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春秋: B.C.722-B.C.481) 시대에 많은 대부(大夫)들이 사람의 말과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의 화복(禍福)을 추측하여 말하면, 대부분 정확히 들어맞곤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좌전(左傳)과 국어(國語)의 기록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 길흉(吉凶)의 조짐(兆朕)은 마음에서 싹터서 온몸(四肢)에 다 드러나게 마련이다. 후덕(厚德)하거나 선량한 성향의 사람은 항상 복을 얻고, 각박(刻薄)하거나 사악한 기질을 지닌 자는 화(禍)에 가까워진다.
그러나 세속의 눈은 가리개가 많이 끼어 있다. 그래서 길흉의 조짐이 겉으로 드러나기 전에는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도리어 헛소리나 우연이라고 코웃음 친다. 지극한 정성은 하늘과 하나로 합해져 감응을 불러일으킨다. 복(福)이 장차 이를 것은 착함(善)을 보면 미리 알 수 있고, 반대로 화(禍)가 장차 이를 것도 착하지 못함(不善)을 보면 미리 알 수 있다. 그러니 지금 복을 얻고 화를 멀리하고자 하면, 선행을 따지기 전에 모름지기 먼저 허물을 고쳐야 한다.
허물을 고치려는 자는, 첫째로 부끄러운 마음(恥心)을 가져야 한다. 생각해 보건대, 옛 성현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장부(丈夫)의 몸으로 태어났는데, 그들은 백대(百世)가 지나도록 모든 사람이 스승으로 삼는다. 그런데 우리는 어찌하여 이 한 몸 죽으면 기왓장 부스러지듯이 썩어 문드러지고 마는가? 세속의 온갖 욕정(欲情)에 탐닉(耽溺)하고 물들어 사사로이 불의(不義)를 저지르면서도, 남들이 모른다고 생각하며 오만하게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그래서 나날이 짐승 같은 생활에 빠져들면서도, 스스로 이를 알지 못한다. 세상에서 부끄러워해야 할 수치 가운데 이보다 더 큰 수치는 없다.
맹자는 일찍이 “부끄러움은 사람에게 매우 위대(중요)하다.(恥之於人, 大矣.)”고 말하였다. 이는 부끄러움을 얻으면 성현이 되고, 그것을 잃으면 짐승(禽獸)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허물을 고치는 요체고 핵심이다.
허물을 고치려는 자는, 둘째로 두려운 마음(畏心)을 가져야 한다. 하늘이 위에서 굽어보기 때문에, 신명(神明)을 속이기는 어렵다. 비록 아무리 은밀한 곳에서 허물을 저지른다고 할지라도, 천지신명은 참으로 거울에 비춰보듯 훤히 내려다본다. 그 허물이 무거우면 곧장 온갖 재앙을 내리고, 가벼우면 현재의 복을 덜어낸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단지 이뿐만이 아니다. 한가하게 머무는 곳에서도 살피고 비춰봄이 명명백백하다. 우리가 비록 아주 은밀히 숨기고 매우 기묘하게 꾸밀지라도, 자신의 허파와 간은 흉금을 털어놓듯 다 드러나기 때문에, 끝내 스스로 속이지는 못한다. 더욱이 남들이 우리 마음을 은밀히 꿰뚫어보면(看破) 한 마디도 꾸밀 수 없게 되니, 어찌 두려운 마음으로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또 이뿐만이 아니다. 한 숨이라도 아직 남아 있는 한, 하늘을 꽉 채우는 죄악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참회하고 고칠 수 있다. 옛날 사람 중에는 한 평생 많은 죄악을 지었는데, 임종(臨終)에 뉘우치고 깨달아 한 순간 정말로 강렬한 착한 생각을 일으켜, 마침내 선종(善終)을 얻은 자가 적지 않다. 이는 한 순간의 생각이 아주 용맹스럽고 강렬하여, 넉넉히 백년의 죄악을 순식간에 깨끗이 씻어낼 수 있음을 뜻한다. 비유하자면, 천년 동안 꽉 막혔던 껌껌한 동굴에 등불 하나만 겨우 켜져 비춰도, 천년 동안의 암흑이 순식간에 말끔히 사라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허물이란 오래 되고 얼마 되지 않은 것을 막론하고, 오직 고치는 것이 가장 귀중하다.
