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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 끊고 믿음 내세

인광대사가언록. 극락왕생은 믿음과 발원지닌 염불로

by 明鏡止水 淵靜老人 2023. 1. 2.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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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의심 끊고 믿음 내세

 

정토 법문에 믿음이 얻어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소? 만약 자기의 지혜로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게 있다면, 마땅히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의 성실한 말씀을 우러러 믿고, 한 생각이라도 의심을 가져서는 결코 안 될 것이오. 의심하면 부처님과 서로 등지게 되어, 임종 때 서로 감응이 통하기 어려울 게 확실하기 때문이오.

옛 사람들이 정토 법문은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그 궁극의 실체를 아시고, 등지 보살(登地菩薩)조차 조금도 제대로 알 수 없다.”고 말씀하셨소. 대저 등지 보살조차 제대로 알 수 없는 정토 법문을, 하물며 우리 같은 범부 중생이 어떻게 제멋대로 추측하고 비웃을 수 있겠소?

 

[등지(登地) 보살: 1() 아승기겁의 수행을 거친 후, 비로소 십지(十地)에 오른 보살. 십지 중 초지(初地) 1()의 번뇌를 끊고 1분의 깨달음을 얻어 기뻐하는 환희지(歡喜地)인데, 마지막 제 십지에 이를 때까지 2() 아승기겁의 수행이 필요하다. 보통 법신 보살 또는 법신 대사(法身大士)라고 부르기도 한다.]

 

정말 생사를 벗어나려는 마음이 간절하고, 정토에 대한 믿음이 철저하여, 한 순간도 의혹의 마음이 일지 않아야 하오. 그렇다면 비록 사바 고해를 벗어나지 못한다 할지라도, 사바 고해에 오래 머물 길손은 더 이상 아니라오. 또 설령 바로 극락왕생하지는 못할지라도, 머지않아 극락에 초대 받을 귀빈이 될 것이오. 어진 이를 보면 자기도 그와 같이 되길 생각하고[見賢思齊], 인에 부닥쳐서는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않아야[當仁不讓於師] 마땅하거늘, 어찌하여 구태의연한 세간의 선입견에 매달려, 자칫 한번 잘못으로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단 말이오? 혈기와 성품을 지닌 사나이라면, 살아생전에 걸어 다니는 시체나 고깃덩어리 노릇하다가, 죽은 뒤에는 초목과 함께 썩어 문드러지고 마는 꼴이, 결코 되고 싶지는 않을 것이오. 정말 심사숙고하고, 힘써 노력하길 바라오.

다른 법문들의 경우, 작은 법[小法]은 큰 근기의 사람이 닦을 필요가 없고, 큰 법[大法]은 작은 근기의 중생이 닦을 수 없는 게 보통이오. 오직 이 정토 법문 하나만큼은, 상중하 세 근기의 중생을 모두 거두어 들여, 그 혜택이 골고루 미친다오. 위로는 관음·대세지·문수·보현보살들도 이 밖으로 벗어날 수 없으며, 아래로는 오역(五逆)과 십악(十惡) 죄인 같은 아비지옥의 종자들도 그 가운데 참여할 수 있소. 가령 여래께서 이 법문을 열어 놓지 않았다면, 말세의 중생은 금생에 생사윤회를 해탈하려는 소원을 이룰 가망이 전혀 없을 것이오.

그런데 이 법문은 이처럼 크고 넓으면서도, 그 수행 방법 또한 지극히 간단하고 쉽다오. 이러한 까닭에 예로부터 정토에 착한 뿌리[善根]를 깊이 심어온 인연 있는 사람이 아니면, 의심 없이 확실히 믿기가 정말 어렵다오. 단지 우리 범부들만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성문과 벽지불의 이승(二乘) 성현들도 의심하는 분이 많다오. 또 이승의 성현들만 못 믿는 것이 아니라, 권위(權位) 보살조차 더러 의심하는 경우도 있다오. 오직 대승의 심위(深位) 보살들만 비로소 철저하게 이해하고, 의심 없이 확실하게 믿는다오.

 

[심위(深位) 보살: 십지(十地)의 초지(初地) 이상을 심위(深位)라고 부르고, 그 이하(이전)를 권위(權位) 보살로 구분한다. 따라서 심위 보살은 등지(登地) 보살과 상통하는 명칭인 셈이다.]

 

따라서 이 정토 법문에 대해 깊은 신심을 낼 수만 있다면, 비록 아주 평범한 중생이라도, 그 종자와 성품은 이미 성문·벽지불의 이승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 되오. 비유하자면, 황태자는 땅바닥에 넘어지더라도, 뭇 고관대작의 신하들을 여전히 압도할 만큼 존귀한 것과 같겠소. 비록 그 재능과 복덕이 아직 무르익지는 못했지만, 황제의 위력에 의지하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가 나타나는 거라오.

정토 법문을 수행하는 사람은 바로 이와 같소. 믿음과 발원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염송하는 수행은, 범부의 마음을 가지고 부처님의 깨달음 바다[佛覺海]에 뛰어드는 것이오. 그래서 부처님의 지혜에 은밀히 통하고, 미묘한 도에 그윽이 합치할 수 있소.

정토 수행법을 설하려고 하면, 다른 모든 법문은 자기 힘으로만 생사를 해탈하기 때문에 매우 어렵고, 정토 법문은 부처님의 힘에 의지해 왕생하기 때문에 아주 쉽다는, 본질상의 차이점을 반드시 설명해 주어야 하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법을 의심하거나, 아니면 자신을 의심하게 되오. 터럭 끝만큼이라도 의심을 품으면, 그로 인한 장애가 워낙 커서, 수행할 수도 없음은 물론이오. 또 설사 수행하더라도, 궁극에 실질상의 이익을 전혀 얻을 수 없게 되오. 그래서 염불 수행에 깊숙이 들어가 절정에 이르기를 바란다면, ‘믿음이라는 첫째 요건을 긴급히 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오.

정토 법문은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께서 세우시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중생을 귀의하도록 지도하셨소. 또 마명(馬鳴) 보살과 용수(龍樹) 보살이 크게 떨치고, 광려(匡廬천태(天台청량(淸凉영명(永明연지(蓮池우익(蕅益) 등의 대사들이 힘써 수행하고 전파하셨소. 이는 지혜로운 성현이나 어리석은 범부 할 것 없이, 모든 중생에게 두루 권장하기 위함이오. 그래서 이들 보살과 대사들이 천 수백 년 전부터, 일찍이 우리를 위해서 대장경의 교법을 두루 연구하신 다음, 특별히 이 정토 법문을 뽑아내신 것이오.

