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채식은 지계와 자비 수행의 밑바탕
천지의 큰 덕은 만물을 낳아 기르는 생명력이고, 여래의 큰 도는 중생을 불쌍히 여겨 제도하는 자비심이라오. 사람과 만물이 비록 모습은 다를지라도, 심성은 한 가지라오. 무릇 보살·벽지불·성문의 성현 삼승(三乘)과 천상·인간·아수라·축생·아귀·지옥의 평범한 육도 중생은, 여래께서 보시기에는 누구나 똑같은 한 자식에 불과하오.
왜냐하면, 그들 모두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으며, 또 모두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라오. 성현의 삼승은 그만 두고라도, 육도 중생만 해도 그렇소. 겉보기에는 비록 그들이 처한 신분 지위나 그들이 각자 받는 고통과 쾌락이 하늘과 땅처럼 현격히 차이 나긴 하지만, 그들 모두 미혹과 업장을 다 끊지는 못하여, 아직 생사윤회를 벗어나지 못했기는 매일반이오. 그런데 천상 세계도 복이 다하면 아래로 내려오고, 지옥 중생도 죄가 소멸하면 다시 위로 올라오는 법이오. 마치 수레바퀴가 굴러가며, 위아래가 서로 번갈아 뒤바뀌는 것과 같은 이치오.
우리가 지금 다행히 인간의 몸을 받았으니, 이리저리 궁리하고 갖은 방법을 다해, 우리만 못한 중생의 생명을 보호하고 아껴 주어야 마땅한 도리가 아니겠소? 천지가 만물을 낳아 기르는 덕을 몸소 느껴 보고, 우리가 타고난 측은지심(惻隱之心)의 어진 천성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오. 만물이 모두 우리처럼 천지간에 생겨나고, 똑같이 천지의 보살핌으로 자라는데, 우리와 똑같이 삶에 탐착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겠소?
어진 사람은 해골까지 흙 속에 묻어주고, 막 자라나는 풀과 나무의 가지도 꺾지 않는다오. 하물며 우리의 입과 뱃속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뭇 생명들을 칼로 자르고 가르며, 불에 굽거나 물에 삶고, 기름에 지지고 볶는 고통을 당하도록 요구한단 말이오? 이러한 중생도 시작도 없는 때[無始]부터 일찍이 아주 높고 귀한 지위에서 대단한 위엄과 권세를 누려 왔을 텐데, 그러한 위엄과 권위를 잘 이용하여 공덕을 쌓을 줄은 모르고, 도리어 그를 빙자하여 악업만 지었을 것이오. 그 결과 죄악이 계속 쌓여 하등 중생으로 타락하여, 입으로 말도 못하고 마음에는 지혜와 사려 분별도 없으며 몸에 특별한 기술이나 재능도 타고나지 못해, 지금 같은 재난을 당하게 된 걸 우리는 꼭 알아야 하오.
물론 약육강식(弱肉强食)이라는 먹이 사슬의 자연 법칙으로 해명한다면, 사리상 그럴 듯하오. 그렇다고 마음속에 맺힌 원한 감정이 내생(來生) 대대로 복수할 엄두를 품지 않을 리가 있겠소? 사람이 설령 만물이 살해당할 때 겪는 고통까지 생각하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도살당할 때 원한이 심령 깊숙이 맺혀, 나중에 내가 그에게 살해당할 것이라는 보복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이오? 또 하늘(자연)이 낳아 기르는 생명을 잔인하게 해치면, 하늘(자연)이 장차 내 복과 수명을 빼앗을 것은 두렵지 않단 말이오?
사람들은 오직 자기 가족끼리만 모여, 몸과 마음 안락하며 만사가 뜻대로 순조롭고 장수하기만 바란다오. 정말 그러고 싶거든, 마땅히 대자비심을 발하여 다른 생명을 살려 주는[放生] 착한 일에 힘써야 하오. 그러면 천지신명이 모두 우리가 만물을 사랑하는 정성에 감동하여 우리를 보우하게 되고, 우리가 바라는 바가 저절로 이루어지게 된다오.
만약 우리가 재력이 있고 지혜가 있다고 해서,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온갖 생명을 잡아, 그들의 고통은 생각지도 않은 채, 우리 자신의 입과 배를 채우기에 급급하다면, 과연 인간[人]이 하늘[天] 및 땅[地]과 더불어 우주의 세 근본 존재[三才]가 된다고 할 수 있겠소?
그리고 우리와 만물은 함께 생사고해를 윤회하면서, 시작도 없는 때부터 지금까지, 때로는 그들이 우리 부모 형제나 처자가 되기도 하고, 거꾸로 우리가 그들의 부모 형제나 처자가 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그들이 사람이나 다른 짐승으로 우리에게 살해당하기도 하고, 거꾸로 우리가 그들의 손에 살해되기도 하였을 것이오. 친척이 되기도 하고 원수가 되기도 하며, 서로 사랑하고 서로 살해한 은혜와 원한을 차분히 생각해 본다면, 부끄러워 살고 싶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서둘러 참회하고 고쳐도 오히려 때늦을 것이오.
