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원만한 체결을 위하여 정부가 미국산 소고기 수입협상을 타결하면서, 광우병(狂牛病) 위험에 대한 우려로 온 국민이 생명밥상의 불안을 느낀 나머지, 정부에 대한 실망과 분노로 세계 초유의 새로운 촛불시위를 일으켰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협상은 절차와 내용상 아쉬움이 없지 않고, 그 위험성과 불안은 여전히 떨치기 어렵다는 견해에 공감한다. 이러한 사태의 발생은 기본적으로 수많은 국민들의 공동업장(共業) 탓에 초래한 자업자득으로 여겨진다. 전 국민의 1/3정도가 무관심과 체념으로 국민의 신성한 권리의무를 포기하여 투표하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어쨌든 국민의 직접투표에 의한 다수결원칙에 따라 지도자를 직접 뽑는 민주주의 제도 아래서, 나머지 소수는 어차피 ‘다수결’의 공업(共業)에 함께 끌려갈 수밖에 없는 운명공동체가 아닌가?!
허지만 한편으로, 나는 내 특유의 관심인 ‘채식’의 관점에서 ‘미국산 소고기 수입 사태’를 차분히 음미해 본다. 상대적 현상세계에서 어느 한 사물(事物)도 오로지 좋고 이롭거나, 아니면 오로지 나쁘고 해로운 법은 없으리라. 미국산 소고기 수입이 국민 대부분한테는 위험하고 해롭고 정신상 심리상 위협을 크게 끼치겠지만, 또 어느 일부 집단에는 많은 이익을 줄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국민한테도 오직 해롭고 나쁜 결과만 강요하지는 않으리라 본다.
왜냐하면, 우선 광우병 위험 높은 소고기의 위생과 검 역 등 제반 관련문제에 대하여 언론이 폭넓게 보도하고 자세히 토론하면서 국민 여론이 저절로 형성되었고, 적어도 많은 국민들이 새로운 지식정보를 널리 접하여 깊이 알고 깨닫는 인연이 되었다. 100일이 넘는 꾸준한 촛불시위로 대의민주주의의 대안 가능성을 모색해 본 경험도 귀중한 소득일 것이다. 반면교사의 효과는 톡톡히 낸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번 사태로 말미암아, 국민 대다수가 ‘광우병 소고기’에 대해 경각심을 높이고, 우선은 ‘미국산 소고기’가 주 표적이겠지만 ‘소고기 안 먹기 운동’이 제법 널리 퍼지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어떤 언론잡지의 특집기획에서도 다뤘듯이, 비록 소수지만 “차라리 이번 기회에 채식할까?”라는 자각의식이 싹튼 점은, 내가 보기엔 이번 사태에 따라온 가장 뜻깊은 이바지가 아닐까 여긴다. 촛불시위에서 켜진 가장 밝고 훤한 ‘국민 식생활 개선을 향한 의식혁명의 촛불’이라고 보여진다. 또, 나한테 이 글을 쓰게 다그치고, 오래 질질 끌어온 “채식명상”이란 책을 지난해와 올해 여름 무더위에 손질하여 출판을 준비하도록 채찍질한 인연도, 지나칠 수 없는 이번 사태의 커다란 공헌이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 지금 당장 주워담기는 어려우므로, 임기응변의 차선책으로나마 전화위복(轉禍爲福)의 인연을 삼아야 하리라! 인생은 어차피 외부의 도전과 상황강제에 압박을 받아, 그에 대응하면서 자신을 채찍질하여 성장 발전하는 속성도 있다. 고립한 주관상황에서 이성과 지성에 바탕을 둔 순수한 자유의지로만 줄곧 향상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우리 국민들은 그동안 헐벗고 굶주린 역사경험 탓에, 급속한 경제발전과 함께 너도나도 군침을 흘리며 고기에 탐닉한 자도 적지 않았다. 스스로 고기 먹는 걸 절제하지 않고 탐욕이 지나치니까, O-157이니 구제역이니 조류독감이니 광우병 같은 괴질이 생겨나고, 올해는 돼지독감이라는 신종 인플루엔자가 멕시코에서 나타나 세계로 퍼지고 있다. 어쩌면 자업자득이라는 성어가 제격이다.
속담에 “나무 잘 타는 놈은 나무에서 떨어져 죽고, 헤엄 잘 치는 놈은 물에 빠져 죽는다”고 하더니, 고기 좋아하는 놈은 고기 때문에 온갖 희한한 문명병과 괴질에 걸려 죽을 판인지 모른다. 그러니 고기 먹는 사람 치고 막연한 불안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는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국민이 어처구니없어하는 이유가 따로 있다. 정부가 한미 협상으로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결정하면서, “값싼 양질의 고기를 국민들한테 충분히 공급하기 위해 수입하니, 먹고 싶은 사람만 먹고, 정 먹기 싫으면 안 먹으면 될 게 아니냐?”는 아름다운 ‘선택의 자유’를 내세운 것이다.
