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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부처님 힘에 의지하길 권함

인광대사가언록. 생사 해탈을 위한 보리심

by 明鏡止水 淵靜老人 2023. 1. 2.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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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로지 부처님 힘에 의지하길 권함

 

나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다시 북에서 남으로 1만여 리를 왕래하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을 보아 왔소. 그 가운데 평소 스스로 참선이나 교법에 통달했다고 자부하며, 정토 법문을 마치 오물처럼 여기고, 행여 자신을 더럽힐까 꺼리던 사람들이 많았소. 그런데 그들이 임종에는 대부분 손발을 어지럽게 휘저으며,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는 걸 많이 목격하였소. 반대로 착실하고 차분히 계율을 지키면서 염불하던 사람들은, 설령 믿음과 발원이 지극하지 못해 상서로운 모습까지 나타나지는 않았을지라도, 모두 평안히 운명하였소.

그 까닭은 무엇이겠소? 본디 맑고 깨끗하던 마음의 물이 분별로 말미암아 출렁거리고 흐려지며, 또 의식의 파동이 거세게 용솟음쳐 흩어지다가도, 부처님 명호로 말미암아 맑고 고요하게 응집하기 때문이라오. 그래서 지혜롭다고 잘난 체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듯 전념하는 이만 못하다오. 기교를 부리기에 도리어 형편없이 되고 마는 것이오. (“교묘한 속임수가 졸렬한 정성만 못하다.(巧詐不如拙誠)는 중국속담이 이에 적확히 부합하는 명언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일체의 대소승과 권실(權實) 법문은, 모두 모름지기 자기의 공덕과 힘에 의지하여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해야, 바야흐로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소. 만약 미혹과 업장이 터럭 끝만큼이라도 남아 있다면, 결정코 생사고해를 벗어나기 어렵소. 그래서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오랜 겁을 거치며 수행하는데, 개중에는 역량이 충분하여 후퇴 없는 용맹 정진으로 해탈할 수 있는 이도 있겠지요.

그러나 대부분은 언뜻 깨달은 듯하다가 이내 미혹하고, 잠시 전진하는 듯하다가 오래 후퇴하며, 영겁토록 벗어날 기약 없이 윤회하고 있다오. 나와 그대들이 오늘까지 아직 범부 중생인 까닭은, 모두 상중하 세 근기가 두루 가피를 입을 수 있으면서도 지극히 원만하고 재빠른 정토 법문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오.

능엄경(楞嚴經)은 정토 법문을 모르는 자가 읽으면 정토 법문을 파괴하는 일등 공신이 되고, 반대로 정토 법문을 아는 자가 읽으면 정토 법문을 크게 떨치는 훌륭한 전도자가 되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자기 힘으로 도를 깨닫기는 몹시 어려운데, 정토 염불로 극락왕생하기는 매우 쉽기 때문이오.

열 가지 법계[十法界: ·보살·벽지불·성문과 六道 중생)의 인과 법칙은 하나하나 분명하오. 만약 부처님의 힘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비록 한둘만 몰래 깨뜨려도, 악마에 들려 미쳐 날뛰고 지옥의 씨를 심게 되오. 그런데 24가지 원통(圓通) 공부를, 요즘 세상에 누가 다 닦아 익힐 수 있겠소?

 

[스물다섯 가지 원통[二十五 圓通]: 법성(法性)의 실질에 원만히 통달함을 원통(圓通)’이라고 부른다. 중생의 근기와 인연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원통을 얻고자 함에도 각종 다른 방법에 의지해야 한다. 부처님께서 능엄회상(楞嚴會上)에서 여러 보살과 성문 제자들에게, 각자 무슨 법문을 바탕으로 원통을 얻었는지 물으셨다. 이에 보살과 성문 제자들이 각자 스스로 원통을 얻은 근본 법문을 대답하였는데, 모두 25가지가 펼쳐졌다. 바로 6() 6() 6() 7()를 각각 대표하는 방법인데, 여기서 24가지로 언급하는 것은, 염불법문과 직접 연관 있는 대세지보살의 수행 방법을 바로 뒤에 따로 소개하기 때문이다.]

