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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광대사가언록. 차례, 서문, 일러두기

by 明鏡止水 淵靜老人 2023. 1. 5.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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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 수행으로 극락정토에 왕생합시다!

 

이 글은 인광대사가언록(印光大師嘉言錄) 번역 단행본의 권두 법문을 권청(勸請)하러 성륜사(聖輪寺)를 방문했을 때, 청화 큰스님께서 때마침 봉행하던 천도재의 회향 법문으로 설하신 것인데, 필시 제 염원을 미리 아신 듯 그 내용이 안성맞춤이라, 이튿날 큰스님을 친견한 자리에서 그 뜻을 여쭙고 허락을 받아, 가언록의 한글 번역판의 서문으로 대신 싣습니다. 법문의 제목은 독자의 편의를 위해 부득이 옮긴이가 임의로 붙인 것입니다.

- 보적(寶積) 합장

 

우리가 믿고 있는 불교는 바로 우주의 종교입니다. 따라서 단지 우리 인간의 행복만을 위하는 그런 종교는 아닙니다. 물론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힌두교나 다 마찬가지입니다만, 불교는 특히 어느 종파의 진리도 부처님 가르침 속에 포함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가령 우리 개인의 행복을 위한다고 하더라도, 부처님 법은 그 행복이 어떠한 것이고 행복의 반대가 되는 불행의 시초는 무엇인가?’ 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풀어 주지 않으면, 부처님 가르침은 의의가 없고 개인의 복락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보통 몸이 아픈 데가 없으면 무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몸이 아프지 않다고 해서 병자가 아닌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중생의 번뇌 망상을 벗어나지 못하면, 모두가 다 번뇌 병자입니다. 우리는 지금 번뇌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우선 나와 너를 구분하는 자기라는 이기적인 관념 자체가 무명병입니다. 무지의 병입니다. 무명 때문에 탐욕심과 분노하는 진동이 많이 생기고 어리석은 마음이 더욱 더 치성해져 우리를 괴롭힙니다.

우리는 무슨 법회에서나 삼보에 귀의하는데, ‘부처님이 어떠한 존재인가?’라는 관념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부르는 대로 따라서 합니다. 그러나 삼보라는 뜻만 확실히 알아도, 우리는 범부심인 무명을 상당히 벗어나게 됩니다. 같은 불법도 초기에는 부처님 하면 모양으로 나토신[化身] 석가모니 부처님만을 부처님으로 숭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참 뜻은 이른바 대승불교의 법신(法身) 부처님입니다. 법신 부처님이라는 사상을 모르면, 우리 부처님 가르침이 우주적 종교가 될 수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화신 부처님은 모양으로 나토신 석가모니 부처님에 국한하기 때문에, 우주 전체를 포섭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법신 부처님은 화신 부처님뿐만 아니라, 다른 성자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다 법신 부처님의 개념 속에 포함됩니다. 단지 모양이나 이름이 있는 것뿐만 아니라, 이른바 명부득(名不得) 상부득(相不得)이라, 모습도 없고 이름도 없는 그런 존재까지도 법신 부처님의 개념 가운데 다 포섭됩니다.

이렇게 되어야 불교가 진솔히 세계적인 우주의 종교가 되지요. 우리는 지금 국가적인 안녕을 위해서도, 국제간의 단결을 도모하지 않으면 참다운 한 국가의 안녕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기업이나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 모두가 다 국제적이고 우주적인 쪽으로 지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류 문화가 발전할수록, 모든 현상은 갈수록 부처님 가르침에 가까워집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냥 우주의 본질, 우주의 생명 위에서 가만히 계시는 그런 분이 아니라, 그 우주의 생명자리인 법신 부처님은 본래 다 원력이 있습니다. 우리도 나름대로 자기 수양에 따라 여러 가지 서원이 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모든 생명의 본질인 법신 부처님도 원력이 있습니다. 목적의식이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주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아야 우리 신앙도 더 깊어지고, 또 그런 것을 알아야 아까 말한 근본적인 번뇌의 병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그 법신 부처님, 우주의 참다운 생명인 그 부처님 자리는, 이름이야 어떻게 불러도 좋습니다. ‘하나님이라고 불러도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그 개념이 무엇이든, 그 가운데 우주의 유정(有情)과 무정(無情), 유상(有相)과 무상(無相) 모두가 포함되면 좋습니다. 그런 것이 바로 부처님이고 하나님의 참뜻입니다.

