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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법어(淨土法語)

의심끊고 염불하세. 인광대사 편지설법

by 明鏡止水 淵靜老人 2023. 1. 6.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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쫚 전등 대사(傳燈大師)

 

 

정토법어(淨土法語)

 

() 천태산(天台山) 유계사문(幽溪沙門) 전등(傳燈)

 

 

 

 

 

무릇 수행 법문이란 여래께서 중생들의 질병에 처방을 내리신 좋은 약[良藥]입니다. 약 처방이 질병에 따라 많아지다 보니, 그 수가 갠지스 강 모래알보다 많은 형편입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가장 간단명료하고 종요(宗要)로우면서 지극히 빠른 지름길은, 극락정토 왕생을 구하는 념불 법문보다 더 훌륭한 게 없습니다. 정토 법문은 정말로 생사 륜회를 재빨리 벗어나는 현묘한 관문[玄關]이자, 깨달음의 도를 신속히 성취하는 비결(秘訣)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개 일반 수행으로 생사 륜회를 벗어남에는 모름지기 세 가지 힘에 의지해야 합니다. 첫째는 자력(自力)이오, 둘째는 타력(他力)이며, 셋째는 본래 지닌 공덕력[本有功德之力]입니다. 가령, 오직 자기 수행에 힘써서 마음 자리를 훤히 깨달아 밝히고 어리석음[無明]의 그물을 찢어 없애며, 애욕의 강물을 벗어나서 부처가 되고 군자가 되는 수행 같으면, 자력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사람은 정말 한량없이 훌륭한 사나이며 진짜 대장부이니, 예컨대 석가모니부처님 생존 시 및 정법(正法)시대 동안에 출현하셨던 수많은 대보살님들과 성문·연각 및 여러 위대한 조사(祖師)들이 그러한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 뒤 상법(像法)과 말법(末法)시대로 내려오면서는, 옛 정법으로부터 멀리 떨어진데다가 중생들의 근기도 형편없이 나빠져서, 비록 수행은 하더라도 깨닫지 못하거나, 또는 깨닫더라도 정통(精通)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자기 혼자 안으로 관조해 보면 해탈한 듯도 한데, 바깥 사물 경계에 부딪치면 형편없이 깨져 여전히 미혹에 빠지기 일쑤입니다. 설사 미혹되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마치 진흙으로 빚은 그릇처럼 굽기 전에 비를 맞으면 흐물흐물 풀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보살도 한번 중음(륜회)을 거치면 더 어두워지고, 초과(初果: 수다원)를 얻은 수행인도 다시 모태(母胎)에 들어가면 어리석어진다고 합니다. 하물며 티끌같은 범부 중생 주제에 어떻게 륜회의 물살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자력 수행은 별 공덕이 없고 홍진의 륜회를 벗어나는 효험도 거의 없습니다. 한번 길을 잘못 들면 천만 번 잘못을 되풀이하게 되나니, 정말로 한심(寒心)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여러 불보살님들께서 다른 방편을 곡진하게 마련해 놓으셨으니, 바로 타력에 의지하는 법문이 열린 것입니다. 이러한 법문은 경전과 론장[經論]에서 직접 밝혀 놓으신 것만도 그 품계(品階)가 많습니다. 그 가운데 불보살님께서 입 아프게 자세히 되풀이하면서 지극한 말씀으로 칭송 찬탄하셨으며, 또 역대 조사들께서 깊이 통달하여 널리 펼치시어 사람들이 마음으로 높이 받들어 행하는 법문으로는, 오직 극락세계 왕생하는 념불 법문이 최고 제일입니다. 말씀말씀마다 유심정토(唯心淨土)의 핵심 종지를 밝히셨고, 구절구절마다 본성미타(本性彌陀)의 미묘법문을 연설하셨습니다.