문제는 ‘자기의사’와 관계없이 ‘선택’을 강요당해야 하는 상황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20년째 채식하는 필자가 작년 추석에 선친 묘소에 벌초하러 가서, 누나가 술 한잔 올리고 옆에 놓은 ‘쌀과자’를 무심코 한 조각 떼어먹었는데, 나중에 보니 성분에 ‘젤라틴(돼지고기)’이 들어있는 걸 보고, 내 부주의와 방심에 스스로 한참 어안이 벙벙하여 몹시도 부끄러웠다. 결국 밖에서 만든 음식은 맘놓고 먹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공자가 출처불명의 음식이나 시장서 사온 고 기 등은 먹지 않았다는 습관이 얼마나 섬세한 마음인지 새삼 놀랍다. 현재 기업 제조상품 중 수입소고기가 들어가는 식품이 엄청 많다는데, 어떻게 일일이 살펴보고 가려낼 수 있겠는가? 거의 원시불가능에 속하는 공업(共業)운명인 셈이다.
그래서 결국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선택’은 아예 ‘고기’를 전혀 먹지 않기로 작정하고, ‘채식주의’로 완전히 전환하는 ‘음식혁명’의 결단이 아닐까?! 어차피 ‘한미동맹’과 ‘지구촌 한 가족’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정치 외교 군사 경제 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과 쉴 틈 없이 통상교류를 하는 ‘한겨레의 공업(共業)’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이제 마지막 남는 것은 개인별 업장(別業)에 따라 각자 스스로 현명하고 슬기로운 선택과 결단을 내리는 일이다.
채식을 하지 않고 고기를 먹으면서, 지구온난화 위기를 걱정하고 온실가스 감축을 떠벌리며 녹색성장을 내세우는 짓은, 세상물정을 전혀 모르는 아주 어리석은 바보천치가 아니라면, 헛소리를 지껄이며 빈말잔치를 벌이는 매우 위선적인 정치선전일 따름이다.
서울대같이 큰 대학에서 열 개 가량 될 식당 중 하나는 채식 전용으로 운영하면 좋겠다는 게 필자의 평소 염원이다. 최근 전남대에서 학생식당 안에 채식 배식(配食)창구를 설치하고 채식버거 등을 공급하는 방안을 논의한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앞으로 잘 이루어지길 바란다. (다행히 반갑게도 이 책 출간 직후에 서울대 제2학생식당 한쪽에 채식창구가 새로 문을 열었다.)
죽지 않고 살려고 발버둥 치다가 수행의 길로 들어서 채식한 지 어느덧 20년이 되었다. 지나고 보니 채식한 건 눈 깜박할 사이 같건만, ‘채식’ 글을 써서 알려야겠다고 마음먹고 손을 댄 지는 아주 오래된 아련한 역사 같다. 1990년대 중반 대만서 구해온 채식 관련 책들을 읽어보고 나서 ‘채식의 과학․철학․종교’를 주제로 처음 원고를 집필해 묵혀두다가, 전남대 부임한 뒤로는 강의와 연구로 바쁜 나날을 보내느라 출판할 엄두도 못내고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정좌(靜坐)나 산행 중에 떠오르는, ‘채식’과 관련한 사유명상을 한 꼭지씩 수상(隨想: 에세이)으로 정리해 인연 따라 발표한 글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한없이 미루어오던 채식 책을, 늦어도 채식한 지 20주년 기념으로는 펴내야겠다며 재작년부터 벼르고 준비해왔는데, 작년에 연구년(안식년)을 받아 여유도 있어 바짝 정신과 기력을 집중했다. 본디, 채식한 지 첫 10년 동안 집필한 ‘채식의 과학․철학․종교’를 제1부로 하고, 교수가 된 뒤로 채식한 지 두 번째 10년 동안 쓴 수상문(隨想文)을 모아 제2부로 하여 펴내려고 편집하였다. 이왕이면 채식을 되도록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에서 서울에 있는 출판사를 대여섯 곳 차례로 두드렸다. 원고를 읽고 심사하길 기다리는 동안 훌쩍 몇 달이 지나버렸다. 대부분 글의 내용이 요즘 독자들의 정신 및 사고 수준에 부담스러워 잘 팔리지 않을 거라는 판단에서 출판을 사양하였다.
결국 우리 전남대출판부에서 내게 되었는데, 여기서도 내용과 분량이 너무 버겁다고 여기기에, 마침내 용단(勇斷)을 내려 첫 10년 동안 기초한 제1부는 빼놓고, 두 번째 10년 동안 교수가 되어 쓴 수상문(隨想文)만 모아 몇 꼭지 더 보탠 상태로 펴내게 되었다. 남겨진 원고는 나중에 내용을 더욱 보충하여 “채식학(Vegetarianology)”으로 따로 출판할까 생각한다. 글을 쓰고 펴내는 동안 도와준 숱한 인연에 감사한다.
작년에 흥미로운 기사를 하나 봤는데, 지난해 대선에서 떨어진 정동영 후보가 문경 어느 암자에서 수양하면서, ‘채식’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소식이다. 작년 미국으로 공부하러 떠나면서 경향신문과 특별대담에 밝힌 소식이다. 지금도 그 결심을 꾸준히 이어가는지는 모르지만.
“자, 우리도 이참에 차라리 채식할까요?
헌사 (0) | 2022.1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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