지금은 무서운 시대이고 세계의 위기 상황인데, 이런 때 다른 것을 배격하는 마음은 굉장히 치졸한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이웃 간의 화평을 도모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나와 더불어 남도 온전히 이해해야 합니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 뿌리나 그대 뿌리나, 동양사람 뿌리나 서양사람 뿌리나, 모두 다 하나의 생명에서 보아야 한단 말입니다.

조금 어려운 철학적인 용어로 이른바 유출설(流出說 : emanatio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고대 모든 철학에서 말씀한 것이고, 힌두교나 다른 세계적인 종교도 대체로 그와 유사한 말씀을 했습니다. 흐를 류() 자 날 출() 자 유출인데, 그 뜻은 우주의 모든 존재와 생명이 우주의 본질로부터 흘러나온다는 말입니다. 마치 바위 틈새에서 물이 솟아 흘러나오듯이, 우주의 본래 생명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부터 모든 종교가 이루어진다 이 말입니다. 어느 위대한 철인도 유출설을 부인하는 분은 별로 없습니다.

가령 불교의 우주관은 맨 처음도 끝도 없이 항시 영겁으로 순환합니다. 모두가 다 파괴되고 텅텅 비어서 물질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세계, 즉 공겁(空劫)이 된다고 하더라도,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라는 형상만 없는 것이지 생명은 그 가운데 충만해 있습니다.

따라서 그 가운데 생명의 작용으로 해서 다시 우주가 차근차근 형성되어 나옵니다. 이게 아까 말한 유출(流出)입니다. 샘물 솟듯이 태양계가 나오고 금성, 토성, 지구가 나옵니다. 어떠한 존재나 근본 진리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종말에는 다시 모두 진리로 돌아갑니다.

종교는 우주의 근본 진리와 항시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은 자기 종교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하나의 기본 철학이 확립되어야 합니다. 그 모든 정보, 종교, 학문 체계가 얽히고 설켜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는 정말로 진리를 소중히 정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자기 마음의 번뇌를 녹여서 마음의 병자가 안 되기 위해서라도, 꼭 진리의 본질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효과적이고 근본적으로 번뇌를 없애지, 그렇지 않고 고식적으로 우선 눈앞에 보이는 것, 예컨대 우리 집이 재수가 나쁘니까, 내 몸이 아프니까 좀 고쳐 봐야겠다는 식으로 좁은 마음을 써서는, 자기가 봐둔 것도 근본적인 해결이 안 됩니다. 하물며 우리 인간 번뇌의 본질적인 무명이 제거되겠습니까? 모든 갈등이 무명 무지에서 오는데, 무지에 대한 상식이 없으면 다른 것이 해결이 안 됩니다. 그냥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은 항시 불안합니다.

우리 본래의 생명이 바로 이 법신 부처님한테서 왔습니다. 법신 부처님은 이름도 모양도 없는 우주의 생명 자체입니다. 우리 마음도 그와 똑같이 모양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생각함으로 해서 내 마음도 존재합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 성품이나 우주의 본래의 생명자리인 법신 부처님이나 똑같습니다. 그러기에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 바로 참다운 부처입니다. 부처님 신앙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을 지금 새삼스럽게 닦아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로 부처라는 소식입니다.

단편적으로만 불교를 공부해서는, 우리 목전에 있는 문제도 본질적인 해결은 절대로 못합니다. 가정이나 사회 문제나 항시 모든 문제를 진리의 차원에서, 우주의 본 바탕에서 비추어 봐야 합니다. 그래야 시원스럽게 해결이 됩니다.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이라. 눈 한 줌을 뜨거운 화로에다 넣으면 금방 녹아버리듯, 어느 모습이나 고민이나 진리에서 보면 순식간에 해결됩니다. 진리에서 보면 죽고 살고, 잘 되고 못 되고 문제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진리에서 보면 우리 생명은 본래로 죽음이 없습니다.

불생불멸이라, 우리 생명 자체는 본래 나지도 죽지도 않고, 영생(永生)으로 존재합니다. 내 생명이 몇 십 년 살다가 죽겠지. 내 몸이 지금 안 좋으니까, 몇 년 안 가서 죽겠지. 이러면 항시 불안스럽겠지요? 그러나 그런 것은 거품 같고 그림자 같은 것입니다. 죽음이 본래로 없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용기가 나겠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우주의 목적의식은, 근본 ()’자 원할 ()’자 본원이라, 또는 근본 서원 그럽니다. 원래 우주는 생명 자체입니다. 우리는 자칫 산이나 냇물이나 산 위에 있는 절이나, 이런 것은 생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 인간 정도의 업장을 가진 중생이 가진 견해이지, 진리의 견해가 못 됩니다.

