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경제가 아직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던 1960-70년대에, 필자는 몹시 낙후한 시골 바닷가에서 유년과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변산반도가 국립공원이 된 뒤로 요즘엔 내소사랑 채석강, 새만금방조제 등의 관광지와 어우러져 곰소가 젓갈 및 주께미로 제법 유명해진 모양인데, 내가 자랄 적 고향은 그저 조그만 천일염 산지로나 알려진 정도였다. 그 때는 전혀 몰랐었지만, 지금 회고해 보면 우리는 몹시도 가난한 생활수준이었다. 고향이 해안이었던 까닭에, 그래도 가끔은 글자 그대로 생선(生鮮)을 맛볼 수 있었다. 고향을 떠난 뒤로는, 어쩌다 먹는 물고기가 그 때 그 맛과 비교되어, 거의 먹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육류는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 또는 가족의 생일이 아니면 구경할 수조차 없는 형편이었다. 계란도 봄가을 소풍 때나 반찬으로 등장하는 정도였다. 사실 보리밥에 쌀을 한두 줌 놓아, 그것도 됫박 쌀을 팔아다가 먹는 것이 고작이었다. 특히 여름 저녁에는 으레 수제비나 칼국수로, 그리고 겨울 점심에는 구황(救荒) 식물이라는 고구마로 끼니를 대신하였다. 물론 이러한 식생활은 비단 필자만의 체험이 아닐 것이며, 지금 사오십 대 이상의 장년 세대 가운데, 특히 시골 출신들은 대부분 공통으로 겪었던 시대상일 것이다.
어쨌든 바닷가에서 자라 해물을 자주 구경하긴 했지만, 어렸을 적 밥상은 주로 채식이었다. 상급학교에 진학하느라 도시로 유학 나오면서, 우리의 경제수준 향상과 함께 식단이 어느새 살생의 피비린내로 물드는 줄도 모르고, 나의 영육(靈肉)도 가랑비에 속옷 젖듯 점차 업장이 두터워만 갔다. 1970년대 후반 전북 도청 소재지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도, 값싼 하숙집 밥상에 고기가 오르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1979년 서울에 올라와 대학에 다니면서부터, 영양사가 식단(食單)을 짜는 대학 기숙사에서, 비로소 규칙적으로 어류와 함께 육류를 접하기 시작한 셈이다. 그때만 해도 아직 어려 자각(自覺)이 없던 시절이라, 음식이 체질이나 건강․지혜 등과 어떠한 상관관계를 갖는지에 대해, 전혀 알거나 느끼는 바가 없었고 관심조차 없었다. 그저 종전에 별로 보지 못하던 귀한(비싼) 반찬이 공동식단으로 올라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정도였다. 4년간 기숙사 생활을 계속하는 동안, 그리고 그 이후에도, 나 자신은 한 가지 의문에 계속 사로잡혀 왔다.
“왜 그리도 풍부한 영양과 다양한 식단으로 운영하는 기숙사 식사가, 나를 전보다 살찌우거나 건강하게 만들지 못했는가?”
어쩌면 음식물에 따뜻한 인정(人情), 특히 모정(母情)이 빠졌기 때문에, 물질적 영양만으로는 모자랄 것이리라고 추측할 따름이었다. 갑자기 대폭 증가한 육식이 나(인간)의 체질과 식성에 맞지 않기 때문일 것이라는 이유는, 꿈에도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었다.
대학원에 진학하여 조교업무를 겸하면서, 과욕과 과로에다 무절제까지 겹쳐 내 심신은 극도로 피곤에 지쳤다. 드디어 발병한 만성간염은 나에게 엄청난 경종과 시련으로 다가왔다. 그즈음 송광사 수련대회에 참석할 인연도 닿아, 고요한 심령의 참선 명상과 함께 정갈한 순수채식공양의 묘미를 비로소 새롭게 맛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여운은 4박 5일 출가에서 환속한 뒤 길어야 한 달도 채 이어지지 않았다.
