 업력을 되돌려 바꿀 수가 있고, 또한 선근을 북돋아 기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비록 온갖 요긴하고 간절한 일깨움을 듣고도 한 마디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거나, 또는 비록 온갖 거슬리거나 순조로운 경계를 당하면서도 결코 한 생각도 분발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면, 이는 정말로 업력이 몹시 깊고도 무거운 자이고, 진짜로 선근이 아주 가볍고 드문 자이니, 이러한 사람은 참으로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지니고 있는 한 생각 심성[一念心性]은 본디 부처님과 똑같은 한 몸[同體]인데, 부처님은 이미 오래 전에 깨달으셨고, 우리는 아직도 헤매고 있는 게 다를 뿐입니다. 부처님께서 비록 오래 전에 이미 깨달으셨지만 조금도 불어난 게 없으며, 우리가 비록 아직도 헤매고 있지만 또한 조금도 줄어든 게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비록 조금도 불어난 게 없지만, 본래 성품에 순응하신 까닭에 크나큰 진리의 즐거움[法樂]을 누리시며; 우리는 비록 조금도 줄어든 게 없지만, 본래 성품을 등진 까닭에 지극히 무거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와 한 몸이신 심성 가운데서 비록 진리의 즐거움을 누리시지만, 중생과 한 몸이라는 대비심[同體大悲]과 인연 없이도 베푸신다는 대자심[無緣大慈]으로, 생각생각마다 우리를 기억하고 염려하시며, 생각생각마다 우리를 거두어 감화시켜 주십니다.

반면 우리는 부처님과 한 몸인 심성 가운데서 비록 온갖 고통을 받으면서도, 부처님께 우러러 구할 줄도 모르며, 부처님을 기억하고 생각할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다만 오직 바깥 사물 경계에 정신을 팔면서 감정 내키는 대로 죄업을 지어 왔습니다. 시작도 없는 무량겁 동안 오역십악(五逆十惡)을 비롯한 온갖 죄업을 안 지은 게 어디 있으며, 삼도팔난(三途八難)을 포함한 온갖 고통을 안 받은 게 무엇이겠습니까? 말하자니 부끄럽기 짝이 없고, 생각만 해도 두렵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도 가령 지금 부처님 생각을 하지 않고, 예전처럼 온갖 죄업을 짓는 데 골몰하며, 예전처럼 온갖 고통을 당하는 데 파묻혀 있다면, 정말 부끄럽지 않고 정말 두렵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부처님께서 대자대비심으로 생각생각마다 우리를 기억하고 염려하시며 거두어 교화하심을 알았다면, 우리는 이제 부처님 은혜에 몹시 감격하여서라도 마땅히 념불해야 합니다. 과거 무량겁 동안 줄곧 온갖 억울한 고통을 당해 왔으므로, 그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마땅히 념불해야 합니다.

이미 지은 죄업도 어찌할 수가 없는데, 앞으로도 죄업을 더 이상 지을 수 있겠습니까?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續愧心]이 들기 때문에라도 마땅히 념불해야 합니다. 부처님과 한 몸인 심성을 본래 가지고 있다면, 지금인들 어찌 없겠습니까? 다만 깨닫고 증명하지 못할 따름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심성을 깨닫기 위해서라도 마땅히 념불해야 합니다.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 념불한다면 념불이 반드시 간절해질 것이며,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으로 념불한다면 념불이 반드시 간절해질 것이며, 고통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념불한다면 념불이 반드시 간절해질 것이며, 부처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념불한다면 념불이 반드시 간절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念佛]하지 않아도, 부처님께서는 오히려 우리를 생각하시거늘; 우리가 부처님을 간절히 생각한다면, 부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더욱 더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대세지보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께서 중생을 불쌍히 생각하심은,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식이 만약 달아난다면, 비록 어머니가 아무리 생각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만약 어머니가 자식 생각하듯이 자식이 어머니를 생각한다면, 어머니와 자식은 세세생생 서로 멀리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만약 중생이 마음으로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부처님을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이나 미래에 반드시 부처님을 친견하고 부처님과 멀리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어떤 방편도 빌릴 필요가 없이 저절로 마음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이는 (수릉엄경 圓通章에서) 대세지보살님께서 몸소 증명하고 실제로 도달한 경계를 간과 쓸개까지 꺼내 보이듯이 허심탄회하게 고백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지금 부처님을 생각[念佛]하면, 반드시 부처님을 뵈올 수 있으며; 한번 부처님을 뵈오면, 곧 모든 고통을 벗어나고 깨달음도 기약할 수 있습니다. 과연 깨닫기만 한다면, 지금까지의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단번에 깨끗이 씻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부처님을 생각[念佛]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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