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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발원을 함께 충분히 갖추세

인광대사가언록. 극락왕생은 믿음과 발원지닌 염불로

by 明鏡止水 淵靜老人 2023. 1. 4.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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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믿음과 발원을 함께 충분히 갖추세

 

설령 오계(五戒)와 십선(十善)을 공경스럽게 닦아, 인간이나 천상의 몸을 받는다고 합시다. 그렇지만 인간의 복락(福樂)은 타락의 근본 원인이 된다오. 또 천상은 비록 인간 세상에 비해서는 번뇌와 미혹이 맹렬한 편이 아니지만, 그래도 천상의 복이 한 번 다하는 날엔 틀림없이 아래 세상에 태어나게 되어 있소. 숙세에 쌓은 복이 아직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복을 누리지만, 그 복을 누리기 때문에 죄업을 짓게 된다오. 일단 죄업을 지으면, 삼악도에 떨어지는 것은 곧 순식간에 달려 있소. 하물며 천상의 목숨이 다하면서 숙세에 지어 놓은 악업이 이미 무르익은 자는, 그 업력으로 곧장 삼악도에 떨어질 테니, 새삼 말할 게 있겠소?

그래서 수행인이 올바른 생각[正念] 없이 청정한 업을 수행하여, 인간이나 천상의 복록을 보답으로 받는 것은, 옛날의 고승대덕들이 제 3세의 원한[第三世怨]이라고 몹시 경계했다오. 법화경에도 삼계가 불타는 집과 같이 평안치 못하고, 뭇 고통이 충만하여 몹시 무섭고 두렵다.”고 말씀하셨소. 좋고 나쁨을 아는 자라면, 마땅히 시급히 여기를 벗어나 평안을 얻으려고 힘쓰는 것이, 최상의 계책이오.

염불 법문은 부처님의 자비력에 기대어, 삼계를 벗어나고 정토에 왕생하는 것이오. 지금 그렇게 발원하지 않으면, 어떻게 믿음이 있겠소? 진실한 믿음이 있는 자는, 반드시 간절한 발원을 하기 마련이오. 믿음과 발원이 전혀 없이 단지 아미타불 명호만 염송하면, 이는 여전히 자력(自力) 수행에 속하오. 믿음과 발원이 없기 때문에, 아미타불의 큰 서원과 감응의 길이 서로 트일 수 없다오.

만약 보고 생각하는 미혹[見思惑] 두 가지가 모두 사라지면, 더러 왕생할 수도 있을 것이오. 하지만 전혀 끊지 못하거나, 끊더라도 말끔히 다하지 못하면, 업장의 뿌리가 아직 남아 윤회를 벗어날 수 없소. 오조(五祖) 사계(師戒) 선사와 초당(草堂) 선청(, 1057~1142, 임제종 황룡파) 선사 등의 실화가, 그 확실한 증거라오. 믿음과 발원이 없는 염불은, 선종의 화두 참구와 다를 바가 없소. 그렇게 해서 왕생할 수 있다면, 이는 원인과 결과가 서로 들어맞지 않는 셈이 된다오.

 

[송나라 때 운문(雲門) 문언(文偃)의 제자인 쌍천(雙泉) 사관(師寬)의 법을 이어받음, 오조산에 주석하다가, 만년에 대우산에서 주장자를 짚고 담소하다가 입적함. 오조는 호북성 황매현의 산으로, 오조 홍인이 주석해 붙여진 이름]

 

그래서 우익(蕅益: 智旭) 대사는 이렇게 말씀하셨소.

왕생할 수 있는지 여부는 전적으로 믿음과 발원의 유무에 달려 있으며, 품위(品位)의 우열 고하(優劣高下)는 전적으로 명호 염송의 깊이에 달려 있다.”