하물며 여전히 구태의연한 인습에 얽매여 미혹한 편견을 고집하고, 하늘이 만물을 낳아 기르는 것은 본디부터 인간의 먹거리로 주시기 위함이라고 강변한단 말이오?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도 미혹과 업장이 두터워, 정말 윤회 고해를 벗어날 길이 없게 되오. 그런데 만에 하나라도, 저들의 죄업이 모두 소멸하여 다시 인간 세상에 태어나고, 착한 뿌리[善根]가 뻗어나 정법을 듣고 수행에 정진함으로써,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여 마침내 불도(佛道)를 이룬다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아직도 타락해 있다면, 마땅히 그들이 자비와 연민을 베풀어, 우리를 고통에서 벗어나 불성을 깨닫도록 구원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게 될 것이오. 그러니 어찌 한 때의 강한 힘과 재주만 믿고 오랜 세월토록 구원받지 못할 죄업을 저지를 수 있겠소?
우리는 이러한 업보 윤회의 이치를 모르지만, 여래께서는 훤히 들여다보고 계신다오. 이러한 진실을 몰랐을 때야 그만이었지만, 이제 여래의 가르침을 듣고 배워 알게 된 이상, 부끄러움과 자비 연민을 이기지 못해야 마땅할 것이오. 우리가 숙세의 착한 복덕으로 다행히 인간 세상에 태어났으면, 마땅히 저들과 전생에 맺고 맺힌 원한 감정을 풀어버리도록 살생을 피하고 방생을 실행하여, 모든 생명이 각각 자기 자리를 얻도록 해 주어야 하오.
나아가 염불 독경의 공덕으로, 그들이 악도(惡道)를 벗어나 극락정토에 왕생하도록 회향 기도해 줄 필요가 있소. 설령 그들이 업장이 너무 무거워 곧장 왕생하지 못할지라도, 우리 자신은 이러한 자선 공덕으로 서방정토에 결단코 왕생하기를 간절히 기원해야 마땅하오. 그렇게 왕생하기만 한다면, 곧 평범을 초월하여 성현의 경지에 들고, 생사윤회를 영원히 벗어나 점차 부처의 과보를 증득해 갈 것이오.
옛날 불교가 동방에 전래하지 않았을 때는, 유교의 성현들이 세간의 윤리 도덕으로 교화를 폈다오. 그래서 우리 중생이 모두 불성을 갖추고 있으면서 육도 윤회를 반복하는 사실과, 미혹을 끊어 진리를 증득하고 평범을 초월하여 성현이 되는 수행의 이치 등은, 아직 뚜렷이 알려지지 않았소. 그러기에 살생을 금지하는 계율까지 세우지는 않았소.
그렇지만 우리 중국의 옛 성현들도,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之心]으로 만물을 사랑하고 생명을 놓아준 가르침이 수없이 많다오. 아주 확실하게 역사 기록으로 후세에 전해지는 행적만도 적지 않소. 『서경(書經)』에는 짐승․물고기․초목까지 모두 기뻐 춤추었다는 기록이 있고, 문왕(文王)의 덕택은 해골까지 덮어 주었다고 전해지오. 논어에는 낚시질은 하더라도 줄낚시나 그물질은 안 하며, 주살을 쏘더라도 밤에 잠자는 짐승을 사냥하지는 않는다는, 공자의 어진 말씀이 적혀 있소. 맹자는 산 목숨을 보면 그것이 죽는 것은 차마 볼 수 없기 때문에, 짐승이 도살당하면서 지르는 비명 소리만 들어도 그 고기를 차마 먹지 못한다는 측은지심을, 인정(仁政)과 왕도(王道)정치의 출발점으로 강조하였소.
주(周) 나라 예법에 따르면, 제후는 정당한 이유(중요한 일) 없이 소를 잡지 않으며, 대부는 정당한 이유 없이 양을 잡지 않고, 선비는 정당한 이유 없이 개돼지를 잡지 않으며, 서민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진기한 음식, 곧 고기를 전혀 먹지 않았다오. 그런가 하면, 간자(簡子)가 비둘기를 놓아 주고, 자산(子産)이 물고기를 물에 넣어 기르며, 수후(隋侯)가 뱀을 살려 보옥을 얻고, 양보(楊寶)가 참새를 구해준 일과 같은 방생의 행적도, 수없이 전해지오.
이러한 문헌 기록만 보더라도, 살생의 악업은 유가의 성현들도 결코 금하지 않은 게 아님이 분명하오. 다만 세간의 중생을 교화시키기 위해, 임기응변의 방편 도덕을 따른 결과, 완전히 끊도록 요구하지 못한 것일 따름이라오. 무릇 당시 상황으로 보아, 정당한 이유(중요한 일)로 목숨을 죽인다면, 그 살생은 정말 적었을 것이오. 더구나 특별한 일이 없으면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하니, 사람들이 고기를 먹는 일은 일 년에 며칠도 채 안 되었을 것이오.
그런데 후세에 성현의 도가 스러지고 교화가 쇠퇴하면서, 사람들의 심성이 갈수록 잔인해지고, 마침내 너나할 것 없이 육식을 집안의 다반사로 습관들이게 되었구료. 자기 한 입만 챙기느라, 다른 생명의 고통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도 않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소?
