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혼신의 힘을 다해 념불하는 일만 남았다
작은 것만 알고 큰 것은 모르며, 가까운 데만 보고 멀리는 못 보는 것이, 바로 보통 중생들의 평범한 식견입니다. 그래서 아미타부처님께서 우리 중생들한테 얼마나 큰 은덕을 베푸시는지를 중생들이 모릅니다. 아미타부처님께서는 무량겁 이전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한테, 죄악 세계에서 고통 받는 모든 중생들을 위해서 48가지 커다란 서원을 다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서원에 따라 아주 오랜 겁의 세월 동안 보살행을 닦으시면서, 금륜왕(金輪王)의 자리를 비롯하여 나라·성곽·처자식과 심지어는 자신의 머리·눈·뇌·골수에 이르기까지, 그 수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 내버리셨습니다. 이는 보살 만행 가운데 단지 안팎으로 버리는 재물 보시의 수행 한 가지만 예를 든 것일 따름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으시고, 사람들이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하시어 만행(萬行)을 원만히 닦아, 그 수행력과 공덕이 지극히 순수해지자, 마침내 장엄한 불국정토를 이루시고 스스로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한량없는 분신(分身)을 나토시어 온갖 방편으로 중생들을 맞아들이고 교화하여 그 극락국토에 왕생하도록 이끌고 계십니다. 그러한즉, 한 사람을 위하는 것처럼 뭇 중생한테도 마찬가지고, 또한 뭇 중생을 위하는 것처럼 한 사람한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뭇 중생의 관점에서 본다면,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 모두를 두루 위하십니다. 그러나 만약 한 사람으로 말한다면, 부처님께서는 오직 나 한 사람을 위하십니다. 중생들의 성품에 맞갖는 커다란 서원은 바로 나를 위해 세우신 것이고, 오랜 겁에 걸친 위대한 수행은 바로 나를 위해 닦으신 것이며, 네 가지 정토는 바로 나를 위해 청정하게 장엄해 놓으신 것이고, 세 몸[三身]은 바로 나를 위해 원만히 이루신 것이며, 나아가 하나하나 몸을 나토어 중생을 맞아 극락으로 이끄시고 도처에서 온갖 상서로운 감응을 뚜렷이 내보이시는 등, 모두가 한결같이 나를 위하신 것입니다.
내가 죄업을 지을 때마다 부처님께서는 나를 경고하고 일깨우시며, 내가 고통을 받을 때면 부처님께서 나를 건져올려 주시며, 내가 목숨을 바쳐 부처님 가르침에 귀명(歸命)할 때는 부처님께서 나를 따뜻이 맞아 감싸 주시며, 내가 수행하는 동안에는 나를 자비 가피로 보호해 주십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로 부처님께서 나를 위하시는 까닭은, 오직 내가 부처님을 생각[念佛]하길 바라시고, 내가 극락 왕생하길 바라시며, 내가 온갖 고통을 영원히 벗어나서 온갖 진리의 기쁨[法樂]을 맘껏 누리고 만끽하길 바라시며, 그래서 내가 이제는 부처님 가르침으로 일체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면서 마침내 다음 생에 부처님이 되는 일생보처(一生補處)의 자리에 오르길 기원하시는 것일 따름입니다.
오호라! 부처님의 깊은 은혜와 크나큰 공덕은 부모님께 비할 바가 결코 아니며, 비록 하늘과 땅이라 할지라도 부처님께 비유하기에는 오히려 턱없이 부족할 뿐입니다. 법문을 일깨움이 없다면 이러한 뜻을 어찌 알 것이며, 불경을 읽지 않으면 이러한 진리를 어찌 알겠습니까? 이제는 이러한 뜻과 리치를 잘 알았으니, 오직 혼신의 힘을 다해 정성껏 수행하고, 이 생명 다할 때까지 지성으로 귀의하면서, 목숨을 바쳐 부처님을 생각하며 념불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다시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모든 중생들은 날카롭거나 무딘 열 가지 차사(差使: 利鈍十使)44)한테 부림[使役]을 받아, 아주 오랜 겁의 세월 동안 생사 고해를 돌면서 커다란 고통과 번뇌를 당하고 있는데도,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으니 정말로 슬픈 일입니다.