그러나 사바홍진(娑婆紅塵)의 속세는 덧없고(無常), 육신은 쉽게 죽어 부서진다. 따라서 한 숨(一息)이 다시 이어지지 않으면, 허물을 고치려고 해도 어떻게 해 볼 길이 없다. 밝은 이생에서는 천백 년이 지나도록 악명(惡名)을 계속 짊어지게 되어, 비록 효성스럽고 자비로운 자손이 수없이 나온다 할지라도, 그 죄악을 깨끗이 씻어줄 수 없다. 또 어두운 저승(冥府)에서는 백 천 겁(百千劫)의 오랜 세월 동안 지옥에 빠져 인과응보를 받게 되니, 성현이나 불보살(佛菩薩)이라도 이끌어내어 구제할 수 없다. 그러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허물을 고치려는 자는, 셋째로 모름지기 용맹심(勇心)을 발휘해야 한다. 사람들이 허물을 고치지 않는 것은, 구태의연한 습관(因循)에 안주하여 물러서고 움츠려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름지기 스스로 분발하고 진작(振作)하여야 하며, 의심하거나 머뭇거리며 기다릴 필요가 없다. 작은 허물은 까끄라기(껄끄락)나 가시가 살 속에 박힌 듯이 빨리 뽑아내어 버리며, 큰 죄악은 독사에게 손가락을 물린 듯이 빨리 잘라 버려서, 터럭 끝만큼도 엉거주춤하거나 머뭇거리지(躊躇) 말아야 한다. 이것이 바람(風: 巽卦☴)과 번개(雷: 震卦☳)가 합쳐져 익괘(益卦:
☴☳
)가 되는 이치다.
이상의 세 가지 마음(수치심, 경외심, 용맹심)을 갖추고서, 허물이 보이는 대로 곧장 고쳐야 한다. 그러면 마치 봄날 얼음이 햇볕을 쬐어 스르르 녹는 듯하리니, 어찌 허물이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하며, 또 어떠한 환난인들 풀리지 않으리오. 그러나 사람의 허물은 구체적인 일(事)에 따라서 고치는 경우도 있고, 추상적인 이치(理)에 따라서 고치는 경우도 있고, 단도직입(單刀直入)처럼 마음(心)으로부터 고치는 경우도 있다. 수행한 공부가 같지 않기에, 그 효험 또한 다르다.
예컨대 전에 살생을 하였으면, 이제 살생하지 않겠다고 계율을 정한다. 그리고 전에 성질을 내고 욕을 했으면, 이제 성내지 않겠다고 계율을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체적인 일에 따라 그 잘못을 고치는 방법이다. 이는 밖에서 억지로 강제하는 것이기에, 그 어려움이 백 배나 된다. 그리고 병의 뿌리가 여전히 남아 있어, 동쪽에서 사라지면 서쪽에서 생기곤 한다. 따라서 이 방법은 최고로 확연히 깨닫는 도가 아니다.
허물을 잘 고치는 자는, 구체적인 일을 금하기 전에, 먼저 추상적인 이치를 밝게 살핀다. 만약 허물이 살생하는 데에 있다면, 곧 이렇게 생각해 본다.
“상제(上帝: 하느님)께서 생명을 좋아하시고, 만물은 모두 자신의 목숨을 사랑(戀慕)한다. 그런데 저 생명을 죽여서 우리 자신을 보양(保養)한다면, 어찌 스스로 편안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저 생명이 도살당하여 칼에 찔리고 썰린 다음 다시 솥에 들어가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 얼마나 온갖 고통이 골수에 사무칠 것인가? 우리가 자신을 공양함에 맛있고 기름진 진수성찬을 푸짐하게 차릴지라도, 먹고 나면 이윽고 그릇도 텅 비고 뱃속도 꺼지고 만다. 거친 밥과 나물국으로도 충분히 배(허기)를 채울 수 있는데, 어찌 꼭 도살과 육식으로 다른 생명을 죽이고 자신의 복을 덜려고 한단 말인가?
