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홀어머니께서 학업을 그만두고 의술을 배우라고 분부하셨다.
“의사가 되면 의술로 생활을 꾸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남을 구제할 수도 있고, 또 의술에 정통하면 명의(名醫)로 명성을 떨칠 수도 있다. 이것이 네 아버지의 숙원(宿願)이다.”
그 뒤로 내가 자운사(慈雲寺)에 있을 때, 한 노인을 만났다. 긴 수염과 위엄 있는 모습이 마치 금방이라도 표표히 날아오를 신선 같았다. 내가 그분께 공손하게 인사를 드리자, 그 노인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대는 벼슬길을 갈 사람이오. 내년이면 학궁(學宮: 현립학교)에 진학할 텐데, 어찌 책을 읽지 않는가?”
내가 그 까닭을 말씀드리고, 다시 노인에게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며 존함과 거처를 여쭙자, 노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성(姓)이 공씨(孔氏)고, 운남(雲南) 사람이오. 소옹(邵雍)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에 담긴 수리(數理: 周易의 義理와 象數)를 정통으로 전해 받았소. 그런데 이제 그 수리를 마땅히 그대에게 전해 주어야겠소.”
그래서 내가 공 선생님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께 여쭈었더니, 어머니는 그분을 잘 대접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의 수리(數理)가 어떠한지 시험해 보았더니, 아주 사소한 것까지 모두 영험하였다.
나는 곧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겨, 심칭(沈稱)이라는 외사촌 형과 상의했다. 그러자 외사촌 형이 선뜻 격려해 주었다.
“마침 욱해곡(郁海谷) 선생이 심우부(沈友夫)라는 사람의 집에 사설 학관(學館)을 열었다네. 그러니 내가 아우를 그곳에 보내 함께 학문을 배우도록 주선하기가 아주 간편하다네.”
그래서 나는 욱 선생님을 찾아가 인사드리고 스승으로 모셨다.
공 선생님(孔先生)이 내 운수를 뽑아 보았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현(縣)의 동생(童生)-주1) 고시에서는 제14등으로 합격하고, 부(府)에서 보는 시험은 제71등으로 합격하며, 제학고(提學考: 省에서 주관하는 시험)에서는 제9등을 할 것이다.”
다음해 시험을 쳤는데, 세 시험의 등수가 모두 일러준 대로 딱 들어맞았다.
다시 평생 동안의 길흉을 다 점쳐 보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해에 시험을 보면 몇 등이고, 어느 해에는 과거 응시생의 신분자격을 점검해 보증하는 름생(廩生) -주2) 의 자리에 끼겠소. 어느 해에는 공생(貢生) -주3)이 되고, 공생에 뽑힌 뒤 어느 해에는 사천성(四川省)의 대윤(大尹)이 될 것이오. 그러나 대윤에 부임한 지 3년 반이 지나면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가서, 53세 8월 14일 축시(丑時)에 거실에서 운명할 것인데, 아깝게도 자식이 없겠소.”
나는 그것을 잃어버릴까 염려하여 적어두고, 마음속에도 늘 새겨두었다.
그 뒤로는 무릇 시험을 볼 때마다, 그 등수가 공(孔) 선생이 미리 뽑아 놓은 운수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공 선생의 계산에는, 내가 받은 녹봉이 아흔한 섬 다섯 되(91石5斗)에 이른 다음에야 비로소 공거(貢擧)를 받도록 적혀 있었다. 그런데 내가 일흔한 섬(71石)에 이르렀을 때, (마침 천거 받기로 한 사람이 결격 사유가 있어서) 도종사(屠宗師)가 나를 후보로 비준(批准: 천거)하였다. 이에 나는 속으로 공 선생이 뽑아 준 운수를 의심하게 되었다. 그런데 막판에 서리(署理)이던 양공(楊公)이 거부해 정말 무산(霧散)하고 말았다.
그 뒤로 정묘(1567)년에 이르러서야, 은추명 종사(殷秋溟 宗師)가 관가에 보관 중인 나의 과거시험 답안을 보고 나서, 이렇게 탄식하였다.