미혹과 업장을 끊지 못함에도 부처의 후보 자리에 함께 참여할 수 있고, 금생 한 번의 수행으로 사바 울타리를 틀림없이 벗어날 수 있소. 정말 단박에 이루면서도 지극히 원만하고, 지극히 간단하며 쉬운 길이오. 선종·교종·율종을 두루 하나로 포괄하면서 그들을 훨씬 초월하고, 얕으면서 깊고, 권의(權宜) 방편이면서 실상(實相) 자체라오. 이렇듯 아주 특수한 천연(天然)의 미묘법문이기 때문에, 정토 법문을 전하신 것이오.

우리들이 이러한 부처님과 조사들을 우러러 믿고[信仰] 옛 고승 대덕을 스승으로 삼는 것이, 어찌 지금 세상에 조금 깨쳤다는 선지식들을 가까이 하는 것보다 못하겠소? 화엄경은 삼장(三藏)의 임금 격인데, 맨 마지막 한 편은 십대원왕(十大願王)을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으로 끝나오. 화장해회(華藏海會)의 대중들이 모두 법신을 증득하신 분들인데도, 한결같이 서방 정토에 왕생하여 부처의 과위를 원만히 성취하길 바라지 않소? 그런데 우리가 도대체 어떤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라고, 감히 그 분들을 우러러 따르지 않는단 말이오? 그대의 미친 마음을 놓아버리고, 이 정토의 길을 힘써 닦아 가길 바라오. 그 공덕과 이익은 스스로 느끼고 깨닫게 되리라. 어찌 꼭 세상의 모든 지식을 두루 참방한 다음에야, 비로소 정법과 대도를 알려고 한단 말이오?

정말 엄격히 진실하게 논한다면, 대승 법문은 법마다 모두 원만하고 미묘하오. 다만 근기가 뛰어나거나 보잘 것 없고, 시절 인연이 무르익거나 덜된 차이가 있소. 그래서 그 이익을 얻기가 쉬운 것과 어려운 것이 있게 되오.

선도(善導) 화상은 아미타불의 화신이오. 그가 정토 법문을 전념으로 닦으라고 가르치신 것은, 수행인들이 마음과 뜻이 확고부동하지 못하여, 다른 법문을 전하는 스승들에게 흔들려 휩쓸릴까 염려했기 때문이오.

초과(初果: 수다원이과(二果: 사다함삼과(三果: 아나함사과(四果: 아라한)의 성인이나,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십지(十地등각(等覺)의 보살이나, 심지어 시방 세계의 모든 부처님께서 차례대로, 허공이 다하도록 법계에 두루 몸을 나토어 광명을 떨치시며, 아주 훌륭하고 미묘한 법문을 설하여 정토 수행을 놓아버리라고 권하시더라도, 이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셨소. 맨 처음에 오직 정토 법문만 전념으로 수행하려 발원했으므로, 그 소원을 감히 어길 수 없었던 것이오.

선도 화상은, 후세 사람들이 이 산을 보면 이 산이 높은 것 같다가, 저 산을 보면 저 산이 더 높은 것같이 여겨(‘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우리 속담과 같은 뜻), 도대체 줏대 없이 흔들릴 줄 일찌감치 알아차렸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남겼다오. 수행인들이 여기 저기 다른 법문을 기웃거리고 돌아다니면서, 아까운 세월만 헛되이 보낼까 염려하셨소. 그런 요행심을 철저히 죽여 없애 주기 위함이었소.

그런데 선도 화상을 스승으로 삼은 사람도 그 말씀을 따르지 않을 줄 누가 알았겠소? 그러니 그 가르침에 따른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구료. 그리하여 이치에도 가장 부합하고 근기에도 딱 들어맞는 최상의 법문을, 눈앞에 보고도 그냥 지나치기 일쑤요. 결국 참선도 없고 정토도 없는 아득한 업식(業識)으로, 의지할 근본 바탕도 없이 윤회 고해를 헤매고 있으니, 이 어찌 숙세의 악업 때문이 아니겠소? 정말 슬프기 짝이 없소.

정토 법문을 수행하는 사람은, 결코 의심하지 않는 이치를 지녀야 하오. 하필 다른 사람들의 효험을 물어보려고 한단 말이오? 설령 온 세상 사람들이 죄다 효험이 없다고 증언하여도, 한 생각의 의심이라도 내어서는 안 되오.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의 성실한 말씀이 믿고 의지할 만하기 때문이오. 만약 다른 사람의 효험을 묻는다면, 이는 부처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지극하지 못한 때문이오. 엿보고 기웃거리는 요행심으로는, 어떤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소. 영웅과 대장부라면, 결코 부처님 말씀을 내버리며 사람들 말을 믿고 따르지는 않을 것이오. 자기 마음 한 가운데에 주인이 없이, 오로지 사람들의 말을 효험 삼아 앞 깊을 나아가는 스승으로 삼는다면, 어찌 슬프지 않겠소?

중생의 습관 기질은 각자 편협한 데가 있기 마련이오. 어리석은 자는 용렬(庸劣)함에 치우치고, 지혜로운 이는 고상(高尙)함에 치우치오. 만약 어리석은 자가 다른 마음을 섞어 쓰지 아니하고 오로지 정토 수행에만 전념한다면, 금생에 결정코 극락왕생할 것이오. 이것은 (공자가) 이른바 “(그 지혜로움은 남들이 미칠 수 있지만), 그 어리석음은 미칠(따를) 수 없다[其愚不可及也].”는 뜻이라오.

그리고 지혜로운 이가 자기 지혜를 믿고 뽐내는 일 없이, 그래도 부처님 자비 가피력에 의지해 정토에 왕생하는 법문 수행에 종사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정말 대지혜요. 그러나 혹시라도 자기 견해를 믿고 정토를 무시한다면, 미래 겁이 다하도록 육도 윤회 고해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금생에 비웃던 어리석은 범부를 뒤늦게나마 따라가려 해도 결코 안 될 것이오.

법성종(法性宗)이네 법상종(法相宗)이네 선종이네 교종이네 하는 법문 수행에 심오하게 통달한 사람들은, 나도 진실로 경애하고 흠모하오. 그러나 그들을 감히 따라 갈 생각은 없소. 왜냐하면 줄이 짧은 두레박으로는 깊은 샘물을 길어 올릴 수 없고, 작은 보자기로는 큰 물건을 쌀 수 없기 때문이오.

