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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문중에서 숭상한 덕행 실록의 서문

의심끊고 염불하세. 인광대사 편지설법

by 明鏡止水 淵靜老人 2023. 1. 7.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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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문중에서 숭상한 덕행 실록의 서문

(緇門崇行錄序: 치문숭행록서)

 

 

한 스님이 내게 물었소.

사문은 무얼 일삼습니까?”

내가 대답했다오.

도를 일삼지요[事道].”

도를 일삼는 데 무엇이 근본이 됩니까?”

덕행이 근본이 되지요[德行爲本].”

그러자 그 스님이 이렇게 말했소.”

당신의 고루함은 몹시 심합니다. 타고난 근기가 예리하고 총명한 사람은 지혜로 곧장 들어가고, 우둔하고 평범한 중생이나 복덕으로 닦아가는 법입니다[利以慧入 鈍以福修]. 따라서 우리 사문은 지혜를 가지면 충분한데, 덕행은 또 뭐하러 닦습니까?”

그래서 내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오.

옛 사람들은 덕행이 모든 것의 근본이라고 말씀하셨지요. 또 선비가 멀리 크게 나아가려면, 먼저 그릇과 식견을 갖춘다는 말씀도 남겼지요. 하물며 더할 나위 없는 깨달음[無上菩提]의 미묘한 도를, 그 그릇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자들이 닦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사자의 젖은 유리병에 저장하지 않으면 새어 흘러 나오고, 십만 근(: 본문은 萬鈞으로, 1균이 30근이니까, 30만 근에 해당함)의 솥을 가랑잎 같은 배에 실으면 금세 기울어 가라앉지 않을 리가 없지요. 요즘 스님들은 재주가 조금만 예민하고 발랄하면, 그만 경전의 자구 해석이나 하는 훈고학(訓鈐學)에 전념하거나, 유생들처럼 글쓰기를 일삼습니다.

또 조금 낫다는 스님들은, 고승대덕들이 수행하고 설법한 기연(機緣)의 고사 토막을 주워 모아, 소리를 흉내내고 그림자를 붙잡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정말 밝은 지혜의 눈을 지닌 분들에게 비웃음이나 사기에 딱 알맞습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 보면 부처님이나 역대 조사(祖師)들을 크게 앞지르지만, 그들의 행실을 살펴보면 평범하고 어리석은 속인보다 훨씬 뒤처져 있습니다. 말법시대 수행의 폐단이 이처럼 극심합니다.

나는 이러한 폐단이 두려워, 옛 사람들의 훌륭한 수행(善行)을 모아 그 주요 내용을 열 편의 주제로 분류 편집하기로 하였다오. 그 구체적인 순서는 이러하지요.

세속의 오염을 떠난 자를 스님이라고 부르기에, 청소(淸素: 맑고 깨끗함. 는 본디 희다는 뜻임)편을 맨 첫머리에 두기로 하였소.

맑기만 하고 엄정(嚴正)하지 않으면, 이는 미치광이 선비[狂士] 같은 청렴에 그치게 되오. 몸과 입과 생각의 삼업(三業)을 잘 추스리는 수행이 모든 부처님의 공통된 가르침이기에, 엄정(嚴正: 엄숙하고 단정함)편을 그 다음에 두었소.

엄정함은 스승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데, 스승이란 사람들의 모범이기 때문에, 존사(尊師: 스승을 존경함)편으로 그 뒤를 이었지요.

어버이가 낳아 길러 준 다음에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 순서이므로, 어버이를 내버린다면 이는 근본을 잊는 것이오. 그래서 계률과 선행이 비록 만 가지나 될지라도, 모두 효도를 으뜸으로 꼽기 때문에, 효친(孝親: 어버이께 효도함)편을 그 뒤에 두었소.

그런데 충성과 효도는 본디 서로 다른 두 가지 도리[二理]가 아니오, 어버이가 계신 줄만 알고 군주(국가 민족)가 있는 줄은 모른다면, 이는 개인의 사사로운 이기주의에 지나지 않소. 나라의 최고 통치자 한 사람이 현명하고 훌륭하게 다스려야, 우리 또한 산중에서 숲 속과 샘 가를 거닐며 평안히 수행할 수 있지요. 이렇듯 군주(국가 민족)의 은혜가 막대하기에, 충군(忠君: 국가 민족에 대한 충성)편을 그 다음에 이었소.

위로만 충성을 다하고, 아래로 일반 중생들에게 베푸는 은혜가 보잘것없게 되면, 이는 위아래를 두루 제도하는 평등자비의 도()가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물(慈物: 만물에 자비로움)편을 그 뒤에 두었소.