“다섯 책문(策文)은 곧 고관대신이 황제에게 바치는 다섯 편의 주청(奏請)이나 의론(議論) 같구나! 이처럼 박학다식하고 사리에 통달한 능력 있는 선비를 어찌 창 아래서 늙도록 내버려둘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는 바로 현감에게 공문을 작성하도록 분부하고, 나를 흔쾌히 공거(貢擧)하였다. 그 앞에 받은 녹봉(食米)을 모두 합산해 보니, 진짜 아흔한 섬 다섯 되(91石5斗)였다. 이 일로 말미암아, 나는 나아가고 물러남에 운명이라는 것이 있고, 더디고 빠름도 때가 있다고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담담하게 지내며, 더 이상 뭘 구하려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공거를 받아 연경(燕京)에 들어가 1년을 머물렀다. 하루 내내 정좌(靜坐: 坐禪)만 하고, 책은 펴 보지도 않았다.
기사년(己巳: 1569)에 되돌아와 남경(南京)에 있는 벽옹(辟雍)에서 유학했다. 그때 국자감(國子監)에 들어가기 직전에, 먼저 서하산(棲霞山: 南京 江寧縣에 있는 유명한 산)에 머물고 있던 운곡(雲谷) 법회(法會) 선사를 예방했다. 선사(禪師)와 한 방에서 마주앉아(對坐) 사흘 밤낮 동안 눈을 붙이지 않았다. 그러자 운곡 선사가 짐짓 놀라 내게 물었다.
“평범한 사람이 성인(聖人)이 될 수 없는 원인은, 단지 잡념망상에 마음이 얽매이기 때문이오. 그런데 그대는 사흘 밤낮을 앉아 있으면서, 한순간도 잡념망상을 일으키지 않았으니, 어찌 된 일이오?”
이에 내가 이렇게 대답했다.
“제 운명은 공 선생이 계산하여 적어 놓았는데, 영욕(榮辱)이나 생사(生死)가 모두 일정한 때와 운수가 있습디다. 그래서 제가 지금 설령 제 아무리 멋진 망상(妄想)을 짓는다고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는 줄 알기에, 망상할 만한 건더기가 없습니다.”
운곡 선사는 (미리 짐작하고 있었던 듯이) 금방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그대를 호걸(豪傑)로 여기고 대했는데, 이제 보아하니 그대도 한낱 범부에 지나지 않는구려.”
내가 그 까닭을 묻자, 운곡 선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범부(凡夫)는 무심(無心)의 경지에 들 수 없어, 결국 음양(陰陽)의 원리에 묶이게 되나니, 어찌 운수가 없을 수 있겠소? 그러나 오직 보통 사람(凡人)에게만 운수가 있을 뿐이오. 지극히 선량한 사람은 운수가 정말로 전혀 속박하지 못하고, 지극히 사악한 사람도 역시 운명이 전혀 구속하지 못하오. 그런데 그대는 20년이 지나도록 그 운수에 묶여 옴짝달싹도 못했으니, 어찌 범부(凡夫)가 아닐 수 있겠소?”
내가 “그러면 그 운수를 피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라고 묻자, 운곡 선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운명은 나 스스로 짓는 것이고, 복(福)은 자기에게서 구하는 것이오.(命由我作, 福自己求.) 이는 유교(儒敎)의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에도 나오는 말인데, 확실히 훌륭하고 밝은 가르침이오. 그런데 우리 불교 경전 가운데도 ‘부귀를 구하면 부귀를 얻고, 남녀(자식)를 구하면 남녀를 얻으며, 장수(長壽)를 구하면 장수를 얻는다.’-주4)라는 말씀이 있소. 무릇 거짓말(妄語)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가장 큰 계율(戒律)의 하나거늘,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이 어찌 헛소리로 뭇 사람들을 속이겠소?”
이에 내가 그 말을 받아 다시 여쭈었다.
“맹자(孟子)께서도, ‘구하면 얻을 수 있으니, 이는 그 구함이 나에게 있는 것이다. 도덕인의(道德仁義)는 힘껏 노력하면 구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신 적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세속의 부귀공명이야 어떻게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운곡 선사가 말하였다.