물론 모든 사람이 죄다, 내가 하는 대로 본받아 따라오라는 말은 아니오. 그러나 나와 같이 비천하고 열등한 사람이, 깊이 통달한 대가의 행위를 배워, 곧장 자기 마음을 미묘하게 깨닫고 가르침의 바다를 이리저리 뒤적이고 싶지는 않소. 만약 그렇게 한다면, 내 생각에는 아마도 통달한 대가는 되지 못하고, 도리어 그저 진실한 염불로 극락왕생하는 어리석은 범부나 아낙들의 동정과 연민이나 받지 않을까 두렵소. 이 어찌 이른바 잔재주 부리다가 크게 볼품 없어지고, 허공을 뛰어 오르다가 깊은 연못에 추락하는 꼴이 아니겠소? 요컨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자신의 근기를 스스로 살펴 헤아리자는 것이오.

사람이 세상살이[處世] 해 나감에는, 모름지기 하나하나 자신의 본분에 합당하게 처신해야 하며, 분에 넘치는 허튼 생각이나 계획은 함부로 내서는 안 되오. (공자가) 이른바 군자는 자기 지위(신분)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생각한다[君子思不出其位].”는 말이오.  군자는 평소 자기 지위에 맞춰 행동한다[君子素其位而行].”는 말도 있지 않소?

보통 사람들은 설사 정토 법문에 대한 신심을 강하게 낸다 할지라도, 여전히 고상한 것을 좋아하고 특별한 것에 힘쓰려는 염두는 놓아버리지 못하오. 더구나 평범한 지아비나 아낙들처럼 어리숙하기는 몹시 싫어하오. 그러나 생사윤회를 끝마치는 일은, 평범하고 어리숙한 지아비나 아낙들이 훨씬 쉽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하오. 그들은 마음에 다른 생각이 없어 전념할 수 있기 때문이오.

만약 선종과 교법에 통달한 사람이 온 몸을 놓아버리고, 평범한 지아비나 아낙들처럼 어리숙한 염불 공부에 전념할 수 있다면, 역시 아주 쉽게 되오. 그렇지 못하다면, 선종과 교법에 통달한 고상한 사람이, 도리어 업장을 짊어진 채 극락왕생하는 평범한 아낙들만 못하게 되오. 정토 법문은 극락왕생이 주요 핵심이오. 인연에 따라 자기 분수껏 힘닿는 대로 그 뜻을 오롯이 일념에 집중시킨다면, 부처님이 사람을 속이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오. 그렇지 않고 특별히 높이 올라가려다가 도리어 추락하고 말면, 이는 스스로 잘못 망친 것이므로, 결코 부처님께 허물을 탓할 수는 없소.

나대산(羅臺山)이 극락왕생하지 못하고 복락을 누리는 곳으로 떨어지고 만 것은, 문자(文字)의 기질과 업습이 너무 무겁기 때문이오. 문자의 업습이 너무 무거우면, 비록 염불한다고 말할지라도, 실제로는 문자 속의 공부에 맴돌 뿐이오. 염불 공부는 단지 문 앞 체면만 겨우 지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오. 이는 나대산 한 사람뿐만 아니라, 문인(文人)들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일반 병폐라오. 세간의 지혜와 변론·총명을, 부처님께서 팔난(八難) 가운데 하나로 손꼽으신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오.

 

[팔난(八難): 부처님을 뵙거나 불법을 듣기 어려운 여덟 장애로, 팔무가(八無暇)라고도 한다. 지옥·아귀·축생의 삼악도와 4. 북울단월(北鬱單越: 사바세계 4천하 중 가장 좋고 편하고 뛰어난 곳), 5. 장수천(長壽天), 6. 봉사·귀머거리·벙어리, 7. 세간의 지혜와 변론·총명, 8. 부처님께서 태어나기 전과 열반한 뒤를 가리킴.]

 

정토 법문에 믿음을 아예 내지 못하거나, 믿음을 내더라도 진실하고 간절하지 못한 것은, 업장이 너무도 깊고 두텁기 때문이오. 이런 사람은 생사고해를 해탈하고 성현의 경지에 들어갈 자격이 없어서, 영원토록 이 사바세계에서 벗어날 기약 없이, 늘 육도 윤회를 반복할 수밖에 없소. 설령 인간이나 천상에 생겨나더라도, 그 시간은 마치 나그네가 여관에 잠시 묵는 것처럼 아주 짧다오. 그러다가 한번 삼악도에 떨어지면, 그 기간은 마치 고향 집에 안주하는 것처럼 몹시 길게 지속하오. 이런 사실까지 생각이 미칠 때면, 매양 마음이 섬뜩 놀라고 머리카락이 쭈뼛이 서는 듯하오. 그러기에 쓴 입맛을 아끼지 않고, 듣기 싫어할 이야기를 같은 수행인들에게 간절히 알려 주는 거라오.

보통 사람들의 불교에 대한 온갖 시비 논쟁을 가만히 살펴 보면, 한마디로 범부중생의 지식 견해로 부처님의 지혜를 추측하는 망상일 따름이라고 하겠소.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안으로는 몸과 마음에서부터, 밖으로는 사물 경계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왜 그러한지 이유를 알 수 있겠소? 경험 지식이 쌓이면서부터 앞 사람들이 행하는 바를 보고, 자기 또한 따라 행하여 몸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가며, 몸과 마음이 편안하게 즐거움을 누리는 것 아니겠소? 그렇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유자재로이 활동하면서 그 이익을 받아 쓰는 것일 게요. 그런데 여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부처가 부처인 까닭과 정토가 존재하고 설해지는 이유조차 알지 못하면서도, 부처님과 조사들의 성실한 말씀을 믿으려고도 하지 않는구료.

예컨대, 우리가 하루 종일 밥 먹어 굶주림을 채우고 옷 입어 추위를 막는 일상생활의 근본 이유[所以然]를 알겠소? 모르겠소? 만약 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거들랑, 아는 자가 과연 누구인지 정확히 끄집어 말해 보시오. 딱히 이렇다고 말할 수 없으면서도, 여전히 앞 사람들이 해온 대로 옷 입고 밥 먹는 것 아니오? 그런데 왜 생사해탈을 인도하는 최고 제일의 미묘 법문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이유를 먼저 안 다음에 믿음을 내겠다고 고집부리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간절하고 성실한 말씀만 듣고는 결코 믿음을 가질 수 없단 말이오?

또 사람들이 병에 걸려 약을 먹어야 하는 경우, 먼저 스스로 본초강목이나 진맥비결 같은 의약 서적을 두루 뒤적여, 약의 성질과 병의 원인을 직접 확인한 다음에, 비로소 처방전을 쓰고 약을 지어 먹겠소? 아니면 곧장 훌륭한 의사를 초청하여 맥을 짚게 하고, 그가 내린 처방에 따라 지어 주는 약을 달여 먹겠소? 만약 곧장 의사 처방대로 약을 먹는다면, 질병 치료와 (생사 해탈을 위한) 불교 수행이 서로 어긋나게 될 것이오.