이 법문을 깨닫는 자는, 중생의 마음과 부처님 마음이 평등하며, 마음의 정토와 부처님 정토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통달하게 됩니다. 또 이 법문을 수행하는 자는, 미묘한 관조[妙觀]와 미묘한 경계[妙境]가 서로 딱 들어맞고, 자력과 타력이 함께 나란히 갖추어짐을 체득하게 됩니다. 하물며 본래 지닌 공덕력까지 어우러져, 시작도 없는[無始] 본래 성품이 갖춘 공덕이 이(념불수행)로 말미암아 온전히 드러나고, 영겁토록 쌓아온 공덕이 이를 계기로 단박에 펼쳐지면 오죽하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사바세계의 과보가 다 차면, 정토가 눈앞에 나타나 련꽃 봉오리에 홀연히 생겨나고[蓮華化生], 더 이상 생사 륜회의 음계에 미혹되지 않습니다. 한번 극락정토[佛道]에 들게 되면 영원히 들게 되어 다시는 물러나거나 타락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미타경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중생들은 모두가 아비발치(阿萊跋致: 不退轉)에 드는데, 그 수가 몹시 많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비하면, 사바세계에서 (자력으로) 도를 닦아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온갖 거칠고 거센 홍진의 경계를 거치면서, 험난한 악도(惡道)가 도처에 없는 곳이 없으니, 정말로 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말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행하기가 더 어려우며, 또 행하기가 어려운 게 아니라 마음의 요령[心要]이 더더욱 어렵습니다. 이는 옛 사람들이 한결같이 경계한 바이니, 우리들도 마땅히 따라 지켜야 합니다.

그 가운데 우리를 위해 정말 진실하게 훈계하고 간절히 일깨우는 가르침으로는, 양차공(楊次公)이 말씀하신 두 구절보다 더 요긴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바로 애욕(애착)이 무겁지 않으면 사바세계에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고, 념불(생각)이 한결같지 못하면 극락정토에 왕생하지 못한다[愛不重, 不生娑婆; 念不一, 不生極樂].”는 경책(警策)입니다.62)

[62) 송나라 때 무위자(無爲子) 양걸(楊傑) 거사가 천태지자(天台智者) 대사의 정토십의론(淨土十疑論)에 쓴 서문(序文)에서 맨 처음 토한 사자후(獅子吼). 본 책 앞부분에 실린 정토십의론서를 참조.]

무릇 념불로 자기 마음을 오롯이 하나로 모으고, 부처님 명호를 간절히 지송(持誦)하여 뜻을 흐트러뜨림 없이 집중 전념하는 일이, 우리가 마땅히 마음을 다해야 할 공부입니다. 그런데 더러 잊어버리고 (마음을 놓고) 념불할 수 없거나, 또는 념불하더라도 한 마음으로 집중할 수 없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감정과 애착에 이끌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애착을 가볍게 덜어 잡념 망상을 막고 감정의 뿌리를 싹둑 잘라 애욕의 그물에서 벗어나는 일이, 우리들이 마땅히 마음을 다해야 할 수행입니다. 그런데 더러 념불은 하면서도 애착을 놓지 못하거나, 또는 애착을 놓더라도 철저히 다할 수 없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념불하는 마음이 오롯이 집중(통일)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극락정토 왕생을 발원하여 념불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늘상 이렇게 자신을 일깨워야 합니다.

사바세계에서 한 애착이라도 훌훌 털어 버리지 못하면, 림종에 이 애착에 이끌려 극락 왕생할 수 없을 텐데, 하물며 애착이 많으면 오죽할까? 또 극락정토는 한 생각이라도 오롯이 집중(통일)하지 못하면, 림종에 이 생각에 얽매여 왕생할 수 없을 텐데, 하물며 생각(잡념망상)이 많으면 오죽할까?”

무릇 극락 왕생의 걸림돌이 되는 애착은, 가벼운 것도 있고 무거운 것도 있으며, 두터운 것도 있고 얇은 것도 있으며, 자신의 몸과 마음 같은 정보(正報)도 있고 세간 사물(환경) 같은 의보(依報)도 있습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부모·처자식·형제·친구·부귀·공명·문장·재주·도술·기예·의복·음식·가옥·전답·산림·화초·보석·골동품 등, 온갖 미묘하고 좋은 물건들을 일일이 셀 수 없습니다. 크게는 태산보다도 무겁고, 작게는 새털보다 가볍습니다.