그러나 자비는 애정에 제법 가까우며, 애정은 집착을 낳아 세속을 벗어나는 수행에 장애가 되기 때문에, 고상(高尙)편으로 그 뒤를 이었소.

그렇지만 고상은 자신만 깨끗하게 지키기를 고집하여 중생을 내버리는 것이 결코 아니라, 고상함이 두텁게 쌓여 마침내 큰 빛을 발하고자 바라는 것이라오. 그래서 지중(遲重: 더디고 중후함)편을 그 다음에 두었소.

더디고 중후함을 추구한다고, 단정히 앉아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정말 안 되오. 그러기에 간고(艱苦: 곤궁과 고난)편이 그 뒤에 이어지오.

그런데 수고롭기만 하고 공적이 없게 되면, 사람들이 고난을 싫어하여 물러나게 마련이오. 그래서 인과응보의 법칙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밝히기 위하여, 맨 마지막을 감응(感應: 인간의 정성이 하늘이나 불보살을 감동시켜 그 응답으로 얻는 신비나 기적)편으로 매듭지었소.

이 열 가지 수행으로 덕이 두루 갖추어진 사람이라야, 정법을 맡아 전할 만한 훌륭한 그릇이 된다오. 토질이 비옥한 땅이라야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듯, 마음이 순수한 사람이어야 지극한 말씀을 받아들이는 법이오. 그러한 그릇이라야 더할 나위 없는 깨달음[無上菩提] 얻기를 바랄 수 있지요.

그렇지 못한 사람은 한낱 보잘것없는 범부에 지나지 않소. 인간의 도리도 온전히 닦지 못하면서, 무슨 부처님의 도를 안단 말이오? 그러한 자는 설사 근기가 예리하고 지혜가 풍부하다고 할지라도, 지혜가 많을수록 업장도 더욱 무거워질 따름이니, 장차 어디에 쓰겠소?”

그러자 그 스님이 물었소.

우리 불법에는 한 티끌도 세우지 않거늘, 열 가지 수행을 어찌 내세웁니까?”

그래서 내가 이렇게 반문했지요.

오온(五蘊 : , , , , )이 어지럽게 뒤엉키고, 사대(四大: , , , )가 다발처럼 무성하거늘, 어찌하여 한 티끌도 없다고 말하시오?”

이에 그 스님이 또 이렇게 대꾸합디다.

사대는 본디 텅 비었고, 오온도 또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한 손바닥을 내 주면서(손바닥으로 따귀를 한 번 때린다는 뜻으로 해석되나, 뒷 내용과 연결시켜 보면, 흙먼지를 한 줌 뿌려 주었다는 의미가 더 적절할 듯도 함.) 말했소.

말이나 배우는 무리들이야 깨알처럼 잘고 좁쌀처럼 많지만, 도를 이어 가지는 못하는 법이오.”

이에 그 스님이 아무 대답도 없더니, 낯빛을 불그락거리며 그만 자리에서 일어서더이다. 그래서 내가 웃으며 타일렀지요.

얼굴을 온통 뒤덮은 티끌 먼지를, 그대는 어찌하여 털어내지 않으시오? 조심하고 신중하시오! 교만심을 높이 부리지도 말고, 열등감에 깊이 빠지지도 마시오. 반야(般若: 지혜)를 함부로 지껄여 스스로 허물과 재앙을 부르지도 말며, 헛된 명예[虛名]에 도취하지 말고, 덕이나 잘 닦으시오.

정성을 다하여 도를 닦는 데에 힘쓰다 보면, 노력이 극도에 이르는 순간 마음이 확 트이게 될 것이오. 그러한 다음에라야, 만 가지 수행을 내팽개치지 않으면서도 티끌 하나 받지 않으며, 온종일 텅 비지 않으면서도 또한 온종일 가진 게 하나도 없다는 리치(경지)를 알 수 있소. 이것이 진짜 지혜라오. 원컨대, 그대는 마음을 잘 참구(參究)해 보시오!”

 

내가 도()도 듣지 못하고, 게다가 덕()도 보잘것없는 주제에, 지금 이러한 글을 감히 쓰는 까닭은, 오직 현재 말법시대의 수행 폐단을 구제하는 데에 힘써, 부처님의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일 따름이오. 바라건대, 현명하고 확 트인 선비들이여, 정말로 나 같은 사람이 보잘것 없다는 이유만으로, 이러한 말까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내팽개치지는 마시오.

부디 서로서로 전하여, 참선 수행하는 분들께도 일러 드린다면, 천만 다행이겠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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