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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바꾸려는 노력이 진정한 수행

인광대사가언록. 콩 심은 데 콩, 팥 심은 데 팥

by 明鏡止水 淵靜老人 2023. 1. 1.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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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운명을 바꾸려는 노력이 진정한 수행

 

화엄경에 이르기를, “일체 중생이 모두 여래의 지혜와 복덕 형상을 갖추었으나, 다만 망상과 집착으로 말미암아 증득할 수 없을 뿐이라고 하였소. 그래서 지혜와 복덕의 형상은 중생과 부처가 함께 갖춘 천성의 덕[性德]인데, 중생은 망상과 집착에 싸여 있고, 부처는 이를 여읜 점이, 서로 판연히 다른 (후천) 수행의 덕[修德]임을 알 수 있소.

수행의 덕에는 순응과 거역이 있소. 천성에 순응하여 수행하면, 닦을수록 더욱 도에 가까워지고, 지극한 경지에 이르러서는 확철대오하고 증득하게 되오. 반면 천성에 거역하여 수행하면, 닦을수록 도로부터 멀어지고, 결국에는 영원히 삼악도에 떨어지고 만다오.

이러한 원리를 파악한다면, 어리석은 자도 현명해질 수 있고, 현명한 자도 어리석어질 수 있으며, 장수할 자가 요절하는가 하면, 요절할 자도 장수할 수 있게 되오. 또 부귀와 빈천이나 자손의 번성과 단절도, 하나하나 모두 스스로 주인이 되어 통제할 수 있게 되오. 의지할 곳 있는 자도 의지할 곳이 없어지기도 하고, 의지할 곳 없던 자도 의지할 곳이 생기게도 되오. 이는 마치 높은 산의 암벽이 발 디딜 틈도 없어 올라갈 수 없는 경우에, 사람이 바위를 뚫고 깎아내어 계단을 만들면, 절벽 끝까지도 곧장 올라갈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마음에 따라 죄업을 짓기도 하고, 마음에 따라 죄업을 돌리기도 한다는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얼마나 수많은 위대한 천재와 학자들이, 그 전까지 쌓은 공덕을 모두 내팽개치고, 오랜 겁의 세월 동안 해를 당하여 왔는지, 이루 헤아릴 수 없다오. 만약 덕을 닦지 않는다면, 설사 몸소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나, 신하로서 최고 권세를 누리는 재상이라 할지라도, 대대로 패가망신하지 않으며 부귀영화를 지속할 수 있겠소? 따라서 몸소 얻은 지위라 할지라도, 모두 장래를 보장해 줄 만큼 확고부동한 근거는 되지 못한다오.

원료범(袁了凡)은 바로 이러한 이치를 체득하였기 때문에, 그가 누린 복덕은 모두 전생의 원인으로 결정된 게 아니었소. 전생의 원인이란, 세속에서 말하는 숙명[]이라오. 하늘이 정한 운명이 인간(의 의지)을 이긴다는 말은, 전생의 원인을 전환시키기 어려움을 뜻하오. 하지만 인간이 결정한 의지가 하늘(의 숙명)을 이긴다는 말은, 전전긍긍하며 수행에 정진하면, 전생의 원인도 믿을 것은 못 된다는 뜻이라오.

그러므로 현세의 (좋은) 원인을 원인으로 삼아 전생의 (나쁜) 원인을 소멸시키는 결과가 바로 덕을 닦는 일이오. 만약 제멋대로 망령된 짓을 일삼는다면, 이와 정반대가 되겠소. 이를 깨닫는다면, 어리석은 이가 현명해지고 평범한 이가 훌륭해지는 것이, 모두 자기의 마음가짐과 복덕 수행에 달려 있음을 알고, 수시로 사람들을 잘 교화해 나갈 수 있을 것이오.

운명[]이 무엇인가 하면 곧 전생에 지은 행위의 과보라오. 그러나 도의(道義)에 따라 행하여 얻는 과보만 바야흐로 운명이라고 일컫고, 그렇지 않은 것은 운명이라고 일컫지 않소. 왜냐하면, 그 과보를 얻음으로써 내생에 그 대가로 받아야 할 고통은, 아마도 차마 보고 들을 수 없을 정도이기 때문이오. 예컨대, 도적이 남의 돈과 재물을 겁탈하면, 우선 잠시 부유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관청에서 일단 알았다고 하면, 붙잡아 머리와 몸통을 둘로 잘라 버릴 것이 틀림없지 않소? 그러니 어찌 잠시 쾌락을 얻는다고 모두 운명이라고 일컬을 수 있겠소?