“맹자의 말씀은 훌륭한데, 다만 그대가 스스로 잘못 알고 있을 뿐이오. 그대가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아직 접하지 못한 모양인데, 육조는 ‘모든 복의 밭(福田)은 방촌(方寸: 마음)을 떠나지 않으니, 마음을 좇아서 찾으면 감응해서 통하지 않음이 없다.’고 말했소. 구함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있으니, 단지 도덕인의뿐만 아니라 부귀공명도 또한 함께 얻을 수 있소. 안과 밖으로 함께 얻게 되니, 이렇게 구함은 얻음이 유익하오. 그러나 만약 안으로 스스로 돌이켜 살피지 않고, 단지 밖으로만 구하려고 나서면, 안팎으로 모두 잃게 되오. 그것은 구하는 데 도(道)가 있고, 얻는 데 천명이 있는 것이라, 구하는 것이 무익하게 되는 것이오.”
이어 선사가 물었다.
“그때 공 선생이라는 사람이 그대의 평생 운명을 뽑아 준 것이 어떠하였소?”
내가 사실대로 말씀드리자, 운곡 선사가 다시 물었다.
“그대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과거에 급제할 수 있을 것 같소? 또 자식은 낳을 것 같소?”
나는 한동안 골똘히 생각한 뒤, 고개를 가로 저으며 대답했다.
“그럴(얻을) 것 같지 않은데요. 과거에 합격하는 사람들은 일반으로 복의 모습(福相)이 두텁습니다. 그런데 저는 복이 얕고, 또 공덕을 쌓아 복의 기초를 두텁게 다질 수도 없습니다. 게다가 번잡하고 어려운 시련을 인내할 줄 모르고, 다른 사람을 포용(包容)할 줄도 모릅니다. 때로는 재주로 남을 압도하고, 강직한 마음에 행동을 곧이곧대로 하며, 말과 대화를 경망스럽게 합니다. 무릇 이러한 것들은 모두 다 박복한 모습이니, 어떻게 제가 과거에 급제할 자질이 되겠습니까?
“땅은 더러운 곳이 비옥하여 생물이 많고, 물은 맑은 곳에 물고기가 없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저는 깨끗한 것(결벽)을 좋아하니, 마땅히 자식이 없을 첫째 이유입니다. 온화한 기운이라야 만물을 양육할 수 있는데, 저는 곧잘 분노하니 마땅히 자식이 없을 둘째 이유입니다. 사랑(仁愛)은 생명을 낳는 근본이고, 참음(殘忍)은 기르지 못함(不姙)의 근원입니다. 그런데 저는 명예와 절개를 긍지로 여겨 아끼고, 자기를 버려 남을 구해 주기를 꺼려하니, 마땅히 자식이 없을 셋째 이유입니다. 말을 많이 하여 원기를 소모시키니, 마땅히 자식이 없을 넷째 이유입니다. 먹고 마시기를 좋아하여 정기(精氣)를 탕진하니, 마땅히 자식이 없을 다섯째 이유입니다. 철야(徹夜)로 오래 앉아 있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원기(元氣)를 보존하고 정신(精神)을 함양(涵養)할 줄 모르니, 마땅히 자식이 없을 여섯째 이유입니다. 그밖에 다른 과오와 죄악도 너무 많아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듣던 운곡 선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어찌 단지 과거뿐이리오? 세상에서 천금(千金)의 재산을 가지는 자는 반드시 천금의 인물이고, 백금(百金)의 재산을 가지는 자는 반드시 백금의 인물이며, 마땅히 굶어죽을 자는 반드시 굶어죽는 사람이오. 하늘은 각자의 재질(才質)에 맞게 그대로(篤實) 대해 줄 따름이오. 하늘이라고 터럭 끝만한 생각을 제멋대로 더하겠소? 만약 자식을 낳는다면, 백대(百世)의 공덕이 있는 자는 마땅히 백대 동안 자손들이 그를 보전하게 되오. 또 10대(十世)의 공덕이 있는 자는 마땅히 10대 동안 자손들이 그를 보전하게 될 것이며, 3대(三世) 2대(二世)의 공덕이 있는 자는 마땅히 3대, 2대 동안 자손들이 그를 보전하게 될 것이오. 그 목을 무참히 쳐서 후손이 없을 자는, 복덕이 지극히 바닥난 자라오.
