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인과응보의 이치
인과응보의 법칙은 불교에 입문하는 첫걸음이자, 유교의 「대학(大學)」에서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誠意] 마음을 바로 하며[正心] 자신을 닦고[修身] 집안을 거느리며[齊家] 나라를 다스리고[治國] 천하를 평정하는[平天下] 중요한 바탕이기도 하오. 그러므로 인과 법칙은 세간이나 출세간의 성인 모두가, 천하를 다스리고 중생을 제도하는 중대한 권능이오.
지금 세상에서 만약 인과응보를 나라 구하고 백성 구제하는 급선무로 삼지 않는다면, 설령 그대의 지혜와 재주와 도덕이 제아무리 높고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모두 헛것에 지나지 않게 되오. 도리(道理)를 말하지 않으면, 왕법(王法)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오.
옛날 성현들은 어느 누구도, 전전긍긍하며 자기를 꽉 붙잡아 지니지[操持] 않은 사람이 없었소. 그래서 그 마음이 빈곤 궁핍이나 부귀영달에 따라 오락가락 흔들리지 않았소. 맹자(孟子)가 말한 대로, 곤궁하면 홀로 자신을 착하게 닦고, 영달하면 천하 중생을 두루 바르게 교화한 것이오[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일상생활과 언행에서, 부자·형제간이나 부부 사이조차도 하나하나 법대로 하지 못하는구려. 조그만 지식이나 식견이 있어도, 곧바로 특출한 위인이나 되는 것처럼 함부로 떠들어 대오. 권세를 얻지 못했을 때는, 망령되고 맹목적인 주장을 횡설수설하여 세상을 현혹시키고 중생을 속이는가 하면, 일단 자리를 차지한 경우에는 포악하고 못된 생각을 거침없이 드러내어, 나라를 망치고 백성을 해치기 일쑤라오.
이러한 병폐의 뿌리는 모두, 그의 부모나 선생들이 맨 처음 가르칠 때부터, 일찍이 인과응보의 도리를 제대로 일깨워 주지 않은 데서 비롯하오. 가령 조금만 인과응보의 법칙을 안다고 해도, 마음을 움직이고 생각을 일으킬 때마다, 저절로 조심과 두려움이 들어, 감히 제멋대로 방종하지는 못할 것이오. 설사 성현이 되려고 바라지 않는다 할지라도, 깊은 연못에 임하여 얇은 살얼음을 밟듯이 어찌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러기에 천부 자질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더더욱 가깝고 얕은 곳으로부터 손대야 하오. 선이 조그맣다고 그냥 지나쳐 버리지 말며, 더구나 악이 조그맣다고 무심코 저질러서는 안 되오[勿以善小而不爲, 勿以惡小而爲之.].
어려서부터 길들여, 타고난 천성처럼 만들어야 하오. 마치 어린 나무에 버팀목을 받쳐 곧게 세워 주면, 크게 자라서는 줄기를 일부러 구부러뜨리려고 해도 구부러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오.
한의학에서 병을 치료할 때, 급하면 바깥 증상을 다스리고, 여유가 있으면 근본 원인을 다스리는 게 의술의 기본이라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목구멍에 종기가 부어올라, 음식도 삼키기 어렵고, 숨까지 내쉬기 어려운 지경이라고 해봅시다. 그러면 반드시 먼저 그 종기를 풀어 가라앉힌 다음에, 병의 근원을 찾아 오장육부를 잘 조리(調理)해야 하지 않겠소? 만약 종기를 처리하지 않는다면, 우선 당장 사람이 죽을 판인데, 설사 병을 뿌리째 뽑을 수 있는 훌륭한 처방과 신령스런 약초가 있다고 할지라도, 어느 세월에 써 볼 재간이 있겠소?
인과응보의 법칙은 바로 지금 세상의 종기를 가라앉히는 미묘한 법문이오. 그러나 인과 법칙은 증상과 근원을 함께 치료하는 약이라오. 낮은 근기의 초보자는 잘못을 고쳐 선행을 닦아 나갈 수 있으며, 높은 근기의 통달자는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할[斷惑證眞] 수 있는 만병통치약인 셈이오. 아래로는 어리석은 범부나 아낙으로부터, 위로는 부처의 과보를 원만히 성취하기까지, 한결같이 이 인과 법칙의 보약을 떠날 수 없으니, 어찌 단지 바깥 증상만 치료할 뿐이겠소?