설령 자신이 본초강목이나 진맥비결 같은 의약 서적을 두루 펼쳐 보고, 약의 성질과 병의 원인을 알아낸다고 할지라도, 이 또한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려는 수행과는 서로 다르게 되오. 왜냐하면 본초강목이나 진맥비결 같은 의약 서적 자체도, 앞사람들이 경험 지식을 쌓아 편찬한 말씀이므로, 우리들이 직접 보고 겪은 내용이 아니거늘, 어떻게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단 말이오? 만약 본초강목이나 진맥비결 같은 의약 서적을 믿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부처님과 조사나 선지식들의 말씀은 어찌하여 모두 믿지 못하고, 반드시 몸소 보고 확인한 다음에 믿겠다고 우긴단 말이오?

만약 이러한 지식 견해대로 엄격히 진실을 따지자면, 마땅히 어떤 약이 어떤 경락(經絡)을 통하여 어떤 질병을 치유하는지를 먼저 보고 확인한 다음에, 비로소 처방을 내리고 약을 복용하여야 할 것이오. 그리고 본초강목이나 진맥비결 같은 의약 서적에 적힌 내용대로 처방을 내려 약을 복용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오. 왜냐하면 자신이 몸소 보고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오. 지금 사람들은 굶주림을 채우고 추위를 막으며 병을 치료하는 근본 원리를 직접 보지 못하면서도, 누구나 밥 먹고 옷 입으며 약을 복용하고 있소. 그런데 부처가 되고 정토에 왕생하는 근본 원리만큼은, 자신이 몸소 보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설령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성실한 가르침이라도, 죄다 믿지 않으려고 고집불통을 부리고 있으니, 이는 도대체 무슨 까닭이겠소?

이는 다른 게 아니오. 전자는 목숨과 직접 관련하기 때문에, 비록 모르더라도 감히 그대로 따라 행하지 않을 수 없소. 반면, 후자는 생명과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이므로, 스스로 고명(高明)하다고 뻐기면서 반드시 그 법문을 철저히 보고 안 다음에, 비로소 수행하겠다는 차이뿐이오. 예로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수많은 천재와 영웅호걸들이 이러한 지식 견해 때문에, 평생토록 부처님 정법의 실익을 얻지 못한 줄 아시오?

그들이 어리석은 지아비와 아낙이라고 비웃던 사람들도, 처음에는 역시 아무 것도 모른 채, 단지 앞사람들이 하던 대로 따라 염불 수행을 믿고 받아들여 행하다 보니, 점차 부처님의 지혜와 은밀히 통하고 오묘한 도에 부지불식간에 합치하게 되어, 마침내 업장을 짊어진 채 극락왕생하였다오. 그 가운데 더러 미혹과 번뇌를 다 끊고 왕생한 사람은, 모두 부처님의 과위를 곧 증득하게 될 것이오.

반면, 스스로 대단한 인물이라고 뻐기는 자들은, 의심 때문에 비방까지 서슴치 않아 영겁토록 삼악도에 떨어지는 것이오. 그래서 그들이 어리숙하다고 비웃었던 평범한 지아비와 아낙들이 염불 수행으로 극락왕생하여, 도리어 그들을 동정하고 연민하여 구원해 주고 싶어도, 어쩔 수 없는 지경이 된다오. 왜냐하면 전생에 믿지 않고 비방한 죄악의 업장이 그들을 뒤덮고 있기 때문이오. 그런데도 세간의 총명한 재주꾼들은, 마치 막야(莫邪)와 같은 훌륭한 보검(寶劍)을 가지고 진흙 덩어리나 자르는 데 쓰듯, 자신들의 고귀한 지혜를 잘 활용하지 못하는구려. 보검으로 진흙을 잘라 보았자, 진흙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괜히 칼날만 망가질 것이 불 보듯 뻔하니, 어찌 슬프지 않으리오?

부처님 법은 마음의 법으로, 세간의 어떠한 법으로도 비유할 수가 없소. 부득이 비유를 쓰는 것은, 사람들에게 그 의리[: 이치, ]를 알아차리도록 전함이오. 그런데 어떻게 구체적 비유 사실에 집착하여, 틀에 박힌 듯이 추상적인 본체를 논할 수 있단 말이오? 부채를 들어 달을 가리키면 반드시 부채 위의 광명을 쳐다보고, 나뭇가지 흔들림으로 바람을 비유하면 나뭇가지 위의 공기 흐름을 알아차리는 것도, 지혜라고 부를 수 있겠소?

꿈속의 경계[夢境]는 가짜이고 인과(因果)는 진짜인데, 꿈속의 경계로 인과를 비유하여 본체와 서로 부합시키는 것도 상관없소. 왜냐하면 허망한 마음[妄心]이 원인이고, 꿈속의 경계가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이오. 만약 허망한 마음이 없다면, 꿈속의 경계도 결코 없을 것이오. 이는 만고불변의 확실한 이론이오. 선악이나 수행하는 마음 같은 사실은 원인이고, 선악과 수행의 과보를 얻는 것이 결과인 줄을 그대는 믿겠소? 못 믿겠소?

허망한 마음이 꿈의 원인이 되어, 그 결과로 꿈속의 경계를 얻()게 되오. 마찬가지로 염불을 하는 마음이 부처의 원인이 되어, 가까이는 서방극락에 왕생하고, 멀리는 결국 부처의 도를 원만히 성취하는 과보를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과연 그대의 의심을 더욱 키우겠소? 아니면 그대의 믿음을 일으키겠소?

부처가 궁극의 존재인지 여부는 우선 접어두고, 사람들이 반드시 먼저 부처의 존재 여부 자체를 따지려고 하는 점부터 봅시다. 과연 우리들 자신이 궁극에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자문해 봅시다. 만약 없다고 한다면, 바로 그 판단은 과연 누가 말하고 기술하는 것이오? 또 만약 있다고 한다면, 그렇게 말하고 기술하는 자(주체)를 한번 정확히 끄집어 내 보시오. (언어)이란 목구멍과 혀가 의식 및 마음과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소리로 나타나는 것이오. (문자)도 단지 손과 붓의 움직임을 통해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오. 말과 글 이 두 가지는 모두 색((((()의 오온(五蘊)일 뿐, 어느 것도 우리들 자신은 결코 아니오. 이 다섯 가지 법을 떠나 뭔가 끄집어 낼 수 있다면, 부처가 과연 존재하는지 여부를 따지는 것은, 정말 대지혜의 질문이 될 것이오. 그렇지 않고 자신의 존재 여부조차 딱히 끄집어 낼 수 없으면서, 먼저 부처가 존재하는지 여부를 따지겠다면, 이는 헛되고 쓸데없는 미치광이 질문일 뿐, 결코 자신에게 절실하거나 진리를 궁구하는 질문은 아닐 것이오.