“그대가 이미 잘못된 줄을 알았으니, 장차 과거시험에 급제하지도 못하고 자식도 낳지 못할 박복한 운명일랑, 진심을 다해 쇄신(刷新)하고 고치시오. 힘써 덕을 쌓고, 거칠고 더러운 것을 포용하며, 사람을 온화하게 대하고 사랑하도록 힘쓰시오. 종전의 이러저러한 행실은 마치 어제 이미 죽은 것과 같이 생각하고, 앞으로 다가올 여러 가지 것은 바로 오늘 새로이 생겨나는 것과 같이 여기시오. 이것이 바로 의리(義理: 道․영혼․정신)로 다시 태어난 몸이라오. 무릇 혈육(血肉)의 몸은 어차피 운수가 있기 마련이지만, 의리(義理)의 몸이야 어찌 하늘을 감동시켜 바꿀 수 없겠소?
“서경(書經: 尙書)의 태갑(太甲)편에 이르기를, ‘하늘이 내린 재앙은 오히려 피할 수 있으나, (사람이) 스스로 부른 재앙은 돌이킬 수 없다.(天作孽, 猶可違; 自作孽, 不可活.)’고 했소. 또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길이 천명에 짝하여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한다.(永言配命, 自求多福.)’고 말했소. 공 선생이 ‘그대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자식을 낳지 못할 운명이오.’ 라고 말한 것은, 바로 하늘이 내린 숙명(宿命)으로서, 피할 수 있는 것이오. 그대가 지금 덕성을 확충하고 좋은 일에 힘써 음덕(陰德)을 많이 쌓는다면, 이것은 바로 스스로 짓는 복이니, 어찌 복록을 받아 누리지 않을 수 있겠소? 주역(周易: 易經)은 유교의 성현 군자가 연구하는 하늘의 도인데, 여기서도 흉함을 피해 길함으로 나아가는 길을 적고 있소. 만약 천명(天命)이 한번 정해진 대로 따라야 할 뿐, 누구도 도저히 바꿀 수 없는 법칙(숙명론)이라면, 길함에 어떻게 나아갈 수 있으며, 흉함은 어떻게 피할 수 있겠소? 주역을 열면 제일 첫머리에 등장하는 구절이 곧 ‘선을 쌓는 집안에는 반드시 남아넘치는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는 법칙(義理)이오. 그대는 이 말을 믿을 수 있겠소?”
나는 그 말을 믿고 절을 올리며 가르침을 받들었다. 그로 말미암아 지난날의 죄악을 모두 부처님 앞에 솔직히 고백하고, 상소문(上疏文) 한 통을 작성하여 우선 과거 급제를 기원하였다. 그리고 3천 가지 선행(善行)을 실행하여 천지신명(天地神明)과 조상의 은덕에 보답하기로 서원(誓願)을 세웠다. 이에 운곡 선사가 공과격(功過格)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내가 행한 일을 매일같이 공과격에 기록하되, 선한 일은 하나하나 그 숫자를 적고, 악을 저지른 경우에는 선행의 수에서 그만큼 빼라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준제주(準提咒)-주5) 를 지니고 염송(念誦)하면 반드시 효험이 있을 것이라고 타이르면서, 아울러 이렇게 말해 주었다.
“부적가(符籍家)에 이르기를, ‘부적을 그릴 줄 모르면 귀신의 비웃음을 산다.’고 하오. 여기에 공개하지 않은 신비스런 전승(傳承)이 하나 있는데, 오직 생각(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일 뿐이오. 붓을 잡고 부적을 그릴 때는, 먼저 세속의 모든 인연을 놓아버리고, 티끌 하나도 일지 않아야 하오. 이처럼 염두가 움직이지 않는 곳에서 한 점을 찍으면, 그것이 혼돈(混沌)에서 터(기초)를 여는 것이라고 말하오. 여기서 시작하여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완성하는데, 어떠한 딴 생각도 일지 않으면, 그 부적이 영험하게 되오. 무릇 하늘에 기도하고 운명을 세우는 일은, 모두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곳으로부터 감동하게 되는 것이오.”