인과응보의 법칙은 세간이나 출세간의 성현 모두가, 평범을 갈고 닦아 성스러움을 정련(精煉)해낸 거대한 용광로와 같소. 만약 맨 처음에 인과 법칙의 궁리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면, 설사 선종과 교학(敎學)에 통달한 뒤라도, 인과응보의 사슬에 잘못 걸려드는 수가 있소. 한번 인과응보에 잘못 걸리면, 타락은 분명한데, 거기서 헤어나 올라올 길은 참으로 막연하게 되오.
인과응보의 원리가 너무 얕고 쉽다고 무시하면 안 되오. 여래가 정각을 이루는 것이나 중생이 삼악도에 떨어지는 것 모두, 인과응보의 테두리를 벗어남이 결코 없으니 말이오. 범부의 마음이 비좁아, 경전에서 거창한 인과응보를 설한 내용은, 혹간 잘 이해하고 깨닫기 어려울지도 모르오. 그렇다면 마땅히 세간의 가깝고 쉬운 내용을 통하여서, 그러한 뛰어난 법문에 들어가는 방편으로 삼아야 할 것이오. 예컨대, 『문창음질문(文昌陰騭文)』이나 『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 같은 글은, 익숙하게 읽고 음미하여 실행한다면, 누구나 모두 선량한 사람이 될 수 있으며, 생사윤회도 벗어날 수 있다오. 또 『안사전서(安士全書)』도 정말로 세상을 정화하고 백성을 선도하는 중요한 책이오.
당(唐) 나라 때 백거이(白居易)가 조과(鳥菓: 741~824) 선사에게 물었소.
“어떠한 것이 부처님 법문의 대의(大意)입니까?”
조과 선사가 대답했소.
“어떠한 악도 짓지 말고, 뭇 선을 받들어 행하라[諸惡莫作, 衆善奉行.].”
그러자 백거이가 놀라 물었소.
“이 두 구절은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쉽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오?”
이에 조과 선사가 이렇게 답변했소.
“비록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말하기는 쉬워도, 여든 넘은 노인도 행하기는 어렵소.”
우리는 이 말이 불법을 배우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가르침인 줄 알아야 하오. 사실 이 두 구절은 삼세 모든 부처님의 가장 간략한 계율 경전[戒經]이라오. 절대로 천시하거나 소홀히 하면 안 되오. 모름지기 마음을 움직이고 생각을 일으키는 곳으로부터, 자세히 살펴야 하오. 만약 이러한 공부를 끝까지 확장 발전시킨다면, 위로 불도를 이룰 수 있소. 하물며 그 밖의 복록이나 지혜 따위 같은 과보야, 말할 것이 있겠소?
계율과 선행을 내보이는 것은 인간과 천상을 여는 탄탄대로요, 인과응보를 밝히는 것은 화를 피하고 복으로 나아가는 최상의 계책이라오.
불교의 오계(五戒)를 유교의 오상(五常)으로 대비하면, 산 목숨 해치지 말라[不殺]는 인(仁)이고, 남의 물건 훔치지 말라[不盜]는 의(義)며, 사음하지 말라[不邪淫]는 예(禮)고, 거짓말을 하지 말라[不妄語]는 신(信)이오. 그리고 술을 마시지 말라[不飮酒]는 마음이 늘 맑고 뜻이 엉기되, 정신이 혼미해지지 않고 이치가 드러나게 하는 것이니, 곧 지(智)가 될 것이오.
오계를 모두 잘 지니면,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항상 인간세상[人道]에 태어나게 되니, 이는 유교의 오상과 대체로 같소. 다만 유교에서는 오직 그 뜻만 다하고 있을 뿐인데, 불교는 그로 말미암는 과보까지 함께 밝혀 주는 것이 조금 다르오.
