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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종신 거사에 대한 답신

의심끊고 염불하세. 인광대사 편지설법

by 明鏡止水 淵靜老人 2023. 1. 6.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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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종신(楊宗愼) 거사에 대한 답신

 

 

종신(宗愼) 거사 보시오.

보내 온 서신은 잘 받아 보았소.

세간의 어리석은 사람들은 인과(因果) 법칙을 잘 모르기에, 착한 일[]을 하고도 화()를 당하는 걸 보면 곧 착한 일은 할 것이 못 된다고 말하는가 하면, 나쁜 짓[]을 저지르고도 복()을 얻는 걸 보면 곧 나쁜 짓도 굳이 멀리할 필요가 없다고 일컫는구려.

이는 화와 복의 결과가 더러는 금방 들이닥치고 더러는 오랜 뒤에 나타나는 줄을 모르기 때문이오. 닥치는 시기가 이르고 늦음은 일정한 기준이 없어서, 빨리는 모든 사람이 함께 지켜보도록 드러나고, 늦게는 한 생(: 생명륜회)을 거치거나 또는 여러 생을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나타난다오. 그래서 숙명통(宿命通)의 안목을 지닌 자가 아니면 알아볼 수 없단 말이오.

이제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한 비유를 들자면, 착한 일을 하거나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은 마치 곡식을 심는 일과 같소. 어떤 사람이 비록 아무리 착하다고 할지라도, 전생에 지은 행위가 전혀 잘못이 없을 수는 없기 때문에, 금생(今生)에 받는 과보(果報)도 역경(逆境)이 없을 수는 없겠지요.

금생에 타고난 이 몸은 보신(報身)이라고 하는데, 이는 금생에 남자가 되거나 여자가 되거나, 또는 아름답거나 추악하거나, 또는 장수와 요절, 가난과 부유, 총명과 우매, 건강과 질병 따위를 타고나는 것은 모두 전생에 짓고 저지른 행위에 따라 받는 과보이기 때문이오. 따라서 이 몸을 보신이라고 하는 것은, 곧 그것이 전생에 지은 행위의 과보로 받은 몸임을 일컫지요. 즉 전생의 원인이 금생의 결과가 되는 것이라오.

금생에 비록 몹시 착하다고 할지라도, 전생의 업장(業障)이 너무 무거우면 금생의 착한 일에 대한 보답을 곧장 받을 수는 없으며, 먼저 전생의 나쁜 짓에 대한 앙갚음을 받아야 하는 것이오. 이는 마치 농부가 작년에 씨앗을 뿌리지 않았다면, 설령 올해 제 아무리 부지런히 농사 짓는다고 할지라도, 가을걷이 전에는 먹을 양식이 없는 것과 같소.

지금 양식이 없는 것은, 올해 부지런히 농사 짓더라도 아무 수확이 없다는 말이 아니오. 지금 양식이 없는 것은, 바로 작년에 씨앗을 뿌리지 않은 원인으로 말미암아 받는 결과라는 뜻이쟎소? 물론 올해 부지런히 경작하면, 가을걷이 이후와 내년에는 먹을 양식이 있을 것이 분명하오.

마찬가지로, 나쁜 짓을 저지르는 자들이 아직 벌[]을 받지 않은 것은, (전생에 지어 놓은) 복이 아직 다 떨어지지 않고 남아 있기 때문이오. 마치 작년에 부지런히 씨 뿌려서 수확한 농부는, 설령 올해 농사 짓지 않아도 아직은 굶주림에까지 이르지는 않는 것과 같소. 그러나 작년에 남은 양식을 다 먹고 나면, 올해는 씨앗도 뿌리지 않았으므로 장차 곡간이 바닥날 것은 뻔하오.

착한 사람이 나쁜 과보를 받는다고 해서 만약 착한 일을 아예 안 한다면 장차 그 나쁜 과보는 더욱 심해질 것인데, 그나마 착한 일을 열심히 해서 나쁜 과보가 그만큼 가볍게 줄어든다는 리치를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되지요. 마찬가지로, 나쁜 사람이 좋은 과보를 누리는 경우, 만약 나쁜 짓을 안 한다면 그 좋은 과보가 더욱 커질 텐데, 안타깝게도 그가 나쁜 짓을 저지르기 때문에 그의 좋은 과보가 그만큼 줄어들고 말겠지요.