다행히 불교가 전래한 이후, 모든 중생이 불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를 모르면 생사윤회가 그칠 날 없고, 이를 깨달으면 열반을 증득하여 영겁토록 상주한다는, 진실한 원리와 사실이 철저하게 밝혀졌소. 그래서 고물고물한 모든 중생이 과거에 우리 부모였고, 미래에 부처가 될 것임을 알게 되었소. 그러니 감히 잡아먹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들 모두가 각자 자기 자리를 얻도록 해주어야 마땅하오.
아니나 다를까, 역대로 거룩한 임금과 현명한 신하, 지혜로운 선비와 뛰어난 유생들은, 대부분 부처님의 가르침을 높이 받들어 따르면서 인자한 덕성을 함양하였소. 더러는 육식을 끊고 채식을 하며, 더러는 살생을 금하고 방생을 널리 행하였소. 그토록 훌륭한 덕행과 아름다운 말씀들이 역사책에 수없이 실려 전해지는 것은, 후세 사람들도 이들을 본받아 함께 자비심을 수양하고 만 생명을 사랑하도록 권장하는 가르침이 아니겠소?
사람과 다른 동물은 모두 똑같이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을 받았으며, 또한 똑같이 지각과 의식 있는 영혼과 심성을 지니고, 같은 천지 사이에 살아가고 있소. 다만 숙세의 죄업과 복덕이 서로 달라, 지금처럼 각기 다른 형체와 의식 수준으로 나뉘었을 뿐이오. 내가 강하고 저들이 약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 살코기로 내 뱃속을 채우면서 쾌락과 만족을 누리는 일이, 바로 전생 복덕의 보답이라고 내세울 수 있겠소?
그 복덕이 한번 다하고 나면, 죄업의 과보가 눈앞에 닥쳐 다른 동물로 떨어지고, 마침내 사람들의 부림을 받다가 살륙을 당할 줄 누가 알리오? 그때 몸으로 대적할 수도 없고 입으로는 말도 못하며, 마음속에 차오르는 근심과 두려움과 고통에 휩싸인 자신을 돌아보면서, 고기를 먹은 게 큰 죄악이었고, 고기를 먹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나찰임을 알게 될 것이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자기를 잡아먹지 못하도록 막고 싶어도, 그때는 이미 어찌할 수 없는 궁지일 뿐이오. 한때 입맛을 위해 미래 오랜 겁토록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할 것이니, 이는 자살에 비해 만 배나 더 참혹하고 끔찍스러운 짓이 분명하오. 어찌하여 이런 짓으로, 그처럼 엄청난 재앙을 스스로 불러들인단 말이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어찌 그리도 어리석고 미혹하단 말이오.
그래서 『능엄경』에 “사람이 양을 잡아먹으면, 양은 죽어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은 죽어 양이 된다.” 하였소. 또 『입릉가경』에도 세존께서 고기 먹는 것을 갖가지로 질책하시면서, 모든 중생이 시작도 없는 때부터 생사윤회를 끊임없이 반복해오면서, 서로 부모 형제나 처자 또는 친구의 인연을 맺어왔는데, 지금 생명을 바꾸어 짐승으로 태어났다 해서, 어찌 그들을 함부로 잡아먹을 수 있느냐고 탄식한 내용이 나온다오.
다른 생명을 죽여 그 고기를 먹으면, 티끌처럼 무한한 영겁의 세월토록 서로 죽이고 잡아먹기를 반복하는데, 마치 수레바퀴가 굴러가며 위아래가 끊임없이 뒤바뀌듯, 윤회 보복이 계속한다는 거라오. 사마타(奢摩他: 禪定)와 부처님 출현을 기다려야만, 비로소 그 복수의 사슬이 끊길 수 있다고 하오. 그런데 사마타의 도를 어디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으며, 더구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는 때는 어디 아무나 만날 수 있는 것이오? 그러하거늘, 우리가 가까이는 앞선 성현들의 언행을 본받고, 멀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수가 감히 있겠소? 우리가 죽기 싫어하는 마음을 미루어 짐작하여, 지금 잡혀 요리당하기를 기다리는 목숨들을 건져 준다면, 숙세의 업장을 덜어 내고 착한 복덕의 뿌리를 심어 기를 수 있으며, 나아가 살해의 원인을 영원히 끊어버려 함께 무궁토록 장수하는 과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오.
일체의 중생은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의 과거 부모이자 미래의 부처이기도 하오. 온갖 방법을 강구하여 보호하고 구제하여도 오히려 부족할까 걱정해야 할 판에, 어찌 한 순간 우리 입과 배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들의 몸을 죽인단 말이오?
뭍이나 허공․물속에서 기고 날고 헤엄치는 모든 중생이, 똑같이 영명(靈明)한 지각(知覺)과 의식을 갖추었으나, 단지 숙세의 업장이 몹시도 깊고 무거워 우리와 다른 모습의 몸을 받은 걸 우리는 알아야 하오. 비록 그들이 입으로는 말할 수 없지만, 먹을 것을 찾고 죽기 싫어 피하는 꼴을 보면, 그들 역시 우리 인간과 다를 바 없음을 깨달을 수 있지 않소?