“또 생각건대, 혈기(血氣)가 있는 생물은 모두 영성(靈性)과 지각(知覺)을 지니고 있다. 영성과 지각을 이미 지니고 있는 생물은 모두 우리와 한 몸(一體)이다. 설령 지극한 덕을 몸소 닦아 모든 중생이 우리를 존경하고 친근히 따르게 하지는 못할망정, 어찌 매일같이 동물의 목숨을 끊어서 그들이 우리에게 원한과 유감을 길이 품게 만든단 말인가?”
일단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장차 육식(肉食)을 먹을 때 상심(傷心)하여 차마 그 고기를 목구멍 속으로 넘길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이다. 옮긴이]
또한 전에 분노하기를 좋아했다면, 이렇게 생각해 본다.
“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는(모자란) 바가 있으면, 인정(人情)상 오히려 긍휼히 여겨야 할 것이다. 또 이치에 어긋나게 침범하는 짓이라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본디 분노할 만한 게 없는 것이다.”
또 생각건대, 천하에 스스로 옳다고 여겨, 남은 그르다고 비난하면서, 자기만 내세우는 호걸(豪傑)은 없는 법이다. 또한 남을 탓하는 학문도 없다. 행동하여 얻지 못함이 있으면, 모두 자기가 덕을 잘 닦지 못하여, 감응(感應)이 이르지 못한 탓이다. 우리는 모든 사물을 대함에 스스로 반성하여, 훼방(譭謗)이 다가오더라도, 모두 옥돌을 갈고 닦아 보옥(寶玉)을 이루는 숫돌(他山之石)로 여겨야 한다. 우리가 주어지는 상황을 기꺼이 기쁘게 받아들인다면, 어찌 성냄이 있으리오.
또한 비방(誹謗)을 듣고서도 분노하지 않으면, 비록 시기하고 모함하는 불꽃이 하늘을 그을린다 할지라도, 그 불길은 허공을 불사를 뿐, 마침내 스스로 꺼지고 말 것이다. 그런데 비방을 듣고 분노하면, 설사 교묘한 언사로 애써 변명한다 할지라도, 마치 봄누에가 스스로 고치를 짓는 것처럼, 스스로 속박(自繩自縛, 作繭自縛)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니 성내는 것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해롭다.
그리고 그밖에 온갖 허물과 죄악도, 모두 이와 비슷하게 그에 맞는 이치에 따라 생각하면 된다. 이러한 이치가 밝아지면 허물은 점차 저절로 그칠 것이다.
그러면 마음으로부터 뉘우치는 개과(改過)란 무엇을 일컫는가? 허물의 종류는 천태만상이지만, 모두 다 오직 마음으로 짓는다. 만일 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허물이 어디로부터 생기겠는가? 도를 배우는 사람은 미색을 좋아하거나, 명예를 좋아하거나, 재화를 좋아하거나, 화내기를 좋아하는 등, 여러 가지 허물에 대해 반드시 온갖 종류에 따라 고치는 방법을 찾을 필요가 없다. 다만, 일심(一心)이 착하여 바른 생각(正念)이 탁 나타나면, 사악한 생각은 저절로 올라오지 못한다. 마치 해가 공중에 떠오르면, 귀신이나 요정들이 사라져 숨는 것과 같다. 이것이 정성스러운 일심(精一)의 진실한 전승(眞傳)이다.-주1)
허물은 마음으로부터 지어지니, 또한 마음으로부터 고칠 수 있다. 마치 독 있는 나무를 베어낼 때, 직접 그 뿌리를 잘라버리면(발본색원: 拔本塞源) 그만인 것과 같다. 하필 한 가지 한 가지 치면서, 한 잎 한 잎 따낸다는 말인가? 무릇 최상의 사람(大乘의 최상 근기)은 마음을 직접 다스려 그 자리에서 청정해진다. 사념이 움직이면 곧 깨닫고, 깨닫는 즉시 곧 없어져 죄가 텅 빈다.