요컨대, 한 물건이라도 마음에서 잊지 못하는 것이 바로 애착이고, 한 생각이라도 마음에서 놓지 못하는 것이 또한 애착입니다. 한 가지 애착이라도 마음속에 품으면 생각(념불)이 하나로 오롯이 집중되지 못하고, 한 생각이라도 오롯이 일념으로 집중되지 못하면 극락 왕생할 수 없습니다.

오호라! “애착(애욕)이 무겁지 않으면 사바세계에 태어나지 아니하고, 념불(생각)이 한결같지 못하면 극락정토에 왕생하지 못한다[愛不重, 不生娑婆; 念不一 不生極樂].”이 두 구절의 말씀은 정말로 눈 속의 가시를 뽑아내는 황금 핀이고, 급소의 불치병을 고치는 거룩한 약입니다.

무릇 극락정토에 왕생하려고 뜻을 가진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 말씀을 벽에다 써 붙이고 자기 살갗(마음)에다 새겨 두고서, 때때로 장엄하게 염송하며 생각생각마다 스스로 일깨워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바세계의 애착일랑 날마다 덜어 나가려고 힘쓰고, 극락세계의 생각(념불)일랑 날마다 오롯이 집중하도록 애써야 합니다. 애착을 덜고 또 덜어 나가 점차 전혀 없는 무[: ]의 단계까지 이르며, 생각을 하나로 집중하고 또 집중해서 점차 지극한 경지[一心不亂; 無念無想]까지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진실로 이와 같이 수행하기만 한다면, 그런 사람은 비록 사바세계를 단박에 벗어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사바 고해에 오래 머물 나그네는 결코 아니며, 비록 극락정토에 당장 왕생하지는 않을지라도 이미 극락 정토에 초대 받은 훌륭한 귀빈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림종에 올바른 생각[正念]이 앞에 나타나며 극락 왕생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질문: “애착을 가볍게 덜어 내는[輕愛] 데 특별한 도(효과적인 방법)가 있습니까?”

답변: “애착을 가볍게 덜어 내는 데는 생각을 통일[一念]하는 것보다 중요한 길(방법)이 없습니다.”

질문: “그러면 생각을 통일하는 데는 무슨 특별한 도가 있습니까?”

답변: “생각을 통일하는 데는 애착을 가볍게 덜어 내는 것보다 중요한 길이 없습니다.”

그러자 질문자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질문: “스승님의 말씀은 리치에 맞지 않습니다. 앞뒤가 서로 꼬리를 물고 순환하니, 어느 것이 옳은지 주된 핵심이 없는 것 같아, 저희 후학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따라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답변: “앞뒤가 맞지 않는 게 아니라, 생각을 통일하는 방법과 원리를 밝히려고 한 것입니다. 무릇 생각이 하나로 통일될 수 없는 까닭은 대체로 마음을 산만하게 흐트러뜨리는 이상한 연분이 다가와서 뒤흔들기 때문입니다. 또 마음을 산만하게 흐트리는 이상한 연분은 마음이 바깥 경계를 좇아 어지럽게 내닫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우리 사바세계에 한 경계가 있으면 우리 중생에게 한 마음이 있게 되고, 우리 중생에게 한 마음이 있으면 사바세계에 한 경계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릉엄경에서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온갖 법이 생겨나고, 법이 생기기 때문에 온갖 마음이 생겨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연분이 모여들어 안으로 (마음을) 흔들어 대면, (마음이) 밖으로 향해 정신없이 치닫게 됩니다. 마음과 경계가 서로 뒤얽혀 치달리는 현상은 티끌처럼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니 진실로 애착을 놓지 않고서 생각을 하나로 통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생각을 하나로 통일하려면 애착을 가볍게 덜어 내는 게 가장 좋고, (거꾸로) 애착을 가볍게 덜어 내려면 생각을 하나로 통일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하나로 통일하는 방법은 바깥 경계를 막는 것보다 좋은 게 없습니다. 바깥의 모든 경계가 텅 비면 온갖 연분[萬緣]이 죄다 고요해지고, 온갖 연분이 죄다 고요해지면 일념(一念)이 저절로 이루어지며, 일념이 이루어질 것 같으면 애착과 연분이 다 함께 다하고(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생각을 하나로 통일하려면 애착을 가볍게 덜어 내는 게 가장 좋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무릇 애착과 생각(념불)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마치 해와 달이 서로 갈마들어(교대로) 운행하면서, 밝음과 어둠이 서로 등지고 번갈아 찾아드는 것과 같습니다.”

