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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엄(香嚴) 거사에 대한 답신

철오선사어록. 철오선사어록 하

by 明鏡止水 淵靜老人 2023. 1. 7.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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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 29일 존귀한 서신을 받고, 일체 그간 사정을 다 알게 되어 한없이 기쁘고 위안이 됩니다. 서신 안에 념불기도가 삼칠(21)일이 지나도록 아직껏 부처님 상호를 뵙지 못했습니다.”는 구절이 있습디다. 이처럼 간절히 마음 쓰고 용맹스럽게 수행 정진하시는 걸 보면, 이번 백일 기한 내에 반드시 불가사의한 큰 성취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수행하는 이 때는 어떤 효험을 기대하는 마음을 미리 간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마음을 간직하면 조급한 설레임만 증폭시켜 도리어 장애가 됩니다. 이는 수행 법문 가운데 아주 미세한 마음의 병폐인지라, 잘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모름지기 곧장 마음 밖에 부처가 없고 부처 밖에 마음이 없으며, 온 마음이 바로 부처이고 온 부처가 바로 마음이며, 한 생각이 앞에 나타나면 곧 한 생각이 상응하고, 생각생각마다 앞에 나타나면 곧 생각생각마다 상응한다[心外無佛, 佛外無心, 全心卽佛, 全佛卽心, 一念現前, 卽一念相應, 念念現前, 卽念念相應].”는 진리를 깊이 믿고 철저히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다만 이 생각이 늘상 바로 지금 앞에 나타나기만 하면, 이것이 바로 진실한 효험입니다. 이 생각을 떠나서 밖에서 따로 효험을 구한다면, 이것이 바로 중간에 끊김[間斷]이며, 곧 절실하지 않음이고, 바로 샛길로 빠지는 것입니다. 경전에 이 마음으로 부처가 되고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다[是心作佛, 是心是佛].”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를 일컬은 것입니다. 고루한 제 소견은 이러합니다만, 거사님의 생각은 어떠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장수(長水) 자예(子璿) 강사(講師)의 질문과 낭야(琅孟) 혜각(慧覺) 선사의 답변에 대해서인즉, 그 예봉(銳鋒)이 솔직하고 간단 명료하여 더 이상 사족(蛇足)을 달 수가 없습니다. 과연 이 문답에서 올바른 안목[正眼]이 확 트일 수 있다면, 낭야를 한눈에 깨뜨리고[看破] 장수를 한 손에 때려 눕힐[捉敗] 것이며, 릉엄경의 대의 요지를 거의 대부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이와 같다 할지라도, 바로 다른 세계를 향해 힘껏 내팽개쳐 버리고서, 스스로 일심으로 념불에 매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약 조그만 이해의 길이나 열겠다고 말씀하신다면, 더 이상 수고롭게 거론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시자록(柴紫錄)은 그 이름은 들은 지 오래되었으나, 아직 그 책을 본 적이 없어서, 근거 없이 함부로 판단 평가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절 안[寺中]은 요즘 유일하게 가원(嘉園) 거사가 20일 만에 더러 한 번씩 올 뿐, 그 밖의 다른 손님의 자취는 없습니다. 불혜(不慧: 지혜롭지 못한 이, 자기 겸칭)는 매일같이 여러 납자(衲子: 스님)들과 먼지나 휘날리며 경전을 담론하고, 그게 끝나면 향을 사르고 편안히 좌선에 듭니다. 더러 화엄경을 교정하기도 하고, 더러 정토진량(淨土津梁)을 검열하기도 하는데, 그 밖에 다른 일은 없습니다.

수릉엄경은 이미 6권까지 강론을 마쳤는데, 대략 다음 7월까지는 전부 강론을 원만히 마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생각하건대, 반년 안에 이 경전을 두 번 마치는 일도, 또한 우리 염부제 인생의 일대(一大) 통쾌한 일 같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줄 한 줄 따라가며 먹물 흔적이나 헤아린 것일 뿐, 한 글자도 새로 얻은 것은 없습니다. 답신 말미에 덧붙여 한바탕 웃음거리나 선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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