진리는 우리 인간적인 견해, 탐욕심과 분노하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 이런 독스러운 마음이 가셔버린 성자의 경지에서만 참다운 진리가 보입니다. 이것을 견성오도(見性悟道)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견성은 볼 견()자 성품 성()자로 우주의 본래 성품을 본다는 뜻이고, ‘오도는 깨달을 오() 자 길 도() 자인데, ()는 바로 진리를 말하므로 진리를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불교 말로 참된 사람, 진인(眞人)입니다. 중국 당나라 때 유명한 임제 선사가 무위진인(無爲眞人)이라고 했는데, 무위진인은 모양이나 이름에 걸리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배에 걸리고 무슨 감투에 걸리고 재산에 걸리면 참다운 진인이 못 됩니다.

불교의 목적은 무위진인이 되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금생에 재산 많이 모으고 감투가 올라가는 것으로 인간의 목적을 생각하면, 정말로 안타까운 속물입니다. 소중한 자기 생명을 갖고서 속물에 바쳐서 일생을 마치면 되겠습니까? 불자님들, 목전에 가족들 문제라든가 여러 가지 문제가 얽히고 설켜서 먹고 살기도 어렵고, 정말로 고난에 처해 있는 분들이 한두 분이 아니겠습니다. 그렇더라도 그런 문제까지도 근본적인 해결은 꼭 진리와 더불어서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해결이 빨라지고, 또 어느 고민에도 우리 마음이 불안하지 않습니다.

아까 말한 유출설은 철학자로 플라톤이 맨 처음에 제창했습니다. 물론 더 앞선 분들이 다 알고는 있었지만, 한 체계를 세운 것은 플라톤입니다. 우주는 모두가 하나의 진리에서 왔기 때문에, 종국에는 모두가 그 역으로 하나의 진리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의 진리로 돌아가는 나그네 길입니다. 하나의 진리로 돌아간다는 테오리아(theoria)’라는 말은,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또 한 체계를 세웠습니다.

우주는 인간이 좋다고 생각하고 궂다고 생각하고, 남을 좋아도 하고 미워도 하고 욕심도 내고 하지만, 그런 것도 인간이 잘 몰라서 그렇지, 알고 보면 그런 모든 시행착오를 거쳐서 드디어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로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그런 도리를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제가 제 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위대한 성현들과 철인들이 다 한결같이 하신 말씀을 저는 전달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주는 하나의 생명에서 왔다가, 나중에는 하나의 생명으로 귀로(歸路)합니다. 즉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내 아내나 내 남편이나 내 자식이나, 모두가 다 실은 빠르고 더디고 차이만 있을 뿐이지, 모두가 다 근본 고향 자리, 진리로 돌아갑니다. 진리에서 왔으니 다른 데로 갈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렇게 우리 귀중한 불자님들이 많이 모이셨습니다. 이런 자리를 그냥 그렁저렁 미봉책으로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좀 납득하기가 어려우셔도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본질적인 진리에다 비추어서 모든 문제를 풀어가도록 하십시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공부를 해야 빨리 근본으로 돌아갈 것인가? 그런 문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본래로 부처이지만, 우리 마음은 지금 여러 가지 못된 생각도 하고, 또 금생에 태어나서 진리에 맞는 생각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진리가 뭣인지 모르고 생활해 왔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 마음의 본성은 진리 그대로인 부처님과 똑같습니다.

우리 마음은 시간성이나 공간성을 가지고 있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해서 더럽혀지지 않고 오염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나쁜 생각을 하더라도, 나쁜 생각이 형체 없이 그림자같이 좀 머물다가 나중에 없어져 버리는 것이지, 우리의 그 청정한 마음을 오염시킬 수가 없습니다. 극악무도한 사람도 마음 본성은 청정무구한 불심과 똑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본래로 부처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본래로 분명히 부처라고 말하지만, 나쁜 버릇이 너무나 많이 붙어 있습니다. 불교로 말하면 무시(無始) 이래로 몇 만 생, 몇 천 생 동안에 우리가 인간도 되었다가, 조금 잘 살고 열 가지 선업을 닦아서 천상도 갔다가, 잘못 살아서 지옥도 갔다가, 이렇게 무수 생 동안 행해 온 버릇이 붙어 있습니다. 그런 버릇 때문에, 우리가 본래로 부처라는 소식을 들어도 잘 모릅니다.