진실로 그러할 수 없다면, 모름지기 이치를 밝혀서 사념을 내쫓아야 한다. 또 이치로도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모름지기 구체적인 일과 언행에 따라서 그때그때 금해야 한다. 상근기(上根機)의 자질로 하근기의 공부를 병행하는 것은 실책(失策)이 아니지만, 하등의 방법에 집착하느라 최상의 법문을 모르면 그것은 졸렬(낮은 수준)하다.
무릇 서원을 세워서 허물을 고침에는, 양(陽: 밝은 세계)으로는 훌륭한 친구가 옆에서 늘 일깨워주어야 하며, 음(陰: 음계)으로는 귀신이 보호하고 증명해 주어야 한다. 한 마음으로 참회하고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기를 1주일, 2주일 그리고 한 달, 두 달, 석 달에 이르면, 반드시 효험이 있을 것이다. 혹은 마음과 정신이 맑게 텅 비는 것을 느끼며, 혹은 지혜가 갑자기 확 열림을 깨달을 것이다. 더러 아주 사소하고 번잡한 세속에 묻혀 있으면서도 거기에 물들지 않고 생각이 모두 통달하며, 더러는 원수를 만나도 분노를 돌이켜 환희로 삼게 된다. 또 더러는 꿈에 더러운 오물을 토해 내며, 더러는 꿈에 옛 성현이 자기를 손잡아 이끌어주시는 꿈을 꾸게 된다. 더러는 허공을 날거나 걷는 꿈을 꾸며, 더러는 좋은 깃발이나 보물덮개(寶蓋)나 그밖에 온갖 훌륭한 사물을 꿈에 보게 된다. 이러한 일은 모두 다 허물이 사라지고 죄가 없어지는 징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에 집착해서 스스로 굉장히 높게 생각(自高: 得意忘形)하면 안 된다. 스스로 만족하고 선을 그으면, 공부가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치기 때문이다.
옛날에 거백옥(蘧伯玉)은 20세 때 이미 그 이전의 허물을 깨닫고 모두 고쳤는데, 21세가 되어서는 20세 때 고친 것이 미진함을 알았다. 22세가 되어 다시 21세 때를 되돌아보니, 또 작년이 여전히 꿈속에 있었다. 다시 한 해 또 한 해 더해 가면서, 차례차례 그것을 고쳐 나갔다. 이렇게 50년을 행했을 때, 아직도 이전 49년이 그릇된 줄 알았다. 옛날 사람들이 허물을 고치는 학문(공부, 수양)은 바로 이와 같았다. 그런데 우리 같은 평범한 중생은 죄와 허물이 고슴도치 가시처럼 뒤덮여 있으면서도, 지나간 일을 돌이켜 살펴보면, 항상 허물이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는 마음이 들떠 정신이 흩어지고, 지혜의 눈이 어둠침침하게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과오와 죄악이 몹시 중대한 경우에도, 나름대로 반응이 있기 마련이다. 더러는 마음과 정신이 흐리멍덩하고 콱 막혀서, 고개만 돌리면 금방 잊어버리고 만다. 더러는 아무 일(까닭) 없이 항상 번뇌 망상에 휩싸이며, 더러는 군자를 보면 몹시 놀래서 의기소침해진다. 더러는 올바른 말이나 주장을 듣고도 기뻐하지 않으며, 더러는 은혜를 베푸는데도 남들이 도리어 자기를 원망한다. 더러는 밤에 엎어지고 나자빠지는 꿈을 꾸거나, 심하면 헛소리하고 정신을 잃게 된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죄악을 지은 상징이다. 혹시라도 이 같은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모름지기 분발하여 옛 것은 다 내버리고 새로운 길을 찾아서, 정말 스스로 잘못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주1) 이는 서경(書經: 古文尙書) 대우모(大禹謨)편에 나오는 16자 심법(心法)이라는 명제를 가리킨다. “인간의 마음은 오직 위태롭고, 도덕의 마음은 오직 미약하니, 오직 정성껏 오직 일심으로 그 중용을 진실하게 붙잡아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이는 요(堯) 임금이 순(舜) 임금에게 임금 자리를 선양(禪讓)하면서 전수한 이래, 역대 계속 전승해 온 유가(儒家)의 정통 도맥(道脈)이라고 일컬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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