부처가 궁극에 존재하는 사실은, 우리들 범부 중생의 감정이 아직 깨끗이 씻기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볼 수 없는 것뿐이오. 우리들 자신도 또한 확실히 존재하고 있소. 다만 우리들의 오온이 아직 텅 비지 못해서, ····식을 떠나서 그 뭔가를 정확히 끄집어 낼 수 없을 따름이오. 금강경에서는 보리심을 낸 보살들에게, 일체 중생을 모두 제도하여 남김 없는 열반을 증득시키되, 어떤 한 중생도 결코 제도하여 열반을 얻게 했다고 여기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소. 또 빛[]이나 소리[냄새[[만짐[생각[]에 머물러(집착하여) 보시를 행하지는 말라고 일깨우고 있소.

보시는 육도만행(六度萬行)의 으뜸이오. 보시를 들어 말씀하셨으니, 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와 만 가지 행실 모두가, 빛이나 소리·냄새··만짐·생각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 당연하오. 금강경의 문장이 간략하게 보시만 거론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보시 안에 포함시킨 것이오. 요컨대, 마땅히 머무르는(집착하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고[應無所住而生其心], 나나 사람이나 중생이나 수자(壽者)라는 모습(형상)이 전혀 없이 일체의 착한 법[善法]을 닦으라는 가르침이라오.

이렇게 말한다면, ()라는 것은 도대체 모습(형상)이 있겠소? 없겠소? 이처럼 광대무변한 광명의 모습이 우주 허공[太虛]을 꽉 채우고 있는데도 없다고 말한다면, 이거야말로 타고난 장님과 무엇이 다르겠소?

금강경에서 한 중생도 제도 못한다거나, 형상에 머무르지 않는다거나, 나나 중생의 모습이 없다거나, 머무르는 바 없다고 말씀하신 전제는, 사람들에게 범부의 감정이나 성인의 견해 같은 형상 집착에서 자유롭게 벗어나라는 뜻이오. 그리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여 남김없는 열반을 증득시키고, 보시를 행하고, 마음을 내고, 착한 법을 닦으라고 말씀하신 본론은, 사람들에게 자기 성품에 알맞게 자신과 남을 모두 이롭게 하는 법을 익히고 닦아, 자기와 남이 함께 보리를 원만히 성취하길 기약하자고 권하신 것이오.

바로 여기에 착안하지 못하고, 모습(형상) 없음[無相]이 궁극의 경지인 줄로 집착하는 과대망상은, 마치 술지게미[酒糟]를 맛보고 최고라고 여기는 술꾼과 똑같은 지식 견해에 불과하오. 이런 자를 어떻게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겠소?

믿음이 얼마나 일으키기 어렵고, 의심은 어찌도 이리 제거하기 어려운고?! 그대들 자신이 결정코 믿음을 일으키려 하지 않고, 또 결코 의심을 제거하려 들지 않는다면, 비록 부처님이 눈앞에 나타나 친히 설법해 주신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할 수 없다오. 하물며 나 같은 범부 중생이 자질구레한 말로 납득시킬 수 있겠소?

부처의 허실(虛實)을 알고자 하면서, 어찌하여 정토문(淨土文) 서귀직지(西歸直指: 서방정토로 돌아가는 길을 곧장 가리킴)에서 논하고 있는 이치와 거기에 실린 사례를, 의심 없이 믿고 받아들이지 못한단 말이오? 이러한 논설과 사례들이 모두 날조한 헛소문이기 때문에, 거들떠볼 가치도 없다고 내팽개칠 참이오?

이러한 견해를 지닌다면, 그 영혼은 틀림없이 다른 오도(五道)에도 떨어지지 못하고, 오직 아비(阿鼻: 無間) 지옥에 갇힐 것이오. 거기서 미래세가 다하도록, 자기 마음 따라 나타나는 펄펄 끓는 용광로나 검수도산(劍樹刀山) 같은 지옥의 경지에서, 온갖 즐거움을 자유자재로 즐기게 될 것이오. 그 즐거움은 어디에도 비유할 수 없소.

부처가 정말 존재하는지 허실을 반드시 알고자 하면서, 정토문이나 서귀직지에서 말하는 내용은 모두 진실이 아니고, 오직 자기가 몸소 보고 경험해야만 진실이라고 고집한단 말이오? 여기 구체적인 사례 하나를 들어 물어볼 테니, 어물쩡하게 넘기거나 피하려 들지 말고, 솔직한 마음으로 한번 대답해 보시오.

북통주왕(北通州王)인 철산(鐵珊)이란 사람은, 청나라 말엽에 광서성(廣西省)의 번대(藩臺: 布政使의 별칭, ()의 두세 번째 실권자)를 지냈다오. 그 당시 광서 지역에는 토착 무장 도적들이 몹시 많았는데, 그가 군대치안을 담당할 때 그들을 섬멸하려고 계획 세워 살해한 자가 아주 많았다오. 그런데 4년 전 중병에 걸려, 눈만 붙였다 하면 몹시 크고도 시커먼 집안에서 자신이 수없이 많은 귀신들에게 사방에서 핍박 당하는 모습이 너무도 뚜렷이 보여, 깜짝 놀라 깨어나곤 했다오. 한참 있다 다시 눈을 감으면 다시 똑같은 장면이 나타나, 또 섬뜩 놀라 깨어나기를 되풀이하였소. 그렇게 사흘 밤낮 동안 꼬박 두 눈을 뜬 채로 지새워, 그저 숨결만 겨우 이어지는 정도였다오.

그래서 그 아내가 보다 못해, “당신이 이러하니 어쩌면 좋겠소? 당신 나무 아미타불을 한번 염송해 보시오. 염불하면 틀림없이 좋아질 것이오.”라고 권했다오. 철산은 아내의 그 말을 듣고 나서, 죽어라고 염불했소. 그런데 얼마 안 되어 이내 잠들어, 한바탕 실컷 자고 나도록 어떠한 모습이나 경계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거요. 병도 점차 다 나아서, 그때부터 계속 재계(齋戒)하며 염불하고 있다오. 이는 철산이 재작년 진석주(陳錫周)와 함께 산에 올라와 나에게 직접 털어 놓은 이야기요.

가령 그대라면, 이러한 상황에서 먼저 부처의 존재 유무를 확인해 안 다음 염불하겠소? 아니면 한번 듣는 대로 곧장 염불하겠소? 만약 이때 부처의 허실을 따져 볼 겨를 없이 즉시 염불한다면, 지금은 어찌하여 옛사람들이 우리에게 기록으로 전해준, 부처(염불·정토)의 허실에 관한 언론과 사례들을, 모두 허황된 거짓말로 치부한단 말이오? 오직 급박한 구원이 필요한 정신없는 상황에서만, 눈물을 흘리며 구하고 싶소? 부귀공명도 한낱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거늘, 어찌하여 편협한 집착은 헌신짝으로 여겨 아주 말끔히 내버릴 수 없단 말이오? 그대는 혹시라도 이러한 지식 견해가 도에 들어가는 문인 줄만 알고, 아비지옥에 떨어지는 고속도로인 줄은 모르오?

