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불 염송 않고 또 누굴 염송할거나
모든 중생은 본래 부처님이신지라, 진실한 마음은 본디 있고 허망한 성품은 원래 텅 비었으며, 일체의 착한 법이 본래 성품에 저절로 갖추어져 있습니다. 다만 오래도록 미혹되고 오염된 연분에 휩쓸려 왔기에, 원래 텅 빈 허망한 성품을 끊지 못하고, 본디 있는 진실한 마음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착한 법이 본디 갖추어져 있는데도 닦지 아니하고, 부처님이 본디 우리 자신인데도 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원래 텅 빈 허망한 성품을 끊고 본디 있는 진실한 마음을 증명하며 본디 갖추어진 착한 법을 닦아 본래 자신인 부처님이 되기 위하여 깨달음의 청정한 연분을 따르려는 사람은, 아주 곧고 재빠르면서도 아주 통쾌하며 지극히 원만하고 곧장 단박에 성취하는 길(방법)을 찾게 마련인데, 그 방법으로는 ‘나무 아미타불’ 명호를 지송하며 부처님을 생각하는 지명념불(持名念佛) 수행만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념불하는 주체인 마음[能念之心]은 본디 온전한 진실이 통째로 허망이 되었고[全眞成妄], 따라서 온전한 허망 그 자체가 곧바로 진실이며[全妄卽眞], 념불하는 대상(목표)인 부처님[所念之佛]도 또한 본디 온전한 덕성 그대로 명호를 붙이셨고[全德立名], 따라서 온전한 명호 그 자체가 곧바로 부처님 덕성이시기[全名卽德] 때문입니다.
념불하는 주체인 (중생의) 마음 밖에 따로 념불의 대상인 부처님이 계시는 것도 아니고, 거꾸로 념불의 목표인 부처님 밖에 따로 념불하는 주체인 (중생의)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체와 객체(대상) 둘 다 잊어버리고 마음과 부처님이 한결같아집니다.
그리하여 생각생각마다 다섯 근본번뇌[五住煩惱]38) 를 원만히 조복시키고 완전히 끊으며, 세 가지 잡다한 오염된 장애[三雜染障]39)를 완전히 되돌려 원만히 소멸시키며, 오음(五陰)40)을 완전히 깨뜨리고, 다섯 혼탁[五濁]41)을 원만히 초월하며, 네 국토[四土]42)를 원만히 정화시키고, 세 몸[三身]43)을 원만히 생각하며, 온갖 덕행[萬行]을 원만히 닦아, 본래 지닌 진리를 원만히 증득하고, 위없이 미묘한 깨달음[無上妙覺]을 원만히 성취하는 것입니다.
[다섯 근본 번뇌[五住煩惱]: 보통 ‘오주지(五住地)’라 부르는데, 온갖 미세한 지엽번뇌를 낳는 뿌리 번뇌라는 뜻에서 ‘주지(住地)’라고 일컬음. ① 견일처주지(見一處住地): 삼계(三界)의 보는 미혹[見惑]으로, 진리를 보는[見道] 단계에 들어갈 때 한꺼번에 끊어짐. ② 욕애주지(欲愛住地): 욕계의 번뇌 가운데 견혹(見惑)과 무명(無明)을 제외한 생각하는 미혹[思惑]으로, 애착의 허물이 가장 중대하기 때문에 ‘애(愛)’자를 대표로 거명함. ③ 색애주지(色愛住地)와 ④ 유애주지(有愛住地)는 각각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의 번뇌 가운데 견혹(見惑)과 무명(無明)을 제외한 사혹(思惑)으로, 역시 애착의 허물이 가장 중대하기에 ‘애(愛)’자를 대표로 거명함. ⑤ 무명주지(無明住地): 삼계(三界)의 모든 무명으로, 모든 번뇌의 근본이기에 별도로 독립시킴.]