오직 자식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듯한[如子憶母] 염불 법문만이, 마음을 지닌 모든 중생이 받들어 수행할 수 있다오. 단지 깨끗한 염두만 계속 이어진다면[淨念相繼], 저절로 (염불)삼매를 몸소 증득할 수 있기 때문이오. 좋고 나쁨을 분간할 줄 아는 사람이 (능엄경) 이 법문을 읽는다면, 누가 감히 오직 힘만 믿고 내세우며, 부처님 힘에 의지하지 않으려고 하겠소? 물론 좋고 나쁨을 모르는 자라면, 정반대일 것이오. 단지 박학통달한 대가가 되기를 원할 뿐, 생사 해탈에는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오.

무릇 수행 공부에 힘쓰는 것은, 본디 생사를 해탈하기 위함이오. 혼자 실컷 공부해도 생사를 끝마칠 수 없음이 분명한데도, 아직도 생사를 해탈할 수 있는 법문에 의지해 수행할 생각이 없다면, 이야말로 황금을 내버리고 깨를 짊어지는 어리석은 짓이 아니겠소?

참선 공부를 하여 설령 확철대오했다 할지라도, 예컨대, 오조(五祖) 사계(師戒) 선사나 초당(草堂) 선청(善淸) 선사나 진여(眞如) 모철(慕喆) 선사나 단애(斷崖) 료의(了義: 1265~1334) 선사 같은 대가들도, 오히려 생사를 해탈하지 못했다오. 그리하여 다시 다음 생을 받는 날이면 도리어 후퇴하여 미혹하고 마니, 전생에 비해서도 크게 못 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오. 하물며 우리 같은 범부야 말할 게 있겠소?

정토 법문은 여래께서 중생을 두루 제도하기 위해서 특별히 베푸신 까닭에, 가장 원만하고 빠르며, 가장 넓고도 간단하며 쉬운 지름길이라오. 무슨 근거로 이렇게 말하겠소? 그밖의 일체 법문은 모두 보고 생각하는 두 미혹[見思二惑]을 완전히 끊어야, 비로소 생사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오. 보는 미혹[見惑]만 완전히 끊기도, 폭이 40리나 되는 큰 강물 흐름을 차단하는 것만큼 어려운데, 하물며 생각하는 미혹[思惑]까지 끊기야 오죽하겠소?

보는 미혹을 완전히 끊으면 초과(初果: 수다원)를 증득하는데, 원교(圓敎)로 치면 초신(初信)에 해당하오. 생각하는 미혹까지 완전히 끊어야 사과(四果: 아라한)를 증득하게 되는데, 원교로는 칠신(七信)에 해당하오. 초과나 초신의 수준에서는 아직 생사윤회가 있고, 사과나 칠신의 경지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생사를 끝마치게 되오.

천태(天台) 지자(智者) 대사는 오품(五品)에 거주함을 보이셨소. 비록 깨달음이 부처와 똑같고 오주번뇌(五住煩惱)를 원만히 조복시켰지만, 보는 미혹[見惑]조차도 오히려 일찍이 끊은 적이 없다오. 그렇지만 지자 대사의 본래 경지는 실제로 헤아릴 수가 없소. 임종에 단지 오품에 오른 것은, 말세의 수행자들이 미혹을 끊어 진리를 증득[斷惑證眞]하는 데까지는 힘쓰지 않고, 오직 마음을 밝혀 성품을 보는[明心見性] 것을 최고 궁극의 경지로 여길까 몹시 염려하기 때문이다.”라고만 말씀하셨소.

 

[오품(五品): 법화경(法華經)』 「분별공덕품(分別功德品)에서, 여래 열반 후 제자들의 공덕을 다섯 품위로 나누어 설하신 것으로, 원교의 8(八位)에 해당하며, 천태 대사가 현생에 이 오품 지위에 올랐다고 한다.  수희품(隨喜品: 實相의 법을 듣고 보고 이해하여 기뻐함),  독송품(讀誦品),  설법품(說法品),  겸행육도품(兼行六度品),  정행육도품(正行六度品)]

 

[오주번뇌(五住煩惱): 잔가지 번뇌를 낳는 근본 번뇌 다섯 가지로, 흔히 오주지(五住地)라 함.  견일처주지(見一處住地: ··無色 三界 見惑),  욕애주지(欲愛住地: 욕계의 번뇌 중 見惑 無明을 제외한 번뇌로, 애착이 가장 중대하여 붙인 이름),  색애주지(色愛住地: 색계의 번뇌 중 見惑 無明을 제외한 번뇌),  유애주지(有愛住地: 무색계의 번뇌 중 견혹과 무명을 제외한 번뇌),  무명주지(無明住地: 삼계의 모든 무명, 어리석음의 본체로, 모든 번뇌의 근본임)]

