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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2. (1). 1) 감각기관이 욕정에 방종하려는 고통(根欲放逸苦)

새 책 소개. 부처님 마지막 가르침 유교경

by 明鏡止水 淵靜老人 2023. 1. 15. 00:12

본문

먼저 감각기관이 욕망에 빠져 안일하게 방종하고 싶어 하는 고통을 어떻게 대치할지 알아야 합니다.

 

經曰:

汝等比丘, 已能住戒, 當制五根, 勿令放逸, 入於五欲. 譬如: 牧牛之人, 執杖視之, 不令縱逸, 犯人苗稼. 若縱五根, 非唯五欲將無崖畔, 不可制也; 亦如惡馬不以轡制, 將當牽人, 墜於坈陷. 如被劫害(賊), 苦止一世, 五根賊禍, 殃及累世, 爲害甚重, 不可不愼. 是故, 智者制而不隨, 持之如賊, 不令縱逸. 假令縱之, 皆亦不久見其磨滅.

?비구 여러분! 이미 계율에 안주할 수 있거든, 그 다음엔 안일하게 방종하여 오욕에 빠져들지 않도록, 마땅히 눈·귀·코·혀·몸 다섯 감각기관을 잘 통제하십시오. 비유하자면, 마치 소나 양 치는 사람이 막대기를 잡고 정신 차려, 소나 양이 방종하여 함부로 남의 곡식이나 채소를 뜯지 못하도록 지키듯 하십시오. 만약 다섯 감각기관을 방종한다면, 그저 오욕만 통제할 수 없게 불어나는 게 아닙니다.

마치 사납고 거친 말을 고삐로 죄지 않으면, 사납게 날뛰다가 사람을 위험한 함정에 빠뜨리는 꼴과도 같게 됩니다. 예컨대, 도적한테 겁탈 당하면 고통이 한 생애에 그치지만, 다섯 감각기관에 도적질 당한 화근은 재앙이 여러 생에 이어져 그 해악이 몹시 중대하므로, 삼가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는 감각기관을 잘 추슬러 오욕에 휩쓸리지 않으며, 마치 도적 지키듯 조심하여, 안일하게 방종하지 않습니다. 설령 잠시 잘못하여 방종하더라도, 곧장 알아차려 바로 추슬러 다잡습니다.?

 

論曰:

2. (1) 감각기관이 욕정에 방일하려는 고통(根欲放逸苦) 중

1) 감각기관 방일 고통(根放逸苦)은,

① 감각기관이 고통 원인(苦因)이자 고통 결과(苦果)이며, 계율청정삼매방편(戒淨三昧方便)에 의해 생각을 추슬러(攝念) 대치하므로, 경에서?已能住戒, 當制五根?이라 설합니다. 왜 단지 오근五根만 설할까요? 구체(色 등 오근)와 추상(非色: 意根)을 구별하고, 또 의근意根 가운데 오근五根에 대한 동념대치(動念對治: 상념을 움직여 대치함)와 부동념대치(不動對治: 상념을 움직이지 않은 대치) 두 가지가 있음을 나타냅니다.

【절요】역시 앞을 추슬러(攝前) 뒤를 일으킵니다(起後). 5근이 각각 인식識을 생기게 할 수 있으므로 함께 나란히 일컫는 것입니다. 오욕에 빠져들지 말라 함은, 색은 달군 쇠(熱鐵)와 같고, 소리는 독 바른 북(毒鼓)과 같으며, 향기는 나쁜 바람(惡風) 같고, 맛은 펄펄 끓는 꿀(沸蜜)과 같으며, 만짐은 독사와 같아서, 어느 것도 붙잡을 수 없음을 마땅히 알라는 뜻입니다. 만약 붙잡으면 곧 다치게 되므로, 그래서 방일하지 말라고 금합니다.

【보주】앞을 추슬러(攝前) 뒤를 일으킨다(起後)고 함은, 자기가 이미 할 수 있는 걸 추스르고, 아직 할 수 없는 걸 일으킨다는 뜻입니다. 색 아닌 것(非色: 意根, 마음)이 색을 주재主宰하므로, 아래 경문에서?이 5근의 임금님이 뜻이다?고 말합니다.

