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행위의 적정성
무릇 염불 수행의 방법과 정도는, 각자의 역량에 따라 중용을 이루어야 마땅하오. 소리를 내어 낭송하든 소리없이 묵송하든, 또는 큰 소리로 염송하든 작은 소리로 염송하든, 모두 안 될 게 없소. 상황과 형편에 따라 수시로 적절한 방법을 택하면 되오. 어찌 꼭 줄곧 큰 소리로 질러 대어, 호흡이 곤란하고 원기가 손상되어 병을 얻을 필요가 있겠소?
물론 그렇게 큰 소리로 염불하다가 병을 얻는 것도, 알고 보면 사실 무량겁(劫) 이래로 쌓여 온 업력(業力)이 터져 나온 때문이오. 좀더 상세히 말하자면, 정도에 지나치게 염불에 정진한 공덕으로, 원래는 뒤늦게 나타날 과보가 마침내 앞당겨 현재의 과보로 닥치고, 또 무거운 과보가 가볍게 전환하여 나타나는 것이라오. 즉 그 병 하나로, 얼마나 무한한 겁 동안 삼악도를 윤회해야 할 죄악이 소멸하는지 알 수 없다오.
부처님의 위신력은 헤아릴 수 없고, 부처님의 은혜는 다 갚을 수 없소. 마땅히 아주 큰 행운과 경사를 만난 줄 알고 기뻐해야 하며, 또 커다란 부끄러움과 굳건하고 청정한 믿음을 내어야 할 것이오. 정토 염불 법문을 스스로 수행하면서 남에게도 권하고 감화시켜, 집안 식구 및 인연 있는 모든 중생이 다 함께 극락왕생한다면, 염불로 도진 질병과 부처님 은혜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오.
부처님을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수행하여 생사 해탈하려고 전념해야 하오. 그러나 또한 모름지기 자신의 분수와 능력에 따라 공덕도 함께 지어야 하오. 가령 근기가 뛰어나고 역량이 큰 사람이라야, 비로소 모든 것을 완전히 놓아버리고 철저하게 자기 수행에 골몰할 수 있소. 그러나 보통 중하근기의 일반 중생은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어지면, 마침내 나태와 무기력에 빠지기 쉽소. 그러면 스스로 자기를 이롭게 하는[自利] 수행도 진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남을 이롭게 하는[利他] 공덕도 완전히 밖으로 내팽개치게 되오. 그래서 결국 천하를 이롭게 한다고 할지라도, 제 몸의 터럭 하나 뽑으려 하지 않은, 양주(楊朱)의 극단 이기주의로 흐르게 되오.
[자전거는 일정 속도 이상으로 달리지 않으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제 무게에 겨워 옆으로 넘어진다. 아주 뛰어난 선수라야, 아주 느린 속도로 나아가거나 멈춘 상태에서도, 쓰러지지 않게 균형을 잡을 수 있다.
일찍이 맹자도 “일정한 일[恒産: 직업]이 없으면서 일정한 마음[恒心]을 지닐 수 있는 것(수행)은, 오직 선비(상근기)만이 가능하다. 일반 백성[民: 중하근기 중생] 같으면, 일정한 일이 없으면 곧 일정한 마음도 없어진다. 정말 일정한 마음이 없으면, 방탕하고 사악해져 못하는 짓(죄악)이 없게 된다. 죄악에 빠진 뒤 나중에 형벌로 다스리는 것은, 백성을 (속여) 그물질하는 것이다.”고 했다. 이는 불교 수행에서 가장 경계하는 무기공(無記空)이며, 요즘 말로는 관념적인 허무주의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자신을 이롭게 하는[自利] 수행과, 남을 이롭게 하는[利他] 공덕이, 서로 나란히 보완해야 하오. 다만 자신을 이롭게 하는 수행에 좀 더 치중하라는 뜻이오. 그렇다고 자신의 역량과 인연에 따라 남들에게도 정토 법문을 수행하도록 권장하는 교화 공덕을 완전히 그만두어서는 안 되오.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은 오직 대보살만이 자신의 사명으로 전담할 수 있소. 우리 중생이야 누가 감히 그런 거창한 말을 내뱉을 수 있겠소? 중하근기의 중생은 자신의 역량과 형편에 따라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을 하면, 그것이 바로 자신을 이롭게 하는 수행에도 부합하게 되오. 수행 법문에도 육도만행(六度萬行)이 있지 않소? 자신이 완전히 해탈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남을 이롭게 하는 공덕도 자신을 이롭게 하는 수행에 속하오. 그러나 오로지 바깥으로 남의 일에만 치우쳐서는 결코 안 되오.