서울 생활 8년여만에, 필자는 중화민국(中華民國) 대만(臺灣)에 3년간 유학(遊學)하게 되었다. 그때 이미 내 육체 건강은 악화 일로의 상황에 있었다. 유학에 필요한 서류를 갖추느라 적십자병원에서 건강 검진한 결과, 의사가 입원해서 치료를 받아야 할 형편이라고 극구 만류하는데도, 나는 의사의 권고조차 무시하고 간염검사를 생략하는 병원을 찾아 독단으로 유학을 강행하였다. 그리하여, 급기야 죽음 일보 직전까지 치달아야만 했다. 풍습(風濕)이 유난히 심한 아열대 기후에다, 언어 및 연구 학습에 적응해야 하는 현실로부터 비롯하는 정신적 육체적 부담도 물론 몹시 컸다. 하지만 온통 고기 아니면 기름기 투성이로 느끼하기 짝이 없는 음식은, 특히 매일 세 끼니 때마다 이맛살을 찌푸려야 하는 심난한 고통이었다. 초반에는 채식 전문점의 존재를 생각조차 못했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물에 삶거나 살짝 데쳐서 무치는 나물과, 아예 생으로 담그는 김치 같은 한국의 반찬이, 얼마나 담백하고 정갈한 맛을 지닌 것인지, 새삼 절감하고 몹시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렇게 2년 반을 악전고투한 끝에, 귀국을 반년 남짓 남겨 두고, 우연히 새로운 수행(修行)의 인연을 만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식생활에서도 ‘채식(菜食)’이라는 일대 혁신의 계기를 맞이하였다.
아아! 채식공양을 식생활의 기본원칙으로 자각(自覺)하여 본격 실행하기로 결심한 것은, 박사과정 진학 후 어떻게 인연이 닿아 - 하늘의 안배와 불보살님의 인도이시리라! - 유학하게 된 대만에서, 예정한 3년의 마지막 한 학기를 남겨놓고, 죽지 않으려고 제 발로 걸어 들어간 수행도량에서였던 것이다. 채식의 복음(福音)에 비로소 영혼의 귀가 뜨인 기연(機緣)은 죽음의 문턱에서, 그것도 이역만리 대만(臺灣) 땅에서, 유불선(儒佛仙) 삼교합일의 종교수행 법문과 함께 맞이하였다. 나면서부터 주어진 따분하고 미지근하던 모태신앙이 상당한 방황과 시험을 거쳐, 마침내 영혼이 새로 태어나는 자아신앙으로 환골탈태(換骨脫胎)했다고나 할까?
7년쯤 뒤 간디 자서전을 읽어 알았지만, 말 그대로 철저한 채식의 모태신앙에서 자란 간디도 나중에 영국 유학 가서 채식의 원리와 이상을 새롭게 자각하고 종신서원을 세워 실행하였단다.
여하튼 처음 시작할 때, 완전채식을 수행의 필수조건으로 엄격히 요구한 것은 아니었지만, 도량에서는 채식을 한다는 규칙(계율)에 따라, 이왕이면 채식도 함께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아예 한학기 수업과 책을 몽땅 내려놓고 도량에서 살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채식은 자연스러운 귀결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 도량에서는 우유와 함께 계란은 허용하는 가장 느슨한 채식을 채택했기에, 나도 처음에는 거기에 따랐다.