꿈으로 부처를 비유하는 경우에는, 허망한 마음이 원인이고 꿈속의 경계가 결과라오. 마찬가지로 염불이 원인이 되고, 극락왕생하여 아미타불을 친견함이 결과로 얻어진다오. 어떻게 금강경의 여섯 가지 비유(일체의 유위법은 모두 꿈·허깨비·물거품·그림자·이슬·번갯불 같다고 설법한 비유게송을 가리킴)로 증명할 수 있겠소?

무릇 세간의 말과 글자는 비록 한 단어나 한 가지 일이라도, 높고 낮음[尊卑]이나 아름답고 추함[美醜] 등 상반하는 두 뜻으로 동시에 해석할 수 있소. 예컨대 아들 자() 한 글자만 보아도, 부자(夫子: 공자에 대한 존칭에서 스승님을 뜻함)라 부를 때도 자왈(子曰)’처럼 홀로 쓰이기를 좋아하고, 보통 사람들을 가리킬 때도 (: 그대)’라고 홀로 쓰이기를 좋아하며, 자녀를 부를 때도 ()’라고 홀로 쓰이기를 좋아하오. 그래서 반드시 문맥에 따라 정의해야 하며, 부자(夫子)라고 부르는 곳에서 결코 자녀라고 새길 수는 없소.

불국토가 꿈속의 경지라는 견해는, 모름지기 우리들이 부처가 되기를 기다려서, 그 뒤에나 말해야 할 줄 아오. 지금 이 순간 곧장 지껄이는 것은, 오직 손해만 가져 올 뿐, 결코 이익이 되지 않소.

사실과 이치, 성품과 형상, 텅 빔과 있음, 원인과 결과 등의 상대 개념은, 서로 뒤섞여 잘 구분할 수 없는 법이오. 그러니 다만 평범하고 어리숙한 지아비나 아낙들처럼 착실하게 염불하는 수행이나 배워, 오직 간절하게 정성과 공경을 다할 일이오. 그렇게 오랫동안 꾸준히 염불하다 보면, 죄업이 소멸하고 지혜가 밝아지며, 업장이 다 사라지면서 복덕이 저절로 높아질 것이오.

이러한 의심이 철저히 떨어져 나가게 되면, 부처의 존재 여부나 자신의 유무, 불법에 들어가는 문과 피안에 이르는 확실한 근거 따위도, 사람들에게 물을 필요가 없이 저절로 밝아지오. 그러나 만약 마음과 뜻을 다해 염불에 전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귀 기울여 알아보려고 할 것이오. 이런 사람은 금강경을 보여 주어도 참모습[實相]을 알지 못하고, 정토문이나 서귀직지를 보고도 믿음을 내지 못할 것이오. 업장이 마음을 뒤덮어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오.

이는 마치 장님이 해를 쳐다보는 것과 같소. 해는 분명히 하늘에 떠 있고, 정말 눈으로 쳐다보고는 있소. 하지만 햇빛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예 쳐다보지 않을 때와 다름이 전혀 없소. 가령 장님이 광명(시력)을 회복한다면, 단번에 햇빛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오.

염불 법문이야말로, 바로 광명(지혜, 마음 또는 영혼의 시력)을 회복하는 최고 최상의 첩경이라오. 참모습[實相]의 형상을 보려거든, 마땅히 이 법문 수행에 정성을 다해야 하오. 그러면 틀림없이 통쾌하게 소원을 이루고 회포를 푸는 때가 있을 것이오. 참나[眞我]를 몸소 보는[親見] 일은, 확철대오하지 않으면 안 되오. 더구나 참나를 증득하려면,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오. 그리고 원만히 증득하려면, 세 미혹을 완전히 끊고 두 죽음을 영원히 없애지 않으면 안 되오.

우리들이 영겁토록 윤회하고, 또 지금 이치에 어긋나게 시비나 따지는 것도, 모두 참나의 힘을 받아 행하는 것이오. 깨달음을 등지고 티끌에 부합하기 때문에, 그 힘을 진실하게 받아쓰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오. 비유하자면, 호주머니 속의 보배구슬을 애시당초 잃어버린 적이 없는데, 있는 줄을 깜박 잊고 공연히 생고생 사서 하는 것과 같소.

세간의 모든 것은 한결같이 중생의 생겼다 사라지는 마음[生滅心]으로부터 비롯하오. 육신 같으면 개인의 개별 업력[別業]으로 타고 나고, 세계 같으면 모든 구성원의 공동 업력[同業]으로부터 이루어지오. 이들은 모두 생겨났다 사라짐이 있기 때문에 영원하지 못하오. 육신은 생로병사가 있고, 세계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소. “만물이 극도에 달하면 반드시 돌이킨다[物極必反].”는 말이나, “즐거움이 극도에 달하면 슬픔이 생긴다[樂極生悲].”는 말이 바로 그러한 뜻이오. 원인 자체가 벌써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결과도 또한 생겨났다 사라지지 않을 수 없소.

극락세계는 아미타불께서 자기 마음이 본디 지니고 있는 불성을 철저히 증득하여, 마음에 따라 나토어 낸 불가사의한 장엄 세계라오. 그래서 그 즐거움이 다할 때가 없소. 비유하자면, 허공이 끝없이 넓고 크게 펼쳐져 삼라만상을 포용하고 있는데, 세계가 제 아무리 수없이 이루어졌다가 무너지기를 계속 되풀이하더라도, 허공은 끝내 조금도 늘거나 줄어들지 않는 것과 같소.

사람들이 흔히 세간의 쾌락을 가지고, 극락세계의 즐거움을 우습게 알고 비난하지만, 과연 극락의 즐거움을 맛볼 수나 있는 처지요? 우리가 비록 허공의 전체 모습을 다 볼 수도 없지만, 우리 눈에 보이는 천지간의 허공만이라도, 바뀌거나 변하는 모습을 누가 본 적이 있겠소?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본래 갖추고 있기 때문에, 석가모니불께서 우리들에게 염불하여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하라고 가르치신 것이오. 아미타불의 대자대비 서원력에 의지하여, 생기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즐거움을 누리도록 말이오. 거기서는 몸이 연꽃 봉오리 안에 자연스레 생겨나[蓮華化生] 생로병사의 고통을 모르고, 세계는 아미타불 성품에 걸맞는 공덕으로 이루어져 성주괴공의 변화가 없다오. 성인조차도 그 경지를 다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범부 중생이 생겼다 사라지는 세간의 법으로 이를 의심하고 비방한단 말이오?