진짜 도를 닦는 사람이야 어찌 다른 일에 간여하겠소? 단지 전신을 온통 다 놓아버리고 온갖 인연을 싹둑 잘라버릴 수 없기 때문에, 남도 함께 북돋워 주는 마음으로 절반만 구제하는 것도 괜찮다는 뜻이라오.
염불은 물론 지성스럽고 청결하게 하는 것이 소중하오. 그렇지만 병든 환자야 어떻게 다 해낼 수가 없지 않소? 그런 경우에는 단지 마음에 지성만 품으면, 소리 없이 묵송하든 소리 내어 염송하든 상관없이, 공덕은 똑같다오. 부처님의 대자대비는 부모님과 똑같소. 자녀가 병들어 신음할 때, 부모가 자녀의 용모나 옷차림 가지고 나무라겠소? 오히려 몸을 어루만져 주면서, 땀과 때까지 깨끗이 씻어 주지 않소? 그렇다고 자녀가 병이 다 나은 뒤에도 병석에서와 똑같이 부모를 대한다면, 벼락 맞아도 쌀 것이오.
자신을 세우고[立身] 세상에 대처하며[處世] 마음을 가짐[居心]에는, 현명한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모두 공경하고, 조금도 오만을 부려서는 안 되오. 그러나 일을 함[行事]에는, 현명한 사람을 가까이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멀리하며, 우수한 것을 택하고 열악한 것을 버려야 하오. 이렇게 한다면, 서로 감염되는 폐단이나 연루되는 허물이 없을 것이오.
천하의 모든 일은 일정한 이치는 있지만 일정한 법은 없소. 일을 맡은 사람은 모름지기 일정한 이치를 파악하여, 때에 따라 적합한 방법을 시행해야 하오. 만약 구체 사정을 감안하여 결정하지 않으면, 마치 판에 박힌 죽은 약방문(藥方文)을 가지고 크게 달라진 증상을 치료하는 것처럼, 살아나는 자는 적고 죽는 자는 많아질 것이오. 정황과 이치가 서로 부합하고, 방법과 사실에 들어맞아야 제대로 해결할 수 있소.
화장(火葬)의 방법은 불법이 흥성하던 당송(唐宋) 시대에는 세속 사람들도 많이 썼다오. 그러나 지금은 꼭 화장을 고집하여 남들의 비방을 야기할 필요는 없으며, 세속의 매장법에 따라도 괜찮소. 매장한 지 세월이 오래 되면 해골이 밖으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은 화장이 더 효도하는 방법일 것이오.
3년상(喪) 동안 예악(禮樂)과 가무(歌舞)를 즐기지 않는 예법만큼은 마땅히 지키는 게 좋소. 청(淸)나라 때까지는 문관(文官)은 부모상을 당하면 반드시 관직을 그만두고 상을 치러야 했소. 다만 무관(武官)은 나라를 지켜야 하는 군사적 필요에서 예외였소. 지금같이 패륜과 불효가 연달아 일어나는 시대에, 3년상을 지낸다는 말이 씨나 먹히겠소? 우리는 옛 예법을 바탕으로 상황을 참작하여 시행하되, 지나친 집착이나 급작스런 변화는 삼가는 게 좋겠소.
지금 세상 윤리 도덕과 인심은 극도로 타락해 가고 있소. 그리고 국가 재정은 고갈하고 조세 부담은 무거워지며, 물가는 날로 치솟아 민생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소. 게다가 천재지변과 온갖 사고가 빈발하고 있소. 이럴 때 불법과 정도를 펼치려면, 모든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단지 불교의 요점만 잘 일러주는 게 가장 좋소.
부모에게는 자비를 말하고, 자식에게는 효도를 말하며, 형제간에는 우애와 부부간에는 화목을 강조하는 것이오. 각자 자기 본분을 다하여 기초를 튼튼히 다진 뒤에, 공경과 정성으로 자기를 극복하고 예법에 복귀하며, 인과응보 법칙을 분명히 알아 윤회를 벗어나도록 일깨웁시다. 어떠한 죄악도 짓지 않고 뭇 선을 받들어 행하며, 믿음과 발원으로 염불하여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길로 안내하는 것이오.
천부적 자질이 제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이 방법으로 수행해야 마땅하오. 그러고도 남는 힘이 있거든, 각종 경론(經論)을 연구해도 괜찮소. 각자 자기 집에서 분수에 맞춰 수행하도록 하며, 무슨 건물을 크게 세우고 사람까지 둘 필요는 없겠소. 피차간에 서로 오락가락하며 헛된 직함으로 세월만 낭비할까 두렵기 때문이오. 이러한 점이 지금 홍법(弘法)에서 중점 설계할 최상의 사항이오.