이 모든 인연은, 죽지 않고 살아야겠다는 생명의 의지와, “공자(孔子)는 나이 삼십에 자립(三十而立)했다는데…” 라고 마음에 되뇐 오랜 염원의 덕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1990년 초부터는 심성(心性: 靈魂)의 새로운 자각과 함께, 정신적 육체적으로 완전한 개혁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 때 시작한 종교철학적인 심신 수행과 채식 습관을 지금까지 계속 유지해 오고 있다. 그로 말미암아 나의 영혼이 제2의 탄생을 맞이했음은 물론이다. 뿐만 아니라, 극도로 피폐했던 육체도 기사회생(起死回生)의 전기(轉機)를 이루었다. 어쩌면 주역 혁(革)괘에서 말하는 군자표변(君子豹變)이나 대인호변(大人虎變)과 같은 자아혁명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사실 나는 대학원에 진학해 조교까지 겸하면서 과로하는 과정에서 만성 활동성 간염을 심하게 앓아, 군대도 재신검을 받아 면제받을 정도였다. 그래서 서양 의학에 정통했다는 의사들은 영양 보충, 특히 동물성 단백질을 충분히 섭취해야 한다고 진단을 내렸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대만에 유학하겠다고 건강진단서 발급을 위해 신체검사를 신청하자, 의사는 나한테 입원해서 요양하며 수혈 치료까지 받아야 할 사람이 무슨 놈의 유학이냐고 극구 만류했다. 그러나 나는 독단으로 어떻게 유학용 영문 건강진단서를 발급 받아 유학 길에 올랐다. 그리고 유학 기간 말미에 시작한 채식을 지금까지 이십년 가까이 지속해 오면서, 건강도 대체로 회복했다. 게다가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동안에는 악성 빈혈에 걸려 두 차례나 쓰러졌다. 한번은 대학 은사이신 김철수 교수님께서 수혈이라도 해서 건강을 찾고 열심히 연구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권유하시는데, 나는 역시 고집스럽게 수혈은 고사하고, 약물이나 고기 보약도 입에 대지 않은 채, 오로지 채식과 수행정신력으로 이겨냈다.
그 과정에서 시련과 고통도 적지 않았다. 1990년 여름 귀국한 뒤, 특히 음식으로 겪은 곤욕은 너무도 컸다. 속세인이 우리나라에서 완전채식을 지탱하기는, 단 하루도 무척 어렵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했다. 그 전에는 전혀 몰랐던 사실이, 새로운 차원의 생활 관점에서는, 여간 중차대한 장애가 아닐 수 없음을 알았다. 육식뿐만 아니라, 파 마늘 등 이른바 오신채(五辛菜)도 안 먹게 된 데다가, 중화민국(中華民國)에서 3년간 유학하는 동안 고추를 전혀 먹지 않는 습관이 들어, 매운 음식을 도대체 입에 댈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귀국과 함께 닥친 시련은 하루하루 지옥 그 자체처럼 느껴졌다. 나의 살던 고국은, 얼른 밖으로 드러나지는 않는 나의 수행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 채, 당장 눈에 띄는 식생활의 변화에 대해서 너무도 민감하게 회의적으로 반응했다. 자친께서는 본능적으로 자식의 건강을 염려하고 나섰고, 형제와 친지, 그리고 학교 선생님들과 친구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결같이 함께 밥 먹기 어려운 불편함과, 언제 자기 곁(세속)을 떠나지 않을까 하는 한 가닥 불안함, 그리고 ‘지가 뭔데 바로 도인이 되겠다는 거야?’ 하는 식의 비아냥거림과 약간의 미묘한 시기질투까지 복잡하게 얽힌 심리반응을 점차 강하게 드러냈다.
그래서 아예 외식(外食)을 단절해 버렸다. 그러니, 그나마 변변치 않던 사교적 인간관계마저 거의 끊어지고, 심지어 집안 가족의 이해와 협조를 얻는 데도 무척 힘들었다. 사실 필자의 집요한 결심과 인욕(忍辱), 그리고 자모(慈母)의 무조건 포용과 헌신적인 사랑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다. 강인한 인내심과 끈기를 가지고 5년 남짓 지속하자, 그 뒤로는 주위 사람들이 우호적이든 냉소적이든 간에, 일단 내 채식주의에 대해 어느 정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어, 정신적 심리적 부담은 다소 줄어든 편이다.