이는 천 불(千佛)이 세상에 나오셔도, 결코 바꿀 수 없는 철칙(鐵則)이오. 이 말에 믿음이 간다면, 그대는 서방 왕생할 희망이 있게 되오. 평생에 믿음과 발원이 전혀 없는 사람은, 임종에 결코 부처님의 자비력에 기댈 수 없소. 임종에 선과 악이 갑자기 동시에 나란히 나타나는 경우, ‘아미타불 네 글자가 나타나지도 않는 사람이 왕생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설령 나타나는 사람이라도 역시 왕생할 수 없다오. 왜냐하면 본인이 왕생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오. 부처님께 구하지 않는 까닭에, 부처님의 영접 인도를 받을 수 없는 것이오.

화엄경에는 가령 중생의 악업이 실체와 형상이 있다면, 시방 허공계도 이를 다 수용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말씀이 있소. 또 옛 고승 대덕은 “(중생의 임종 갈림길이) 마치 사람이 빚을 졌을 때, 힘이 센 (채권) 자가 먼저 끌어가 버리듯이, 마음의 실마리가 수없이 갈라져서, 가장 무거운 쪽으로 쏠려 떨어진다.”고 말씀하셨소.

지금 선과 악이 모두 함께 나타나는데, 믿음과 발원이 없기 때문에, 악업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가게 되오. 자기 힘에만 의지하면, 악업이 터럭 끝만큼만 남아 있어도 생사고해를 벗어날 수 없음을 분명히 알아야 하오. 하물며 악업이 많은 자야 말할 게 있겠소?

또 믿음과 발원이 없이 염불하여 일심불란(一心不亂)에 이르는 사람은, 끝없이 수많은 가운데 더러 한둘쯤 왕생할 수 있다오. 혹시라도 이러한 경우를 모범으로 본받아, 천하의 후세 일체 중생이 정토에 왕생하지 못하도록, 착한 뿌리를 송두리째 끊어버리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되오. 왜냐하면 자기의 힘에만 의지해, 업장이 다하고 감정이 텅 빈 일념(一念)의 경지에 들어 무생법인을 증득할 수 있는 자는, 온 세상을 통틀어 한둘이나 있을까 말까 하기 때문이오.

가령 사람들이 각자 이런 방법에 따라 수행하여, 믿음과 발원을 옆으로 제쳐두고 따르지 않는다면, 무수한 중생이 영원히 고통바다 속에서 벗어날 기약없이 윤회할 것이오. 이 모두가 그런 한 마디 말이 잘못 인도한 결과인데도, 그 말을 한 사람은 오히려 득의양양하여 몹시 고상한 척 자만에 차 있을 것이오. 자기 말이 부처님 지혜의 명맥[佛慧命]을 끊고, 중생을 그르치는 미치광이 독설이 되는 줄은 모르고 말이오. 어찌 슬프지 않겠소?

세간에서 선업(善業)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는, 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오. 믿음과 발원을 원만히 갖추고 극락에 왕생하는 정업(淨業)에 대비하면, 그 선업도 결국 악업이 될 뿐이오. 정토 법문은 별도로 특별한 안목으로 보아야 하며, 통상의 교법이나 의리와 나란히 견주어서는 안 되오. 만약 여래께서 이 법문을 여시지 않았다면, 말세 중생 가운데 생사를 해탈하는 자는 찾아볼 수도 없을 것이오.

그러므로 임종에 반드시 서방극락에 왕생하겠다는 결연한 마음을, 평소 굳게 지녀야 하오. 또 보통 평범한 사람의 몸은 내세에 다시 받고 싶지 않다는 따위의 발원을 하지 마시오. 설령 인간이나 천상의 왕, 또는 스님도 원하지 마시오. 출가해서 하나를 들으면 천 개를 깨닫고, 대총지(大總持)를 얻어 불법 교화를 널리 펼치고 중생을 두루 이롭게 하는 고승 대덕의 몸이라도, 내세에 받을 염두일랑 손톱만치도 해서는 안 되오. 이러한 과보도 마치 독풀이나 죄의 숲처럼 보고, 혹시라도 받고 싶다는 마음을 한 순간도 결코 내지 않아야 하오.

이와 같이 확고부동하게 결정해야만, 자기의 믿음과 발원과 수행(염불)이 비로소 부처님의 서원에 감응을 얻고, 부처님께 거두어질 수 있다오. 감응의 길이 서로 트이고 부처님의 영접 인도를 받으면, 곧장 구품연화(九品蓮華)에 올라 윤회 고해를 영원히 벗어나게 되오.