세상 사람들은 의식주와 같이 몸뚱아리에 바치는 물건에 대해서도, 모두 넉넉히 갖추어 두고 행여 다 떨어져 곤란을 당하는 일이 생길세라 자나깨나 걱정할 줄 알지요. 그런데 정작 육신과 심성(心性) 및 생명 자체의 중대한 일에 대해서는, 스스로 미리 닦아[預修] 둘 줄 모를 뿐만 아니라, 남들이 미리 닦아 준비하는 것조차 도리어 어리석다고 비웃고, 자신은 제 멋과 기분 내키는 대로 살상과 음욕을 자행(恣行)하면서도, 복 있고 지혜로운 것으로 착각한단 말이오.

그러나 세상에 그 많은 봉사와 귀머거리와 벙어리, 또는 심한 불구와 장애로 의지할 곳도 없는 사람들이나, 마소나 양·돼지와 같이 사람들에게 고되게 부림 당하고 심지어 도살되어 사람들의 입과 뱃속을 채우고 마는 온갖 축생들이, 모두 전생에 스스로 복 있고 지혜롭다고 착각하면서 나쁜 짓을 자행하던 그런 사람들이 자칭 복과 지혜의 결과로 받은 정말 좋은 과보인 줄을 누가 알 것이오?

수행(修行)을 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결연하면서도 강렬한 마음[決烈之心]을 가지고, 그러한 자들의 비웃음이나 비방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끄떡없고 결코 의심 걱정 안 한다는 태도를 지켜야 하오. 만약 남의 비웃음이나 비방을 듣고서 곧 물러설 마음을 품는다면, 이러한 사람 또한 전생에 심은 착한 뿌리[善根]가 너무 얕거나 들떠 있기 때문에 초래된 과보라오.

부처님의 설법에 귀의하지 아니하고 범부(凡夫)나 어리석은 아낙네[愚婦]가 지껄이는 말에 의지한다면, 이러한 사람은 진실로 오랜 세월 동안 생사 륜회(生死輪廻)를 거치면서 영구히 삼악도(三惡道)의 고통을 받게 될 것이오. 인간이나 천상의 몸을 받는 일도 오히려 몹시 어렵거늘, 하물며 생사를 해탈하고 평범을 초월하여 성현의 경지에 들어서며[超凡入聖] 마침내 성불(成佛)하는 커다란 이익인들 꿈에라도 바랄 수 있으리요?

정토(淨土)의 법문은 진실한 믿음[眞信]과 간절한 서원[切願]과 부처를 염송하는 행동[念佛]으로 서방 극락세계에 결정코 왕생하겠다는 것이 그 핵심 요지지요. 만약 념불하는 사람이 서방 정토에 왕생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게 되오.

한 가지 비유를 들어 봅시다. 가령 어떤 왕자가 다른 나라를 떠돌아다니면서 자신이 왕자라는 사실을 믿지도 않고, 다만 하루 동안 음식을 빌어 먹을 수 있기만 바랄 뿐, 굶어 죽지 않는 것으로 기뻐하고 만족한다면, 그 식견이 너무 낮고 졸렬하여, 사람들이 그를 불쌍하고 가엾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소?

그런데 왕고씨(王高氏: 자신은 씨이고 남편의 성이 씨인 어떤 부인을 일컬음)가 불교 경전을 훤히 잘 알면서도, ‘감히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할 망상(妄想)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니, 그 마음과 뜻이 어찌 그처럼 지극히 낮고 졸렬한 정도에까지 이르렀단 말이오? 그가 평소에 가까이 한 스승이 또한 눈먼 수련[盲修如煉]이나 하는 무리임에 틀림없소이다. 만약 그 스승이 정토의 법문을 안다면, 어떻게 그가 이토록 오래 이런 생각에 잠겨 있겠소?