우리는 다행히도 전생의 복덕에 힘입어 인간으로 태어나 지혜로운 마음까지 받았으니, 마땅히 만물이 모두 우리와 똑같이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생겨난 동포임을 알고, 형제의 우애를 도탑게 다해야 할 줄 아오. 그래야 인간이 하늘 및 땅과 함께 삼재(三才)로 자부하며, 천지자연의 생장 변화 이치[道·眞理]를 참구하고 보필한다는 대의명분이 부끄럽지 않게 되오. 인간과 중생이 각각 자기의 자리를 얻어, 하늘과 땅 사이에서 평화롭게 공존 공생하며 타고난 천수(天壽)를 다해야 하지 않겠소?
그런데 천지자연이 만물의 생명을 낳아 기르는 덕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기의 입맛이나 즐기고 뱃속이나 채우려는 생각만 품고, 자기가 좀 강하고 재능 있다고 약한 그들을 마음대로 잡아 그 고기를 먹는단 말이오? 그러다가 언젠가는 반드시 전생에 쌓아 둔 복덕이 다하고, 살생의 죄업이 눈앞에 나타나는 날이 닥칠 것이오. 그때는 인간의 얼굴과 모습을 바꾸고 싶지 않더라도, 업력(業力)에 따라 그들과 서로 자리를 바꾸어 잡아먹히는 꼴이 될 것이오.
하물며 육식은 독성(毒性)이 강한데도, 즐겨 먹고 싶단 말이오? 살해당할 때 원한의 마음이 내뿜는 독기(毒氣)가 엉기기 때문이오. 그래서 무릇 전염병이 나돌 때에도 채식하는 사람은 감염되는 일이 몹시 적다오. 또 고기는 아주 더럽고 혼탁한 물건으로, 이를 먹으면 피가 흐려지고, 정신도 맑을 수 없게 되오. 발육 성장은 빠른 게 사실이지만, 그만큼 일찍 노쇠해지고, 특히 질병에 가장 쉽게 걸리는 취약 체질의 화근이기도 하오.
반면 채식은 맑고 정갈한 식품으로, 채식을 하면 기혈(氣血)이 맑아지고 정신도 또렷해지며, 자양분도 풍부하여 건강 장수하고 잘 늙지 않게 되오. 이는 비록 보건 위생에서 늘상 거론하는 상식 같은 이야기지만, 사실은 하늘로부터 타고난 성품을 다하는 지극한 이론이기도 하오. 다만 속세의 관습이 잘못 이어지면서, 그만 미혹과 사견이 갈수록 두텁게 쌓여, 본래 성품의 자리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라오.
어진 사람은 반드시 만물을 사랑하고, 생명을 죽이는 자는 결코 어진 사람이 아니오. 이는 습관(업습)과 천성 때문이라오. 그래서 성왕이 세상을 다스릴 때에는, 길짐승이나 날짐승은 물론 물고기와 미물까지 모두 즐거워하며, 대도를 밝혀 백성을 교화하기에 활이나 창․낚시 같은 살상 무기를 모두 없앤다오. 예로부터 지금까지 두루 살펴보면, 잔인하고 재물과 음식에 탐닉한 자들은 집안이 대부분 끊겼으며, 어질고 자비와 사랑으로 만물을 구제한 이들은 자손이 반드시 창성하였소. 그래서 산 사람을 차마 순장(殉葬)할 수 없어 대신 인형[俑: 진시황릉에서 출토한 兵馬俑 같은 附葬品]을 만들어 쓴 창시자에 대해서조차, 공자는 결코 후손이 없을 것이라고 단죄하였소. 또 제멋대로 고기를 먹는 사람에 대해, 여래께서는 반드시 그 빚을 갚아야 할 것이라고 수기(授記)를 내리셨소.
[이 말은 『孟子』梁惠王상편에 나오는 말로, 원문은 “처음 부장용 인형을 만든 자는 그 후손이 없을진저!(始作俑者,其無後乎!)”이다. 양 혜왕이 가르침을 청하자, 맹자는 막대기와 칼날로 사람을 죽이는 게 차이가 있는지 묻고, ‘없다고 답하자 다시 칼날과 (나쁜) 정치로 사람 죽이는 게 다르냐고 되묻는다. 또 없다고 답하자, 맹자는 “왕의 푸줏간에 살찐 고기가 즐비하고 마구간엔 살진 말이 있는데,백성이 굶주리고 들에 굶어죽은 시체가 널려있으니, 이는 짐승을 몰아다가 사람을 잡아먹게 하는 거나 다름없다고 힐난한다. 짐승끼리 서로 잡아먹는 것조차 사람들은 싫어하는데, 하물며 인민의 부모(왕)가 정치를 행하면서 짐승으로 사람을 잡아먹게 한다면, 왕의 직책은 도대체 어디(무엇)에 있느냐고 강하게 힐난한다. 이어서 “중니(공자)는 ‘처음 순장용 인형을 만든 자는 그 후손이 없을진저!(始作俑者,其無後乎!)’라고 말하였으니, 그것은 사람 모습을 본떠 썼기 때문이다.(爲其象人而用之也)”고 그 이유를 밝힌다. 사람의 모습을 땅속에 묻어 순장하는 불인(不仁)조차 그토록 비난을 받는데, 어떻게 인민을 굶주려 죽게 할 수 있느냐는 강렬한 질책인 것이다.
