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강희(康熙) 5년 병오(丙午: 1666)년, 연주(兗州: 산동성 운하 동쪽 일대)에 속한 어느 현에 정(鄭)씨 서생이 있었다. 그는 생김새도 준수하고 글도 잘 지었는데, 외삼촌에 딸이 예쁘고 정숙한 데에 반하여,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외삼촌은 그 청혼을 받아주지 않고, 이웃 동네 소(蕭)씨네 구혼에 이미 허락한 상태였다. 그런데 사위 될 사람이 병에 걸려, 약혼한 지 1년이 넘도록 시집을 가지 못했다. 그러자 정씨 서생은 딸에 딸린 하녀에게 뇌물을 주어, 외삼촌 딸이 잠자는 틈을 타서 신발과 향주머니를 몰래 훔쳐오게 하였다. 그리고 자기가 그걸 가지고 소(蕭)씨네 가까운 친척에게 내보이며, 그 딸이 이미 자기와 사통(私通)했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제 딴에는, 소(蕭)씨가 그 소문을 들으면 틀림없이 파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혼사가 깨뜨려지면, 마치 깨진 시루처럼 누구도 쳐다보지 않을 것이니, 그런 다음에는 자기가 구혼하여 쉽게 얻을 수 있다는 속셈이었다. 소씨가 이 헛소문을 듣고는 반신반의하면서, 사람을 보내 딸네 어머니에게 사실 여부를 캐물어 보도록 시켰다.
그런데 딸은 어머니를 통해 그 헛소문을 전해 듣자, 억울한 분통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날카로운 칼을 찾아 스스로 한바탕 휘둘렀다. 그 결과 팔뚝에 핏줄이 끊기면서, 목숨마저 끊어지고 말았다. 딸네 아버지가 하도 원통하여 관가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 읍에 수령이던 아무개 공(某公)은, 사안을 가만히 살피더니 심증(心證)을 굳히고서, 정씨 서생을 붙잡아다 신문하여 범죄 사실을 모두 자백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극형을 심판 받고 곧 처형되었다.
평(評): 당나라 때 원진(元稹)에 이모 딸(이종 사촌 누이)인 최앵앵(崔鶯鶯)이란 녀자는 절세가인(絶世佳人)이었다. 원진이 결혼하게 해달라고 집요하게 요청했으나, 최앵앵 어머니(원진에 이모)는 딸을 자기 조카인 정항(鄭恒)에게 시집보낼 생각으로, 그 청혼을 받아 주지 않았다. 이에 원진은 몹시 분통이 터져, 회진기(會眞記: 鶯鶯傳에 다른 이름)를 지어 최앵앵을 모욕하였다. 게다가 최앵앵을 대신하여 화답시(和答詩)까지 지어 후세에 전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흠 없이 결백한 보옥(寶玉)으로 하여금, 천추(千秋)에 길이길이 더러운 티끌을 뒤집어쓰도록 하였다. 그러니 이 사건에 정씨 서생에 비하면, 그 죄악이 더욱 막심하다. 그 뒤 원진은 번갯불에 시체가 불타버리는 과보를 받았으니, 그 또한 당연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