질문: “그러면 바깥 경계를 막는 데[杜境] 특별한 도가 있습니까?”

답변: “내가 바깥 경계를 막는다.’고 말하는 것이, 만물의 존재[萬有]를 깡그리 없애 버린다거나, 또는 눈을 감아 버리고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바깥 경계에 부딪쳐서도 그것이 (본성상) 텅 빈 줄을 깨달으며, 근본 바탕 자리(성품)를 체득해 말단지엽적인 현상을 텅 비운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온갖 법이 본래 스스로 있지 아니하나니, 있는 것(만법을 있게 하는 것)은 감정[]이다[萬法本自不有, 有之者情].’는 리치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감정이 있어서 바깥 사물이 있는 것이며, 감정이 텅 비면 바깥 사물도 텅 비게 됩니다. 사물이 텅 비게 되면 본래 성품이 나타나게 되고, 본래 성품이 나타나면 온갖 법이 텅 비게 되며, 온갖 법[本性]이 텅 비면 감정 생각[情念]이 스러지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저절로 그리 되는 것이지[自然而然], 억지로 애써 시켜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릉엄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見與見緣 []과 보는 연분[]

竝所想相 생각하는 바 모습과 아울러

如虛空花 모두 허공의 꽃 같아

本無所有 본디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보는 것[]과 연분[]은 본디 미묘하고 청정하며 밝은 보리(진리)의 광명체[菩提妙淨明體]인데, 어떻게 그 가운데 옳고 그름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바깥 경계를 막으려면 만물이 본디 텅 비었음을 체득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만물이 본디 텅 빈 줄 체득하면 감정이 저절로 끊어질 것이며, 감정이 저절로 끊어지면 애착이 생겨나지 않고, 오직 마음만이 드러나면서 생각이 하나로 통일될 것입니다.

 

그래서 원각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知幻卽離 (만약 사물이) 허깨비인 줄 안다면 즉각 떠나게 되니,

不作方便 특별한 방편을 지을 필요도 없다.

離幻卽覺 그 허깨비(사물)를 떠나면 곧장 깨닫게 되니,

亦無漸次 또한 차례대로 점진할 필요도 없다.

一去一留 한 번 떠나가고 한 번 머무름에

不容轉側 몸 뒤척여 돌릴 틈도 용납하지 않으니,

功效之速 공덕 효험이 나타나는 빠르기는

有若辣鼓 마치 북채로 북 치는 순간 소리 울리듯 하리.

도를 닦는 (진리를 배우는) 선비들은 마땅히 이 점에 마음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질문: “그러면 애착을 가볍게 덜어 내는 것[輕愛]과 생각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一念]은 도대체 같습니까?”

답변: “사바세계의 애착을 가볍게 덜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극락세계의 생각을 하나로 통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극락정토의 생각을 하나로 통일할 수 있으면, 반드시 사바세계의 애착을 가볍게 덜 수 있습니다. 이는 대체로 뜻이 있고[有志] 없고[無志] 차이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뜻이 없는 경우를 제쳐두고 오직 뜻이 있는 사람만을 말한다면, 생각이 하나로 통일되지 않으면 애착은 버릴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애착을 버리지 않으면 생각은 하나로 통일되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 수행 공부 사이에는 애시당초 조금도 틈(차이)이 없습니다.”