십선(十善)에는, 죽이지 않고[不殺], 훔치지 않고[不盜], 사음하지 않는[不邪淫] 세 가지 신업(身業)과, 거짓말 않고[不妄語], 번지르르한 말(음담패설 포함) 않고[不綺語], 두 말(이간질) 않고[不兩舌], 험담(욕설) 않는[不惡口] 네 가지 구업(口業)과, 욕심 부리지 않고[不貪], 성질 부리지 않고[不瞋], 어리석음 부리지 않는[不癡] 세 가지 의업(意業)이 있소.
이는 대체로 오계와 같지만, 오계가 다분히 몸을 추스르는(다잡는) 것이라면, 십선은 다분히 마음을 추스르는(잡도리하는) 점이, 조금 다를 것이오. 십선을 모두 갖추면, 틀림없이 천상 세계에 생겨나게 되오.
부모에게는 자애를 말하고, 자녀에게는 효성을 일깨우며, 형제에게는 우애를 일러주는 따위의 각종 윤리 도덕의 가르침은, 모두 사람들에게 각자 분수를 지키고 도리를 다하도록 권장하여, 세간의 모습과 형편에 따라 출세간의 법을 닦도록 인도하는 것이오.
불교에서는 인과응보의 원리가 터럭 끝만큼도 어그러지지 않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거나 천상에 생겨나는 것 모두, 사람들이 스스로 불러들이는 과보임을 널리 밝히고 있소. 이는 여래께서 지극한 자비심으로, 중생을 모든 고통에서 영원히 벗어나 오직 즐거움만 누리도록 인도하기 위해서라오. 그래서 광장설(廣長舌)을 드러내는 수고로움도 아끼지 않으시고, 중생을 위해 마음과 정성을 다해 설하신 거라오.
경전에 “보살은 원인을 두려워하고, 중생은 결과를 두려워한다[菩薩畏因, 衆生畏果.].”고 하였소. 정말 괴로운 결과를 받고 싶지 않다면, 모름지기 먼저 나쁜 원인을 끊어야 하지 않겠소? 만약 항상 착한 원인만 닦는다면, 틀림없이 즐거운 과보만을 늘 받게 될 것이오.
이는 『서경(書經)』에서, “착한 일을 하면 상서로움이 내리고, 착하지 아니한 일을 하면 재앙이 내린다[作善降祥, 作不善降殃.].”고 한 말이나, 『주역(周易)』에서 “선행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남아넘치고, 악행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재앙이 남아넘친다[積善之家必有餘慶, 積不善之家必有餘殃.].”고 한 말과 다를 게 없소.
다만 유교에서는 오직 현세와 자손의 관점에서만 언급하였는데, 불교에서는 과거·현재·미래의 삼세에 걸친 인과응보를 빠짐없이 두루 논하는 게 다를 뿐이오. 범부의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황당하거나 허망한 말이라고 여기며,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자가 참으로 많소. 이는 마치 눈먼 봉사가 길잡이를 등지고, 제 스스로 험한 길을 더듬어 가려는 것과 같으니, 어찌 구덩이에 빠지거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배기겠소?
인과응보의 법칙을 제창함은, 천지와 성인의 마음을 받들어 행함으로써, 전 세계 인류의 도덕과 인의(仁義)를 완성시키는 일이오. 만약 인과응보를 황당하거나 허망하여 돌아볼 가치도 없다고 여긴다면, 이는 단지 천지와 성인의 마음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자기의 정신 의식도 영원히 악도에 떨어뜨리는 것이 되오.
그러면 상근기의 지혜로운 자도, 뜻을 분발하고 제때 민첩하게 덕성을 닦을 수 없게 되오. 또 하근기의 어리석은 자는, 거리낌 없이 죄악을 자행할 것이오. 그 결과 천지가 만물을 기르고 성인이 중생을 교화시키는 권능조차 억눌려 드러나지 못하고, 우리 인간의 마음에 본디부터 갖추어진 이성도 파묻혀 나타나지 못할 것이오. 그 폐단을 어찌 말로 다 헤아릴 수 있겠소?
