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각철오선사어록서(重刻徹悟禪師語錄序)
내가 철오 선사의 유고(遺稿)를 편집하여 책으로 내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념불하여 극락 왕생하는 길에도 중요한 비결이 있습니까?”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확실한 믿음[確信]이 있을 따름입니다. 정토 법문에는 세 가지 기본 밑천이 있는데, 믿음[信]과 발원[願]과 념불 수행[行]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믿음만 있으면, 발원과 념불 수행은 저절로 그 안에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14)
[근래 전래된 기독교에서 ‘믿음[信]·소망[願]·사랑의 실천[行]’을 말하면서, 특히 예수님(복음)에 대한 확실한 믿음 하나만 두드러지게 강조하는 교리와 일응 상통하는 것처럼 대비된다.]
예전에 단화장(單華藏) 스승님[夫子]을 따라 공부하던 때에, 당시의 고승대덕들한테 좀더 공부하겠다고 청하자, 그 자리에서 수도에 계신다는 철오 노인의 존함을 귀에 들려 주시던 기억이 새롭다. 선종과 교종을 두루 통달하시면서도 정토 법문을 널리 펼치신다는 말씀이었다. 그래서 선사를 흠모하던 차에, 병인(丙寅: 가경 11년, 1806)년 연경(燕京: 북경)에 갈 일이 생겨, 혼자 속으로 선사를 찾아뵙고 법좌 아래 예를 올릴 수 있겠다고 기뻐하였다.
그런데 서울에 이르자, 선사께서는 이미 홍라산(紅螺山)으로 거처를 옮기신 뒤였다. 그 곳은 북경에서 이박삼일의 거리나 떨어져 있었는데, 나는 당시 세속의 일에 얽매여 결국 거기까지는 가지 못하고 말았다. 그 뒤로 오랫동안 인연이 닿지 않음을 한탄하고 있었는데, 무인(戊寅: 가경 23년, 1818)년 봄에 진익자(眞益子)가 북경으로부터 선사의 유고집을 가져 왔다. 그래서 나도 읽어볼 수 있었는데, 정말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대중들에게 일깨우신 법문은 구구절절 자비심이 북받쳐 오르고, 극락왕생의 길을 가지가지 확실하고 예리하게 관통했다. 북쪽으로 선종의 임제종 기풍을 은밀히 전수하는가 하면, 남쪽으로는 교종의 천태종 법해(法海)를 폭넓게 섭렵하고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리며, ‘어찌하여 그 당시에 선사께 찾아갔으면서도, 눈앞에 지척의 거리에 가로막혀 친견할 절호의 기회를 놓쳐 버렸던가’ 하는 회한(悔恨)의 탄식만 나왔다.
오호라! 사바세계의 인토(忍土)15)는 모든 경계가 고통스럽고 수명은 몹시도 짧다. 그러니 조금만 큰 마음[大心]을 낼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 누가 덧없음[無常]을 일깨우고 경책하면서 한시 바삐 생사 륜회를 벗어나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거의 전부가 끝내 그 문(길)을 찾지 못하여 그만 포기하고 만다.
[사바인토(娑婆忍土): 사바(娑婆)는 사하(沙訶) 또는 색하(索訶)로도 표기되며, ‘감당하고 인내한다[堪忍]’는 뜻이기에 인토(忍土)로 번역함. 사바세계의 중생은 십악(十惡)에 안주하여 벗어날 생각을 안 하기 때문에, 또는 탐진치 삼독 등 온갖 번뇌를 잘도 참아가며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뭇 보살들이 중생들을 이롭고 즐겁게 하는 보살도를 행하면서 도리어 온갖 원망과 질투·비방 따위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힘들거나 싫은 내색 하지 않고 잘 감당하고 받아 넘기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함.]
여러 생에 걸쳐 선근 복덕을 심은 사람만이, 불·법·승 삼보께 공경스럽게 귀의하고, 게다가 최상의 법문인 극락 왕생의 첩경(지름길)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런데도 또 더러는 자기 혼자만의 견문이 확실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로 말미암아, 념불 왕생에 관한 여러 전기와 기록들이 어쩌면 사실을 벗어난 지나친 과장일지도 모른다고 도리어 의심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다가 끝끝내 그 회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망친다. 결국 륜회의 굴레를 달게 받아들이고 온갖 고통을 참으면서 죽음만을 기다릴 뿐이다.