 

옮긴이 보충 해설: 기독교식의 흔한 비유로, 사람이 세간에서 죄를 짓지 않고 착하게 산다고 해서 반드시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늘나라에 갈 사람은 반드시 죄를 짓지 않고 착하게 삽니다. 또 착하게 살아도 예수님을 믿고 하늘나라에 가고 싶다는 소망을 품어야만 하늘나라에 갈 수 있고,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믿음과 소망(발원)을 지닌 사람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하늘나라에 가려는 생각이 철저하지 않으면 죄를 안 짓고 좋은 일만 하는 착한 사람이 될 수 없고, 반대로 세간에서 죄를 안 짓고 좋은 일만 하는 착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결코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는 리치와 똑같습니다. 그래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실천은 셋이 하나로 어우러져야 합니다. 착한 심성과 극락 왕생은 뗄래야 뗄 수가 없는 혼연일체의 상호 인과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질문: “애착을 가볍게 덜어 내는 법문은 이제 잘 들었습니다. 그러면 생각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변: “생각을 하나로 통일하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가 믿음[]이고, 둘째가 수행[]이며, 셋째가 발원[]입니다.

첫째로, 믿음입니다.

무릇 의심하지 않는 것을 가리켜 믿음이라고 합니다. 만약 정말로 의심이 있다면, 마음이 하나로 통일될 수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극락 왕생을 구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돈독한 믿음으로 시작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러 대승경전을 두루 읽고 뭇 조사들의 가르침을 널리 배워야 합니다. 극락정토의 법문을 밝히고 찬양하는 글들은 모두 하나하나 깊이 참구하여, 극락이 바깥에 있는 다른 국토가 아니라 원래 오직 내 마음 속의 정토[我唯心之淨土]임을 깨닫고, 아미타불 또한 바깥에 있는 다른 부처님이 아니라 원래 내 본성 안의 아미타불[我本性之彌陀]임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방법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미묘한 존재[妙有]는 온 법계에 두루 퍼져 있고 빠진 것 없이 두루 갖추어져 있음을 깨달아, 극락정토를 믿고 흔연히 기뻐하는 (극락왕생 발원의) 근본으로 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진짜 텅 빔[眞空]은 원만히 벗어나고 원만히 해탈함을 깨달아, 사바 고해[穢土]를 싫어하고 기꺼이 내버리는 원천으로 삼는 것입니다.

둘째로, 수행(修行)입니다.

앞의 첫 번째 돈독한 믿음이 눈으로 보는[目視] 것이라면, 이제 수행은 발로 길을 가는[足行] 것입니다. 믿기만 하고 수행하지 아니하면, 이는 눈만 있고 발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수행은 하는데 믿지 아니하면, 이는 발만 있고 눈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믿음과 이해[信解]가 일단 갖추어지면, 그에 상응하여 념불 수행을 하여야 마땅합니다. 마치 눈과 발이 함께 어우러진 다음에라야 비로소 청량한 연못[凉池]에 다다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믿음 다음에 수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수행의 법문(: 行門)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본 수행[正行]이고, 다른 하나는 보조 수행[助行]입니다. 기본 수행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는데, ‘나무 아미타불이라는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칭명념불(稱名念佛)과 부처님의 모습이나 공덕을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관상념불(觀想念佛)입니다.

우선, 칭명념불이란, 불설아미타경에 나오듯이 이레 동안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여 한 마음 흐트러지지 않는[七日持名, 一心不亂]’것을 가리키는데, 구체적인 사일심(事一心)’과 추상적인 이일심(理一心)’이 있습니다.

입으로 부처님 명호(나무 아미타불)를 부르면서 마음을 한 곳에 묶어 두면, 념불 소리가 하나하나 서로 이어지며, 순간순간의 마음이 흐트러짐 없이 통일됩니다. 그러다가 마음이 더러 바깥 경계에 끌려 흩어지려고 하면, 바로 추스려 되돌아오게 합니다. 이러한 념불에는 모름지기 흔들림 없는(확고부동한) 결정심(決定心)을 내고, 뒤돌아보는 (앞날을 걱정하는) 후제심(後際心)을 끊으며, 온갖 세속 일을 내팽개쳐 버리고, 바깥 사물에 연연하는 마음을 놓아 버려야 합니다.