‘始作俑者’의 전통적 해석은, 나쁜 짓이나 악렬한 풍습을 처음 물꼬 튼 원흉은 천벌을 받을 거라는 뜻이다. 그런데 도덕이 타락한 말세 풍조에 젖은 현대인이 보기에는, 인류문명의 ‘역사발전’ 관점에서, 산 사람을 묻는 순장 대신 인형을 도입한 것은 오히려 인도주의의 발현으로 칭송해야할 ‘선행공덕’으로 볼 수도 있는가 보다. 실제로 위키백과사전의 중국어판본인 ‘維基(웨이지)詞典’은 그런 시대흐름을 반영해 완전히 상반된 뜻풀이도 제시한다. 즉, 맹자 원문의 ‘其無後乎’를 ‘어찌 그 후손이 없겠는가?’라고 반문한 걸로 풀이하며 몇 가지 근거를 댄다.(http://zh.wiktionary.org/zh/%E5%A7%8B%E4%BD%9C%E4%BF%91%E8%80%85)
첫째, 문장형식상 단순한 설의적 반어법의 의문문으로 본다. 허나 감탄문으로 보는 전통 해석도 똑같이 성립하며, 맹자 원문 맥락에서 갑자기 ‘사람 인형 순장했다고 어찌 후손이 없겠느냐?’고 반문하는 건 참으로 어색한 논리비약이다. 둘째, 위에서 소개한 맹자 원문 맥락에서 ‘始作俑者,其無後乎!’ 뒤에 ‘차마 산 사람을 묻어 죽일 수 없어서’가 생략된 걸로 보고, ‘爲其象人而用之也’를 ‘그(其) 사람모습(象人)을 만들어(爲) 그걸(之) 썼다(用)’고 풀이한다. 고문의 구조상 전혀 불가능한 해석은 아니겠지만, ‘그(其)’가 지시관형사여야 하고 주어는 될 수 없기 때문에, 문장구조 분석이 견강부회가 된다. ‘爲’를 원인으로 보아 ‘때문이다’고 풀이하는 전통 해석이 훨씬 자연스럽다.
셋째, 실질논리상 공자시대에 이미 俑人의 순장이 보편이었는데 그런 사람 모두를 비난하고 책망했다는 건 이해하기 어렵단다. 또 ‘仁’을 근본으로 하는 공자의 인본주의 철학사상의 관점에서 ‘사람’ 대신 ‘인형’은 획기적 역사발전으로 오히려 칭송해야할 선행공덕이란다.
허나 이는 공자와 맹자의 본래 회포인 깊은 인본주의 철학사상에 대한 이해 부족이다. 물론 노자의 지적처럼, 미더운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미덥지 않은 현실이지만, 도(道)와 덕(德)도 결국 말과 글을 통해 표현되므로 인간현실에서 말글의 위력은 막강하다. 그래서 공자는 명실상부한 정명(正名)을 주장하며 말과 명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꾀 많은 조조가 목말라 허덕이는 군사들의 갈증을 풀어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저 언덕 너머에 매실이 주렁주렁 열려있다’고 거짓말해 군침을 돌게 하고 위기를 모면했다고 전한다. 거꾸로, 은나라 마지막 주임금의 별도(別都)로 주나라 때 강숙을 위나라에 봉한 도읍지인 朝家(조가)는 弔歌와 음이 비슷하고 포학무도한 주(紂)임금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고, 묵자는 이 도읍에 들어가지 않고 마차를 돌렸다고 전한다. 또 증자는 ‘어머니를 이긴다’는 ‘승모(勝母)’라는 마을에는 들어가지도 않았다고 한다. 모두 ‘이름’이 지니는 물리적 ‘파동’과 심리적 ‘의미’연상 작용이 발휘하는, 은근한 함축적 위력을 실감하게 하는 역사적 실례들이다.
그래서 공자는 어진 마을에 거처하는 아름다움과 지혜로움을 강조했다.(里仁爲美, 擇不處仁, 焉得知?) 왜냐하면 난실에 들어가면 난향이 옷에 배고, 어물전에선 비린내가 젖기 때문이다. 말과 글에 담긴 관념과 생각의 향기도 사람의 뇌리와 심리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강력한 전자기장을 미치기 마련이다. 공자는 사람모습을 본뜬 ‘용(俑)’이 사람을 순장하던 나쁜 악습을 무의식중에 떠올리는 심리연상까지 염려한 것이다. 지금도 대만에서 순수 채식 염불수행자들은 콩단백이나 밀단백으로 만든 채식에 콩‘고기’나 밀‘고기’란 이름을 쓰는 것조차 꺼려한다. 마음이 순수하고 섬세하게 수련되어갈수록 더욱 정치(精緻)해지기 때문이다.
또 다른 기발한 해석으로는, ‘처음 순장용 인형을 만든 사람은 그 후계자가 없겠는가?’라는 의미로, 반드시 그를 본받는 모방범죄가 뒤를 이을 거라는 우려다. 과연, 진시황은 대대적인 병마용을 만들어 자신의 사후 지하궁전을 호위하도록 준비했고, 그로 말미암아 엄청난 인력과 재물이 소모되고, 마침내 그 작업에 참여한 사람가지 생매장했다는 비극의 역사가 전해진다. 이는 위의 전통적 해석의 자연스런 논리로 도출되는 결과이기도 하다. 물론 그 덕분에 그 엄청난 역사문물이 전해진다고 감탄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뭘까?]