도가 높아지면 마장도 따라서 더 높아진다(道高魔盛)더니, 달리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상대적인 역풍도 더 거세지는 법! 중국에서는 “도가 한 자 높아지면, 마는 한 길 높아진다.(道高一尺, 魔高一丈.)”고 한다. 귀국 후 박사과정 복학해 수료할 때까지, 학교에 나갈 때는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녔다. 파․마늘도 안 먹는 데다가 대만서 3년간 고춧가루를 안 먹는 데 습관이 들어 버려, 밖에서 반찬을 아무리 잘 골라 가려먹어도 그 매운맛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심지어 지도교수님의 식사초대도 사양하였다. 수업이나 특별한 볼일이 없는 날은 아예 학교에 안 나가고, 나가는 경우도 되도록 식사시간을 피해 다녔다. 처음에는 인사상 어쩌다 좀 중요한 회식에 동석은 했는데, 박사수료 후에는 논문 쓴다고 아예 두문불출하다시피 했다. 규칙적으로 관악산에 운동 삼아 오르내리는 일 이외에는, 집에서 잠자고 밥 먹고 글 쓰고 쉬다가 수행하는 것이 내 일과의 전부였다.
이러한 객관적인 사회여건을 가슴 속 깊이, 그리고 뼈에 사무치게 통감하면서, 필자는 우리나라에도 하루 빨리 예전과 같은 채식 위주의 식생활로 되돌아오기를, 매일같이 간절히 염원하여 왔다.
수행하다 보면 시련은 으레 가장 가까운 데서 가장 크고 강하게 닥치는 법이다. 하긴 남이야 내가 죽을 쑤든 풀을 쑤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좋게 말하면 나한테 사랑과 관심을 가진 분들이, 달리 말하면 나한테 기대와 애착을 가진 분들이 나의 세속 이탈 성향에 염려하고 간섭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사적인 감정(人情)을 갈고 닦아 천지자연의 진리와 도덕(天理, 天道)에 합치하게 대승적인 자비(慈悲)로 승화시키는 과정이 바로 수행의 본래 모습이리라.
공부 잘해 서울 법대 들어갈 때만 해도, 사법시험 합격해서 검판사 되어 출세하고 집안을 번창시키길 열렬히 기대했는데, 고시도 포기하고 교수한다고 대학원 가서 유학까지 가더니만, 아니 대만에 갔다 오더니 사람이 완전 딴판이 되어 이제 자칫하면 박사도 교수도 팽개치고 출가 수행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런 우려를 용케도 누르고, 일단 박사도 따고 7년 가뭄 기다려 교수자리도 얻었다.
그간 채식과 수행 때문에 겪은 고초를 말과 글로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으리오? 사람을 만날 때마다 식사 때마다, 크고 작은 박해와 고난의 십자가가 나를 따라다니며 영혼을 짓눌렀다. 박사논문 심사 때는 지도교수님의 배려로 학교 안에서 간단히 두 차례 점심대접으로 때웠는데, 내가 동석은 하였으나 심사위원들 식사하시는 걸 지켜만 보았으니, 참으로 전무후무할 진풍경이었으리라.
귀국 직후 법제연구원 자리가 나서 추천 받았는데, 채식과 수행의 기초가 잡히기 전 세속사회에 적응할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박사논문 준비에 전념하겠다는 핑계로 사양했다. 그리고 시간강의도 전혀 하지 않았다. 박사학위 받고 2년 반만에 모교에 자리가 났으나, 우여곡절 끝에 응모해 두 차례 계속 밀려났다. 삼세인과로 따지면, 아마도 내가 전생에 큰 빚이나 죄를 졌든지, 아니면 모교 교수자리에 앉을 만한 복덕을 쌓지 못했든지 둘 중의 하나겠지! 하지만 현세의 인과로만 따지면, 채식과 수행으로 말미암은 세속 인간관계(人和)의 실패가 주요인이리라! 그때부터 5년 동안 18회나 교수공채에 미끄러졌다. (몇 번은 전공 부적합이 이유) 가장 합리적이고 지성적이라는 교수 사회, 그것도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 자유와 평등을 다원화한 현대 민주사회의 최고 법원리라고 역설하면서 연구․교육하는 법대에서, 나의 채식주의가, 그 거창한 종교신앙의 자유와 양심(사상)의 자유라는 대의명분은 그만 두고라도, 술과 담배를 먹지 않고 커피대신 녹차를 마시는 하나의 평범한 기호로조차 인정받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비행기 기내식에서도 채식을 예약하면 우선 대접해 주는데…. 어쨌든 그래도 나는 채식의 신념을 굽히거나 타협하고 싶지 않았다.