그러나 세간(유가나 도가)의 성인 말씀은 너무 간략하고, 또 현세와 자손밖에 언급하지 않고 있소. 태어나기 이전(전생)이나 죽은 이후(내생)에, 시작도 없이[無始] 죄와 복의 인연에 따라 육도 윤회를 반복하고 있는 인과응보는, 전혀 밝히지 않은 것이오. 그래서 식견이 천박한 자는, 비록 매일같이 성인의 인과응보 말씀을 읽을지라도, 여전히 인과응보의 원리를 믿지 못하고 있소.
(옮긴이 보충 해설: 예컨대, 유가의 삼세 윤회관을 대표하는 일화는 이러한 것이다. 한 제자가 사람이 죽은 뒤 영혼 세계가 존재하는지 묻자, 공자는 중생에 대한 교화 목적이라는 실용성을 이유로, 가부간의 명확한 답변을 회피했다. “영혼이 있다고 하면, 죽은 이의 효성스러운 자손들이 차마 시신을 갖다 매장하지 못하여, 상례(喪禮)나 살아남은 후손들의 현실 생활에 지나치게 커다란 장애를 몰고 올 것이다. 그렇다고 영혼(사후 세계)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렇지 않아도 각박한 인심이 더욱 불효막심하고 패역무도해져, 세상이 극도로 혼란해질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때가 되고 인연이 닿으면 각자 느끼고 알게 될 것이라며, 자칫 무익하고 공허한 관념 논쟁에 빠지기 쉬운 함정을 경계하는, 현세 실용의 교화 방편을 견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가에서,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를 극진한 공경과 정성으로 받들어 중시하고, “제사를 지낼 때는 받는 분이 살아 계신 것처럼, 신께 제사 올릴 때는 신이 강림하신 것처럼 하라[祭如在, 祭神如神在.].”고 강조한 공자의 말씀 등을 찬찬히 음미해 보면, 내생과 윤회에 대한 확신을 읽을 수 있다.)
여래의 큰 가르침은, 우리 인간 심성의 오묘함과 삼세 인과응보의 미묘함을 뚜렷이 내보이셨소. 뿐만 아니라,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도에서부터,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여 생사윤회를 해탈하는 법문에 이르기까지, 갖추지 않은 바가 없다오. 그래서 부모에게는 자애를 말하고, 자녀에게는 효성을 일깨우며, 형제에게는 우애를 일러 주고, 부부에게는 화목과 순종을 말해 주며, 주인은 어질고 하인은 충성하여, 각자 자기의 맡은 바 직분을 다하도록 가르치시니, 이는 세간의 성인 말씀과 전혀 다를 바가 없소.
그러면서도 사실 하나하나에 대해서, 다시 앞의 원인과 뒤의 결과를 밝혀 주시는 점은, 세간의 성인이 따라올 수 없는 부분이라오. 의리를 다하고 직분을 다하라는 식의 말은, 단지 최상 근기의 지혜로운 자에게나 통할 뿐, 하근기의 어리석은 자에게는 먹히지 않소. 그러나 인과응보를 알면 선악과 화복이 불을 보듯 뻔하게 되니, 어느 누가 흉함을 피하고 길함으로 나아가며, 화를 면하고 복을 얻으려고 노력하지 않겠소?
‘인과(因果)’ 두 글자는, 세간과 출세간의 일체법을 두루 총망라하여 빠뜨림이 없소. 세간(유교)의 성인도 인과를 분명히 보여 주지 않음이 없으나, 다만 세상을 경륜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에, 후세에 계속 전해질 수 있는 가르침을 펼친 것뿐이라오. 그래서 오직 현세(금생)와 선후대(先後代), 부자(父子), 조손(祖孫) 간의 인과응보에 국한하였소. 태어나기 이전(전생)과 죽은 이후(내생)는 물론, 시작도 없는 아득한 과거와 끝도 없는 영원한 미래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은 것이오.
그런데 후대의 학자들은 성인의 본래 뜻을 제대로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이나 만물이 생겨나는 것은, 단지 천지간의 기운[氣: 에너지]이 우연히 결합하고 변화하여 그 형상을 드러내는 것일 따름이라고, 터무니없이 쉽게 말하는구려. 또 죽음에 이르면, 만물의 형체가 썩어 문드러지면서, 영혼도 또한 바람에 나부끼듯 흩어져 없어지기 때문에,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다고 하는구려. 이러한 단멸상(斷滅相)에 빠진 사견(邪見)이, 성인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자신의 영혼까지 어리석게 타락시키는 해악은, 매우 심하다오.