 

② 경전에서?勿令放逸?부터?犯人苗稼?까지는 계념戒念이 오근을 보호하는 이익을 비유한 법문입니다.?牧牛?는 신계身戒가 청정하여, 갖가지 색色에 방일하지 않음을 비유하고; 막대기 잡음(?執杖?)은 정념正念을 성취하여, 갖가지 마음(心)을 행하지 않음을 비유하며;?不犯苗稼?는 계념戒念을 성취하여, 삼매방편三昧方便과 정수공덕正受功德이 줄거나 없어지지 않음을 비유합니다.

【절요】소→오근, 목자→비구, 막대기 잡음(?執杖?)→섭념攝念, 농작물(苗稼)→삼매ㆍ방편 및 정수正受공덕을 각각 비유합니다. 오욕이 일지 않으면 정념正念이 성취하는데, 마치 농작물을 짓밟지 않(으면 저절로 열매를 맺)는 것과 같습니다.

【보주】석공石鞏과 남천南泉 선사가 이 뜻을 잘 거느렸습니다. ?三昧正受?는 예전에는 범어와 한문이 합쳐져 이루어진 글이라고 했으나, 여기서는 삼매방편三昧方便과 정수공덕正受功德으로 표현했으니, 두 가지는 구별해야 합니다.

【강의】 불교에서 마음 찾는 참선수행의 상징처럼 널리 알려진 우명한 십우도十牛圖(또는 심우도尋牛圖) 이야기는 바로 유교경의 이 비유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석공石鞏과 남천南泉 고사는 여러 선사의 목우가牧牛歌와 함께 여러 어록에 실려 선가에 회자합니다.

석공石鞏 혜장慧藏 선사는 본디 사냥꾼으로 사슴을 쫓다가 마조선사를 만나 사슴이 지나는 걸 보았냐고 물은 인연으로, 마조가 활 쏠 줄 아느냐고 묻자 안다고 답했는데, 화살 하나로 몇 마리를 쏘냐고 묻자 한 마리를 쏜다고 답하며 스님은 몇 마리 쏘냐고 되물었습니다. 마조가 한 무리를 떼거리로 쏜다고 답하자, 사람이나 짐승이나 같은 생명인데 어찌 한 무리를 떼거리로 쏘냐고 되물었답니다. 마조가 그런 줄 안다면, 너는 어찌 스스로 자신을 쏘지 않냐고 묻자, 사냥꾼은 어쩔 줄 모르며 스스로 자신을 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청했습니다.

이에 마조가“이 녀석 무시 겁 이래로 내려온 무명 번뇌가 오늘 단박에 식었다?고 말하자, 그 자리서 활과 화살을 내버리고 출가했습니다. 하루는 부엌에서 일하는데 마조가 뭐하냐고 묻자, 석공은 소를 친다(牧牛)고 답했는데, 어떻게 치냐고 다시 묻자, 고삐를 항상 손에 쥐고 있으면서 소가 밭에 들어가면 바로 고삐를 잡아당겨 돌아오게 한다고 답하니, 마조가 정말 소를 잘 친다고 인가하였답니다.

이후 석공은 30년간 제자와 객승한테 활을 잡아당겨 화살을 쏘는 시늉으로 일깨웠는데, 의충義忠 선사가 찾아와 화살을 보고 가슴을 열어젖혀 사람 살리는 화살인지 죽이는 화살인지 물으며 어쩔 테냐고 대들자, 석공이 활시위를 세 번 튕겨 의충이 예를 올리니, 석공은“30년간 활 하나와 화살 두 개로 겨우 반개 성인半箇聖人을 얻었다?고 탄식하며 이내 활과 화살을 부러뜨렸다고 합니다.

또 남천南泉에서 30년을 나오지 않은 보원普願 선사는 어렸을 적 물소를 칠 적에 동쪽으로 가도 서쪽으로 가도 소가 남에 수초水草를 뜯어먹어 애를 먹은 경험을 회고하며, 마음 소를 치는 법을 일깨운 모양입니다.

③?若縱五根, 非唯五欲, 將無崖畔, 不可制也.?는, 계戒가 없어 호념念이 사라지면, 더할 나위 없이 최상으로 마음을 해쳐, 도저히 대치하기 어려운 분위기(상황)가 이루어짐을 나타냅니다.