“맹자가 입명(立命)의 학문을 논하면서, ‘요절과 장수가 둘이 아니다’(夭壽不貳)라고 말했소. 무릇 요절과 장수는 완전히 다른 별개의 것이오. 맹자의 말처럼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함양해서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부동심(不動心)의 경지에 다다르면, 누가 요절하고 누가 장수한단 말이오? 세분하여 말하자면 이렇소. 풍년과 흉년이 둘이 아님을 깨달은 연후에 빈부(貧富)의 운명을 세울 수 있고, 곤궁하고 통하는 게 둘이 아님을 깨달은 연후에 귀천(貴賤)의 운명을 세울 수 있으며, 요절과 장수가 둘이 아님을 깨달은 연후에 생사(生死)의 운명을 세울 수 있소. 세간의 인생으로는 오직 생사가 가장 중대하여, 요절과 장수를 말하는 것이오. 그밖에 일체 순풍(順風)과 역경(逆境)도 모두 그 안에 들어감은 물론이오.
“자신을 수양하여 천명(天命)을 기다린다(修身以俟之) 함은, 곧 공덕을 쌓아 하늘에 기도하는 일이오. 수양(修)이라는 것은, 자신에게 과오나 죄악이 있으면, 모두 다스려 제거함을 뜻하오. 또 기다린다(俟)는 것은, 들락날락하는 분수 밖의 요행심이나, 사물에 따라 끊임없이 일었다 스러지는 잡념망상을 철저히 모두 놓아버려 텅 빔을 뜻하오. 이러한 정도에 이르면 곧장 선천(先天)의 경지에 들어가니, 이것이 바로 실학(實學: 진실한 학문, 道學)이 되는 것이오.
“그대는 지금 당장 무념무상(無心)할 수가 없으니, 단지 준제주(準提咒)를 지니고 염송(念誦)하되, 수효를 생각하거나 헤아리지 말고 단지 끊임없이 계속하기만 하시오. 염송이 순수하게 무르익으면, 염송하는 가운데 염송하지 않으며, 염송하지 않는 가운데 염송하게 되오. 염두가 움직이지 않는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곧 영험(靈驗)해질 것이오.”
나는 본디 호(號)가 학해(學海)였는데, 이날 이후로 평범을 끝마친다는 뜻에서 호를 료범(了凡)이라고 바꿨다. 무릇 운명 수립의 학설과 이론을 깨닫고서, 더 이상 범부의 소굴에 떨어지지 않고 싶어서였다. 그 뒤로는 하루 종일 전전긍긍하면서, 내 언행이 예전과 전혀 같지 않음을 깨달았다. 옛날에는 오직 혼자 유유자적하며 방임했는데, 이때부터는 스스로 전전긍긍하며 경각심을 한층 높이고 저절로 자신을 채찍질하게 되었다. 어두컴컴한 곳이나 깊숙한 방구석에서도 항상 천지신명께 죄를 지을까 두려워하고, 설사 남이 나를 미워하거나 비방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스스로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 다음해에 예부(禮部)에서 과거를 치렀는데, 공 선생이 3등으로 합격할 거라고 계산한 것이, 뜻밖에도 1등으로 합격하였다. 그 말이 더 이상 영험하지 않게 되어, 가을 과거시험에도 합격하였다.
그러나 행실(行實)과 의리(義理)가 아직 순수하지 못해, 자신을 점검함에 과오가 많았다. 때로는 선(善)을 보고도 행동할 용기를 내지 못하거나, 또는 남을 구제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줄곧 스스로 의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더러 몸으로는 힘써 선을 행하면서도, 입으로 지나친 말을 지껄이기도(입으로 공을 갚기도) 하였다. 아니면 깨어 있을 때는 언행을 조심히 지키다가도, 술 취한 뒤에 제멋대로 방종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과오로 공덕을 깎아먹어 허송세월하는 날이 많았다.