한번은 가까운 교수님이 몹시 못마땅하셨는지, 이젠 “너랑 같이 밥 안 먹겠다”고 하시며, “풀은 너나 많이 먹어라”고 핀잔을 주셨다. 그리고 논문을 마치고 모교에 자리가 나서 공채에 응모하는데, 교수 추천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두 번이나 미끌어진 뒤에는 서로 서먹해져서, 매년 한 차례씩 새해 세배 드리는 정례 인사를 제외하고는 두문불출하다시피 지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그 교수님이 직장암으로 입원해 수술 받아 문병을 갔는데, 다행히 초기에 발견해 잘라내 무사하였다. 잘 아시다시피, 직장암은 지나치게 곱고 부드러운 음식과 특히 육식 과다로 섬유소가 모자라 발병하는 걸로 정평이 나 있다.
나중에는 약간의 오기도 이는 걸 느꼈다. 여태 내가 온갖 불이익과 수모를 당하며 갖가지 박해와 고난을 참고 버티어 왔는데, 이제 와서 그만 두기에는 그동안의 희생과 대가가 물거품처럼 헛수고로 돌아갈 게 아깝게 여겨지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그럭저럭 버티고 애쓴 덕분에, 학위 취득 7년 만에, 채식 수행 만 11년 만에 42세의 늦깎이로 전남대 법대에 전임강사로 취직했다. 부임한 다음에는 내가 그간의 채식원칙을 저버리면, 자신과 신(부처님)에 대한 배신이고 변절자가 될 것 같아 절개와 지조를 지키기로 맘먹었다. 그리고 학장 및 선배교수들한테 나의 채식원칙을 말씀드리고 양해를 구했다. 대신 학과의 공식 회식에는 되도록 빠지지 않고 참여하여 분위기는 맞춰 주었다. 그러자니 회식 있는 날엔 고기 굽는 냄새부터 생선 비린내와 술 냄새 담배연기에 이르기까지 온갖 혼탁한 기운을 온통 뒤집어쓰고, 심신이 소금절인 듯 초친 듯 완전히 녹초가 되어야만 했다. 더구나 부임 당시 학장과 학과 분위기는 사교모임을 좋아하여, 동문과 지역사회의 성원을 이끌어 낸다는 명분으로 매달 공식 모임을 열었다. 채식으로 맑고 여린 내 심성과 영혼은 온갖 혼탁한 기운이 물밀 듯 삼투해 들어오는 스폰지 같았다. 한번씩 회식이 지나면 반드시 등산과 명상으로 풀어야 원기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나마 채식은 술과 고기를 안 먹는다는 명분으로 나한테 외식과 모임을 절제하는 호신부(護身符)가 되어 주었다.
부임 후 두어 차례 함정에 빠지는 실수가 있었다. 세간의 인생살이 도처에 틈을 노리는 마수가 있는 줄 알아차리지만, 조금만 방심하면 걸려 넘어지는 게 우리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란 걸 또한 절감하곤 했다. 한번은 부임 후 얼마 안되어 학과 선임교수와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반찬을 채식만 조심스레 골라 먹는다고 주의했는데, 야채 튀김이라고 해서 먹다 보니 오징어 발이 하나 씹히는 게 아닌가? 바로 일어나 잔반통에 뱉으면 될 건데, 내가 신참이고 상대방이 한참 고참이라 예의체면상 일어서 자리를 뜨지 못하고 그냥 어물어물 삼키고 말았다.