공자가 『주역(周易)』의 위대하고 오묘함을 찬탄하여, 그 의리(義理)를 부연해석하면서 맨 처음 꺼낸 말이, “선을 쌓는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남아넘치고, 악을 쌓는 집안에는 반드시 재앙이 흘러넘친다.”는 것이었소. 또 기자(箕子)는 무왕(武王)의 간청에 따라 아홉 가지 홍범(洪範: 『書經』의 한 편명으로, ‘큰 법도’라는 뜻)을 진술하면서, 맨 끝에 바야흐로 오복(五福: 장수·부귀·안녕·好德·善終)과 육극(六極: 비명횡사(요절)·질병·우환·빈곤·포악·허약)을 함께 분명히 밝혀, 선악과 화복의 위엄으로 매듭지었다오.
이 두 성인이 밝힌 경전의 내용이, 만약 과거·현재·미래의 삼세를 통틀어서 함께 논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하늘이 내려준 법도나 성인이 펼친 언론(철학)이나 현명한 군왕이 시행한 정치 명령은, 모두 모순투성이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오.(예컨대, 간사한 악당들이 부귀영화를 누리고, 정의로운 충신들이 처형당하며, 안회가 요절하고, 도척이 장수한 사실들이 모두 그렇소.)
그러나 전후 인과응보의 원리를 알게 되면, 곤궁하고 통달하거나 잃고 얻음이 모두, 한결같이 자기 스스로 구하고 받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소. 그래서 설령 몹시 어려운 시련과 역경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늘을 원망하거나 사람을 탓하지 않을 수 있소. 단지 자기의 덕이 아직 충분히 쌓이지 못해, 과보가 무르익지 않은 것을 부끄러워할 뿐, 하늘이나 사람들의 각박한 대접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오. 이렇듯이 하늘의 섭리[造化]를 즐거이 따르며 자신의 운명(분수)을 알고 만족한다면, 언제 어디엘 가든지 자유자재로 소요유(逍遙遊)할 수 있다오.
불법을 유통시키는 이익과 공덕은 한량이 없소. 선천의 근기가 두터운 자는, 심오한 이치를 체득하여 마음을 밝히고 본성을 보며[明心見性], 나아가 미혹을 완전히 끊고 진리[道]를 증득할[斷惑證眞] 수 있겠소. 또 선천의 근기가 다소 얕은 자라도, 평이한 내용만 이해하면, 죄악을 고치고 선행을 닦아 성현이 되길 희망하는 발원으로 정진할 수 있지 않겠소?
진실로 여래께서 교화를 베푸신 까닭은, 비록 출세간을 위하셨다고 하나, 각자의 근기와 시절인연에 따라 중생을 순순히 잘 유도하심에 있었소. 그래서 세간을 경륜하는 도에서도, 또한 조그마한 선(善)이나마 남김없이 모든 것을 완전히 발휘하셨소. 부모에게는 자애를, 자손에게는 효성을, 형제에게는 우애를, 부부에게는 화목을, 각각 말씀하셨소. 일상생활상의 모든 윤리 도덕이 유교의 가르침과 전혀 다름이 없다오.
다른 점이 있다면, 삼세(三世)의 인과 법칙과 선악의 과보를 일일이 보이시어,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에 공경과 두려움을 간직하고, 감히 분수와 법도를 벗어나지 않으며, 비록 외진 구석과 깜깜한 방안에 혼자 있더라도, 늘 하늘과 부처님 앞에 나와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처신하도록 가르친 것이오.
설사 탐욕과 잔인·포학으로 가득 찬 최하근기의 악인이라도, 비록 처음에는 전혀 신심이 없겠지만, 인과응보의 사리를 오래도록 계속 듣다 보면, 그 마음에 원인을 두려워하고 결과를 무서워하는 그림자가 드리워질 것이오. 그러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은연중에 저절로 조복(調伏)되고, 그렇게 전처럼 아주 심하지는 않게 될 것이오.