극락세계에 왕생하고 싶으면, 마땅히 이 세간을 놓아버리고, 특히 지나치게 날뛰는 헛된 욕심을 놓아버려야 하오. 보살들처럼 생사윤회의 고해 속에서 중생을 제도하는 일은, 모름지기 자신이 보살인 다음에야 비로소 가능하오. 아직 자신이 범부인데도 이런 일을 떠맡으려고 나선다면, 다른 사람을 제도하기는커녕, 자신도 건질 수 없소.
세상에 얼마나 많은 선지식들이 한결같이 이 같은 병폐를 범하면서, 오히려 보리심(菩提心)을 지녔다고 자부했는지 모르오. 이 보리심을 가지고 먼저 극락왕생을 구한다면, 매우 유익하오. 보살이라면 그 마음으로 왕생을 구하지 않아도 괜찮소. 그러나 일반 범부가 보리심을 핑계로 극락왕생을 구하지 않는다면, 그 해악이 적지 않음을 반드시 알아야 하오.
지나치게 날뛰는 헛된 욕심은 진실한 수행자에게 아주 커다란 장애가 됨을 명심하시오. 이처럼 혼탁하고 어지러운 시대일수록, 진실로 인과응보의 법칙과 정토 법문을 널리 제창해야 실익이 있소. 고상하고 거창한 것만 좋아하는 사람들은, 인과 법칙과 정토 법문이 널리 떨쳐지면 자신들의 명성이 떨어질까 두려워하여, 일부러 사람들에게 이걸 모르게 하고, 우리들에게 결코 꿇리지 않으려고 기세를 부린다오.
한번 그들 고상한 사람들에게, 생명을 보양하는 의식주도 융통성 없이 한 가지만 고집하는지 물어 보시오. 여름에 모시옷 입고 겨울에 털옷 입으며, 목마르면 물 마시고 배고프면 밥 먹는 일은 자연스럽지 않소? 그런 일은 하루에도 수시로 상황에 맞추면서, 불법을 널리 펼치는 일에는 지혜가 그보다 못하단 말이오? 그러고도 진실로 중생을 이롭게 하겠다고 말하는구려.
연화정토결사[蓮社]를 세워 염불 수행을 하려면, 무엇보다 맑고 향기로움[淸淨香潔]이 필요하오. 주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공경과 정성을 갖추어야 하오. 행여라도 남들에게 오만하게 굴거나, 공덕을 베푸는 듯한 기색을 보여서는 안 되오. 그리고 함께 염불하러 찾아오는 사람에게, 모두 온화하고 겸손하며 공경스럽게 맞이해야 하오.
염불을 시작하기 전과 끝마친 뒤에는, 집안일이나 일상 잡담을 꺼내지도 말아야 하오. 꼭 말해야 할 사항이 있으면 요점만 말하고, 그렇지 않으면 각자 제자리로 돌아가는 게 좋소. 나이가 너무 젊은 사람은 단지 자기 집안에서 염불하는 게 낫소. 늘상 찾아오는 것은 거리가 가까운 사람은 괜찮지만, 길이 먼 사람은 행여 뜻밖의 걱정이 생길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하오. 이러한 결사도 일정 지역을 위해 참고로 말하는 것뿐이며, 역시 각자 집에서 마음을 집중하여 염불하는 일이 가장 바람직하오.
불법을 배우는 사람은 먼저 인과 법칙을 알고, 홀로 있을 때를 조심하는 신독(愼獨: 유교 수양의 기본 출발점)에 착수해야 하오. 신독만 제대로 하면 삿된 생각[邪念]은 저절로 사라질 터이니, 어찌 불법에 맞지 않는 곳이 있겠소?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즉각 힘써 잘라내 버려야, 바야흐로 진실한 수행이 될 수 있소.
그렇지 않으면 배움 따로 수행 따로 겉돌게 되어, 지식과 견해가 높아질수록 행실은 더욱 형편없어지는 괴리가 발생하오. 이것이 요즘 불교를 깊이 배워 통달한 대가라고 자칭하는 자들이, 뼛속까지 달고 다니는 악성 종양이라오. 가령 똑같은 허물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불이과(不貳過: 공자가 수제자 顔回의 덕행을 칭찬한 말)만 도달하려고 목표를 세워도, 한 가지를 배우면 배운 만큼 실익을 얻을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