또 한번은 어느 행자와 더불어, 지금은 같은 학과로 옮겨와 함께 있지만, 당시에는 다른 대학에 있던 선배 겸 동료 교수인 분을 만나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분이 내 채식을 잘 이해하고 일부러 채식식당에 안내한다고 찾아갔는데, 호사다마라고 무척이나 재수 없게 그 식당이 장사가 안되었는지 채식을 그만두고 다른 일반 음식점으로 바꾼다고 한창 내부수리 중이었다. 허탈하지만 별 수 없이 돌아서서 근처 두부된장찌개 집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주문할 때 분명히 간곡하게 고기나 조개나 동물성은 넣지 말고 끓이라고 신신당부했건만, 음식이 나와서 믿고 국물을 한참 먹다 보니 나중에 바닥에 조개가 드러나는 게 아닌가? 아, 이런! 낭패가 있나.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주인을 불러 따지고 나무랐지만, 이미 엎지른 물, 종업원이 그리 주의 깊게 듣지 않고 실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번은 불교를 전공하는 동료교수랑 두 여스님을 만나게 되어 내가 아는 두부집으로 공양을 초대했다. 내가 대학원생들과 몇 번 다니면서 특별히 내 방식의 순두부찌개를 지정하여 잘 알고 있었고, 또 내가 그렇게 주문을 잘 일렀는데도, 그날 따라 또 실수가 터져 조개가 들어간 것이다. 내가 주인을 불러 나무라자, 사실은 물리고 새로 끓여 와도 되는데, 한 여스님이 자비로운 마음에 주인을 난처한 궁지에서 건져 주려고, 당신이 그걸 먹겠다고 바꿔 가는 게 아닌가. 자기는 평소 채식을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벌어졌으니, 나의 원칙을 지켜 주면서 주인의 겸연쩍음을 풀어 주려고, 상대방한테 보살의 무외시(無畏施)를 행하면서 자신이 스스로 혼탁함을 뒤집어 쓴 것이다. 물론 스님도 조개는 먹지 않았다. 나는 융통성 없는 완고한 형식주의자가 되고, 오히려 겸연쩍은 마음으로 스님한테 미안함을 느껴야 했다.
갈수록 태산이고 도가 높으면 마장도 더 높아진다더니, 청정해야 할 수행도량인 절간에서 이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한 경험은 참으로 씁쓰름하기 짝이 없었다. 등산 겸 가끔씩 들르는 암자에 들렀는데, 당시 요사채를 새로 짓느라 목수와 인부들이 올라와 일하느라 속인 비위를 맞추기 위해 세간 입맛의 음식을 마련한 모양이었다. 나도 밥을 좀 얻어먹는데, 마침 누님이 거기서 임시로 공양간 일을 거들면서, 나한테 김치를 먹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던 것 같은데, 무심코 한 입 먹었더니 젓갈 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게 아닌가? 그러자 누님이 근게 먹지 말라고 했지 않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그 뒤 건축불사가 끝나고 요사채가 지어진 뒤에 또 한번 들렀을 적엔, 주지스님이 아주 맛있다고 하도 권하기에 별로 내키지 않은 갓지(갓 김치)를 한 입 머금었더니, 또 젓갈 비린내가 물씬 배어 나왔다. 그 뒤로는 채식식당이 아니면 바깥에선 김치류를 먹지 않는 원칙이 하나 더 세워졌다.
그 뒤 한참이 지나서, 나는 이따금 학교 교수산악회를 따라 산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남들과 어울리는 게 힘들지만, 운전도 못하고 기력도 허약한 내가 무등산 이외에 주변 명산을 홀로 따로 찾아 나서기가 쉽지 않아서다. 어차피 점심은 각자 준비하니 별 문제 없는데, 문제는 하산 후 회식이다. 내가 좀 조심하고 참으면 되겠지 하고 몇 번 나다녔는데, 한번은 좀 먼 거리 산을 타고 내려와, 돌아오는 길이 멀고 저녁시간도 늦은 상태에서 순창 한식집에 들어갔다. 내가 그냥 굶고 허기를 참았으면 탈이 없었으련만, 한식집이라 혹시 두부 남은 게 있는지 물어보았다. 근데 시간이 이미 밤9시를 넘어 영업 마치고 한창 설거지하는 때인데, 반찬거리가 뭐 제대로 있겠는가? 역시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알았다고 내가 그냥 체념하는데, 바로 그때 나이 지긋한 선배교수가 대뜸 입을 열고 사자후(獅子吼)를 토하는 게 아닌가?