[열 가지 차사[十使]: 사(使)란 번뇌(煩惱) 또는 미혹(迷惑)의 다른 명칭으로, 마치 차사(差使)가 백성을 부리거나[使役] 또는 죄인을 뒤쫓아 붙잡아 결박시키는 것처럼, 번뇌가 중생의 마음을 부리고 뒤쫓아 옴짝달싹 못하게 붙들어 맴으로써 삼계의 생사 륜회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결박시킨다는 상징적 비유로 붙여졌는데, 경론(經論) 상의 공식 개념은 아니라고 함. 오리사(五利使)와 오둔사(五鈍使)의 명칭은 천태종의 구분임.]
열 가지 차사[十使]가 무엇인 줄 아시오? 바로 신견(身見: 또는 我見)·변견(邊見)·사견(邪見)·견취견(見取見)45)·계(금)취견[戒(禁)取見]46)은 가볍고 날렵하게 발동하기 때문에 다섯 가지 날카로운 차사[五利使]라 부르고, 탐욕(貪欲)·진에(瞋迷: 성냄)·우치(愚癡: 또는 無明, 어리석음)·교만[慢]·의심[疑]은 날카로운 차사에 의해 생겨나는지라, 상대적으로 더디기 때문에 다섯 가지 무딘 차사[五鈍使]라고 부릅니다.
[견취견(見取見): 오견(五見 또는 五利使), 십사(十使)의 하나로, 비열한 견해나 하찮은 것을 아주 수승하고 청정하다고 집착하는 사견을 가리킴.]
[계(금)취견(戒(禁)取見): 예컨대 외도(外道) 중에서, 닭처럼 한 발로 서 있는 걸[鷄戒] 배운다든지 개처럼 똥을 먹는다[狗戒]든지 하는 것을, 죽은 뒤 천상에 생겨나는 인연이나 해탈의 도를 이루는 청정한 계률 수행으로 여기는 미신(迷信)이 많은데, 합리적인 계가 못 되는 것[邪戒]을 진실한 계로 잘못 아는 견해를 가리킴. 나아가 합리적이지 못한 보시(布施)나 고행(苦行)을 청정한 해탈의 인연 또는 도(道)로 잘못 생각하는 미신도 계(금)취견에 포함됨.]
이 십사(十使)를 우리 중생들은 많건 적건 각각 편중되게 지니고 있습니다. 이를 지닌 채 도를 닦는다면, 단지 사견과 번뇌를 더욱 키울 뿐, 수행에 상응하는 경지는 결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욕망을 끊기가 진실로 어렵듯이, 이 십사(十使)라는 근본 번뇌는 사성제(四聖諦) 아래로, 삼계(三界)의 구지(九地)47)를 죽 거치면서 88사(使)라는 견혹(見惑)과 81품(品)의 사혹(思惑)48)으로 번창합니다.
[구지(九地): 구유(九有)라고도 하는데, 욕계(欲界)의 ① 오취지(五趣地), 색계(色界)의 ② 이생희락지(離生喜樂地) ③ 정생희락지(定生喜樂地) ④ 이희묘락지(離喜妙樂地) ⑤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 무색계(無色界)의 ⑥ 공무변처지(空無邊處地) ⑦ 식무변처지(識無邊處地) ⑧ 무소유처지(無所有處地) ⑨ 비상비비상처지(非想非非想處地)를 가리킴.]
[견사혹(見思惑): 삼계 번뇌의 통칭. 견혹이란 리치를 따져 삿된 분별심으로 일으키는 아견·변견 등의 망견(妄見) 미혹을 가리키고, 사혹이란 세간의 사물을 헤아려 일으키는 탐·진·치 등의 미혹된 감정을 가리키는데, 이는 소승(小乘) 구사론(俱舍論)의 법상(法相)에 따른 구분임. 대승 유식론(大乘唯識論)의 법상(法相)에 따르면, 후천적 분별로 일어나는 번뇌와 알음알이의 장애를 견혹(見惑)이라고 하고, 선천(태생)적으로 일어나는 번뇌와 알음알이를 사혹(思惑)이라고 구분함. 이 두 미혹을 끊어야 삼계의 생사 륜회를 벗어나는 바, 견혹과 사혹의 차례로 점차 끊어가는데, 견혹을 끊는 단계가 견도(見道), 사혹을 끊는 단계가 수도(修道), 견사혹을 완전히 끊은 경지가 무학도(無學道)임.