부처님 당시로부터 삼백 년 후에 음광부(飮光部)’라는 근본불교 종파가 있습니다. 불교 종파가 한 20가지나 되는데, 20종파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째서 음광부라고 했냐면, 음광부를 개설한 위대한 성자가 하도 빛나기 때문에, 그 성자가 나타나면 다른 빛은 다 들이마신 것처럼 감추어져 버린다는 말입니다.

음광부를 개설한 분은 선세(善世)’라는 분인데, 인도 말로 하면 가섭유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고, 한문투로 풀이하면 성자라는 분인데, 그분은 십 세도 채 못 된 일곱 살 때 성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믿기지가 않으시지요? 아직도 재롱부릴 나이인 일곱 살 때 성자가 되었다니!

우리 인간은 충분히 그렇게 될 수가 있습니다. ‘다라표라는 비구는 14세 때 승려가 되어, 2년 만인 16세에 팔만장경을 통달하고 아라한과를 성취했습니다. 이것도 믿기 어려운 문제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 마음이 순수하면 교학적으로 아무 것도 안 배우더라도, 우리 마음이 본래로 법신불이기 때문에, 그 자리는 만민이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 자리를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것이 소중한 것입니다. 믿으면 우리 공부는 순풍에 돛단배가 됩니다.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源功德母), 믿음이라는 것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입니다. 바른 믿음이 있어야, 우리 공부도 빠르고 성불도 할 수가 있습니다. 그 믿음은 뭘 믿는 것인가? 밖에 있는 부처님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이 부처인 것을 믿어야 참다운 바른 믿음[正信]이 됩니다. ‘모든 공덕을 갖추고 있는 것이 본래로 내 마음이다.’라고 믿을 때는, 우리가 설사 무슨 좌절을 당해서 비관에 처해 있고, 나 같은 하찮은 목숨 차라리 끊어버려야겠다고 생각이 들 때라도, 자기 목숨을 끊을 수가 없습니다. 무슨 수로 끊습니까? 가장 소중한 능력이 무한히 자기 마음에 원래 갖추어져 있는데 말입니다.

따라서 그 마음은 무한한 가능성인지라, 우리 믿음과 생각에 따라서는, 아까 선세 동자와 같이 일곱 살 먹어서도 성자가 될 수 있습니다. 어느 때도 우리는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설사 우리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선지피를 흘리면서 목숨이 으스러진다고 하더라도,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몸에 의지한 우리 마음은 그때 잠시 고통 받는 것뿐이지, 몸뚱이가 으스러지자마자 바로 더 나은 삶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바로 살았으면, 교통사고를 당해서 몸뚱이가 으스러진다고 하더라도, 그 순간 몸뚱이가 생명 활동을 그치자마자 더 좋은 쪽으로 천상도 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 생명은 그러기에 소중하고 존엄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방법도 부처님 법문에 의지하면, 어려운 문과 쉬운 문이 있습니다. 난행문(難行門)과 이행문(易行門), ‘2의 석가라는 용수보살이 그런 문의 체계를 세웠습니다. 어려운 문은 우리가 경을 배우고 선방에 들어가서 참선을 하고, 모든 힘을 다해서 받들어 가지고 한 단계씩 올라갑니다.

그러나 쉬운 문은, ‘경을 외우지 말라 또는 참선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도 소중하나, 그러한 어려운 작업을 안 하더라도 가는 문입니다. 팔만장경을 누가 다 볼 수가 있습니까? 또 좌선해서 삼매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는 오십 년 이상 참선을 했지만, 아직도 공부를 끝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쉬운 문[易行門]은 별로 어렵지가 않으니, ‘자기 마음이나 모든 우주의 존재가 오직 하나의 생명이요, 하나의 부처다.’ 그렇게 믿고서 부처님 이름을 외우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가장 공부하기 쉬운 염불입니다. 이것이 쉬운 문인데, 2의 석가 용수보살이 그 체계를 세웠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다 염불을 제대로 하시고 계시겠지요? 그것이 제일 쉽습니다.

