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국가의 부강
중국이 빈약한 것은 예의에 따르지 않기 때문이오. 예의만 따른다면, 어찌 빈약해질 것이오? 빈약의 원인을 한번 살펴보시오. 어느 것 하나 탐욕으로 뇌물을 받아 챙겨, 외국인을 이롭게 한 결과가 아닌지? 질병의 원인을 분명히 알아내지도 못하고서, 약효가 없다고만 투덜대면 지혜롭다고 할 수 있겠소?
외국이 강한 것은, 그들 나라가 작아서 동심협력하지 않으면 자립할 수 없기 때문이오. 그런데 중국은 사람들마다 각자 다른 뜻을 품고, 설령 같은 마음을 가진 자라도 외국인이 뇌물로 유혹하면 금방 넘어가버리기 때문이오. 국가와 민족을 거들떠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조차도 돌아보지 않는 것이오. 그런데도 예의를 봉행하는 잘못으로 돌릴 수 있겠소?
예전에 임문충공(林文忠公)이 서양 오랑캐를 내쫓을 때(아편전쟁 전후)만 보아도, 충분히 증명할 수 있소. 그 뒤로 크고 작은 사건에서, 어느 하나 중국이 대신 나서서 이루어주지 않은 게 있소? 중국 사람들은 태반이 모두 망할 팔자에 속했던 거요. 그래서 외국은 그렇게 강한데, 우리 중국은 이렇게 약한 것이오.
[임칙서(林則徐: 1785〜1850): 청말의 정치가. 자(字)는 소목(少穆), 문충공은 시호, 복건성 출신으로 가경(嘉慶: 1796〜1820 재위) 때 진사가 되어, 공자진(龔自珍)·위원(魏源) 등과 함께 경세지학(經世之學)을 제창함. 각지의 총독과 순무(巡撫)로 황하를 비롯한 치수 사업을 함. 1838년 호광(湖廣) 총독으로 아편을 금지한 효과가 탁월하여, 금연파 대표 인물이 됨. 흠차(欽差) 대신으로 광동에 파견되어 아편 수입을 금지하고, 서방 사정의 이해를 위해 사주지(四洲志)를 편역함. 등정정(鄧廷楨) 총독과 협력하여 영미 아편상들로부터 아편 237만 근을 압수하고, 호문(虎門)에서 폐기 처분한 뒤, 해안 경비를 강화하여 영국군의 도발을 격퇴시킴. 1840년 1월 양광(兩廣) 총독이 되고, 아편전쟁이 발발하자 영국군의 침공을 엄격히 방어하였는데, 투항파의 모함으로 파직당함. 이듬해 절강(浙江)에 파견되어 해안 방어를 계획했는데, 곧 신강(新疆)의 군대에 배치되어 그곳에서 치수와 개간에 힘씀. 1850년 흠차 대신에 다시 기용되어 광서(廣西)의 농민 반란을 진압하러 가던 길에 병으로 사망함. 시문(詩文)을 잘했으며, 『임문충공정서(林文忠公政書)』와 『신급록(信及錄)』 등을 남김.]
가령 중국 사람들이 모두 예의염치를 지켜, 외국 사람들이 팔아먹는 쓸데없는 상품을 소비하는 사람이 없도록 했더라면, 중국은 1년에 수천억 금을 보전할 수 있었을 것이오. 중국인의 비열한 짓은 정말로 최고로 지극한 비열이오.(우리나라의 매국노와 매판 자본도 똑같은 상황임.)
일찍이 맹자는 이런 말씀을 하였소. “오직 외로운 신하와 서얼 자식만이, 그 마음가짐이 위기의식에 가득 차 있고 환난을 깊이 염려하여 준비하기 때문에, 결국 통달한다.” 아무리 경전을 많이 읽고 세상을 자세히 살펴보아도, 이러한 도리를 모르면 제대로 인식하고 판단할 수 없소.
지금 세상을 위한 계책으로는, 마땅히 인과응보와 생사윤회, 개과천선 및 극락왕생에 대한 믿음과 발원을 적극 제창해야 하오. 그것이 재난과 액운을 되돌이켜 국가와 민족을 구제할 수 있는 최고 제일의 방책이오. 현허하고 미묘한 이치를 담론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오.
그렇지만 세상을 구제하려면, 자기 자신부터 솔선수범하여 실천궁행해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실효가 없소. 자신부터 시작해서 집안과 동네와 나라까지 확대할 때, 그 기풍은 더러 생각할 수 없는 엄청난 효과를 낼 수도 있소. 그렇지 않으면 꿈속에서도 보기 어렵소.