【절요】만약 5근을 추슬러 지키지 않으면, 단지 욕심이 일어 도를 가로막을 뿐만 아니라, 장차 가없는 고해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일단 계념을 잃으면, 대치하기가 몹시 어려워 걷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름지기 싹틀 때 예방하여 점차 커지는 걸 막도록(杜絶), 마음을 움직이지 말아야 합니다.

【강의】우리 속담에?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고 합니다.

 

④?惡馬?비유는 대치하기 어려움을 설합니다.

【절요】惡馬→오근, 고삐잡지 않음(不以轡制)→정념 없음(無正念), 구덩이(坈陷)에 빠짐→삼악도에 떨어짐을 각각 비유합니다.

【보주】소와 말에 빗댄 두 비유는 비슷해 보이나 구별이 있습니다. (소 비유에서) 농작물을 짓밟음은 선근을 파괴하는 걸로 원인을 가리키고, (말 비유에서) 구덩이에 빠짐은 삼악도에 빠지는 걸로 결과를 나타냅니다.

 

⑤?如被劫害?이하?不可不愼?까지는, 허물이 몹시 무거워 인과응보 고통이 무량세無量世에 걸쳐 몹시 깊음을 비유합니다.

【절요】《징조계소澄照戒疏》에 보면, (주지 않는 물건을) 공공연히 강제로 빼앗아 가지는 걸 겁劫이라고 합니다. 재앙 초래가 여러 생에 걸치고 고통 또한 훨씬 능가하므로, 욕정이 일지 않도록 5근을 조심히 단속하라고 권하십니다.

(※ 옮긴이: 공공연히 강제로 빼앗는 ?겁劫’은 전통 율령에서 ?적賊’으로 표현한 ?강도’에 해당하고, 몰래 훔치는 ?도盜’는 ?절도’에 해당합니다.)

【보주】성현을 비방하면 6만세萬世가 지나도록 혀가 불구가 되고, 음악에 탐닉하면 아라한을 증득해도 습기習氣가 남아있다. 재앙이 미침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⑥ 아까는 계념이 보호함(戒念護)을 설했고, 이제는 지혜가 보호함智護)을 설합니다.?是故智者制而不隨?는 지자智者가 무거운 업장(삼매에 중대한 장애)을 삼매로 관찰하여 예방함을 말하고,?持之如賊, 不令縱逸?은 그 업장을 목숨 해치는 자(害命者)처럼 방호防護한다는 비유입니다.

무거운 업장을 이처럼 방비하면, 가벼운 업장은 어떻게 통제할까요? 가볍다 함은 미세한 모습의 습관성 장애(細相習障)로서, 있을 때는 있지만 없을 때는 없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는 무의식에서 일어나므로(不作意起) 經에서?假令縱之?라 하고, 기세가 스스로 지탱(自立)할 수 없으므로?皆亦不久?라 하며, 자성이 마주대함이 없어 서로 볼 수 없으므로?見其磨滅?이라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어떻게 사라짐을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보일 때를 기준으로 말하여, (더 이상) 보이지 않으면 소멸이 보인다(滅見: 사라짐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절요】지혜가 있는 사람이므로?智者?라고 부릅니다. 무릇 지혜가 있으면, 시비를 재단裁斷하고 이해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계념戒念이 이롭고 해가 없는 줄 이미 알았기에, 자신을 절제하여 5근 욕망에 따라가지 않게 됩니다. 또한 이미 5근 욕망이 해롭고 이로움이 없는 줄 알았기에, 도적 지키듯이 방어하게 됩니다. 그래서 덧없음(無常)은 반드시 사라짐(磨滅)으로 돌아감을 비유로 나타낸 것입니다.

【해설】감각기관 보호 방법의 요점(護根法要)을 세 비유로 밝힌 것입니다.

?當制五根?아래는?牧牛?비유로, 앞에는 법이고 뒤에는 비유(先法後喩)인 형식입니다. 오근은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이고, 오욕은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입니다. 소→오근, 목자→비구, 막대기 잡음(?執杖?)→계념戒念, 농작물 싹(苗稼)→온갖 선근공덕(선정지혜 등 법)을 각각 비유합니다.