내가 부처고 또는 우주 본래의 자리, 우주의 생명이 바로 부처이거늘, 부처의 이름을 외우는 것같이 더 쉽고 절실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 불자님들 마음에다 우주의 훤히 열린 그런 불을 밝히시길 바랍니다. 우리 마음은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한도 끝도 없이 우주를 다 비추고 있습니다. 자기가 미처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김씨라는 마음도 우주를 비추고 있고, 박씨라는 마음도 마찬가지이고, 어느 분의 마음도 모두가 다 끝도 갓[]도 없이 조금도 거리낌이나 장애를 받지 않고[無障無礙] 우주를 비춥니다.

따라서 아까 말씀드린 성자, 무위진인이 보면 우주는 이 사람 저 사람, 이것 저것의 광명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러기에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우주 자체가 바로 무량의 빛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다만 원통하게도 우리 중생이 무명에 가려서, 우주가 다 하나의 부처이고 하나의 광명이라는 진리를 모르는데, 그것을 무명이라고 합니다. 대승경전도 구절마다 모두가 하나의 법문이라, 이른바 일원론(一元論)’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대상을 보면, 내가 있으면 네가 있고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상대로만 보지요. 이런 이원론이나 삼원론이 아니라, 우주는 본래로 일원론이라, 하나의 진리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진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부처입니다.

그런 부처님을 우리가 뭐라 이름을 불러야 되겠는데, 가장 절실한 이름이 이른바 관세음보살이나 나무 아미타불, 지장보살, 약사여래 모두가 다 그런 부처님입니다. 그런 부처님을 이름 하나만 지었으면 공부하기가 참 쉬울 것인데, 그렇게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령대로 우리 공부에 손해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다 맞고 소중하니까, 이것 저것 다 불러야 공부가 더 많지 않겠는가? 이런 것이 굉장히 복잡해 보이고 혼란스럽습니다. 기독교는 그런 의미에서는 참 좋습니다. 하늘에 계신 주님, 하나님 한 분만 믿고 생각하니까, 참 하나로 간단하고 좋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우주 모두를 포함하다 보니까, 어느새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총 대명사는 바로 아미타불입니다. 지금 이렇게 복잡한 세상에서 지장보살이나 관세음보살이 다 그 자리가 그 자리입니다만, 그래도 기왕이면 총 대명사를 부르는 쪽으로 우리 마음을 모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할 것인데, 너무 이름을 많이 불러 놓으면 관념도 헷갈립니다.

그래서 합리적으로 생각하시도록 제가 말씀을 드립니다. 벌써 보살 지위라는 것은 하나의 생명 자리이고, 보살 지위가 아니더라도 본래로 하나의 생명 자리입니다. 그 보살들 이름은 모두 뿔뿔이 몸뚱이가 따로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다만 그렇게 하나의 덕명(德名), 공덕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사람도 조금 똑똑하고 자리가 높으면 호가 여러 가지 있고, 사회적 지위에 따라 무슨 회장, 무슨 회장 그런 이름이 많이 붙지 않습니까? 그런 것과 똑같이 부처님 자리도 만덕을 갖춘 자리라, 그냥 몇 가지 개념으로는 그 덕을 다 표현을 못해요.

그래서 자비로운 쪽으로는 관세음보살, 지혜로운 쪽으로는 문수보살, 원행 쪽으로는 보현보살, 그렇게 붙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별명은 하나의 공덕명입니다. 그러나 총 대명사, 본질은 바로 아미타불이라, 그래서 경전에서도 나무 본사 아미타불이라고 읽습니다.

아까 법회 시작 전에 스님네들도 나무 아미타불을 그렇게 부르셔서, 제 마음도 굉장히 흐뭇하게 생각했습니다. ‘스님네도 정말 참 저렇게 모두가 하나로 생각해서 공덕 이름을 총 대명사로 부르시는구나.’라고 저도 참 동조를 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께 앞으로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을 부르지 말라고 제가 말씀 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모두 똑같은 자리인데, 지장보살을 좀 더 좋아하는 분들이 그렇게 부르면서 거기에 집착해 버리면, 다른 것은 저만큼 밑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고하상(高下相), 높고 낮은 그런 차별상을 두지 않기 위해서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우선 모두가 다 같다고 생각하고서 총 대명사쪽으로 우리 마음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신라 때 원효 스님도 마을에 다닐 때, 표주박을 때리면서 나무 아미타불 나무 아미타불 그렇게 많이 불렀습니다. 고려 초기에 대각국사 의천 대사도 그렇게 했고, 또 보조국사도 염불 주문을 보면 그렇게 했고, 나옹 대사, 태고 대사 다 그렇지요. 그런 분들은 될수록 복잡한 것을 다 합해서, 하나의 진리로 마음을 향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불자님들도 아미타불로 하시고, 거기다가 나무(南無)’는 아미타불에 귀의한다’, 우리 모든 생명이라든가 역량 모두를 아미타불로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본래 아미타불인 것이고 아미타불이 되어야 하는 것이니까, 그 쪽에다 자기의 온 정력과 정성을 다 바쳐야 되겠지요.