기사(己巳: 1569)년에 발원한 이래로, 줄곧 기묘(己卯: 1579)년에 이르기까지 10여 년을 거치면서, 3천 가지 선행이 비로소 다 찼다. 그때 바야흐로 리점암(李漸庵)을 따라 관중(關中: 山海關 안쪽)으로 들어가게 되어, 미처 회향기도(廻向祈禱)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경진(庚辰: 1580)년에 남쪽으로 되돌아와서, 성공(性空) 스님과 혜공(慧空) 스님 등 웃어른(上人: 善知識)을 청해 동탑선당(東塔禪堂)에 나아가 회향기도(廻向祈禱)를 올렸다. 그리고 드디어 자식을 구하는 소원을 발하면서, 다시 3천 가지 선행을 서약하였다.
그런데 신사(辛巳: 1581)년에 바로 너를 낳았다. 그래서 네 이름은 하늘이 열어 준(내려 준) 아들이라는 뜻에서 천계(天啓)라고 지었다. (이 글은 아들에게 遺訓 형식으로 쓴 것임.- 옮긴이)
나는 한 가지 선행을 행할 때마다, 즉시 붓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너의 어머니는 글을 쓸 줄 몰라서, 매번 착한 일을 할 때마다, 거위 깃대에 인주를 묻혀 달력의 날짜 위에 하나씩 동그라미를 찍었다. 때로는 가난한 사람에게 음식을 보시하기도 하고, 더러 산목숨을 사들여 놓아주기도(放生) 하였다. 하루에 많게는 10개의 동그라미가 찍히기도 하였다. 계미(癸未: 1583)년 8월에 이르러 3천 개의 수가 꽉 차서, 다시 성공(性空) 스님 등을 집안에 초청해 회향기도 하였다. 그리고 9월 30일에 다시 진사에 합격하기를 바라는 염원(念願)을 일으켜, 1만 가지 선행을 행하기로 발원하였다. 그래서 병술(丙戌: 1586)년에 등제(登第)하여 보지(寶坻)현의 현감(知縣)이 되었다.
나는 빈칸이 있는 책(공책)을 한 권 갖춰 두고, 치심편(治心篇)이라 이름 붙였다. 새벽에 일어나 당상(堂上)에 앉으면, 먼저 하인에게 이 공책을 가져다 문지기에게 건네주어, 책상 위에 두고 하루 동안 행한 선악을 사소한 것이라도 반드시 기록하도록 분부하였다. 밤에는 뜰에 탁자를 갖다놓고, 조열도(趙閱道)-주6) 를 본받아 향을 사르고 (옥황)상제께 보고하였다. 너의 어머니는 행한 선행이 많지 않은 걸 보면, 곧 이맛살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내가 전에 집에 있을 때는 서로 도와 선을 행하였기 때문에, 3천 가지 선행을 그런 대로 완성할 수 있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1만 개나 발원해 놓고, 관청 안에 행할 만한 일이 없게 되었으니, 언제 이 공덕을 원만히 성취한단 말입니까?”
밤중에 우연히 한 신선(神仙)을 꿈에 뵈었는데, 내가 발원한 선행을 완성하기 어려운 까닭을 여쭈었다. 그랬더니 그 신선이 말하기를 “그대가 현감이니 조세 곡식(稅糧)을 조금만 덜어 주면, 1만 가지 선행이 한꺼번에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일러주었다. 당시 보지현의 토지는 매무(每畝)당 이푼삼리칠호(二分三釐七毫: 23.7%)의 세를 걷었다. 그런데 내가 시범 삼아 구획을 정하여 1푼4리6호(一分四釐六毫: 14.6%)까지 줄였다. 이 일은 분명히 시행하였지만, 마음속으로는 못내 의심스러웠다.
때마침 환여 선사(幻余禪師)가 오대산(五臺山)에서 왔다. 내가 꿈꾼 내용을 말하면서, 이 일이 과연 믿을 만한 것인지 여쭤보았다. 그러자 선사가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착한 마음이 진실하고 간절하면, 한 가지 선행으로도 1만 가지 선을 감당할 수 있소. 하물며 전 현(全縣)을 상대로 조세를 덜어주면, 모든 현민(縣民)이 복을 받지 않겠소?”