이러한 념불심[念心]을 점점 길게 증가시켜 가다 보면, 처음에는 잠깐 동안에 머물다가 나중에는 오랫동안 지속되는데, 하루·이틀 나아가다 이레에 이르기까지 결국에는 한 마음 흐트러지지 않는 일심불란(一心不亂)을 성취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구체적인 칭명념불을 통해 얻는 사일심입니다. 정말로 이러한 한 마음[一心]’을 얻으면, 극락정토의 청정한 원인이 성취되어 림종 때 틀림없이 정념을 유지합니다. 몸에 아무런 질병이나 고통 없이, 어떠한 죄악의 업장에도 얽매이지 않고, 갈 때가 오는 것을 미리 알아 몸과 마음 모두 환희에 가득 차서 더러는 앉은 채[坐脫]로 더러는 선 채[立亡]로 편안하고 상서롭게 떠나갑니다. 그때 아미타부처님께서 몸소 광명을 나토사 극락 왕생을 맞이하여 인도하심을 친견하게 됩니다.

이일심(理一心: 추상적 리치로 깨닫는 한 마음)’이란 특별히 다른 법문이 있는 게 아니라, 바로 구체적인 사일심 가운데서 한 생각 한 생각마다, 념불하는 주체인 마음과 념불의 대상인 부처의 본질(본래 성품)을 훤히 통달하는 것입니다. , 과거·현재·미래의 삼세가 평등하고 시방 세계가 서로 융합하며, 텅 빈 것도 아니고 뭔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자기도 아니고 남도 아니며 (자기와 남이 따로 구별되지 아니하며), 감도 없고 옴도 없으며, 생겨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으니, 지금 앞에 나타나는 한 생각의 마음[一念之心]이 곧바로 미래 극락정토의 시절[淨土之際]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념불하면서도 념불함(념불한다는 생각)이 없고[念而無念], 념불함(념불한다는 생각)이 없이도 념불하며[無念而念], 생겨남(왕생)이 없이 생겨나고[無生而生] 생겨나면서도 생겨남이 없으니[生而無生], 념불할 만한 게 없는 가운데 치열하게 념불하고, 생겨남(왕생)이 없는 가운데 간절하게 생겨남(극락왕생)을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구체적인 사일심 가운데서 추상적인 이일심을 훤히 깨닫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관상념불은 관무량수불경(觀無量壽佛經)에서 자세히 설해 놓으신 바와 같습니다. 관상의 대상은 16경계가 있지만, 그 중 부처님 관상[觀佛]이 가장 중요합니다. 아미타부처님께서 한 길 여섯 자[丈六: 16]의 키에 온통 자마황금(紫磨黃金) 빛을 띤 모습으로 칠보 련꽃의 연못 위에 서시어 손을 드리우고 우리를 맞이하시는 형상을 관상(觀想)하는 것입니다. 그 아미타부처님 몸에는 32가지 대인의 상[大人相]이 있고, 각 상마다 80가지 수형호(隨形好)가 있습니다. 이러한 관상념불에도 구체적인 사물과 추상적인 리치에 의한 두 가지 일심이 있습니다. 구체적인 사일심은 마음으로 부처님을 묶어 두고 부처님으로 마음을 묶어 두는 방법인데, 처음에는 향합의 밑바닥처럼 편평한 부처님 발바닥을 관상하고, 다음에는 천 개의 바큇살을 지닌 바퀴의 모습을 관상하며, 이와 같은 순서로 거슬러 올라가 정수리 가운데 있는 육계(肉鉅)까지 이릅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정수리 육계로부터 차례대로 발바닥까지 내려오면서, 하나하나 뚜렷하고 분명하게 관상하면서 조금도 생각이 흩어져서는 안 됩니다.

이일심이란 경전에 나오는 다음 말씀과 같습니다.

 

모든 부처님은 법계의 몸으로서

일체 중생의 마음 생각 속에 들어가 계시니,

그래서 너희들이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할 때

이 마음이 곧 32 80종호니라.

이 마음으로 부처님이 되고 이 마음이 곧 부처님이니,

모든 부처님의 올바른 깨달음과

원만한 지혜의 바다는

마음속 생각에서 생겨난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마땅히

저 여래·응공·정변지 등으로 불리는 공덕 원만한 부처님을

마음속 깊이 생각하여야 하느니라.