서방 극락세계는 보통 범부 중생이 갈 수 없는 곳이라고 말하지 마시오. 설사 소승 성인(성문·벽지불)이라도 갈 수 없다오. 그 곳은 대승의 불가사의한 경지이기 때문이오. 소승 성인도 마음을 돌이켜 대승으로 향하면 갈 수 있소. 범부 중생은 믿음과 발원으로 부처님을 감동시키지 않는 한, 설령 그밖에 모든 뛰어난 수행을 닦으면서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는 염불 수행까지 병행하더라도, 극락에 왕생할 수 없다오. 그래서 염불 법문에서는 믿음과 발원과 수행(염불)의 세 가지 법이 가장 요긴한 종지(宗旨)라오. 세 법이 솥발[鼎足]처럼 원만히 갖추어지면, 틀림없이 왕생하게 되오. 만약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이 없으면, 설령 진실한 수행(염불)이 있을지라도, 왕생할 수 없는 것이오. 하물며 유유자적하니 한가하게 입으로 염불 시늉이나 하는 사람이 왕생하겠소?

믿음과 발원과 수행의 세 가지는, 정토십요(淨土十要)에서 모두 자세히 설하고 있소. 그 가운데 제 1요인 아미타경요해(阿彌陀經要解)에 특히 가장 정밀하고 상세히 해설하고 있으니, 참고하기 바라오.

서방정토에 왕생하고 싶으면, 가장 먼저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을 반드시 갖추어야 하오. 만약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이 없으면, 설령 염불 수행을 할지라도, 부처님과 감응이 서로 통할 수 없소. 그래서 단지 인간과 천상의 복록만 얻고, 미래에 생사를 해탈할 수 있는 원인 종자만 심는 데 그치오. 정말 믿음과 발원만 함께 갖추면, 만 사람 가운데 하나도 빠뜨림 없이 모두 왕생하게 되오. 영명(永明) 선사가 사료간(四料簡)에서 만 사람이 닦으면 만 사람이 모두 간다.”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믿음과 발원을 함께 갖춘 수행을 가리키는 것이오.

무릇 불보살님께 예배(禮拜)하거나 대승경전을 독송하거나, 또는 세간의 사람들에게 유익한 일을 하는 일체의 선행 공덕은, 모두 서방 왕생에 회향 기도하여야 하오. 단지 염불 공덕만 서방 왕생에 회향하고, 그 밖의 선행 공덕은 따로 세간의 복록을 받으려고 회향해서는 결코 안 되오. 그렇게 되면 마음이 일념(一念)으로 오롯이 집중하지 못하여, 왕생하기 어렵기 때문이오. 진짜로 염불할 줄 아는 사람은, 무병장수나 집안 화목, 자손 영달, 만사 소원성취와 같은 세간의 복록을 바라지 않아도, 저절로 세간의 복록을 받게 된다오. 만약 세간의 복록을 받으려고만 생각하여 극락왕생에 회향하지 않는다면, 그로부터 얻는 세간의 복록은 오히려 형편없이 낮은 것에 지나지 않고, 마음이 일념으로 오롯이 집중하지 않기 때문에 왕생도 확정하기 어렵다오.

염불하는 사람이 단지 진실하고 간절히 염불하기만 하면, 저절로 부처님의 자비 가피력을 입어, 총칼이나 전쟁·홍수·화재 등의 온갖 재난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오. 숙세의 업장이 너무 무거워 지옥의 과보를 받아야 할 운명인 경우에는, 현생에 가벼운 벌로 과보가 바뀌어, 더러 이러한 재앙을 당할 수도 있소. 그러나 평소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만 갖추고 있으면, 금생에 틀림없이 부처님의 영접 인도를 받을 것이오. 또 살아생전에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증득하면 이미 성인의 경지에 들어가므로, 자기 몸조차 그림자와 같아져, 총칼이나 홍수·화재 같은 것이 모두 전혀 장애가 되지 못하오. 설령 재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고통이 전혀 없게 되오. 망망대해 같은 이 세상에, 이런 사람이 지금까지 몇이나 있었겠소?