정토 법문은 여래께서 철저한 대자비심으로 모든 중생을 두루 제도하시는 법문이오. 미혹을 끊을 힘이 없는 범부 중생에게, 믿음과 발원으로 아미타불 명호를 염송하여 금생에 생사를 해탈하고, 관세음보살 및 대세지보살과 함께 불도 수행의 반려자가 되도록 가르치신 것이오. 위로 부처의 과위에 바로 이웃한 등각(等覺) 보살조차, 극락왕생하여야 비로소 정각(正覺)을 이룬다오. 그래서 맨 위부터 맨 아래까지 총망라하고, 가장 빨리 수행을 성취하는 지극히 원만한 법문이오. 여래께서 평생 설한 모든 법문을 초월하는 특별 법문이오.

그래서 석가모니불이 아미타경을 설할 때에, 동서남북 상하 육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동시에 넓고 긴 혀[廣長舌]를 드러내어 한 목소리로 찬탄하며, “불가사의한 공덕을 지어 일체 모든 부처님이 보호 염려[護念]하는 경전이라고 일컫고, 우리 석가세존께서 몹시 어렵고 드문 일을 하고 계신다고 칭송하셨소.

그리고 석가세존께서도 스스로, “내가 오탁악세(五濁惡世)에서 이토록 어려운 일을 수행하여 보리를 증득하고, 일체 세간 중생을 위하여 이렇게 믿기 어려운 법을 설하는 것은 몹시도 어렵다.”고 설법 인연을 서술하셨소. 듣는 자들이 믿고 받아들여 수행하도록, 자신이 세상에 나오신 궁극 회포를 남김없이 펼치신 것이오.

그런데 이 법문은 몹시 심오하여 헤아리기 어렵소. 비록 모든 부처님과 우리 석가세존께서 서로 번갈아 가며 믿음을 권하셨어도, 세상에 의심하는 사람은 오히려 더욱 많기만 하오. 세간의 범부 중생만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참선과 교법에 깊이 통달했다는 선지식들도 더러 의심하는 이가 많고, 이미 진리[眞諦]를 증득하여 업장이 다 소멸하고 감정이 텅 비었다는 성문이나 벽지불 중에도 더러 의심하는 분이 있다오. 또 이들 작은 성인[小聖] 뿐만 아니라, 권위(權位: 하급) 보살조차도 의심하는 경우가 있소. 법신대사(法身大士: 등각 보살)에 이르면, 비록 진실하게 믿기는 하지만, 궁극 근원까지 철저히 알지는 못한다오.

왜냐하면, 이 법문은 아미타불이 과보로 얻은 깨달음을, 그대로 중생이 수행하는 원인 자리의 마음으로 삼아, 전체가 부처님 경계이기 때문이오. 그래서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궁극의 경지를 다 알 수 있다오. 부처 아래의 성현들이 잘 모르고 의심하는 것도 당연하다오. 우리 범부 중생이야 부처님 말씀을 믿고 가르침대로 받들어 행하기만 하면, 저절로 진실한 이익을 얻게 되오. 이토록 불가사의한 법문을 보고 들을 수 있는 것 자체만도, 오랜 겁 동안 착한 뿌리[善根]를 깊이 심어온 복덕의 결과이거늘, 하물며 믿고 받들어 수행하는 이야 오죽하겠소?

화엄경은 여래께서 처음 정각을 이룬 다음, 이 세계 밖의 41분 법신 대사를 위하여 한 생애에 부처가 되는 방법을 설하여, 삼장(三藏) 가운데 왕이라고 일컬어지오.  화엄경에서도 성불의 궁극 귀결은, 실제로 십대원왕(願王)으로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하라고 매듭짓고 있소. 거기서 선재(善財) 동자가 증득한 내용은 이미 보현보살과 같고, 모든 부처님과도 사실상 다르지 않은 이른바 등각(等覺) 보살이오. 부처와 단지 한 칸 차이 밖에 나지 않는 등각 보살도 극락왕생을 회향하고, 화장세계해(華藏世界海)의 모든 보살들도 한결같이 이 가르침을 받들어 닦는 것이오.

지금 참선과 교법에 제아무리 통달했다는 선지식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타고난 근기와 성품 및 증득한 도가 어떻게 이들 보살을 능가할 수 있겠소? 천만 경론(經論)이 도처에서 이 법을 강조하는데, 믿고 의지할 수 없소? 그리고 예로부터 수많은 성현들이 한결같이 서방 극락을 향해 나갔는데, 그들이 모두 어리석은 바보란 말이오? 한 마디로 말하면, 업장이 몹시 무겁고 두터워 해탈할 수 없는 자들인지라, 매일같이 쓰면서도 알아차릴 줄 모르는 것이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의심할지 모르오. ‘아미타불이 극락세계에 안거하고 있고, 시방 세계가 끝없고 수없이 많으며, 한 세계마다 염불하는 중생 또한 끝없고 수없이 많을 텐데, 아미타불이 어떻게 한 몸으로 동시에 시방 허공의 끝없고 수없는 세계에서 염불하는 일체 중생을, 두루 빠짐없이 맞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우리가 평범한 중생의 지식 견해로 부처의 경지를 추측하려는 데서 비롯한 어리석은 질문인데, 한 가지 비유로 그 미혹을 풀어 보겠소. 달 하나가 하늘에 떠서 천만 강물에 제 모습을 각각 드리울 제, 달이 무슨 특별한 마음을 쓰겠소? 하늘에 단지 하나의 달뿐인데, 큰 바다와 강물 및 작은 시냇물은 물론, 작게는 한 바가지 한 방울의 물에도, 온전한 달의 모습이 한결같이 비춰지오. 게다가 한 강물의 달이라도, 한 사람이 쳐다보면 하나의 달만 그에게 보이지만, 백천만억 사람이 백천만억 곳에서 그 한 강물의 달을 보면, 각자에게 하나의 달씩 똑같이 보이지 않소? 또 백천만억 사람이 각각 동서남북 각 방향으로 움직이면 달 또한 각자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똑같이 움직이고, 그들이 멈추면 달도 따라 멈추어 선다오. 그러나 오직 물이 맑고 고요할 때만 달이 나타나고, 물이 흐리거나 움직이면 달은 이내 숨어버리오. 달은 정말 스스로 취사선택하는 바가 전혀 없소. 달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물이 혼탁하거나 물결치며 흐르기 때문에, 달의 모습을 받아 비추지 못하는 것이오.