다음?若縱五根?아래는?惡馬?비유로, 역시 앞에는 법이고 뒤에는 비유(先法後喩)인 형식입니다. 惡馬→오근, 고삐잡음(?轡制?)→계념戒念, 구덩이(坈陷)→삼악도를 각각 비유합니다. 오근을 방종하면 선행공덕을 방애할 뿐만 아니라, 틀림없이 악에 떨어짐을 경고합니다.

셋째,?如被劫賊(害)?아래는 도적겁탈 비유인데, 앞에는 비유이고 뒤에는 법(先喩後法)인 형식입니다. 재앙이 여러 생에 미쳐 그 해악이 도적 겁탈보다 심한데도, 오히려 말려들지 않도록 통제하지 못한다면, 어찌 지혜로운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설령 방종할지라도 곧 마멸함은, 마치 칼날에 묻은 꿀과 같아서, 한 끼 식사로도 턱없이 모자랍니다. 어린애가 멋모르고 핥는다면, 단지 혀를 베는 환난이 있을 뿐입니다.

【강의】 유가와 도가 수행법도 사실 불교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선 맹자는 호연정기 함양을 자부했습니다. 맹자가?나는 말을 알고, 나는 내 호연지기를 잘 함양한다(我知言, 我善養吾浩然之氣).?고 말한 호연지기란 도대체 뭘까요? 맹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그 氣라는 것은 지극히 크고 굳센데, 단지 해치지만 않고 정직하게 함양하면, 저절로 천지간을 꽉 채우게 된다. 그 氣는 정의(義)와 짝하고 도덕(진리)과 함께 하면, 결코 모자라지 않는다. 이 호연지기는 정의가 모여 저절로 생기며, 정의를 거짓 행세하여 몰래 또는 억지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행실이 마음에 떳떳하지 못하면, 이 기氣는 금세 죽고 만다.?

이걸 맹자는 또 다른 비유로 설명합니다.“우산牛山에 수풀이 매우 아름답고 울창한데, 사람이 도끼로 찍어내지만 않으면, 수풀은 저절로 무성해진다. 그런데 매일같이 새싹을 베어 내면, 어느 겨를에 자랄 수 있겠는가? 생명의 원기인 호연정기도 마찬가지다. 건드리지 않고 해치지 않으면, 저절로 차오른다. 특별히 함양할 필요가 없다.?

숲 속에 옹달샘처럼, 맑고 고요히 솟아 넘치는 물을 때에 따라 필요한 만큼 떠서 쓰기만 하면 됩니다. 흙탕물이 되고 바닥이 나도록 함부로 퍼내지만 않으면, 옹달샘은 어지간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맑고 감미로운 물이 넉넉히 넘칩니다.

따라서 호연정기도 사실 특별한 함양 방법이 없습니다. 그냥 저절로 차서 넘치게 고요히 놔두면 됩니다. 다만, 불순물이 끼어들어 오염 당하지 않도록 보호만 하면 됩니다. 불교로 말하자면, 계율戒律만 잘 지켜 번뇌망상煩惱妄想이 일지 않도록 추슬러 무념무상無念無想으로 선정禪定에 들면, 저절로 생명의 정기精氣가 정신의 지혜광명으로 훤히 밝아집니다. 로자老子가 말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 도道 그대로입니다. 맹자가 알묘조장揠苗助長하지 말라고 든 비유는 너무도 적절합니다.

또 맹자는 인仁은 사람 마음(人心)이고 의義는 사람의 길(人路)인데, 사람들이 그 길을 저버리고 가지 않으며, 그 마음을 놓아버리고 찾을 줄 모른다고 슬퍼합니다. 개나 닭이 집을 나가면 찾을 줄 알면서, 마음(정신)이 나갔는데도 찾을 줄 모른다고 탄식합니다.