그러면 노력[]이란 무엇이겠소? 바로 현생에 짓는 행위를 일컫는 것이오. 그러나 노력의 행위에도 두 가지가 있소. 하나는 오로지 변덕스러운 기교와 간사한 재주를 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직 자기 감정을 극복하고 예법으로 복귀하는[克己復禮] 수양이라오.

그런데 열자(列子)가 말하는 운명은, 잡다하게 뒤섞여 내용이 불분명하오. 또 그가 말하는 노력도, 다분히 기교와 간사에 치중하는 편이오. 그 결과, 노력이 운명에 굴복하는 것에 대해 대답할 길이 없다오. 예컨대, 공자가 진() 나라와 채() 나라에서 곤욕을 치른 것이나, 전항(田恒)이 군주를 시해하고 제() 나라를 차지한 것을, 모두 다 운명이라고 말하니, 과연 그가 운명을 안다고 할 수 있겠소?

공자가 현명한 군주를 만나지 못해 천하를 평안하게 다스리지 못한 것은, 천하 중생의 공동 업장의 힘[業力]이 하도 커서 그리 되었으니, 공자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겠소? 안회(顔回)가 요절한 사실도, 이치는 마찬가지라오. 한편 전항이 제나라를 차지한 것은 무력으로 찬탈한 것인데, 어떻게 운명이라고 한단 말이오? 비록 우선 당장은 군주로 행세했겠지만, 한 가닥 숨이 이어지지 않은 순간, 곧장 아비지옥의 죄수로 떨어졌을 것이 아니오? 이러한 것을 운명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사람들에게 도의를 닦지 말고, 도리어 제멋대로 겁탈을 자행하도록 가르치는 셈이 될 것이오. 그래서 내가 열자는 운명을 모른다고 굳이 말하는 거라오.

맹자(孟子)의 운명론을 보지 않았소? 반드시 이치를 궁구하고 타고난 (착한) 심성을 다하여 다다른 운명이라야, 비로소 진짜 운명[眞命]이라는 것 아니오? 도의에 따르지 않고 얻은 것이나 잃은 것은, 모두 이른바 운명이 아니라는 것이오. (보충 해설: 일찍이 공자는 부귀는 하늘에 달렸고, 생사는 운명에 달렸다고 말하면서, 부귀는 모두가 원하지만 정당한 도의로 얻지 않으면 자신은 차지하지 않겠으며, 빈천은 모두가 싫어하지만 정당한 도의로써가 아니면 자신은 결코 떠나지 않겠노라고 역설한 적이 있다. 맹자나 인광 대사의 운명론도 여기서 비롯한 것이다.)

또 열자가 논한 노력은, 대부분 기교와 변덕투성이의 간사한 재주로, 성현은 입 밖에도 내지 않은 것이오. 성현이 말한 것은, 모두 자기 감정을 극복하고 예의로 복귀하는[克己復禮] 수양이라오. 예컨대, 성현도 한 생각 놓으면 미치광이가 되고, 미치광이도 한 생각 극복하면 성인이 된다오. 선행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남아넘치고, 악행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재앙이 흘러넘친다오. 나무가 먹줄을 받으면 바르게 다듬어지고, 군주가 충직한 간언을 따르면 성왕이 된다오. 거백옥은 오십 년을 살아오면서 49세 때의 잘못을 알아차리고는, “허물을 줄이려고 끊임없이 노력해도 잘 안 된다.”고 겸허히 말했다오. 공자는 나에게 몇 년만 더 주어져, 오십 세에 주역을 공부한다면, 큰 허물은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오. 맹자는 사람은 누구나 다 요순 같은 성현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소. 중용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바를 경계하고 조심하며, 귀에 들리지 않는 바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한다는 신독(愼獨)을 강조했소. 이러한 언론은 모두 수양의 노력을 강조하는 유가의 명언이라오.