諸佛如來, 是法界身,

入一切衆生心想中.

是故汝等心想佛時,

是心卽是三十二相八十種好.

是心作佛, 是心是佛,

諸佛如來正鸚知海, 從心想生.

是故汝等應當繫念彼佛

多陀阿伽度阿羅訶三臺三佛陀

 

이러한 리치에 미묘한 세 관법[微妙三觀]이 모두 밝혀져 있는데, 더 구체적인 내용은 (송나라 때 지례(知禮) 스님이 쓴) (무량수불)경소묘종초(觀無量壽佛經疏妙宗抄) 가운데 자세히 해설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칭명념불과 관상념불의 두 가지 기본 수행은 함께 어우러져 상호 보완적으로 병행되어야 마땅합니다. 평소 다니고 머물고 잠들고 누울[行住睡臥] 때에는 한 마음으로 나무 아미타불을 지송하는 칭명념불을 하고, 또 방석에 가부좌로 앉을 때에는 마음마음마다 관상념불을 하는 것입니다. 돌아다니며 칭명념불하는 게 귀찮아지면 조용히 가부좌로 앉아 관상념불하고, 좌석에서 일어나면 경행(經行)하며 칭명념불을 합니다. 이렇듯 다니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하는 일상의 행동 가운데서 끊임없이 념불 수행을 하면 틀림없이 서방 정토에 왕생합니다.

또 보조 수행[助行]에도 또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간의 수행으로, 부모님께 공손히 효도하고 세상에 인자(仁慈)함을 힘써 베풀며, 자비로운 마음에서 산 목숨을 죽이지 않는 등, 모든 계률을 잘 지키는 것들입니다. 무릇 중생에게 이익이 되는 일은 모두 그 공덕을 서방 정토에 회향하면, 어느 것 하나 도덕 수행의 보조 아닌 게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출세간(出世間)의 수행으로, 륙도만행(六度萬行: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의 육바라밀을 통한 모든 수행)의 온갖 공덕이나, 대승경전 독송과 참회 예불 수행의 공덕들도, 모름지기 또한 회향하는 마음으로 닦아간다면, 어느 것 하나 극락정토 왕생의 보조 수행 아닌 게 없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더욱 미묘한 보조 수행이 있습니다. 연분에 따라 부딪치는 바깥 경계에 대해서, 어느 곳 어느 때이든지 상대방한테 마음을 잘 쓰는 것입니다. 예컨대 가족들을 볼 때는, 서방 정토의 불법 가족[法眷]으로 생각하여 정토 법문으로 잘 일깨우고 가르쳐 줌으로써, 세속 사물에 대한 애착을 가볍게 덜고 생각(념불)을 하나로 통일하여 장래 영원히 무생법인의 가족[無生眷屬]이 되도록 이끌어 줍니다. 또 만약 은혜나 애정[恩愛]의 생각이 일어날 때면, “극락정토의 가족(도반·법우)들은 사랑의 감정[情愛]이 없다는데, 어떻게 해야 이 애욕의 고통을 멀리 떠나 극락정토에 왕생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이 나고 화가 치밀[瞋迷] 때에는, “극락정토의 가족들은 촉감이나 번뇌가 없다는데, 어떻게 해야 이 분노의 고통을 벗어나서 극락정토에 왕생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또 고통을 당할 때면, 극락정토에는 어떠한 고통도 없고 오직 온갖 즐거움만 누림을 마땅히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즐거움을 누릴 때면, 극락정토의 즐거움은 더할 나위 없고 비할 데 없이 무궁무진함을 마땅히 생각할 것입니다. 무릇 자신이 부닥치는 온갖 연분과 경계에 대하여 모두 이와 같은 리치로 미루어 생각해 나간다면,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어느 것 하나 정토 왕생을 위한 보조 수행 아닌 것이 없습니다.

셋째로, 발원[]입니다.