그 다음에 중요한 문제는 아미타불에 대한 관념입니다. 어떻게 무엇을 생각하면서 아미타불을 부를 것인가? 그냥 이름만 부르면, 우리 마음이라는 것이 여태까지 익히고 배우고 습관성을 붙여 놔서, 자꾸만 잡스러운 생각이 많이 납니다. 그렇기에 우리 마음의 소재를 어디다가 둘 것인가? 그것이 중요한데, 아미타불은 사람 같은 모양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소박한 단계에서는 부처님 상호를 관찰해도 무방합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모양 상호는 만덕을 갖춘 32 80수형호라, 부처님 얼굴은 조금도 흠절이 없습니다. 지혜로 보나 덕으로 보나 또는 능력으로 보나, 만능의 상징으로 부처님의 상호가 나왔습니다.

불경에 보면, 부처님께서 3아승기겁이라는 무수한 세월 동안 몇 천 번도 넘게 자기 몸을 일반 중생한테 희생하고 순교했습니다. 한 겁도 무량세월인데, 백 겁 동안 32 80수형호라는 그런 근본 상호를 이루기 위해 모든 복을 지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처님의 원만한 상호가 나왔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 상호를 보면서 나도 그렇게 닮아야 하겠구나 하고 염불을 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직 상을 덜 떠난 염불인 것이고, 부처님의 참다운 법신은 우주 어디에나 언제나 무엇이나 충만해 있는 하나의 생명의 광명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무량광명 아닙니까? 아미타불 별명 가운데 무량광불도 있습니다.

또 아미타불은 바로 낳지 않고 죽지 않는 우주의 생명 자체, 영생의 생명이기 때문에,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고도 합니다. 그런 부처님의 이름은 한도 끝도 없는 부처님의 공덕을 다 표현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부르는 이름 가운데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름과 더불어서 부처님 공덕을 다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선 한도 끝도 없이 잘 생긴 얼굴을 관상하면서 나도 닮아야 되겠구나, 나도 만덕을 다 갖추기 위해서는 모든 중생을 위해서 시시때때로 자기라는 관념을 줄이고 정말로 공평무사한 행동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에나 한도 끝도 없이 빛나는 아미타불을 외우시면 좋습니다. 이것을 불교 용어로 말하면, 우주의 참다운 모습을 담아서 하는 염불이기 때문에, 실다운 실() 자 모습 상() , 실상 염불입니다. 또는 법신 염불(法身念佛)이나 진여 염불(眞如念佛)이라고 하는데, 실상 염불과 다 같은 뜻입니다. 그렇게 하면 철학적으로 염불을 하는 것이 됩니다. 우주의 도리 그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상호를 관찰하는 것은, 아직 상을 두어서 철학적인 염불은 못 되고 하나의 방편 염불입니다. 그렇게 우리 마음이 모아져서 하나로 통일되면, 그때는 깊은 염불삼매라, 오직 부처님만 생각하고 다른 것은 거기에 낄 수가 없게 됩니다. 우리가 소박하니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고, 부처님 이름만 외다가 우리 마음이 오직 하나로 통일되는 게 염불삼매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으로 부처님의 원만덕상을 상상하면서 염불삼매에 들어도 좋습니다.