사바 고해를 벗어나기는 마치 죄수가 감옥을 벗어나기 바라는 것처럼 간절히 원하고, 극락에 왕생하기는 곤궁에 빠진 아들이 고향의 부모에게 되돌아가기를 생각하는 듯이 절실히 원해야 하오. 정토에 왕생하기 이전에는, 설령 인간이나 천상의 왕위(王位)를 준다고 할지라도, 이를 타락의 씨앗이나 뿌리는 인연으로 여겨, 눈꼽만큼도 바라거나 좋아하는 생각을 품지 않아야 하오. 또 여자의 몸을 버리고 남자로 태어나, 순진한 어린애 때 출가하여 하나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닫고, 대총지(大總持)를 얻어 중생을 널리 제도하는 것조차도, 구불구불 돌아가는 수행길로 여기고, 한 생각도 바라거나 구하는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하오.

오직 임종 때 부처님의 영접 인도를 받아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만 바라야 하오. 일단 정토에 왕생하기만 하면, 생사를 해탈하게 되오. , 범부를 초월하고 성인의 대열에 끼어, 불퇴전의 지위에 머물면서 무생법인을 증득하게 되오. 그때 인간과 천상의 왕 따위나, 스님이 되어 정토 법문을 모르고 다른 법문으로 오랜 겁토록 힘들게 수행하면서, 해탈할 길조차 없는 이들을 되돌아본다면, 과연 어떠하겠소? 마치 반딧불이 빛나는 태양 아래서 날고, 개미가 태산 기슭을 기어가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오. 그 비통함과 애도의 마음을 어찌 다 이길 수 있겠소?

그러므로 정토 법문을 수행하는 사람은, 결단코 인간과 천상의 복록이나, 내생에 출가하여 스님이 되겠다는 과보 따위를 바라서는 안 되오. 만약 터럭 끝만큼이라도 내생을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 이는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이 아니오. 따라서 아미타불의 서원과 거리가 생기게 되고, 감응의 길이 트이지 않아 부처님의 영접을 받을 수가 없소.

이처럼 불가사의하게 수승(殊勝)하고 미묘한 수행으로, 결국 인간과 천상의 번뇌 많은 복록 인연이나 짓는단 말이오? 그 복록을 누릴 때 반드시 악업을 짓게 되고, 일단 악업을 지으면 죄악의 과보를 피할 수 없는데도 말이오? 마치 제호(: 우유에서 뽑아낸 최고의 맛과 영양, 품질을 갖춘 식품) 가운데 독을 넣으면, 사람을 살해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요. 마음을 잘 쓰지 않는 자의 허물은, 이처럼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소. 그러니 이러한 염두일랑 철저하게 싹둑 잘라 버려야 하오. 그래야 정토 법문 수행의 온전한 이익을 온 몸으로 고스란히 받아 쓸 수 있소.

인간의 수명이 설령 백년이라고 해도, 눈 깜박할 사이에 금방 지나가 버리오. 그러니 아직 숨결이 붙어 있을 때, 벗어날 길을 한시 바삐 찾아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임종에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을 것이오.

경전에 이런 말씀이 자주 나오는 게 기억나오.

 

사람 몸 얻기 어렵고 人身難得

문화의 중심 국가에 태어나기 어려우며 中國難生

부처님의 법 만나기 어렵고 佛法難遇

그 법에 믿음 내기 더욱 어렵다. 信心難生

 

우리는 다행히 이 네 가지를 모두 갖추었으니, 더욱이 항상 노력해야 하오. 마치 마니(摩尼: 여의주)를 얻기 위해 보물산에 오르는 것과 같소. 진실로 범부의 처지에서 미혹과 업장을 끊지 않으면, 생사를 벗어날 수 없고, 타락을 면하기 어렵소. 그래서 여래께서 중생에게,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을 내어 부처님 명호를 염송함으로써, 정토에 왕생하길 바라라고 지극히 권장하셨다오.