 

무릇 마음을 밝혀 성품을 보는 것[明心見性], 이른바 확철대오를 가리키오. 만약 최상상(最上上)의 근기라서 깨닫는 즉시 증득까지 한다면, 동시에 생사까지 해탈할 수 있을 것이오. 그렇지 않다면, 설령 미래세를 죄다 훤히 알지라도, 오히려 다음 생 받는 것을 피할 길이 없소.

오조(五祖) 사계(師戒) 선사가 소동파(蘇東坡)로 태어나고, 초당(草堂) 선청(善淸) 선사가 노공(魯公)으로 다시 태어난 것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오. 그러나 해인(海印) () 선사가 주방어(朱防禦)의 딸로 태어난 것은 이미 참기 어려운 타락이오. 또 안탕(雁蕩) 스님이 진회(秦檜)로 태어난 것은, 정말 몹시 불쌍하고 딱한 일이오.

 

[진회(秦繪: 10901155): 남송(南宋) 투항파의 대표 인물. 강녕(江寧: 지금의 南京) 출신으로, 정화(政和: 徽宗의 네 번째 연호. 11111117) 때 진사가 되고, 북송 말기에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됨. 정강(靖康) 2(1127) 포로로 금()나라에 끌려가 태종(太宗) 아우의 측근이 되었다가, 건염(建炎) 4(1130) 금군(金軍)을 따라 초주(楚州)까지 왔을 때 쫓겨났는데, 수비병사를 살해하고 배를 빼앗아 도망왔다고 거짓말하여 남송(南宋)에 빌붙음. 소흥(紹興: 高宗 두 번째 연호. 11311162) 때 두 번이나 재상이 되면서 19년간 집정함. ()에 투항을 주장하며, 항전파 악비(岳飛)를 처단하고, ()에 신하로 조공을 바치자고 화의(和議)를 주도하여, 백성들의 원한을 크게 삼.]

 

얼마나 막심하게 어려운 줄 아오? 자기 힘으로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여 생사를 해탈하기가! 여래께서 한평생 설하신 보통의 수행 증득 교리는, 비록 법문이 여러 가지로 다양하지만, 미혹과 업장을 지니고 있으면서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절대로 없소.

오직 정토 법문 하나만이, 단지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을 갖추고 지성으로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여, 극락왕생하는 유일한 길이라오. 미혹과 업장이 얼마나 두텁고 무거운지를 가리지 않고, 수행 공부의 정도가 얼마나 깊고 내실이 있는지도 따지지 않으며, 임종 때 부처님의 자비력에 의지하여 업장을 그대로 짊어진 채 극락왕생하는 거라오.

일단 왕생하기만 하면, 그 즉시 범부를 뛰어 넘어 성인의 경지에 들고, 생사윤회를 이미 벗어나게 되오. 그때부터 점차 수행 정진하여 몸소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고, 부처님 과보까지 원만히 성취하게 된다오. 이것이 바로 여래께서 말세의 어리석고 열악한 근기의 중생을 불쌍히 여기시어, 누구나 현생에 생사윤회를 단박 벗어날 수 있도록 열어 놓으신 특별 법문이라오.

교리를 연구하는 이들은, 통상의 교리에 비추어 논단의 증거를 삼으며, 업장을 짊어진 채 왕생하는 사실을 믿지 않소. 항상 생사윤회 속에 머물면서, 중생 제도하는 것을 대단한 자부심과 긍지로 여긴다오. 한시 바삐 생사고해를 벗어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오. 진흙으로 빚은 그릇이, 불에 굽기 전에 비를 맞으면 금방 풀어져 버리듯이, 번뇌와 미혹이 완전히 끊어지기 전에 다음 생을 윤회하면, (수행의 힘이 풀어져) 더욱 미혹해지는 이치를 모르기 때문이오. 그러면 자신도 이롭게 하기 어려운데, 어느 겨를에 남을 이롭게 교화하겠소.