단지 푸줏간(도살장)만 멀리하면서, 도살의 모습과 비명을 보고 듣지 않으면 고기를 먹어도 좋다고, 적당히 자신과 타협하지 않기를 바라오. 이는 유가에서 세속의 풍습에 따라, 할 수 없이 내세운 임시방편의 교화일 따름이오. 진실로 비린내와 매운 맛을 영원히 끊어야, 바야흐로 부처의 가르침과 진리에 부합한다고 일컬을 수 있겠소.
옛날 노(魯)나라에 용감한 두 사람이 있었는데, 피차 이름만 익히 듣고 서로 직접 만나 보지는 못하였소. 그러다가 어느 날 서로 만나 술을 사서 함께 마시게 되었다오. 한 사람이 “고기 안주가 없으면 맛과 멋이 별로 없으니, 가서 고기를 사오자.”고 말하자, 다른 한 사람이 “그대와 내가 모두 고깃덩어리인데, 어찌 달리 구한단 말이냐?”고 대꾸하였다는 거요. 이 말을 듣고 그 식견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 그들은, 마침내 옷을 걷어 부치고 각자 살을 떼어, 서로 상대방과 맞바꾸어 먹었다오.
그들은 의기양양하여 자신들의 교유야말로 마음과 뜻이 서로 진지하게 들어맞는 친구 사이라고 여기며, 각자 살까지 베어 내어 먹었지만, 마침내 죽고 말았소. 이 소문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어리석음에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소.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바로 육식 때문에 끝없는 살생의 죄업을 지어, 오랜 세월에 걸쳐 서로 자리를 뒤바꾸어 가면서 살생으로 보복하고 있소. 그러니 이들 노나라의 용사들보다 더욱 비참하고 혹독한 셈이오. 지혜의 눈이 없기 때문에 후세의 과보를 알지 못하고, 도리어 득의양양하게 육식을 자랑하고 과시하면서, 채식하는 사람들을 미신이나 박복(薄福)의 소치로 덮어씌우고 비방하기 일쑤요. 세인의 습속이 오래 이어져 내려와, 잘못조차 모르고 있는 게요.
그래서 석가여래께서 『범망경(梵網經)』과 『능엄경(楞嚴經)』, 『능가경(楞伽經)』 등의 대승경전에서, 살생과 육식의 과보로 초래하는 재앙을 지극하게 설법하셨으니, 이는 재앙을 발본색원하려는 진정한 대자대비심에서 나온 것이오. 근래 살륙의 참상은 만고에 듣지 못했을 정도라오. 게다가 홍수․가뭄․전염병․폭풍․지진․화산폭발 등 천재지변 소식이 끊임없이 전해지고 있소. 이들 모두 결국 살생의 죄업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인과응보일 뿐이오. 세상 인심과 윤리 도덕이 갈수록 타락해 가고 있기 때문에, 천벌과 인재(人災: 사고)가 줄지어 일어난다오. 이는 거울 앞에 서면 본래 모습 그대로 비치는 것과 같아, 피하거나 속일 수 없는 것이오.
그런데도 세속의 미혹은 막심하여, 악을 저지르면서 선으로 착각하고, 죄업을 지으면서 복을 닦는다고 잘못 믿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오. 그 가운데 가장 눈 뜨고 보기 어렵고 마음 아프게 하는 처참한 광경은, 아마도 천지신명께 제사 지낸다는 일일 것이오. 부자와 재벌은 소 돼지를 잡아 제사 지내며, 한편으로는 많은 복 받기를 기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오. 살림 규모가 작고 가난한 집안도 하다못해 닭이나 오리를 잡아, 신명의 보우로 복과 수명이 늘어나고, 만사가 뜻대로 형통하기를 기원하기는 매일반이오.
천지는 만물을 낳아 기르는 일이 자연스런 덕성이고, 신명은 천지를 대신하여 모든 일을 직접 주재하는 존재인 줄을 모른 채, 사람들의 마음은 천지신명과 완전히 상반하는 것이오. 만약 천지신명이 자기 혼자를 위해 바치는 제사를 기쁘게 받아 누리면서, 그 대가로 수많은 생명들이 도마 위에 칼로 난자질당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어찌 총명하고 정직하면서 선행을 상 주고 죄악을 벌하는 올바른 신명(正神)이라고 일컬을 수 있겠소?
사실인즉, 원래 입맛에 탐닉한 어리석은 사람들이, 특별히 신명께 제사지낸다는 명분을 빌어 짐승을 살륙하여 자기 뱃속을 채우던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서로 습관이 되고 풍속을 이루게 된 것일 따름이오. 커다란 악업을 짓는 줄은 모르고, 신명께 제사 지낸다고 말하지만, 과연 천지신명이 그 피비린내 나는 살륙의 희생물을 받아먹겠소?