“도를 깨쳤으면, 두부는 뭐고, 고기는 뭐고? …”
사실 우리 한국 불교의 오랜 전통에 따라 나를 일깨우는 죽비 경책(警策)일 텐데, 아직 내가 마음공부가 덜 무르익은 데다가, 당시 배가 제법 고파 뱃속에서 꼬르륵 기화(飢火)가 일었던 탓인가 보다. 그 말이 비아냥거리는 소리로 귀에 몹시 거슬렸다. 그러면서 덧붙인 해설이 더욱 가관이었다. 자기는 중고등학교 6년간 (불교 조계종) 종립학교에 다니며 불교 공부를 할 만큼 했다고 자부하는 거였다. “너만 불교 공부하고 도 닦는 줄 아느냐? 채식한다고 겉치레 내세우며 청정하게 도 닦는 척하지 말라!”는 논조로 들렸다. 설사 말하는 사람이 주관적으로 그런 의중을 지니고, 또 누가 들어도 일반객관의 관점에서 그렇게 여겨진다고 할지라도, 내 마음이 확 트여 허심탄회하게 열려 있다면, 굳이 그 소리가 고깝게 귀에 거슬리고 마음에 거슬리지 않았을 텐데, 그 교수 말대로 아직 내가 도를 깨우치지 못하여 이리저리 걸리고 마음이 언짢은 게 분명하다.
육조 혜능 말씀대로, 바람이 분 것도 아니고, 나뭇잎이 흔들린 것도 아니며, 오직 쳐다보는 어리석은 사람 마음이 흔들렸다고! 아직 부동심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으니, 그 말을 탓할 게 아니라, 내 마음이 흔들린 것 안타까워해야겠지. 허나 내가 언짢아한 까닭은 다름 아닌 의중과 저의였다. 그 말이 아니라 그 말을 한 마음이 내 마음을 아프게 찔렀던 거다. 그 마음까지 껴안아 풀어버릴 만한 도덕의 법력이 없으니 어쩌랴? 물론 당시 현장에서 내가 아주 태연자약하게 평화로운 마음을 보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말대꾸하지 않고 인욕과 하심(下心)으로 묵묵히 들어주며 잘 참은 것은 다행이다. 그 뒤에도 그 말을 탓하여 일부러 산행에 빠지지는 않았다.
이 모든 인연들이 다 나를 시험하는 마장이면서도, 또한 내 도심과 불성을 갈고 닦아주는 숫돌임은 틀림없다.
어쨌든 지금도 채식은 분명 청정한 수행의 필수요건이고, 그 자체가 수행의 중요한 핵심이라고 나는 믿는다. 부끄럽게도 나는 지금까지 수행에서 남들처럼 크게 깨닫거나 한 소식 얻은 것이 전혀 없기에, 단지 20년 동안 꾸준히 산에 다니면서 굳게 지켜 온 채식원칙과 약간의 복덕 인연을 짓기 위해 중국 고승대덕의 법문을 한글로 옮긴 번역불사만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수행자의 천국이라는 대만처럼, 우리도 얼른 채식이 보편화하고 순 채식 인구와 순 채식 식당이 많아지길 간절히 기원하면서, 대학에 나다닌 지 어언 9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기꺼이 간단한 도시락을 준비해 등교하여, 연구실에서 혼자 조촐히 점심 드는 걸 즐기고 있다. 간디의 말씀처럼, 진정한 맛은 혀에 있는 게 아니라 마음에 있음을 새삼 실감하고 확인하면서!
*이 글은 “불광(佛光)” 2002년 7월호(통권 제333호) 34-37면에 실은 원고를 바탕으로 대폭 손질하고 내용을 많이 보태 편집한 것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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