맹자에 따르면, 공자도 추슬러 붙잡으면 존재하고 놓아버리면 사라져서, 들락날락 때도 없고 일정하게 머무는 고향도 알 수 없는 존재는, 바로 오직 마음일 따름이라고 일컬었습니다.(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鄕, 惟心之謂與!) 유가에서 말하는 학문의 길(學問之道)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나가버린 마음을 찾는(求其放心) 수양일 따름입니다. 불교에서 계정혜戒定慧 삼학의 마음수행과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한편, 로자도 일찍이 오색찬란한 광채가 사람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며, 각종 요란한 소리와 음악이 사람 귀를 몽롱하도록 만들고, 맵고 시고 짜고 달고 쓴 각종 강렬한 맛을 지닌 산해진미와 진수성찬 및 술이 사람 입맛을 자극해 오장육부까지 손상시키며, 수렵 스포츠와 같은 오락이나 유희가 사람 마음을 혼란스럽도록 발광시키고, 획득하기 어려운 귀중한 재화가 사람 행실을 비뚤어지게 유혹하는 환영幻影 세계를 간파했습니다. 그래서 로자는 물질감각뿐만 아니라 정신허영까지도 깡그리 부정하는 극단의 무위자연을 이상으로 제시합니다. 어쩌면 불교 공空사상에 필적할 만합니다.

?현명한 재주를 숭상하지 않으면, 인민들이 다투지 않게 되고;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인민들이 도적이 되지 않으며; 욕심낼 만한 물건을 내보이지 않으면, 인민 마음이 미혹하지 않는다. 이러한 까닭에 성인이 인민을 다스림에는, 그 마음을 비우고 그 배를 채우며, 그 뜻(의지 의욕)을 약화시키고 그 뼈(골격)를 강화시키며, 항상 인민들이 무지하고 욕심 없도록 교화한다. 무릇 지혜로운 자도 감히 행하지 못하도록 무위無爲를 펴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게 된다.?

나아가 로자도 개인의 주관 차원에서 육근 닫는 수행을 굉장히 중시하는데, 색기태塞其兌 폐기문閉其門?이라는 명제로 나타납니다. 여기서?兌?와?門?의 해석에 다소간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육근?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이는 로자 특유의 화광동진和光同塵과 더불어, 최고 이상경지인 현동玄同에 필수불가결한 내용으로 꼽힙니다.

?兌?와?門?, 즉?육근?을 닫으면 종신토록 수고롭지 않고 평안할 수 있으나, 반대로 이들을 열어 일을 처리하려면 종신토록 수고를 다해도 구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塞其兌, 閉其門, 終身不勤; 開其兌, 濟其事, 終身不救.) 그래서 로자는?말이 많으면 자주 곤궁해지니, 가운데를 지킴만 못하다.(多言數窮, 不如守中.)?고 설합니다.“말이 다하면 도가 끊긴다.(言盡道斷)?는 거죠!

그러면 눈ㆍ귀ㆍ코ㆍ혀는 뭐하라고 있을까요? 인간 생명에 필요해서 존재하는 감각기관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요점은 생명활동과 진리실현에 맞도록 올바르게 쓰고, 억지로나 지나치게 잘못 쓰지 않아야 합니다. 필요한 때와 곳에 요긴하게 쓰고, 함부로 생명 에너지를 소모하는 남용과 오용ㆍ악용은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진리(正法)를 말할 때를 빼고는 늘 침묵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게 바로 반야공般若空 중도실상中道實相이고,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하는 참된 자연自然입니다.

또 공자 수제자인 안회가 인仁을 묻자, 공자는 자기 욕망감정을 이기고 예절로 돌아가 따르라고 극기복례克己復禮를 가르쳤습니다. 안회가 그 구체 방법을 다시 묻자, 공자는 예절에 어긋나는 것은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며, 말하지도 말고, 움직이지도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고, 이른바?사물四勿?놀이를 일러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사물四勿?놀이를 불교식으로 하나로 간추리자면,?예가 아니면 생각지도 말라?는?비례물념非禮勿念?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절에 어긋나는 나쁜 기운이 생명 원기를 소모시키고 마음을 어지럽게 흔들어, 어진 덕성 수양을 해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불선 모두 우리 몸에 감각기관인 육근六根을 추슬러 다잡고 때로는 닫으라고 가르칩니다.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라서, 육근과 마음이 서로 하나의 양면처럼 혼연일체가 되어 있으므로, 계율로써 육근을 잘 통제해야 마음이 선정에 들어 지혜를 밝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각 통제는 모든 종교철학에 공통하는 기본 수양 방법입니다. 바로 불교에서 육근六根을 잘 절제하는 계율을 수행에 출발이자 근본기초로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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