그래서 내가 즉시 봉급으로 받은 은(銀)을 꺼내 주면서, 환여 선사에게 오대산에 가지고 가서 내 대신 스님 1만 명에게 공양(萬鉢供養)을 올리고 회향해 달라고 간청했다.
공 선생이 일찍이 내 운명을 계산할 때, 내가 53세에 큰 액운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런데 내가 조금도 오래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한 적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53세가 되던 해에 끝내 아무런 재앙도 없었으며, 지금 69세까지 이르렀다. 서경(書經)에는, “하늘은 믿기가 힘들고, 천명은 항상성이 없다.(天難諶, 命靡常.)”고 적혀 있다. 또 “오직 천명은 항상 정해져 있지 않다.(惟命不於常.)”는 구절도 있다. 이 모든 말씀이 미친 소리가 아닌 줄을 내가 이때서야 비로소 알았다. 무릇 “화와 복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구한다.(禍福自己求之.)”는 말씀은 모든 성현의 가르침이다. 반대로 “화와 복이 하늘의 명령(결정)에 달려 있다.(禍福惟天所命.)”고 말하는 것은, 전부 세속의 숙명론에 불과하다.
너(아들 天啓를 가리킴)의 운명이 어떠할지는 나도 모른다. 운명이 현달(顯達)하여 영화로울 때는, 늘 몰락하여 적막할 때를 생각하라. 시세(時勢)가 유리하고 순조로울 때는, 늘 일이 꼬이는 역경을 생각하라. 당장 눈앞의 의식주가 풍족할 때는, 늘 가난하고 구차할 때를 생각하라.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공경할 때는, 늘 두려움과 무서움을 생각하라. 집안의 세도(勢道)가 명망(名望)이 있고 존경을 받을 때는, 늘 비천하고 한미(寒微)할 때를 생각하라. 학문이 자못 우수할 때는, 늘 천박하고 고루할 때를 생각하라.
멀리는 조상의 공덕을 선양(宣揚)하려고 사념(思念)하고, 가까이는 부모의 허물을 덮으려고 사념하라. 또 위로는 국가의 은혜에 보답하기를 사념하고, 아래로는 집안의 복 짓는 것을 사념하라. 그리고 밖으로는 타인의 위급함을 구제하려고 사념하고, 안으로는 자기의 사악함을 막으려고 사념하라.
날마다 잘못된 것을 알아차려, 매일매일 잘못을 고치도록 힘써라. 어느 하루 그릇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곧 그날은 스스로 옳다는 착각에 안주하게 된다. 어느 하루 고칠 만한 과실이 없으면, 곧 그날은 나아갈 걸음(進步)이 없게 된다.
천하에 총명하고 준수(俊秀)한 사람이 적지 않지만, 공덕(功德)을 높이 쌓고 도업(道業)을 넓게 닦지 못하는 까닭은, 단지 ‘인순(因循: 타성에 젖어 주어진 상황에 안주하고 기존 관행을 답습함)’이라는 두 글자로 말미암아 한 평생을 허송세월하기 때문이다. 운곡 선사가 나에게 전수해 준 운명 수립(창조)의 학설과 방법은 지극히 심오하고 정밀하면서도, 몹시 진실하고 올바른 이치니, 잘 익히고 음미하여 힘써 실행할지어다. 정말 스스로 내팽개쳐서 인생을 허송세월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옮긴이 보충: 숙명론에 빠져 그럭저럭 구차하게 살아가는 것이 윤회(輪廻)라면, 도덕 수행과 공덕 배양으로 운명을 창조해 나가고 나아가 다른 사람을 교화․제도하는 것은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린다는 의미에서 전륜(轉輪-轉法輪)이라고 하겠다.]
주1) 동생(童生): 문동(文童)이라 별칭함. 명청(明淸)대 과거제도에서 생원(生員: 秀才)시험을 보는 사람은 연령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유동(儒童)이라 부르는데, 관습상 동생(童生)이라 일컬음.