불교에서는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모두 마땅히 부처가 될 것이기 때문에, 중생으로 하여금 지나간 죄업을 참회하고 과오를 고치며 선행을 닦아, 반드시 어떠한 악도 짓지 않고 뭇 선을 받들어 행하도록 가르친다오. 계율로써 몸을 붙들어 예의에 어긋난 짓을 하지 않고, 선정으로 마음을 추슬러 잡념 망상을 일으키지 않으며, 지혜로써 미혹을 끊어 버려 본래 성품을 환히 보는 것들이, 모두 유교의 극기복례(克己復禮)와 같은 수행의 노력이오.

이러한 노력에 따라 수행하면, 위로 불도(佛道)도 이룰 수 있거늘, 하물며 그보다 낮은 과보들이야 얻지 못하겠소? 그래서 능엄경(楞嚴經)에 아내를 구하면 아내를 얻고, (현명하고 지혜로우며 조용하고 정조 있는 아내를 구한다는 뜻이오. 그렇지 않다면, 속된 아내야 어찌 굳이 보살께 구한단 말이오?) 자식을 구하면 자식을 얻으며, 장수를 구하면 장수를 얻고, 삼매를 구하면 삼매를 얻으며, 이렇듯이 계속 나아가 대열반을 구하면 대열반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였소. 대열반이란 최고 궁극의 부처님 과보인데, 이러한 것조차 가르침대로 수행하여 얻으리니, 그 노력의 위대함이 어찌 한계가 있겠소? (보충 해설: 불보살의 성호(聖號)를 염송하며 기도하는 것도, 중요한 수행의 노력이다.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 약사(유리광불본원) 등에도, “구하면 얻는다.”는 기도수행의 감응을 설하고 있다. 예수가 구하면 얻을 것이고, 두드리면 열릴 것이며, 찾으면 찾아질 것이다.”라고 설교한 성경 말씀도, 궁극에는 불교나 유교의 수행 노력과 하나로 통하는 마찬가지 원리라고 여겨진다.)

원료범(袁了凡) 선생이 공() 선생을 만나, 자기의 전후 일들을 계산해 준 것이 하나하나 모두 딱 들어맞아 가자, 마침내 운명이란 처음부터 한번 정해진다고 믿었다오. 그런데 나중에 운곡(雲谷) 선사를 만나 그 가르침을 받고 전전긍긍하며 조심스럽게 수행해 나간 결과, 공 선생이 전에 계산해 준 운명이 더 이상 조금도 들어맞지 않게 되었다오. 그러나 거꾸로 원료범 선생 같은 현인도, 만약 나쁜 짓을 함부로 자행하였다면, 공 선생이 계산해 준 운명이 역시 들어맞지 않게 되었을 것이오.

이런 걸 보면, 성현들이 세상 사람들을 가르침에는 오직 수행의 노력을 중시하며, 여래께서 중생을 교화함도 또한 마찬가지임을 알 수 있소. 그래서 부처님이 설하신 대승이나 소승, 권의(權宜)나 실상(實相)의 법문들이, 어느 것 하나 중생으로 하여금 허망한 미혹의 업장을 완전히 끊어 내버리고, 본디 갖추어 지니고 있는 불성을 철저히 깨달아 증득하라고 가르치지 않음이 없다오. 그래서 세상에 지극히 어리석고 둔한 사람들도 수행의 노력을 꾸준히 오래 지속하면, 마침내 위대한 지혜와 말재주를 얻게 된다오.

열자가 모든 것을 다 운명(숙명)으로 되돌린 주장은, 사람들이 성현 되기를 희망하는 염원과 의지를 꺾으면서, 반대로 사람들에게 부당하게 찬탈하고 간사한 죄악을 자행하고 싶은 마음을 부추기는, 이단(異端)이고 사견(邪見)인 셈이오. 하근기의 일반 중생이 이러한 숙명론의 폐단과 해악을 무진장 입을 것은 물론이오. 또한 상근기의 지혜로운 사람들조차도, 때맞춰 민첩하게 분발하고 수행하려는 용기와 의지를 적지 않게 상실하고, 마침내 성현의 경지에는 들어가지 못한 채, 평생토록 한낱 평범한 중생에 눌러 앉고 말 것이오. 이렇듯 열자의 글은 세상에 완전히 백해무익할 따름이니, 어찌 보고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겠소? (보충 해설: 제자백가 중에 순자(荀子)와 묵자(墨子)도 관상이나 운명의 결정론을 철저히 비판 부정하였는데, 각기 유명한 비상(非相) 편과 비명(非命) 편을 지어 상세한 주장과 논리를 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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