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교와 불교의 윤리강상(倫理綱常)
성품을 다해 불교를 배워야만, 비로소 인륜을 다해 공자를 배울 수 있소. 또 거꾸로 인륜을 다해 공자를 배워야만, 비로소 성품을 다해 불교를 배울 수 있소. 고금에 위대한 충신 효자와 유교 성현의 심법(心法)을 크게 펼친 인물들을 한번 살펴봅시다. 그분들은 대부분 불경을 깊이 연구하고 혼자 조용히 수행하여 은밀히 증명하였소.
(옮긴이 보충 설명: 마찬가지로 역대 스님들도 출가 전에 기본 교육으로 받은 사서삼경 같은 유교 경전 공부가, 몸에 배고 마음에 새겨져 불법과 융화하는 성향이 뚜렷하다. 거기에 노자(老子)와 장자(莊子) 같은 도교의 기본 경전은 특히 선종(禪宗)과 상통하여, 중국 특유의 선불교를 이루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래서 명나라 4대 고승으로 꼽히는 지욱(智旭: 蕅益) 대사나 주굉(袾宏: 蓮池)·덕청(德淸: 憨山) 대사 같은 분들은 유불선 삼교 합일을 적극 주장하며, 유교 경전에 대한 불교 관점의 주석서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유교와 불교 둘을 융합하면 둘 다 더욱 아름다워지지만, 서로 분리시키면 둘 다 손상하고 마오. 세상에 어느 누구도 윤리 강상의 안에 존재하지 않는 자가 없고, 또 어느 누구도 마음과 성품[心性] 밖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오. 이러한 윤리 강상 및 마음과 성품을 지니고, “어떠한 악도 짓지 말고 뭇 선을 받들어 행하라[諸惡莫作, 衆善奉行.].”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기를 극복하여 예로 복귀하며[克己復禮] 사악함을 막고 정성을 간직하라[閑邪存誠]는 유교의 인격 수양에 보조 방편으로 삼는 것이오.
그래서 부모가 자애롭고 자녀가 효성스러우며, 형이 우애하고 아우가 공경하는 등, 모든 인간관계에서 서로 각자의 윤리와 성품을 다해야 하오. 그래야 헛되고 망령된 번뇌 미혹을 제거하고 본래 지닌 불성으로 되돌아갈 수 있소. 이렇게 보면, 유교와 불교는 단지 본체(本體: 기본 성질)만 하나인 것이 아니라, 그 작용(作用: 현상 효과)도 결코 둘이 아님을 알 수 있소.
불법은 십법계(十法界)의 공공(公共)의 법임을 알아야 하오. 어느 한 사람 닦아서 안 되는 법도 없고, 어느 한 사람 닦을 수 없는 법도 없소. 불교가 인륜을 저버리고 성현의 도를 해친다고 비난하는 사람(특히 유교 가운데 척불론자)들은, 모두 불교의 진짜 낯빛을 보지도 않고서 지껄이는 소경이나 다름없소.
왜 그런고 하면, 부처님은 부모에겐 자애를 말하고 자식에게는 효도를 말했기 때문이오. 또 군주에게는 어짊[仁]을, 신하에게는 충성을 말했소.(좀 더 정확히는, 임금에게는 義로움을 말함) 남편의 화목과 아내의 순종, 형의 우애와 아우의 공경 등, 세상의 모든 좋은 말씀과 행실은 그 과거의 원인과 현재의 과보뿐만 아니라, 현재의 원인과 미래의 과보까지 상세히 진술하지 않은 게 없소.
자애와 효도 등의 윤리를 말하는 것은 유교와 똑같소. 그러나 삼세의 인과 관계를 상세히 보여주는 것은, 유교에서 들어볼 수도 없는 내용이오. 하물며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여 무상의 보리를 원만히 이루어, 얻을 것도 없는 궁극의 법으로 돌아간다는 가르침이야, 말할 필요나 있겠소?
애석하게도 그 사람들이 이런 내용을 못 본 것뿐이오. 만약 상세히 읽어보고 깊이 생각해보았더라면, 눈물을 펑펑 쏟으며 통곡을 해야 마땅할 것이오. 예전에 뭣 모르고 부처님(가르침)을 비방했던 죄가 비통하기 그지없어, 그 통곡 소리가 삼천대천세계를 진동하고도 남을 것이오.
부처님과 조사들을 공부하려면, 모름지기 먼저 성인과 현인들을 모범으로 본받아야 하오. 가령 자신의 행실에 오점이 있고 윤리 도덕이 크게 어긋나 삐뚤어진 사람이, 패륜의 죄명을 뒤집어쓰는 판에 어떻게 불제자가 될 수 있겠소? 불교가 비록 출세간의 법이긴 하지만, 얕은 데서 깊은 데로 들어가며, 아래서 배워 위로 통달하기 때문이오.
따라서 진짜 불자가 되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먼저 진짜 유생(선비)이 되는 데서 시작해야 하오. 만약 정심(正心) 성의(誠意)나 극기복례(克己復禮)·공경과 정성·효제충신 등의 윤리도 제대로 붙잡지 못한다면, 그렇게 튼실하지 못한 뿌리와 기초로 어떻게 불교를 배울 수 있겠소?