하물며 명색이 신명이라면, 반드시 총명하고 정직한 덕성을 지니고, 마땅히 사람들이 지은 선악대로 화복을 공평히 내리는 원칙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그런데 가축을 죽여 자기에게 제사 지낸다고, 죄악을 지은 자라도 복을 내려 주고, 반대로 자기에게 희생을 바쳐 제사 지내지 않으면, 선행을 행하는 이에게도 재앙을 내릴 수 있겠소? 만약 그렇다면, 그 신명의 심성과 덕행은 시정(市井) 잡배와 다를 게 뭐가 있겠소? 그런 존재를 어떻게 총명하고 정직한 신명이라고 일컬을 수 있겠소? 총명하고 정직한 신명이라면, 결코 이러한 요괴(妖怪)나 마귀(魔鬼) 같은 짓은 하지 않으며, 오직 도덕(道德)과 인의(仁義)에 따른 일만 행할 것이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단지 육식이 좋은 걸로만 여기고, 마침내는 자기가 피비린내 나는 더러운 음식을 탐닉하는 것처럼, 신명 또한 그러할 줄로 잘못 미루어 짐작하는 게요. 그래서 서로 본받아, 아무도 잘못인 줄 모르는 것이오. 비유하자면, 똥 고자리(구더기)가 똥을 먹으면서, 하늘의 신선도 당연히 자기처럼 그렇게 훌륭한 맛을 즐기리라고 착각하고, 늘 그 똥을 신선에게 바쳐 복덕을 내려 주길 바라는 것과 같소.
사실 지금 도살당하는 저 짐승들은, 거의 대부분이 모두 과거 전생에 다른 희생을 잡아 신명께 제사 지내던 자들로, 지금 자기 살을 먹는 사람들이 당시 자기가 저지른 살생의 과보를 갚아 주기만 바라는 처지라오. 그런데도 어리석은 일반 대중은, 아직도 짐승을 잡아 신명께 제사 지낸다는 소문을 들으면, 곧 기뻐 날뛰면서 큰 복덕을 짓는 일로 여기는구료. 장래에 자신들이 이러한 짐승으로 바꾸어 생겨나 사람들에게 도살당할 때는, 이미 입은 있지만 말은 할 수 없고, 죽음을 피하거나 저항할 수 없는 처지가 될 거라는 사실은 모르는 것이오.
하물며 불법(佛法)에 깊숙이 들어가 부처님의 가장 큰 기본 계율을 받아 지니고, 평생토록 채식하기로 결심한 출중(出衆)한 고매한 사람이, 아무 까닭도 없이 육식을 탐닉한다는 억울한 누명을 써가면서까지, 수없는 생명을 죽여 신명께 제사 바치는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있겠소? 그러한 짓은 천리(天理)에 어긋나고 성현을 모독하는 패역무도한 죄악으로, 미래 영겁토록 매 생애마다 그렇게 살해당하는 짐승의 과보를 받을 것이니, 어찌 몹시 슬프지 않겠소?
세상 사람들은 질병이 있거나 위험과 재난 등이 있는 경우, 염불로 기도하고 선행을 닦을 생각을 안 하고, 망령되이 귀신에게 제사 지내 도움을 청하려 들기 일쑤요. 그래서 산 목숨을 죽이니, 본디 재난을 초래한 업장에, 살생의 죄업을 새로 덧보태는 셈이오. 정말 불쌍하기 짝이 없소.
인간이 살아가면서 만나는 외부 환경의 인연[境緣]은, 대부분 전생의 업장 때문에 말미암는 것이오. 그래서 질병이나 고난이 생기면, 곧 염불과 선행을 닦고 숙세의 죄업을 참회하는 게, 최상의 해결 방편이자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오. 그렇게 하여 업장이 소멸하면, 질병도 낫고 재난도 점차 사라지는 것이오. 귀신들은 자기들도 아직 업장의 바다[業海] 가운데 잠겨 있는 형편인데, 어떻게 사람들의 업장을 소멸시켜 줄 수 있겠소?
설사 막대한 위력을 지닌 정직한 신명[正神]이라 할지라도, 그 위력은 부처나 보살에 비하면, 마치 반딧불을 햇빛에 견주는 것과 같다오. 불제자(佛弟子)로서 부처와 보살께 기도하지 않고 귀신에게 기도하는 일은, 부처의 가르침에도 어긋나는 사견(邪見)이라는 걸 알지 않으면 안 되오.
또 일체의 중생이 모두 과거의 부모이자 미래의 부처들이므로, 이치상 살생을 금하고 방생하며, 모든 중생의 목숨을 아끼고 사랑해야 마땅하오. 세속의 고정 관념과 편견에 따라, 부모에게 진수성찬을 봉양하는 것이 효도라는 생각은, 절대로 품어서는 안 되오. 불법을 들어보지도 못한 일반 속인들이야 육도 윤회와 인과응보의 사리를 모르기 때문에, 부모에게 진수성찬 바치는 것이 효도라는 사견과 망언을 일삼을 수 있고, 또 그 허물을 용서받을 수 있소. 그러나 이미 불법을 들어 이치를 안 사람이, 과거의 부모 친척을 살해하여 현재의 부모를 봉양하거나 장례 또는 제사 지내는 행위는, 단지 효도가 아닐 뿐만 아니라, 곧바로 천리(天理)와 불법에 정면으로 거스르는 패역무도가 된다오.