여러 가지 교학도 많이 배우시고 조금 철학적으로 정말로 우주의 실상에 맞게끔 염불해야 되겠구나.’ 그런 분들은 실상 염불, 법신 염불, 진여 염불을 하면서, ‘우주의 끝도 갓[]도 없이 만덕을 갖춘 진리가 어디에나 충만해 있구나, 다만 우리 중생이 어두워서 미처 보지 못하는 것이구나.’ 생각하면서 하면, 이것이 이른바 가장 고도의 철학적인 염불이 됩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할 때는, 얼마나 공부를 해야 그렇게 될 것인가, 그런 의심을 품으시겠지요. 사실은 그것이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염불은 할수록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다른 작업은 너무 지나치게 하면 몸도 무거워지고 마음도 피로해지지요. 그러나 염불이라는 것은 꼭 소리를 내야만 되는 것이 아니니까, 소리를 내도 좋고 안 내도 좋고, 또는 가만히 앉아서 가부좌를 해도 좋고 걸으면서 해도 좋고, 또는 반쯤 앉아서 하든 반쯤 서서 하든 어떻게 하나 좋습니다. 조금도 제한이 없습니다. 또는 누워서 해도 무방합니다. 염불은 조금도 피로함이 없습니다. 우리 건강 상황에 따라서 편리한 대로 하면 됩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염념상속(念念相續)이라, 생각생각 거기에 다른 잡념이 끼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마음이 통일되어서 삼매에 들어갑니다. 꼭 염불삼매에 들어가야 공덕이 나옵니다. 염불삼매에 안 들어가면 참다운 공덕은 미처 못 나옵니다. 한 번 하면 한 번 한 만큼 공덕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삼매에 들어가야 무위진인이라, 참다웁게 견성 오도한 그러한 성자가 됩니다.

그것이 항시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자가 안 되고 버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금생에 안 되어도 본래가 부처인지라, 우리는 꼭 성자가 되고 맙니다. 꼭 부처가 됩니다. 부처가 이 사바 현상세계에 나토었다가 다시 부처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의 갈 길이고, 모든 존재가 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아까 말한 테오리아, 모든 존재가 중심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나무나 흙, 하나의 원자 모두가 다 가장 중심적인 그 에너지, 우주 기()에서 다 나오고 있습니다. 우주의 기가 천차만별로 형성되었다가, 다시 우주의 기 하나로 돌아갑니다. 하나에서 와서 모두가 되었다가, 모두가 다 하나로 되는 것이, 영겁으로 되풀이하는 우주의 원리입니다.

염불은 한 번 하면 한 만큼 몸도 좋아지고 마음도 맑아지고, 동시에 자기 집안도 맑아지고 우리 주변을 정화시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이름을 외는 것같이 우주를 정화시키는 것이 없습니다. 어떤 물리적인 힘보다도 그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한 번 외면, 그것이 바로 자기 마음도 몸도 자기 주변도 가정도 우주도 정화시킨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저런 세간적인 공덕을 위해서 하는 염불은 하나의 기초에 불과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삼매에 든다는 것입니다.

삼매에 들어야 우리 범부심을 녹이고서 성자가 됩니다. 삼매에 들기 전에도 염불을 오래 하면 그냥 보통 재미가 아닙니다. 나중에는 자기가 안 하려고 해도 저절로 속으로 하고 있게 됩니다. 처음에는 소리를 내서 하지만, 오랫동안 하다 보면 나중에는 가만히 있으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속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속에서 하는 소리가 그냥 보통 소리가 아니라,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습니다. 불자님들 그런 공덕이나 행복을 꼭 맛보시길 바랍니다.

돈 주고서 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게 애쓰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참 간단합니다. 우리가 안 하려고 해도 우러나오는 염불이 얼마나 행복스러운지 모릅니다. 머리도 맑아지고 가슴도 시원하고 말입니다. 마음이 맑아지면 동시에 피도 맑아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건강으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최적의 법입니다.

그리고 드디어는 그 부처님의 광명, 빛나는 부처님이 앞에 훤히 보이게 됩니다. 미신도 아니고 맹신도 아닙니다. 부처님은 우주의 진리이고 그 자리는 만물의 자리이기 때문에, 우리 중생이 부처님 같은 그런 광명이 빛나는 모습을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는, 우리 마음이 청정해짐에 따라서 꼭 앞에 나옵니다. 그것 보고 불교 말로는 부처 불() 자 설 립() , 부처가 앞에 서 보이는 불립삼매(佛立三昧)라고 합니다. 그러면 모든 의심이 다 풀리고 마음에 막힘이 없게 됩니다.

책 가운데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이라는 책이 있어요. 거기에 나오는 법문인데, 우리 중생은 본래로 마음이 부처이기 때문에, 그 마음 확실히 붙들고, 그 마음 놓치지 않고서 그 마음으로 마음을 닦는 공부, 형식으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마음을 닦는 그런 공부는 일자무식도 무방합니다. 일곱 살 먹은 사람도 전생에 많이 닦았기에, 금생에 조금 순수한 환경 만나서 그냥 금방 도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언제 어느 때나 우리가 도인이 못 되라는 법은 절대로 없습니다.