무릇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반야선[般若舟: 지혜의 배], 모름지기 믿음[]으로 뱃머리를 삼아 앞의 물길을 더듬고 물살을 헤치며, 념불 수행[]으로 돛을 달고 노를 저어 나아가면서, 발원[]으로 뱃전의 키를 삼아 방향을 올바로 잡아 주어야 합니다. 뱃머리의 물길 탐색이 없으면 물길의 깊이와 암초를 알 수가 없고, 돛과 노의 추진력이 없으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으며, 키의 방향 조정이 없으면 목적지를 향한 항로 통제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념불 수행 다음에 발원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발원에는 공통 발원과 개별 발원이 있고, 넓은() 발원과 좁은(작은) 발원이 있으며, 보편적인 발원과 국부적인 발원이 있습니다. 공통 발원이란 장기간 참회 예불 독송 시 읽혀 온 옛날 고승대덕의 회향 발원문과 같은 것이고, 개별 발원이란 각자 자기 생각과 소원에 따라 회향하는 것입니다. 넓은() 발원은 사홍서원(四弘誓願)과 같이 위로 부처님 도를 구하여 아래로 중생을 교화하겠다는 발원이고, 좁은(작은) 발원은 스스로 닦고 스스로 제도하여 금생에 결정코 극락 왕생하겠다는 뜻을 세우는 것입니다. 국부적인 발원은 예불이나 독송 시 대중과 함께 낭독하는 발원이고, 보편적인 발원은 어느 때건 수시(항시)로 발원하고 어느 곳이든 도처에서 마음을 표시하는 발원입니다. 요컨대, 모름지기 사홍서원의 정신에 부합해야 하며, 자기 마음대로 엉뚱하게 세워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대체로 발원은 개별 발원이 적합하고 공통 발원은 피하는 게 좋습니다. 공통 발원은 사람들 말에 따라 하다 보면 자기 나름의 생생한 기준이 없는데, 개별 발원은 자기 마음을 스스로 표시하며 강한 의지로 적극 진취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공통 발원문을 따라 하면서도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낼 수 있다면, 형식은 비록 공통이지만 실질상 개별 발원이 됩니다. 반대로 개별 발원문이라도 오래 계속하면서 건성으로 산만하게 읽고 넘어간다면, 이는 형식만 개별이지 사실상 공통 발원처럼 되고 맙니다.

또 발원은 넓게(크게) 해야지, 좁게(작게) 해서는 안 됩니다. 발원이 넓으면 그에 따라 내는 마음도 커지고 얻는 과보도 수승하지만, 발원이 좁으면 마음도 좁아지고 얻는 과보도 보잘것없습니다.

그리고 발원은 보편적으로 해야지, 국부적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국부적인 발원은 마음 표시가 한정되기 때문에, 마음을 기약함(일깨움)이 자주 끊기곤 합니다. 반면 보편적인 발원은 생각생각마다 마음을 내어야 하기에, 시시각각으로 극락정토를 원만히 성취해 갑니다.

위와 같은 믿음[수행[발원[]의 세 가지 법문은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삼대 강령이자, 아미타부처님을 알현(친견)하는 보배로운 뗏목입니다. 일체의 정토 법문은 모두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전등(傳燈) 대사: 명나라 만력(萬曆)부터 천계(天啓) 사이에 생존한 천태종의 중흥조인데, 정토사상을 크게 선양하였다. 천태산(天台山) 유계(幽溪)에 있는 고명사(高明寺)에 주석하여 유계(幽溪) 대사로도 불린다. 유마경(維摩經릉엄경(楞嚴經법화경 등에 대해 주소(註疏)를 달고, 천태전불심인기주(天台傳佛心印記注)와 성선악론(性善惡論)을 썼다. 뿐만 아니라, 우익(藕益) 대사가 선정한 정토십요(淨土十要)에 아홉 번째로 실린 정토생무생론(淨土生無生論)을 지었는데, 이 법문을 신창(新昌) 석성사(石城寺)에서 처음 강설할 때 매번 법좌에 오를 적마다 공중에 천상음악[天樂]이 가득 울려 퍼져 법회에 동참한 대중이 모두 함께 들었던 걸로 유명하다.]

 

 

 

청화 큰스님께서 친히 부촉·격려해 주신 자비 은혜에 힘입어 金輪지에 정토법어를 번역 소개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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