그에게 대신 말해 주기 바라오. 만약 서방 정토에 왕생하려고 발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그냥 귀의를 허락하여 나 자신의 명예를 망가뜨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기꺼이 서방 정토에 왕생하려고 열망하는 경우에만 귀의를 허락하며, 지금 바로 그에게 종신(宗信)이라는 법명(法名)을 지어 보내오. 부처님 말씀을 깊이 믿고 감히 어기지 않으며, 스스로 청정한 행위[淨業]를 닦아 나가라는 의미요.

물론 자녀와 며느리·손자들도 가르치고 일깨워, 가족 모두 함께 인륜을 돈독히 하고 직분을 다하며[敦倫盡分], 간사함을 막고 정성을 간직하며[閑邪存誠], 어떠한 나쁜 짓도 저지르지 말고 온갖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며[諸惡莫作, 衆善奉行], 살상을 끊고 산 목숨을 보호하며[戒殺護生],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의 성호(聖號)를 염송하여, 금생에 업장이 소멸하고 복록이 증대되며, 림종에 서방 정토에 왕생할 수 있도록 닦아 나가야 할 것이외다.

이와 같이 스스로 수행하면서, 아울러 가정과 친척·친구들에게까지 그 감화를 미친다면, 반드시 소원대로 극락 왕생하리다.

부처님께서 정토의 법문을 열어 놓으신 까닭은 중생들에게 극락 왕생을 바라도록 가르치기 위함인데, 그대들이 어떤 사람이길래 감히 부처님 말씀을 옳다고 여기지 않고, 각자 제 멋과 뜻에 맡기려 한단 말인가? 그러므로 모름지기 한결같이 부처님 말씀을 으뜸가는 주체와 근본[宗主宗本]으로 삼아, 이를 굳게 믿고 받들어 행하면서 한 생각이라도 감히 어긋나지 않으려고 힘써야만, 바야흐로 종신(宗信)이라는 법명을 일컬을 수 있겠소이다.

그의 딸 호왕씨(胡王氏: 아버지 성이 씨이고 남편 성은 씨인 부녀)는 법명을 종정(宗淨)이라고 지어 보내오. 세간의 부부와 자녀 가족은 모두 전생에 맺은 업장의 인연[業緣]이 아닌 게 없소이다. 그의 남편은 일찍 사망하고 아들 또한 장가도 못 들고 요절하였으며, 딸은 시집갔으나 청상과부가 되었다고 하니, 일반 세속의 인정(人情)으로 말한다면, 몹시 불행한 운명이라고 탄식하겠죠? 그렇지만 만약 이러한 운명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현상이 덧없는 줄 깨닫고 수행에 전념할 수 있다면, 이러한 모든 고난의 상황이야말로 진실로 생사고해(生死苦海)를 벗어나도록 채찍질하는 훌륭한 안내자가 되기도 한다오.

저기 부귀한 자들을 보시오. 부모 자녀 온 가족이 둥그렇게 모여 앉아 온통 먹고 지껄이며, 시집 장가 들고 자식 손자 낳는 데에 정신을 쏟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 않소? 그들은 설령 한 마음[一心]으로 념불하고 싶어도, 결국 뜻대로 이룰 수 없는 운명이오.

(王高氏)가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자기 딸에게도 한 마음으로 념불하도록 가르쳐 준다면, (이미 세상을 떠난) 그의 남편과 아들과 사위가 모두 그의 도업(道業)을 도와 주는 착한 인연으로 바뀔 것이외다. 또한 그가 정말로 극락 왕생에 전념한다면, 그의 남편과 아들과 사위도 또한 그의 수행 공덕을 인연으로 함께 서방 정토에 왕생할 수 있소이다.

바로 이러한 인연을 두고 일컬어, “금은 제련할수록 정밀해지고[金以煉精] 칼날은 갈수록 날카로워진다[刀以磨利].”고 하는 게요.  한 철 뼛속 스미는 추위를 겪지 않으면, 그윽한 매화 향기가 어떻게 콧속을 후빌 수 있겠는가[不經一番寒徹骨, 爭得梅花撲鼻香]?”라고 일깨우는 격언도 있잖소?