[세 가지 잡다한 오염된 장애[三雜染障]: ‘장(障)’이란 ‘번뇌’의 다른 명칭으로, 부처님의 거룩한 진리[聖道]를 가로막고 착한 마음을 해치기 때문에 ‘장’애라고 부르는데, ① 탐욕·성냄·어리석음 등과 같은 미혹의 번뇌장(煩惱障 또는 惑障), ② 오역(五逆)·십악(十惡)과 같은 죄업의 업장(業障), ③ 지옥·아귀·축생과 같은 고통스런 과보의 보장(報障)을 가리킴. 이 밖에 아집(我執)인 번뇌장과 법집(法執)인 지장(또는 所知障)의 이장(二障)이나, 번뇌장과 해탈(滅盡定의 다른 이름)장의 이장(二障), 또는 위의 삼장(三障)에 견장(見障, 邪見)을 덧보탠 사장(四障)이나, 번뇌장·업장·생장(生障)·법장(法障)·소지장(所知障)의 오장(五障) 등의 구분이 있음.]
[오음(五陰): 오온(五蘊)이라고도 하는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다섯 무더기.]
[다섯 혼탁[五濁]: 겁탁(劫濁)·견탁(見濁)·번뇌탁(煩惱濁)·중생탁(衆生濁)·명탁(命濁)으로, 사바 고해를 가리킬 때 오탁악세(五濁惡]
[네 국토[四土]: 천태종에서 세운 네 불국토. ① 범부 중생과 성문·연각 등 성현이 함께 거처하는 범성동거사(凡聖同居士), ② 견혹(見惑)과 사혹(思惑)을 끊고 삼계의 생사 륜회를 벗어난 사람이 거처하는 방편유절토(方便有節土), ③ 그 위에 순전히 보살만 거처하는 실보무장애토(實報無障巫土), ④ 법신(法身)이 상주하는 상적광토(常寂光土).]
[세 몸[三身]: 천태종에서는 법신(法身)·보신(報身)·응신(應身), 법상종(法相宗)에서는 자성신(自性身)·수용신(受用身)·변화신(變化身), 『최승왕경(最勝王經)』에서는 법신(法身)·보신(報身)·응신(應身)으로 각각 나누는데, 대승과 소승에 공통되는 일반 구분은 법신(法身)·보신(報身)·응신(應身)임. 이밖에 천태종에서 부처님의 색신(色身)·법문신(法門身)·실상신(實相身)의 삼신(三身)을 일컫기도 함.]
한 생각이 이와 같을 뿐만 아니라, 생각생각마다 모두 그러합니다. 단지 생각생각마다 그렇게 죽 이어진다면[念念相續], 조복시켜 끊어 버리고 닦아 증명함에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온전한 부처님의 마음[全佛之心]으로 온전한 마음의 부처님[全心之佛]을 생각하면, 진실로 자기 마음의 과보 자리에 계시는 부처님[自心果佛]께서 백퍼센트 온전한 공덕과 위신력으로 은밀한 가운데 뚜렷한 가피를 주실 것입니다.
‘나무 아미타불’ 한 구절의 부처님 명호에 다른 잡스런 연분(망상)만 끼어들지 않는다면, 단 열 번의 념불로도 공덕이 성취되어, 여러 겁(동안의 수행)을 단박에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념불의 리치도 믿지 않는다면 진짜로 나무나 돌과 같으며, 이러한 념불의 방법을 내버리고 다른 수행을 하는 사람은 미치광이가 아니면 바보 천치일 것이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시방세계에 모두 불국정토가 있는데, 어찌하여 오로지 서방 극락정토만을 찬탄하며 거기에 왕생하길 발원하여야 하겠습니까?
이는 일반 인간 스승의 뜻이 아닙니다. 바로 부처님께서 황금 입으로 진실한 말씀[金口誠言]을 설하시어 분명히 가리켜 주셨기 때문이며, 대승의 현교(顯敎)나 밀교(密敎)의 여러 경전에서 한결같이 귀결되는 궁극 목표이기 때문이며, 처음 마음을 낸 사람한테도 오롯이 한 경지에 정신 집중하여 삼매에 쉽게 이르게 하기 때문이며, 아미타부처님의 48대 서원을 연분으로 삼기에 그 연분이 강력한 때문이며, 열 번의 념불만으로도 원인이 되기에 그 원인이 수승한 때문이며, 부처님과 중생이 서로 연분이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사바세계의 중생들은 승가나 속가나, 남자나 여자나, 노인이나 어린애나, 착한 이나 악한 이나 할 것 없이, 아주 순조롭거나 몹시 거역스럽거나 매우 즐겁거나 극히 고통스런 상황에 당할 때면, 대부분은 자신도 모르게 념불 소리가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와 입 밖으로 흘러나오곤 합니다.
