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自序)
나는 건륭(乾隆) 38년 계사(癸巳: 1773)년부터 수도(북경)의 광통사(廣通寺)에서 주지를 맡아 대중을 거느리고 참선 수행을 하면서, 틈틈이 이런 말 저런 말을 지껄이며 붓으로 기록해 두었다. 42년 정유(丁酉: 1777)년에 이르러, 숙세의 두터운 업장으로 말미암아 온갖 질병이 다발처럼 몰려들었다. 그래서 교종의 5정심관(五停心觀)12)이 우리 유정(有情) 중생들에겐 장애가 많음을 느끼고, 념불 수행으로 다스리기로 작정하였다.
[5정심관(五停心觀): 다섯 가지 마음의 허물을 멈추게 하는 다섯 가지 관찰사유의 법문으로, 성문승이 맨 처음 불도에 입문하는 수행법. 첫째 탐욕심을 멈추는 부정관(不淨觀), 둘째 진에심을 멈추는 자비관(慈悲觀), 셋째 치암심[無明]을 멈추는 인연관(因緣觀), 넷째 아견(我見: 我相)을 멈추는 계분별관(界分別觀: 모든 법을 6계 또는 18계로 분별), 다섯째 산란심을 멈추는 수식관(數息觀)이 그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계분별관을 인연관에 통합시키고, 그 대신 관불관(觀佛觀: 念佛觀)을 보태기도 한다.]
이 념불 법문은 문수·보현 등 여러 위대하신 보살님들로부터, 마명(馬鳴)·룡수(龍樹) 등 여러 위대한 조사(祖師)님들과, 지자(智者)·영명(永明)·초석(楚石)·련지(蓮池) 등 여러 위대한 선지식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결같이 마음으로 귀의[歸心]한 가르침이다. 그런데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감히 생명으로 귀의[歸命]하지 않는단 말인가?
마침내 나는 아침·저녁 예불시간에 념불하기 시작하였는데, 참선하던 스님들 중에 함께 따라하기를 원하는 이가 제법 많았다. 그래서 념불이 시절인연과 중생 근기에 순응하는 줄 알고, 또 혼자 수행하기도 편하기 때문에, 드디어 참선을 그만두고 념불에 전념하였다. 그러자 당시에 법문의 장벽이 두터운 자들이 사방에서 비방의 불길을 내뿜었다.
나는 부처님 말씀을 깊이 믿기 때문에 그런 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참선을 하면서 10여 년 동안 적어오던 원고들을 하루아침에 불 속에 던져버렸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대부분 참선을 일삼던 어떤 스님이 그 원고를 아깝게 여겨, 불타버린 잿더미 속에서 타고 남은 걸 약간 건져냈다. 그러나 그 분량은 전체의 백 분의 일도 못 되었다.
그 뒤로 업력의 바람[業風]에 휩쓸려, 각생사(覺生寺)와 자복사(資福寺)의 두 사찰에서 주지를 역임하였다. 그런데 헛된 명성[虛名]에 그만 잘못 이끌려, 가끔씩 나한테 찾아와 법문을 청하거나 무슨 서문이나 발문(跋文)을 써 달라고 요청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나는 간청을 거절할 수 없어 마지못해 응락하곤 했는데, 날이 가고 해가 지남에 따라 점차 쌓여 다시 책이 이루어졌다. 그러던 중 가경(嘉慶) 13년 무진(戊辰: 1808)년 여름에, 리봉춘(李逢春) 거사가 산에 와서 내 강의를 듣다가, 법문을 듣고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던지라, 마침내 내 글을 책으로 출판하겠다고 자청했다. 그러나 나는 완곡하게 사양했다.
“안 되오. 몸이 산 속에 은둔해 있거늘, 어찌 또 문자를 쓴단 말이오? 세간의 은둔한 선비들의 말도 오히려 그러할진대, 하물며 나같이 이미 마음을 극락정토에 깃들인 수행승이 어떻게 또 다시 문자를 남길 수 있겠소?”
하지만 이 거사의 간청은 너무도 집요했고 그칠 줄 몰랐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의 뜻에 따르기로 하고, 몇 마디 말을 덧붙여 이러한 연유를 밝히는 바이다. 이 모두가 사람들의 청에 따라 마지못해 지껄인 말들일 따름이다.
가경(嘉慶) 15년 경오(庚午: 1810)년 9월 중양절(重陽節) 지난 뒤
사흘째 되는 날(12일), 자복사 이유장실(二有丈室)에서
눌당도인(訥堂道人) 씀.
삼보제자 성안(誠安) 삼가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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