오호라! 확실한 믿음이 생겨나기가 이와 같이 어렵단 말인가?16)
[기독교에서도 무조건 절대 믿음을 유난히 강조하면서도, 그 믿음이 아무에게나 저절로 생겨나는 게 아니고, 하느님의 은총(숙세의 선근 복덕으로 인한 부처님의 가피)으로 주어진다고 해설하는 리치를 참고로 음미해 보자.]
지금 철오 선사께서 서방 극락에 왕생하신 과정을 보건대, 가시기 몇 달 전에 도량을 보호하는 재가불자[外護]들한테 감사와 당부 말씀을 하시고 나서 사원의 업무를 하나하나 당부하셨으니, 이는 가실 때가 이르렀음을 미리 아셨다는 확증이다.
왕생하시던 때에 온갖 깃발[幢幡]이 허공에 꽉 차게 다가오고, 여러 위대하신 보살님들이 뒤이어 나타나시고, 림종의 순간에는 아미타불께서 몸소 영접 나오셨으니, 이는 사바세계의 보신(報身)이 다할 때 상서로운 경계가 나타나고 불보살님께서 친히 영접 나오신다는 확증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상서로운 경계는 선사께서만 홀로 친견하신 것인지라, 믿을 만한 증거가 없다고 우길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특이한 향기가 허공에 가득 풍겼고, 녈반하신 뒤 이레 동안이나 살아계신 듯했으며, 흰 머리카락이 검게 변하고 사리가 영롱하게 나온 사실은 어떠한가? 이는 당시 림종을 지켜본 대중들이 다 함께 보고 이구동성으로 증언하는 바이다. 극락 왕생의 상서로운 조짐은 중국 전체에 두루 알려진 확증이며, 터럭 끝만큼도 의심할 나위가 없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만약 이 소식을 듣고도, 아직도 맹렬히 반성하여 확연히 깨달을 줄 모르고, 홍진 속으로 뒷걸음질치면서 지금 자신의 수행 노력만으로 생사를 감당하고 륜회를 끝마치려 든다면, 이는 과연 누구의 잘못이겠는가?
내가 일찍이 중국의 불교 역사를 살펴보았는데, 진(晋)나라 때 혜원(慧遠) 대사께서 정토 법문을 여시어 초조(初祖)가 되신 뒤, 그 뒤를 이어 조사의 지위에 오르실 만한 분이 거의 끊이지 않았다.
시대순으로 내려오자면, 선도(善導)·승원(承遠)·법조(法照)·소강(少康)·영명(永明)·성상(省常)·련지(蓮池)·사제(思齊) 등이 련종(蓮宗: 정토종)의 9대 조사이시다. 내가 지금 철오 선사의 행적을 생각해 보건대, 미래세가 다하도록 덕망과 기풍이 크게 진작되기에 충분하여, 나중에 조사의 서열을 이어갈 때 결코 빠뜨릴 수 없는 분이라고 믿는다.
때마침 서성패(胥城貝) 보암(寶巖) 선생이 선사의 념불가타(念佛伽陀)를 법문에 뒤이어 법보시하는데, 송도(松濤) 화상께서 법문과 념불가타를 합본으로 인쇄하여 널리 유포시키는 게 좋겠다고 제안하시면서, 인쇄 비용으로 약간의 자금을 먼저 내놓으셨다. 그리하여 두 문집 가운데 선종과 교종과 정토 념불의 요점을 설법하신 정수(精粹)만을 가려 뽑아 간행하게 되었다. 그 나머지 잡다한 저술은 대강의 윤곽만 소개할 따름이다.
왜냐하면, 대체로 천하 후세 사람들이 선종과 교종을 회통하여 함께 극락정토로 귀향(歸向)하는 밑천으로 삼기에는, 무엇보다도 믿음[信]·발원[願]·념불 수행[行]의 세 가지 밑천 가운데서도, 결정코 확실한 믿음으로 극락 왕생함이 최고의 급선무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송도 화상은 사람들한테 념불하라고 권하시는 스님으로서, 서천(西天: 인도) 목정문(目淨文) 장로(長老)의 수계 제자이시다.
청(淸)나라 가경 24년 기묘(己卯: 1819)년 여름 6월 기망(旣望: 음 16일)
호림(虎林)의 삼보제자 전이암(錢伊庵) 삼가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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