하늘이 사람을 성취시키는 데에는 역경(逆境)이 있고 순경(順境)이 있기 마련이오. 사람이 운명을 깨닫고 하늘을 즐겨 따른다[樂天知命]면 역경이 도리어 순경도 될 수 있지요.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물론 순탄한 운명도 오히려 역경으로 뒤바뀌게 되나니, 이 모든 것은 사람이 마음을 잘 쓰느냐 잘못 쓰느냐에 달려 있을 따름이오.

또한 지금은 세상의 도덕이 몹시 어지러운 환난의 시대라오. 총칼이나 물불·전염병·독충의 재앙들과, 각종 원한의 업장[怨業]으로 말미암아 현대 의약으로도 고칠 수 없는 질환들이 얼마나 많소? 그러나 이들도 만약 아미타부처님과 관세음보살을 기꺼이 지성(志誠)으로 염송한다면, 흉악한 재난을 당해서도 틀림없이 평안무사하게 풀어지게 된다오.

또 임산부가 아이를 낳으려는 순간에 반드시 소리를 내어 나무 관세음보살(南無觀世音菩薩)’을 염송한다면, 결코 난산(難産)은 없을 것이오. 설령 난산하여 금방 죽을 지경이라도, 그 임산부에게 나무 관세음보살을 일념으로 낭송하도록 시키면, 즉각 평안히 몸을 풀 수 있게 되오. 이 방법을 모든 사람에게 말해 주어 알고 실행하도록 한다면, 세상에는 난산이나 난산으로 말미암아 산모와 아이가 함께 죽는 불행한 일이 곧 없어지겠지요.

해산(解産)의 경우에는 알몸을 드러내어 정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리내어 염송하는 것이 혹시 불보살께 죄가 될까 두렵다는 식의 말은 일절 꺼내서도 안 되오. 왜냐하면, 이러한 때에는 산모와 아기의 목숨이 바로 경각에 달려 있어 달리 어찌할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이기 때문에, 평상시 념불처럼 공경과 정결을 갖추어야 한다고 견주어 말할 수 없는 것이오.

또 이 때에는 반드시 낭랑히 소리내어 염송해야 하지, 마음속으로만 묵송(默誦)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오. 마음속으로만 묵송하면 불보살의 감응력(感應力)이 작을 뿐만 아니라, 온 힘을 다 써서 아이를 내 보내야 하는 마당에 마음속으로만 묵송하다가는 자칫 병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오. 물론 방 안에서 출산을 보살펴 주는 사람도 큰 소리로 염송하여 그를 도와주고, 방 밖에 있는 가족 친지들도 또한 소리내어 념불하여 산모를 정신상으로 지원해 주면 더욱 좋겠지요.

여자들이 어려서부터 념불하는 버릇을 길들이면, 나중에 이러한 고통은 결코 생기지 않으며, 장차 림종 시에는 극락왕생할 수도 있소.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라도 임신을 한 때부터 염송하거나, 혹은 출산하기 사나흘 전부터라도 지성으로 하면 모두 되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남의 착한 생각[善念]을 가로막기 일쑤지요. 예컨대, 산모가 아이를 낳으려고 할 때, 모두가 이를 두려운 일로 여기고, 산모 자신이 감히 념불할 엄두를 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조차도 며느리나 딸이 애 낳을 때가 되면, 미리 이를 피해 밖으로 달아났다가 한 달쯤 지난 뒤에야 바야흐로 되돌아올 생각을 한단 말이오. 이러한 것은 모두 외도(外道)의 영향을 받아, 단지 평상시 공경을 다해야 한다는 원칙의 도리만 알고, 특수한 사정에 따라 시의(時宜) 적절히 대응하는 변통의 방법은 모르기 때문이오. 그로 말미암아 세상의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극심한 고통을 받거나 심지어 사망하였겠소? 그러니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래서 이러한 내용을 함께 적어 세상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이롭게 하길 바라는 마음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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