주2) 름생(廩生): 름(廩)은 쌀 곳간이나 곳간 쌀의 뜻인데, 관청에서 나눠주는 쌀을 가리킨다. 름생(廩生)은 과거제도의 생원(生員) 명목의 하나인데, 명(明)나라 때 부(府)․주(州)․현(縣)의 학교에 다니는 생원은 나라에서 매달 쌀을 주어 생활비를 보조하여, 그 쌀을 받는 생원이라는 뜻이다. 주요 직무는 과거시험에 응시하는 동생(童生)이 청렴하지 못하거나 차명 대리 응시하지 않는지 점검하여 보증하는 일인데, 이런 수속을 관습상 보름(補廩)이라 한다. 청(淸)나라 때는 세고(歲考)와 과고(科考)의 양시(兩試)에서 1등의 전열(前列)에 들어야 비로소 자질과 경력 높은 생원으로 름생이 되었다. 생원은 당대(唐代) 국학 및 주(州)․현(縣)의 학교에 학생정원이 있어 부르는 호칭으로, 관직(官職)에 정원(定員)이 있어 관원(官員)으로 부르는 것과 같다. 문장에서는 보통 제생(諸生)이라 일컬음.
주3) 공생(貢生): 과거제도에서 생원(生員: 秀才)은 보통 관할 부(府)․주(州)․현(縣)의 학교에 속하는데, 만약 시험에 합격해 경사(京師)의 국자감(國子監)에 들어가 독서하게 되면, 황제한테 바쳐진(貢獻) 인재라는 뜻에서 공생(貢生)이라고 부른다. 명대에는 세공(歲貢)․선공(選貢)․은공(恩貢)․납공(納貢)이 있었고, 청대에는 은공(恩貢)․발공(拔貢)․부공(副貢)․세공(歲貢)․우공(優貢)의 오공(五貢)과 예외로 특별한 재산헌납으로 얻는 비정식 예공(例貢)이 있었다. 세공(歲貢)은 매년 또는 2-3년에 한번씩 부(府)․주(州)․현(縣)의 름생(廩生) 중 일정수를 뽑아 국자감에 진학시키는 것인데, 대개 순서대로 승진해 흔히 ‘애공(挨貢)’으로 속칭(俗稱)한다. 은공(恩貢)은 황실의 경사나 축전을 맞이해 특별히 추가하는 공생(貢生)이고, 선공(選貢)과 발공(拔貢)․우공(優貢)은 몇 년에 한번씩 성(省)의 학정(學政)이 부(府)․주(州)․현(縣)에서 1-2인씩 시험으로 선발해 보내는 공생이다.
주4) 불보살(佛菩薩)의 명호(名號)를 염송(念誦)하며 예배(禮拜)하고 불경을 독송하면 불보살의 자비원력(慈悲願力)의 가피(加被)로 소원(所願)이 원만히 이루어진다는 내용인데, 「불설약사여래본원공덕경(佛說藥師如來本願功德經)」이나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 등이 대표 법문이다.
주5) 불보살(佛菩薩)의 명호(名號)를 염송(念誦)하며 예배(禮拜)하고 불경을 독송하면 불보살의 자비원력(慈悲願力)의 가피(加被)로 소원(所願)이 원만히 이루어진다는 내용인데, 「불설약사여래본원공덕경(佛說藥師如來本願功德經)」이나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 등이 대표 법문이다.
주6) 조열도(趙閱道: 1008-1084): 본명은 변(抃), 열도는 자(字). 북송(北宋) 인종(仁宗: 1022-1063 재위) 경우(景祐: 인종이 1034-1038년 사이에 사용한 세 번째 연 때 진사(進士)가 됨.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었는데, 탄핵함에는 권세가나 귀족을 피하지 않고 강직하여, 사람들이 모두 ‘철면어사(鐵面御史)’로 일컬음. 여러 주(州)의 지사(知事)를 거쳐 참정(參政)이 되었는데, 청묘법(靑苗法)을 반대하여 자리에서 물러남. 「조청헌집(趙淸獻集)」이 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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