그래서 통달한 선비와 지혜로운 사람들은, 불법의 진실한 이치를 들으면 깊이 깨달은 바가 있어, 한결같이 세속의 임시방편적인 절충 법문에 따르려 하지 않는다오. 이러한 임시 방편의 절충 법문은, 아마도 세속 중생의 미혹한 감정에 잠시 따라주는 타협안으로 세워진 것이 분명하며, 삼세의 인과 법칙을 통달하는 여래의 정도(正道)는 결코 아니라오.
세상의 모든 악업 가운데, 살생이 가장 무겁소. 온 천하를 통틀어 살생의 죄업을 전혀 짓지 아니하는 사람은, 아마 씨도 종자도 없을 것이오. 설사 평생토록 산 목숨을 몸소 죽인 적이 결코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매일같이 육식을 하면 곧 매일같이 간접 살생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오. 살생을 하지 않고서는 결코 고기를 얻을 수 없지 않소? 사실 백정(도살업자)이나 사냥꾼이나 어부들은, 모두 육식하는 사람의 수요를 공급하기 위해서 대신 살생을 하는 것에 불과하오.
그러니 육식을 하느냐 채식을 하느냐 문제는, 실로 우리의 성품과 정신이 향상 승화하느냐, 타락 침몰하느냐에 직접 관련되오. 나아가 천하 통치가 태평성대를 이루느냐, 혼란무도에 빠지느냐에도 근본 원인이 된다오. 따라서 이는 결코 사소한 일로 하찮게 여길 수 없소.
요컨대, 자기 목숨을 자중 자애하고 천하 백성을 두루 사랑하여, 모든 사람이 안락하게 건강 장수하며 뜻밖의 재난과 사고를 당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이들은, 마땅히 살생을 끊고 채식을 몸소 실천하며 널리 권장해야 할 것이오. 채식이야말로 천재지변과 사고를 예방하고 줄이는 제일 신묘한 법문이기 때문이오.
모든 중생의 심성과 한 순간 생각은 부처와 다를 바 없고, 또 우리 사람들과도 전혀 다르지 않소. 불행히 전생의 악업으로 축생에 떨어졌으니, 정말 더욱 큰 자비심과 연민의 정을 보여야 하지 않겠소? 아무 것도 모르는 속인들은 오랜 습속에 젖어, 살생으로 육식하는 것을 식도락(食道樂)으로 즐기면서, 도살당하는 짐승들의 고통과 원한이 얼마만한지는 전혀 생각지도 않는구려.
인간은 약육강식을 당연한 자연법칙으로 여기지만, 전쟁이나 난리가 일어나 서로 죽이고 죽으면, 짐승들이 도살당하는 처지와 똑같은 상황이 되지 않겠소? 가령 적군이나 폭도들이 그대의 집을 불사르고 그대의 아내와 딸을 겁탈하며, 그대의 재산을 약탈하고 그대의 목숨까지 죽이는데도, 감히 욕설 한마디 퍼붓지 못하고 꼼짝없이 당하는 것은, 자기 힘이 대적할 수 없기 때문이오. 짐승들이 도살당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지금 당장 힘으로 대적할 수 없기 때문이라오.
만약 그들이 대적할 힘이 있다면, 틀림없이 당장 사람을 물어뜯고 들이받으며 대항할 것이오. 인간이 자기 입맛과 뱃속을 채우기 위해 살생을 자행하고, 그 죄업으로 말미암아 맺히고 쌓인 짐승들의 원한과 분노가, 인간끼리 서로 총칼을 들이대고 살륙하도록 전쟁을 일으키는 직접 원인이라오.
물론 홍수와 가뭄·기근·질병·폭풍·지진·해일 따위의 천재지변도, 모두 그러한 살생 죄업의 여파로 끊임없이 계속 발생하오. 마치 사람들이 명절 때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것과 같소. 내가 선물을 보내면, 상대방도 답례를 해오는 것이 도리이듯 말이오. 선물이 갔는데 답례가 오지 않거나, 거꾸로 인사가 왔는데 답례를 보내지 않는 법은 결코 없소. 만약 답례가 없다면, 이는 반드시 별다른 인연(사정)이 있어 상쇄하기 때문이며, 알고 보면 정말로 왕래 보답의 예법을 벗어나는 경우는 하나도 없소. 하늘(자연)이 상벌을 내리는 인과응보의 법칙도 이와 똑같거늘, 하물며 인간사회에서 서로 보답하고 보복하는 이치야 그렇지 않겠소?
그래서 『서경[尙書]』에는 “선을 행하면 온갖 상서로움이 내리고, 악을 지으면 온갖 재앙이 내린다.”는 말씀이 전해오고 있소. 또 『주역(周易)』에는 “선행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남아도는 경사가 있고, 악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남아넘치는 재앙이 있다.”는 가르침이 적혀 있소.
하늘(자연)의 도(天道)는 도는 것(순환)을 좋아하여, 가면 간 만큼 되돌아오기(반복) 마련이오. 나쁜 결과를 받지 않으려면 먼저 나쁜 원인을 끊고,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먼저 좋은 원인을 심어야 하오. 이것이 천리(天理)나 인정(人情)에 모두 딱 들어맞는 지극한 법칙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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