예로부터 효자 집안에서 충신을 선발한다고 하였소. 그런데 어떻게 유교에 어긋나는 행실을 가지고, 여래 집안의 일을 감당할 수 있겠소? 위로 부처님 지혜의 생명[慧命]을 잇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하는 일이 그리 간단한 줄 아오?
불법은 크게는 망라하지 않는 게 없고, 작게는 빠뜨리는 게 없소. 세간과 출세간을 막론하고 어느 법 하나 불법의 범위에 포함하지 않는 게 없소. 그런데 세간의 조그만 명분에 얽매이는 자들은 으레히 출가를 패륜으로 여기고, 불교의 진면목은 살피지도 않은 채 비방을 일삼는구료. 마치 목구멍에 걸릴까 염려하여 아예 식음을 전폐하여 스스로 목숨을 잃는 거나 같으니, 정말 불쌍하오.
만약 우리가 눈을 제대로 뜨고 역사를 살펴본다면, 불법이 세상에 퍼진 지 2천여 년 동안 그 도가 얼마나 성행했는지 알 것이오. 얼마나 수많은 성왕과 어진 재상·영웅호걸·위인들이, 앞을 다투어 불법을 보호 유지하고 전파해 왔소? 그 사실이 바로 일반 범부의 감정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진짜 도가 있음을 증명하는 게 아니겠소?
물론 어쩌다 식견이 좁고 편벽한 유생들이 극단으로 배척하기도 하고, 포악한 군주가 나타나 탄압·훼방하기도 하였소. 그러나 그러한 배척과 탄압은 결국 한 손으로 해를 가리고, 하늘을 향해 침 뱉기 식이었소. 자신의 식견이 얼마나 작고,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망령된 죄악인지를 스스로 드러내는 짓이었소. 그러니 부처님과 불교에 무슨 손상이 되겠소?
그리고 유교에서는 겉으로는 불교를 배척하고 반대하는 척 명분을 내세우면서, 안으로는 불교의 이치를 닦아 증명하는 실질을 챙겨 왔소. 송나라[理學] 이후 유교의 대가들은 그러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라오. (옮긴이 보충: 도가의 노자와 장자에 대해서도, 보통 유생들의 태도는 겉으로 배척하고 속으로 열중하는 이중성을 보여 왔다.)
부처님을 배우는 일은, 원래 인간의 도리를 다한 다음에 비로소 본격 착수할 수 있소.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예의염치(禮義廉恥) 같은 기본 윤리도 하나 실천하지 않으면서, 온 종일 부처님만 받들어 모신다고 부처님이 보우(保祐)해 주시겠소?
불교는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법을 총망라하오. 그래서 부처님은 각자가 직분에 맞는 인도(人道)를 다한 다음, 출세간의 법을 닦으라고 가르치셨소. 비유컨대, 수십 층의 높은 누각을 지으려면, 반드시 먼저 기초를 깊이 파고 튼튼히 다지며 물길을 잘 터야 하는 것과 같소. 불교를 배우는 것도 이와 같소.
옛날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조과(鳥菓) 선사에게 “어떤 것이 불법의 큰 뜻입니까?”라고 물었소. 그러자 선사는 주저 없이 “어떠한 악도 짓지 말고, 뭇 선을 받들어 행하라[諸惡莫作, 衆善奉行.].”고 대답했다오.
불법을 배우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먼저 자기를 극복하고 홀로 있음을 조심하며, 하는 일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와 진실하게 행해야 하오. 이러한 사람은 진짜 불제자라 할 것이오. 만약 간악한 마음을 품고서 불법을 빌려 죄업이나 면하고자 꾀한다면, 이는 먼저 독약을 잔뜩 마셔 놓고, 나중에 양약(良藥)을 조금 먹는 것과 같소. 그러고도 몸이 가볍고 건강하며 장수하길 바란단 말이오?
세상에는 문장이 천하를 압도하고 공적이 우주에 혁혁히 빛나는 영웅호걸과 대장부가 적지 않소. 그런데 그들이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여 생사윤회를 해탈하지 못한 까닭은 무엇이겠소? 밖으로만 드러나느라 안을 빠뜨리고, 말단 지엽의 유위(有爲)에만 치중하느라 근본인 무위(無爲)를 소홀히 한 탓이라오.
세상사람 가운데 누가 하나하나 완전무결할 수 있겠소? 우리는 단지 윤리 강상을 다하면서, 정토 염불 법문의 수행에나 힘쓰면 그만일 따름이오. 어느 겨를에 다른 것을 따지고 계산한단 말이오?
봄가을 제사는 유교의 예법에서 아주 중시하오. 그런데 세시(歲時) 명절에 선망(先亡) 조상을 천도하는 법회는 불교에서 더욱 숭상하오. 물의 원천과 나무의 뿌리를 생각하며, 그 은혜를 기리는 마음으로 상례와 제례를 정성스레 받들어 모시는 일은, 세간의 유교나 출세간의 불교나 무슨 차이가 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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