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때 옥산현(玉山縣: 강서성 동부에 있음)에 사는 서생 왕(王) 아무개는,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아내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래서 칠칠(七七) 49재(齋)가 끝나면 혼례를 올리기로 기약하고, 왕 서생은 어머니 관 옆에서 잠자며, 신부는 방안에서 잠자기로 별거 중이었다. 하룻밤에는 방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하녀가 신랑이 당도했다고 여쭈었다. 이에 신부가 방문을 열고 맞이하여, 마침내 동침하였다. 북소리 다섯 번 울리는 오경(五更)이 되어서는, 신랑이 서둘러 달아나듯 떠나가면서, “바깥사람들이 알면 나를 불효죄로 꾸짖을까 두렵다.”고 말하곤 했다.
그렇게 며칠을 계속하더니, 하루는 혼수에 대해 물어왔다. 그래서 신부는 옷값으로 은(銀) 80량과 금비녀․옥 귀걸이가 모두 조그만 상자 안에 들어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5경에 방을 나가면서, 그 상자를 통째로 가지고 간 뒤, 다시는 오지 않았다.
칠칠(七七) 49재일이 모두 지나자, 왕 서생은 술자리를 벌이고 혼례를 올리려고 준비하였다. 그러면서 신부는 신랑과 주고받은 말을 통해, 비로소 자기가 도적에게 속아 롱간(弄奸七七)당한 줄 알게 되었다. 그리고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머리를 바닥에 대고 통곡하면서, 더 이상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이윽고 친정에 되돌아가 부모께 자초지종을 아뢴 뒤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신부 주검을 장례 지낼 때, 왕 서생이 관을 앞에서 이끌고 묘 자리까지 이르렀다. 그러자 하늘에서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번갈아 일어나더니, 난데없이 어디선가 한 사람이 이끌려 와 관 앞에 꿇어 앉혀졌다. 모두들 바라보니, 바로 왕 서생 집안에 형님(堂兄)이었다. 그런데 손에 금비녀와 옥 귀걸이․은을 받쳐 든 채, 꿇어앉은 모습으로 벼락 맞아 죽었다. 그 시체는 금세 썩어 문드러졌고, 이를 본 온 고을 사람들이 모두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이는 무종(武宗) 정덕(正德) 9년(1514)에 일어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