중생의 마음은 바로 물과 같고, 아미타불은 달과 같소. 중생이 믿음과 발원을 함께 갖추어 지성으로 염불하면, 부처가 그에 감동하여 응답을 보인다오. 마치 물이 맑고 고요하면, 달의 모습이 저절로 비추어지듯이. 반면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거나 정성스럽지 못하고 탐진치와 어울리면, 부처와는 서로 멀어질 수밖에 없소. 마치 물이 혼탁하거나 움직이면, 달이 빠짐없이 비추어 주더라도, 그 모습을 드리울 수 없는 거와 같소.

달은 세간의 빛깔 있고 형상 있는 물건[色法]인데도, 오히려 이처럼 미묘하고 신비스러움을 간직하고 있소. 하물며 번뇌와 미혹을 깨끗이 제거하고 복덕과 지혜를 원만히 갖추어, 마음은 허공을 다 감싸고 도량은 시방 법계를 두루 포용하는 아미타불이야 오죽하겠소? 그래서 화엄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소.

부처님 몸 법계에 충만하여, 일체의 중생 앞에 두루 나토시네. 인연 따라 나아가 두루 감응하면서도, 항상 이 보리좌(菩提座)에 머무시네.”

그러므로 모든 법계에 두루 감동하고 호응하더라도, 실제로 부처님은 마음을 움직이거나 생각을 일으킨 적이 없으며, 오고 가는 모습도 없다오. 단지 인연이 무르익은 중생에게 부처님이 와서, 그들을 맞이해 극락왕생하도록 이끄시는 것을 보여 주는 것뿐이오. 위와 같은 의심을 일으키는 자가 정말 한둘이 아니기 때문에, 특별히 비유로 대강의 요지만 간추려, 바른 믿음을 낼 수 있도록 권장 격려하는 거라오.

사실 정토 법문은 최고 최상의 근기를 받아들이는 가르침인 줄 알아야 하오. 그래서 이미 등각(等覺)을 증득한 선재동자에게, 보현보살이 십대원왕으로 극락왕생하길 회향하라고 가르쳤소. 정토왕생을 회향하는 법문이야말로, 부처의 과위를 원만히 성취하는 마지막 단계인 것이오.

그런데 세간의 미치광이들이 더러 교법의 이치를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은 채, 평범하고 어리숙한 아낙들도 모두 이 법문을 수행할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소승이라고 여겨 무시하기 일쑤라오. 이 법문이 화엄경에서 한 생애에 성불하는 시종일관의 제일 법문인 줄을 모르고 있소.

또 지식 견해가 편협하고 보잘 것 없는 바보 중생은, 자기의 수행 공부가 몹시 얕고 업력이 매우 두터운데, 어떻게 금생에 단박 왕생할 수 있겠느냐고, 자조(自嘲) 섞인 체념을 곧잘 내뱉는다오. 중생의 심성(心性)이 본디 부처와 둘이 아니기 때문에, 오역 십악(五逆十惡)의 죄를 지어 무간지옥에 떨어질 중생이라도, 선지식을 만나 염불 법문을 배우면, 열 번이나 불과 몇 번의 간절한 염불로도 임종과 함께 극락왕생할 수 있는 줄은 모르는 게오. 관무량수경에서 설하신 말씀을 어찌 믿을 수 없단 말이오? 극악무도한 죄인도 왕생할 수 있거늘, 하물며 우리처럼, 비록 죄업이 많고 수행공부가 적기는 하지만, 오역 십악보다는 훨씬 나은 보통 중생이, 어떻게 자포자기로 이처럼 막대한 이익과 소중한 기회를 놓칠 수 있겠소?

여래께서 스스로 이 정토 법문을 일체 세간 중생이 믿기 어렵다고 말씀하신 까닭도, 바로 착수하기는 쉬운데 성공률은 매우 높고, 별로 힘들이지 않고서도 효과가 매우 빠른 때문이라오. 크고 넓으면서 간단하며 쉽고, 지극히 원만하면서 가장 가깝고 빠른 지름길이라, 다른 어떤 법문도 크게 능가하는 법문이오. 그래서 숙세에 착한 뿌리를 깊이 심지 않은 중생은, 정말 믿고 받아들여 수행하기가 매우 어렵다오.

내가 늘상 부처 아래의 구계(九界) 중생은 이 법문을 떠나서는 결코 위로 불도를 원만히 성취할 수 없으며, 시방 세계 모든 부처님도 이 법문을 놓고서는 아래로 중생을 두루 이롭게 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이는 모두 진실 그대로 전하는 것뿐이오.

정토 법문은 상중하 세 근기를 두루 포용하는데도, 어리석은 사람들이 매양 보잘 것 없는 소승이라고 얕잡아 보고 배척하고 있소. 이는 결국 대승경전을 제대로 펼쳐 보지 않고, 지혜의 눈이 뜨인 선지식도 친견하지 못한 때문이오. 본말이 뒤바뀐 집착의 마음으로, 여래의 시원(始原)적이고 궁극적인 무상도(無上道)를 추측하려는 것은, 마치 봉사가 해를 보고 귀머거리가 천둥소리를 듣는 것과 똑같소. 그들이 보지도 듣지도 못하면서, 해가 어떠니 천둥소리가 어떠니 평론하는 것은, 부질없는 지껄임이 틀림없소.

믿음과 발원으로 염불하는 정토 법문은, 여래께서 중생을 두루 제도하려고 철저한 대자대비심으로 설하신 것임을 모름지기 알아야 하오. 오직 관세음·대세지·문수·보현 등의 보살만이 궁극으로 이 법문을 감당할 수 있다오. 그런데 사람들이, 어리숙하고 평범한 아낙들도 모두 염불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보잘 것 없는 소승으로 얕잡아 보는 것이오. 마치 작고 희미한 별들도 해나 달과 함께 허공에 떠 있다는 구실로, 하늘을 작게 여기는 것과 같소. 또 작은 벌레들이 사람이나 큰 짐승들과 함께 뭍 위를 기어다닌다는 핑계로, 대지를 조그맣게 생각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이 법문에 정말로 믿음을 내고 귀의할 수 있는 바탕은, 바로 과거 오랜 겁부터 깊숙이 심어온 착한 뿌리라오. 독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으로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여, 육근(六根)을 모두 추슬러 깨끗한 생각이 계속 이어지면, 평범한 중생의 마음이 곧 여래장(如來藏)이 된다오. 마치 향을 늘 가까이 하는 사람에게서는 향 내음이 그윽이 풍겨나듯이 말이오. 지금 부처님과 우리 사이에 마음과 기운이 서로 계속 이어진다면, 임종에 감응의 길이 뚫리면서 부처님의 영접을 받지 않을 수 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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