예컨대, 춘추 전국시대까지만 해도, 각국에서 산 사람을 죽여 제사 지내거나, 사랑하던 첩과 신하를 순장(殉葬)하는 풍속이 치성하였소. 걸핏하면 수십 또는 수백 명을 태연스럽게 생매장하고, 그 수가 많을수록 부귀와 영광을 상징한다고 여겼다오.
물론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어진 은택은, 땅 위에 나뒹구는 마른 해골에까지 미쳤다지만, 그 뒤로 몇백 년이 채 못 되어 살인 순장의 악풍이 천하에 두루 퍼진 것이오. 비록 노자·장자나, 공자·맹자 같은 성현이 연달아 세상에 나왔지만, 그러한 퇴폐 악습을 그치게 하기에는 역부족이었소.
그러다가 불법이 중국에 전래한 뒤로, 생사윤회와 인과응보의 원리가 세상에 크게 밝혀지면서, 지방의 제후는 물론, ‘짐(朕)’이라고 일컬으며 천하를 호령하는 황제조차도, 감히 더 이상 순장을 계속할 엄두는 못 내었소. 설령 어쩌다 순장하는 자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수가 많을수록 영광으로 여기는 일은 결단코 없었소.
그러나 가령 생사윤회나 인과응보의 법칙이 없이, 단지 정심(正心)·성의(誠意)의 학설만 가지고, 충서(忠恕)의 덕목에 따라 자기 마음으로 남의 마음을 미루어 헤아려, 순장을 그만두고 백성의 생명을 보호하라고 가르쳤다면 어떻게 되었겠소? 내 생각에는 아마도, 그렇게 권장하고 가르친 사람은 헛수고만 하고, 순장의 악습은 더욱 치성했을 것 같소.
하물며 후대의 유학자들은, 단지 바깥세상 다스리는 도[治道]에만 급급하고, 자기 마음 다스리는 수양은 외면한 채, 불법을 비방하고 배척하면서, 자기 학파를 세우고 이어 나가려고만 했으니, 오죽했겠소? 게다가 한결같이 말하기를, 사람이 한번 죽으면 모든 것이 영원히 사라지고, 후세나 영혼 같은 것은 없다고들 주장했으니….
만약 여래의 생사윤회와 인과응보의 가르침이 사람 마음에 흠뻑 적셔지지 않았다면, 후세의 중생은 타고난 수명대로 살다가 평안히 죽는[善終] 사람조차 드물었을지 모를 일이오. 이것이 불법 가운데 가장 평범하고 기본이 되는 법문이지만, 오히려 잔인하고 포악한 살인의 풍속을 가라앉히는 특효약이 되었소. 하물며 지극히 심오하고 미묘하며 원만한 돈오의 대법문[圓頓大法]을, 세속의 지혜와 범부의 감정으로 어떻게 짐작하며, 또 그 이익을 만분의 일이라도 감히 헤아릴 수 있겠소?
이러한 까닭에, 부처는 시방 삼계의 위대한 스승이고 모든 중생의 자애로운 아버지이며, 성인 가운데 성인이며 하늘 가운데 하늘임을 알 수 있소. 격물(格物)·치지(致知)부터 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에 이르기까지, 또 밝은 덕을 밝혀[明明德] 지극히 선한 경지에 다다르는 세간(유교)의 대학지도(大學之道)도, 부처님의 법문을 회통(會通)하면 더욱 쉽게, 절반의 힘으로 배 이상의 효험을 얻을 수 있다오.
그래서 역대로 수없이 많은 훌륭한 군왕과 현명한 신하나, 통달한 선비와 뜻있는 사람들이 계속하여 불교에 귀의하여 수행정진하면서, 불법을 보호하고 유통시키는 데 적극 앞장서 온 것이라오. 일체 모든 법이 마음을 근본으로 삼지만, 오직 불법만이 궁극의 이치까지 철저히 밝혀 가르치기 때문이오.
인과응보의 사실 (1) | 2023.01.01 |
---|---|
운명을 바꾸려는 노력이 진정한 수행 (1) | 2023.01.01 |
채식은 지계와 자비 수행의 밑바탕 (1) | 2023.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