그런데 념불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무릇 념불을 하면 반드시 아미타불을 염송하게 됩니다. 이는 누가 시켜서 그러하겠습니까? 이는 대체로 우리 중생들이 오래도록 부처님의 교화를 받고 오래도록 부처님 은혜를 입어서, 부처님과 인연이 아주 깊기 때문입니다.
『아미타경』은 구마라집이 최초로 번역하여, 동림사(東林寺)의 혜원(慧遠) 조사께서 곧바로 123인과 함께 념불결사를 창설하여 념불하였는데, 123인이 차례로 입적하시면서 림종에 모두 상서로운 감응을 남기셨습니다. 앵무새나 뻐꾹새도 념불하면 죽을 때 모두 상서로운 모습을 보이는데, 이것이야말로 우리 중생이 부처님과 인연이 깊지 않다면 그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 『무량수경』에 이르시기를, “미래 세계에 경전과 불도(佛道)가 모두 사라질 때, 내가 원력으로 특별히 이 경전을 백 년 동안 더 세상에 머물게 하여, 인연 있는 중생들을 널리 제도하겠노라.”고 하셨습니다.
무릇 다른 경전은 남기지 않고 특별히 이 경전만 남기신다는 뜻은, 바로 이 념불 법문이 착수하기 쉬우면서 모든 근기의 중생들을 두루 포섭하고, 진리에 들어가기에 탄탄하면서 그 효과가 아주 빠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시대가 후대로 내려올수록 이 념불 법문이 더욱 중생들 근기에 잘 들어맞는 줄 알아야 합니다.
세간 사람들은 화급한 재난이나 고통을 당할 때면 으레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짖고, 천지신명을 찾곤 합니다. 그러나 이는 부모님이나 천왕(天王)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생사 륜회 속에 있어서 우리를 생사 륜회에서 구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저 다급한 김에 울부짖는 외침일 따름입니다.
삼승(三乘)의 성인들은 비록 생사 륜회는 벗어나셨지만, 대자비심이 없어 우리한테 별 도움이 없으며; 여러 보살님들은 비록 대자비심이 있지만, 각자 마음에 증득한 정도가 유한하여, 모든 중생의 소원을 다 채워줄 만큼 두루 이익을 베푸실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시방세계의 여러 부처님들은 비록 모두 궁극의 진리세계[法界]를 증득하셨지만, 우리 중생이 부처님을 감동시키기가 쉽지 않고, 설사 정성이 지극하여 감응이 나타날지라도, 잠시 고통을 떠날 뿐이지, 결코 궁극의 해탈은 아닙니다.
오직 아미타불만이 단지 한번 뵙기만 하면 곧장 생사 륜회를 벗어나 고통의 뿌리를 영원히 끊어버리게 됩니다. 오직 이 ‘나무 아미타불’만이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염송해야 할 명호입니다. 그래서 제가 일찍이 “세간과 출세간을 두루 사유해 보아도, 아미타불을 염송 않고 또 누굴 염송할거나?[世間出世思惟鸚, 不念彌陀更念誰]”라고 읊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념불은 어렵지 않으나, 변덕없이 꾸준히 지속하기가 어렵습니다. 정말로 쇠를 녹여 주물을 만들고 강철을 두들겨 연장을 만들 듯이, 혼연일체로 한 생각만 꾸준히 견지할 수 있다면, 마치 한 사람이 만 명을 대적하듯이, 천 분의 성인이 설득해도 가로막지 못하고, 만 마리의 소가 끌어당겨도 고개 돌리지 아니하고, 오로지 념불만 계속하면, 반드시 감응이 상통할 것입니다.
만약 이와 같은 마음으로 념불하지 못하면서, 부처님 말씀이 영험하지 않고 부처님 마음은 감응시키기 어렵다고만 불평한다면, 이 어찌 될 말씀입니까? 단지 한 생각 감응이 통하기만 하면, 단박에 생사 륜회를 벗어나 곧장 불퇴전의 경지에 오르고 부처님 과보도 확고부동하게 이루게 될 텐데, 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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