견혹은 앞의 십사(十使: 미혹 번뇌)가 욕계·색계·무색계마다 고·집·멸·도의 사성제로 나뉘어 배속되는데, 욕계에는 고제(苦諦)에 10혹(惑) 전부 따르고, 집(集)과 멸(滅)에 신(身)·변(邊)·계(戒)를 제외한 7혹(惑)씩 따르며, 도(道)에 신(身)과 변(邊)을 제외한 8혹(惑)이 따르므로, 모두 32혹이 된다. 그리고 색계와 무색계에는 똑같이 고집멸도 아래에 욕계의 해당 혹수(惑數)에서 진(瞋)을 뺀 수만큼씩, 즉 고(苦)에 9혹, 집과 멸에 6혹, 도(道)에 7혹이 따라 각각 28혹씩 된다. 그래서 삼계의 미혹 수를 전부 합하면 88견혹(見惑)이 된다.
사혹(思惑)은 앞의 구지(九地 또는 九有)마다 각각 上上, 上中 … 下中, 下下의 9품씩으로 세분되어 모두 9×9=81품이 된다. 88견혹을 모두 끊으면 예류(預流: 수다원)과(果)가 되고, 초지(初地)의 1품~5품의 사혹을 끊으면 일래(一來: 사다함)향(向), 초지의 6품 사혹을 끊으면 일래(사다함)과, 욕계 초지의 나머지 3품을 끊으면 불환(不還: 아나함)과, 그리고 색계와 무색계 8지의 72품 사혹을 점차 끊어가는 과정이 아라한(不生)향, 다 끊으면 아라한과를 이루어 생사 륜회를 벗어난다.]
단지 보는 미혹[見惑]만 끊기도 너비가 40리나 되는 큰 강물 줄기를 끊기만큼 어려운데, 하물며 생각하는 미혹[思惑]까지 끊자면 오죽하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보고 생각하는 두 미혹[見思惑]이 터럭 끝만큼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 육신의 생사 륜회는 결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걸 일컬어 ‘위로 삼계를 벗어난다(曼出三界)’라 하는데, 몹시 어렵고도 또한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열 가지 미혹[十使]을 총칭하여 중생의 지견이라고 합니다. 옛 고승대덕께서 말씀하시기를, 중생의 지견은 모름지기 부처님의 지견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부처님 지견이란 바로 지금 당장 생각을 떠난 신령스런 지각[現前離念靈知]입니다.
그러나 이 신령스런 지각[靈知]이란 제 홀로 우뚝 설 수가 없으며, 반드시 인연 따라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 세계[佛界]의 인연에 따르지 않는다면, 바로 보살 이하 지옥까지의 아홉 중생 세계의 연기법(緣起法)에 따릅니다. 이 열 세계를 떠나서는 그 밖의 다른 연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세계의 연기를 따르고자 한다면, 믿음과 발원의 마음으로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는 것만한 게 없습니다. 다만 믿음은 독실한 게 중요하고, 발원은 간절한 게 중요하며, 명호 지송은 오롯한 마음과 근면한 실행이 중요합니다. 정말로 독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으로 오롯이 마음 집중해서 근면하게 부처님 명호를 꾸준히 지송한다면, 바로 이것이 부처님 지견으로 우리 지견을 삼는 것이며, 또한 바로 이것이 생각생각마다 부처님 지견으로 중생의 지견을 다스리는 게 됩니다.
열 가지 번뇌 미혹이 치열하게 타오르는 마음 가운데, 단지 믿음과 발원으로 부처님 명호 지송하는 마음 하나 던져 놓기만 한다면, 바로 중생 세계의 연기를 되돌려 부처님 세계의 연기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이것이 도를 닦는 법문 가운데서, 쇠를 손대어 금으로 바꾸는[點鐵成金] 지극히 오묘한 방법입니다. 아무 것도 필요없이 단지 맨몸으로 나서 기꺼이 떠맡기만 하면 됩니다. 오래오래 바꾸지 않고 념불을 지속하기만 하면, 황금 좌대도 앉아서 기다릴 수 있으며, 보배 련화가 머지 않아 영접하러 올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사바세계의 동거(同居: 성현과 범부가 함께 사는) 국토에서 저기 극락세계의 동거 정토로 왕생하는 지름길입니다. 이를 일컬어 ‘옆으로 삼계를 벗어난다(가로지른다)[橫出三界]’고 말하는데, 앞서 말한 위로 벗어나는[曼出] 수행법과 비교한다면, 그 얼마나 힘들지 않고 손
인과와 감응의 진리를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리요 (0) | 2023.01.10 |
---|---|
오직 부처님[唯佛]·마음[唯心]을 으뜸 종지로 삼는다 (0) | 2023.01.10 |
부처님의 가르침 자체가 방대한 념불 법문이다 (1) | 2023.01.08 |
마땅히 부처님을 생각할지라 (1) | 2023.01.08 |
아미타불 염송 않고 또 누굴 염송할거나 (0) | 2023.0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