근래 사람들이 큰일을 하는 경우, 여러 해 동안 외국 것을 배우고 기이한 것을 내세우는 꼴이, 당연한 자랑거리가 되고 있소. 요․순 임금이나 주공(周公)·공자 같은 옛 성인은 모두 본받을 게 없다고 내팽개치고 있소. 그러다가 뜻을 얻지 못하면 미쳐 날뛰어 교화하기 힘든 백성이 되고, 어쩌다 뜻을 얻으면 나라를 망치고 백성을 죽이는 관료 선비가 되는구료. 그래서 천재지변과 인재 사고가 줄지어 일어나고, 국운이 위태로워지는 가운데 민생은 더욱 막막해져 가고 있소.
불교를 배우는 데 가장 귀중한 점은, 못된 버릇을 하나하나 엄정히 다스려 개과천선을 실행하는 일이오. 만약 별 일이 없을 때는 불교를 걱정 없이 배우다가, 일이 생길 때면 옆으로 제쳐두고 도외시한다면, 조금도 실익이 없는 헛된 이름이 되고 말 것이오.
지금 세상의 도리는 단지 각자 마음만 다할 수 있을 뿐이오. 미래의 길흉과 화복(禍福)은 미리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오. 정말로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부처님과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염송하면, 무형(無形) 중에 그윽한 가피력으로 상황이 호전하여, 큰 위험까지 이르지는 않게 되오.
만약 이러한 염불 공덕에 주력하지 않는다면, 설사 온갖 기지(機智)와 잔재주를 쓴다고 할지라도, 좋은 효과를 얻기가 어렵소. 허깨비처럼 급변하는 세상 형국은 미리 추측할 수도 없소. 부귀영화가 눈부시게 빛나던 자들도 순식간에 소멸하여 자취를 감추는 판인데, 하물며 우리 같은 사람이야 말할 게 있겠소?
공자께서 “천명을 모르면 군자가 될 수 없다[不知命, 無以爲君子也.].”고 말씀하셨소. 그렇지만 모름지기 적극 힘써 수행해야만, 비로소 천명을 말할 수 있다오. 타성에 젖어 게으름 피우며 제멋대로 내맡기는 숙명론 같으면, 얻는 것이든 잃는 것이든 모두 천명이 아니라오.
[ 흔히 “사람 할 일을 다 하고 나서 천명을 기다린다[盡人事待天命.].”고 말하는 격언이, 공자를 비롯한 유불선 모든 성현의 공통된 운명관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환난으로 가득 찬 세상이오. 비록 염불 공덕으로 숙세의 업장을 소멸시킬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모름지기 큰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지녀야 하오. 남의 손해로 자신만 이롭게 하려는 중생심(속물근성)을, 모든 중생 두루 이롭게 하는 보살행으로 크게 전환시켜야 하오. 그러면 숙세의 업장이나 현세의 죄업 모두, 그 큰 보리심 속에 빛나는 부처님의 자비 광명을 가피 받아 말끔히 소멸할 수 있소.
만약 전생이나 예전에 큰 죄업을 지은 사람 같으면, 지금 죄악을 그만 두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오. 비록 더 이상 죄는 안 짓더라도, 힘써 뭇 선을 닦아 쌓지 않고 그저 유유자적하니 염불만 하고 앉아 있으면, 염불의 공덕이 죄악의 업장에 필적하지 못하오. 그래서 더러 피하기 어려운 나쁜 과보를 당하기 쉽소.
물론 염불의 공덕이 헛되이 내팽개쳐지는 것은 아니오. 보리심을 내지 않고, 또 죄악의 업장이 특히 넓고 크기 때문에, 염불 공덕만으로는 완전히 상쇄하기가 역부족인 것이오. 만약 큰 보리심을 발하기만 한다면, 찬란한 해가 중천에 떠올라 아침 이슬이나 서리가 금세 사라지는 것과 같게 되오.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반평생 이상 갖은 죄악을 지어 오다가, 나중에 무슨 계기로 조금 회개해 놓고, 죄악의 과보를 받지 않기만 바라는구료. 그렇지만 앞서 말한 이치대로, 죄악의 과보가 전혀 없을 수는 없는지라, 그걸 보고는 곧장 불법은 영험이 별로 없고, 수행해 봤자 이익이 없다고 푸념하기 일쑤라오. 이러한 이치를 잘 음미하여, 틀림없이 미혹의 길을 벗어나 깨달음의 언덕에 안전히 오르기를 기약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