마땅히 삼보를 공양하고 한평생 계율을 지키며 선행을 실천하는 일체의 공덕을 가지고, 오직 임종에 정토에 왕생하기만 바라야 하오. 행여라도 금생의 건강 장수나 내생의 인간과 천상 복록을 구하는 마음은, 조금도 품어서는 안 되오. 그러면 아미타불의 서원과 서로 딱 들어맞아, 감응의 길이 열리고 틀림없이 소원을 이루리다.

비유컨대, 사람이 바닷물에 빠졌는데 배가 와서 구해 주려고 할 때, 만약 물에 빠진 사람이 배에 올라타기만 하면, 건너편 뭍까지 오를 수 있소. 인간과 천상의 복록을 바라고 왕생을 구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물속에 빠져 배에 올라타려고 하지 않는 자와 같아서, 익사(윤회)를 피하기 어렵소.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에게, 평범을 벗어나 성인의 경지에 들어가라고 가르치고 이끄시는데, 우리는 도리어 번뇌 많은 사바세계의 복록이나 얻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이오. 그 복록이 한번 끝나면 삼악도에 영원히 떨어질 것이 뻔한데도 말이오. 마치 여의주로 새총을 쏘아 참새나 잡으려는 어리석음과 같소. 얻는 것은 적고 잃는 것은 많을 테니, 어찌 안타깝지 않으리오? 마땅히 경각심을 드높여 자세히 살펴야 하겠소.

만약 금생에 몸소 진실한 이익을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정토 법문에 의지하여야 하오. 믿음과 발원으로 염불하여 서방 정토에 왕생하길 바라면, 확실히 생사를 해탈할 수 있기 때문이오. 만약 염불 법문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불교의 진짜 전수[眞傳]를 얻지 못한 자가 생사를 벗어날 수 없음은 말할 것도 없고, 설사 진짜 전수를 얻은 자라 할지라도 생사를 벗어날 수 없다오.

왜냐하면 진짜 전수를 얻어 확철대오할지라도, 그것이 진실한 증득은 아니기 때문이오. 증득까지 이르면 생사를 벗어날 수 있지만, 확철대오만으로는 생사를 벗어날 수 없소. 다른 법문을 수행하는 경우에는, 모두 미혹을 끊고 진리의 몸을 증득해야만, 비로소 생사를 벗어날 수 있소. 그러나 정토 법문만큼은, 단지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만 갖추고, 아미타불 명호를 염송하면 가능하오. 게다가 어떠한 죄악도 짓지 않고 뭇 선행을 받들어 행하면, 기본 수행[正行]과 보조 수행[助行]이 합쳐져서 극락왕생이 확정될 뿐만 아니라, 그 품위(品位) 또한 매우 높고 훌륭하게 결정된다오.

또한 단지 정신이 순수하고 마음이 독실한 사람만 왕생이 확정되는 것이 아니오. 오역 십악과 같은 중죄인의 부류도, 임종에 진실한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크게 내어, 깊이 참회하고 뜻과 마음을 다해 염불하면, 몇 마디 염불 소리만으로도 임종과 함께 틀림없이 왕생할 수 있다오. 부처님의 자비는 광대무변하여, 오로지 중생의 제도만 일삼기 때문이오. 한 순간 염두만 부처님의 광명으로 돌이키면 곧바로 그 가피력을 받게 되니, 이것이 곧 부처님의 자비력에 의지해 업장을 짊어진 채 왕생한다는 것이오.

말세의 중생이 정토에 의지하지 않고 다른 법문을 닦는다면, 단지 인간과 천상의 복록만 과보로 얻고, 미래에 생사 해탈할 수 있는 인연 종자를 심는 데에 그친다오. 미혹을 끊을 힘이 없기 때문에, 생사의 뿌리가 여전히 남아 있는데, 어찌 생사(윤회)의 새싹이 다시 돋아나지 않겠소?

염불 법문의 중점은, 바로 믿음과 발원에 있소. 믿음과 발원이 진실하고 간절하면, 비록 마음속이 완전히 청정해지지 못하더라도,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오. 왜냐하면, 뜻과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염불하면, 아미타불을 감동시켜 곧바로 호응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오.

