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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瑞一) 리 거사(李居士)한테 부치는 서신

철오선사어록. 철오선사어록 하

by 明鏡止水 淵靜老人 2023. 1. 7.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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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瑞一리 거사(李居士)한테 부치는 서신

 

 

여러 차례 서신이 왔음에도 한 번도 답장하지 못했는데, 현인(賢人)의 거울 같은 마음으로 비추어보고 저를 의심함 없이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현인께서 남쪽[南中]에서 힘을 다해 공무를 처리하면서, 마음을 다해 불법을 보호하고, 수행에 그침이나 쉼없이 중생을 은근히 권유하고 인도하신다고 듣고 있습니다. 이는 스스로 수행하며 남을 교화하여 둘 다 함께 이롭게 함이요, 세간법과 불법을 한꺼번에 나란히 수행함입니다. 더러 서신을 때때로 통하고, 더러는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을 통하여, 매번 소식을 보고 들을 적마다 한편으로는 위로가 되고 한편으로는 기쁩니다.

진리란 있지 않은 곳이 없음[道無不在]을 생각한다면, 어찌 조정과 재야의 구분이 있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수행 증득의 차원에서는 진실로 쉽고 어려움이 있게 마련입니다. 도 닦는 것[修道: 진리의 수행]을 적확히 논하자면 출가도 오히려 쉽지 않거늘, 하물며 재가 수행이 쉽겠습니까? 집에 거처함[居家]도 이미 어렵거늘, 하물며 조정 관직에 거처함[居官]은 오죽 어렵겠습니까? 그래서 홍진의 수고로움에 맞부딪쳐 부처님 일을 행하며[卽塵勞爲佛事] 뜨거운 번뇌를 승화시켜 맑고 서늘히 만드는[化熱惱作淸凉] 일은, 진실로 무생법인을 증득하고 불퇴전의 지위에 올라 여래의 방 안 깊숙이 들어선 다음 중생 제도를 위해 짐짓 권의(權宜) 방편으로 재관(宰官: 재상이나 관원)의 몸을 나툰 대승보살이 아니시라면, 끝내는 홍진의 인연에 점차 감염되어 구도의 신념[道念]이 날로 희미해짐을 피하지 못할까 저어합니다.

지금 현인께서 이 도에 신심이 계합(契合)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바로 번잡한 관직 생활에서도 용맹스럽고 간절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숙세의 선근(善根)의 힘이 아니라면, 그 무엇 때문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비록 그러하지만 그래도 모름지기 삼계가 편안치 아니하고[三界無安], 육신은 고뇌에 가득 찼으며[肉身苦惱], 생사 륜회의 길은 험난하고[生死路險], 사람 목숨은 덧없다[人命無常]는 사실을 통절히 명심해야 합니다. 다행히 부처님 법문 듣고 더욱이 믿는 마음까지 내었으니, 허깨비 경계나 허깨비 인연을 한눈에 단박 간파해 버리고, 부처님 마음과 부처님 수행을 맨몸으로 고스란히 떠맡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청정한 업은 닦을 수 있는 대로 최대한 닦아 나가면서, 벼슬자리는 놓을 수 있는 대로 곧장 놓아 버리십시오. 조금도 유보나 미련을 내지 말고, 잠시도 광음(光陰: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마십시오. 이번 한평생 할 일을 다하여 상품 련화에 피어나도록 힘써 기약합시다. 그래야 자신이 여러 생에 걸쳐 훈습해온 선근 원력과 우리 부처님께서 오랜 겁토록 호념해 주신 자비 은혜를 헛되이 저버리지 않으며, 한 생에 출세간의 용맹스런 대장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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