형무소에 있으나 어디에 있으나, 어느 때나 마음에 사무치게 정말 내 마음이 석가모니 마음 또는 모든 성자 마음과 하나의 마음이라, 내 마음은 본래로 오염시킬 수가 없다. 따라서 내 마음 자체는 어느 공덕이나 능력이나 다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100%로 딱 믿고서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 이름을 외운다고 생각할 때, 모두가 성불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복잡한 세상에서는 기왕이면 그런 식의 쉬운 문으로 공부를 해야 하겠지요. 그렇다고 어려운 공부를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우리가 제대로 알아먹지 못해서 그렇지, 어느 경전이나 모두가 다 쉬운 쪽으로 말씀했습니다. 그대 마음이 바로 부처인 것을 믿고서 그대로 공부하면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달마 스님도 불립문자(不立文字)’, 문자를 세우지 않고서,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깨달아라.’ 하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참선도 원래 의미는 그래요. 아미타불이 저 밖에 계신다고 하면 방편 염불이지만, 그러나 자기 마음이 바로 자성불이라 생각하고서 화두를 들고 염불을 하고 주문을 할 때는 모두가 참선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기왕이면 참선하고 싶겠지요. 지금 사람들은 염불이라는 것을 잘 몰라서, 염불은 그냥 누구나 하는 것이고 참선은 더 고도의 수행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 마음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화두를 든다고 하더라도, 자기 마음이 부처인 줄을 모르면 그때는 참선이 못 됩니다.

그러나 염불을 하건 주문을 외우건 간에, ‘우리 마음이 바로 만능을 갖춘 부처님이다.’ 생각하고 염불이나 주문을 외운다면, 그것이 바로 염불선이 되고 또는 염불 주문이 됩니다. 가령 우리가 하나님으로 보더라도, 하나님이라는 개념 내용이 우리 부처님의 법신불과 똑같다면, ‘, 주여!’ 한다고 하더라도 그대로 참선이 됩니다.

우리는 어려운 문화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도래하는 문화는 세계적인 진리가 다 융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공연히 종교 때문에 서로 싸우고 전쟁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것은 종교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느 도둑놈이나 누구나 다 부처님 자손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참다웁게 불교의 진리를 믿는 것이고, 동시에 가장 쉬운 공부고 행복해지기 쉽습니다. 염불 한 번 하고 나면 귀신이나 신장이나 다 좋아합니다. 우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그런 존재가 굉장히 많은데, 그런 나쁜 귀신들도 좋아하고 두려워합니다.

더구나 중생념불불환억(衆生念佛佛還憶)’이라, 원래 우리가 부처거니, 우리가 부처를 부르면 부처도 역시 우리를 굽어본단 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피가 분명히 있습니다. 거기다가 염념상속(念念相續)’이라, 생각생각에 끊임없이 염불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염불삼매에 들고, 염불삼매까지는 미처 못 간다고 하더라도, 우리 마음은 부처님이라 염불을 안 해도 저절로 염불이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느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느끼시면 정말로 매일매일 신묘한 멜로디를 들으면서 공부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꼭 금생에 염불삼매에 들어서 우리 본래의 고향 땅에, 본래 들어가야 할 그 자리에 금생에 꼭 가셔야 하겠습니다.

오늘 초대를 받으시는 영가들도 지금까지 제가 드린 말씀을 명심하셔서, 그 어두운 저승, 저승길은 굉장히 어두운 세계인데, 저승길에 헤매지 마시고 극락세계, 극락세계는 번뇌를 다 없애버린 청정한 존재가 들어가는 세계, 즉 성자가 들어가는 극락세계에 들어가시길 바랍니다.

극락세계는 꼭 금생에 성자가 되어야만 가는 것도 아닙니다. 금생에 갖은 나쁜 일을 많이 했더라도, 영가들은 지금 몸이 없으니, 마음으로 부처님을 100% 믿고 100% 믿는 그 마음으로 우리 인간과 우주의 참다운 생명 자체인 나무 아미타불을 간절히 외운다면, 그 공덕으로 해서 성자가 미처 못 된 영가도 본래 마음은 오염이 안 되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가 있습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본사 아미타불!

 

곡성(谷城) 설령산(雪靈山) 성륜사(聖輪寺) 청화(淸華)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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