마치 강과 바다의 물에 움직이는 모습(물결)이 완전히 없을 수는 없지만, 단지 거센 바람과 큰 파도만 일지 않는다면, 하늘 위의 밝은 달이 뚜렷이 제 모습을 수면 위에 드러낼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오. 염불로 부처님과 감응의 길이 열리는 것은, 마치 어머니와 자식이 서로 그리워하고 생각하는 것과 같소. 오로지 자기 힘만 믿고 부처님의 자비력에 의지하지 않는 자들은, 대부분 이러한 염불의 이치를 모르기 때문이오.

보통의 교법을 배우고 닦는 관점에서는, 일반 범부 중생이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게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오. 그러나 믿음과 발원으로 염불하여 정토에 왕생하려는 특별 법문에서는, 금생에 곧장 모두 생사를 끝마칠 수 있소. 정말로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만 갖춘다면, 만 명 가운데 한 사람도 결코 누락하는 일이 없다오.

말세의 중생에게는 오직 이 법문만이 믿고 의지할 만하오. 불법의 시운(時運)이 말기에 가까울수록, 이 법문이 더욱더 중생의 근기와 시절 인연에 부합하오. 그때문에 선지식들이 더욱더 간절하게 이 법문을 제창하고 권장하는 것이오. 그 결과, 진실한 수행으로 마침내 극락에 왕생하는 영험 증거는 수시로 나타나고 있소.

정토 법문은 믿음과 발원과 염불 수행[信願行]의 세 가지를 으뜸 요건으로 삼소. 믿음과 발원이 있으면, 염불 수행의 기간이나 깊이 정도에 관계없이, 모두 왕생할 수 있소. 하지만 믿음과 발원이 없으면, 수행이 설사 주체[]와 객체[] 둘을 모두 잊고, 육근(六根)과 육진(六塵)을 모두 벗어나는 경지에 이를지라도, 왕생하기 어렵다오.

정말로 주체와 객체 둘을 모두 잊고, 육근과 육진을 모두 훌훌 벗어나 진실한 이치를 몸소 증득한다면, 자력으로도 생사를 해탈할 수 있음은 거론할 필요도 없소. 그렇지만 만약 수행 공부가, 단지 그러한 이치를 본(깨달은) 정도이고, 아직 진실로 증득하지 못했다면, 믿음과 발원이 없이 극락왕생하기는 역시 어렵다오.

선가에서 말하는 정토(법문)는 여전히 선종에 속하는 것으로, 가장 중요한 믿음과 발원을 빼버리고 말한다오. 정말 선가의 정토에 의지해서 수행한다면, 더러 크게 깨달을 수는 있을 것이오. 그러나 미혹과 업장을 끊지 않고서 생사를 해탈하려는 것은, 꿈조차 꾸어 볼 수 없는 일이오.

범부 중생의 신분으로 극락왕생할 수 있는 것은, 믿음과 발원으로 아미타불을 감동시키기 때문이오. 그래서 부처님의 자비력에 의지하여, 업장을 짊어진 채 왕생하는 것이오. 그런데 지금 믿음과 발원은 내지 않으면서, 게다가 부처와 정토까지 하나하나 자기 마음[自心]으로 돌리고 있으니, 어떻게 부처님을 감동시킬 수 있겠소? 감응의 길이 트여 서로 부합하지 않으면, 중생은 그냥 중생이고, 부처는 홀로 부처로 남게 되오.

가로로 특출한 법을 세로용으로 사용한다면, 거기서 얻을 이익은 아주 적고 받을 손해는 무척 클 것이 분명하오. 이러한 이치를 잘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되오. 거기서 얻을 이익이란, 선가에서 말하는 대로, 더러 크게 깨달을 수도 있다는 것이오. 반면 그로부터 받을 손해란, 믿음과 발원을 빼버려, 부처님의 자비력에 의지할 길이 없어진다는 점이오.

그래서 나는 진짜 정토 법문을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선가의 깨달음 법어가 쓸모조차 없다.”고 줄곧 말해 왔소. 법문의 기본 취지가 서로 판연히 다르기 때문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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