이는 모두 자기의 공덕과 능력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범부 중생이, 약간의 지혜만 갖춘 듯하면 곧바로 무슨 대단한 법신 대사(法身大士)나 되는 것처럼, 스스로 뻐기고 행세하는 것이라오. 그러다가 한 번 잘못 든 길이 영원한 잘못으로 빠지기 십상이오.

한편 선종을 참구하는 이들은 오로지 화두(話頭) 참구에만 몰두하여,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보기[明心見性]만 바란다오. 근기가 조금만 떨어져도,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보지 못하는 자가 거의 대부분이며, 설사 이미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보았더라도, 미혹과 업장을 완전히 끊지 못하여 여전히 생사윤회를 계속하는 이가, 또 거의 전부라는 사실을 잘 모르기 때문이오. 오조 사계 선사나 초당 선청 선사나 해인 신 선사나 진여 모철 선사 등이 확실한 증인들이오.

오호라! 생사(生死) 문제는 너무도 중대하거늘, 어떻게 오로지 자기 힘만 믿고, 부처님 힘에 의지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이오? 혹시라도 자신의 힘이 정말로 부처님 힘보다 뛰어나단 말이오? 무릇 일반 사람들의 처세조차도, 크게는 국가(왕조)를 창건하여 정통(正統)을 물려주는 일에서부터, 작게는 자기 한 몸 먹고 입는 데 이르기까지, 뭇 사람들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는, 스스로 이룰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지 않소?

그런데 생사같이 중대한 일에서, 비록 부처님의 힘이 있더라도, 의지하지 않겠다는 심사는 무슨 까닭이오? 특출한 자기 능력을 드러내어 맘껏 과시하다가, 끝내 어리석은 바보의 소굴로 떨어지고 싶은 것이오?! 그 뜻이 위대하고 가상하다 말해야 할지?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위대함이 무얼 가리키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구려.

무릇 생사를 끝마치고자 한다면, 반드시 진실로 증명(증득)해야 하오. 만약 단지 깨닫기만 하고 증득하지 못했다면, 번뇌와 미혹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니, 더욱 크게 노력해야 하오. 그렇게 계속 전전긍긍하니 인연따라 단련해 가면서, 항상 깨어 관조(覺照)한다면, 마음가짐이 점차 성인의 지혜와 그윽이 합치하면서, 나와 남이나 시비를 분별하는 범부 감정이 생겨날 수 없으리다.

만약 깨어 관조하지 않으면, 여전히 범부의 감정이 치열하게 타오르게 되오. 수행 공부가 높을수록, 감정 견해도 더욱 무거워지는 법이오. 그래서 깨달음에서 다시 미혹으로 들어가는 퇴보도 피하기가 어렵소. 마치 잠에서 깨어났다가도, 일어나지 않고 누운 채 뒹굴다 보면, 다시 잠드는 것과 같다오.

옛 사람들은 큰 일[生死]이 분명해지면, 마치 부모를 여읜 듯한다.[大事已明, 如喪考女比.]”고 말씀하셨소. 바로 번뇌와 미혹이 완전히 끊기지 않아, 혹시라도 다시 빠져 들까 두려워하기 때문이오. 미혹을 완전히 끊은 사람은, 범부의 감정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오. 범부의 감정이 전혀 없는데, 어떻게 생사윤회가 이어지겠소?

확철대오한 사람의 깨달음이 설령 부처와 같다 할지라도, 그 미혹은 아직 완전히 끊어진 게 아니라오. 따라서 반드시 한 생각 한 생각 또렷또렷 깨어 관조함으로써, 범부의 감정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오.

이 법문은 온전히 부처님 힘에 의지하오. 비유하자면, 절름발이 장정이 힘써 걸어야 하루에 고작 수십 리 가겠지만, 만약 전륜성왕의 윤보(輪寶: 요즘의 제트기나 로케트로 상정해 보면 좋음)를 탄다면 잠깐 동안에 사주(四洲: 오대양 육대주를 상정하면 좋음)를 두루 돌아다닐 수 있는 것과 같소. 이는 전륜성왕의 (복덕) 힘이지. 결코 자기의 능력이 아니오. 한평생 열심히 수행한 사람은 정말로 이와 같을 따름이오.

 

[ 여상고비(如喪考妣) : 본디 아버지 어머니를 잃은 것처럼 몹시 비통(悲痛)해 한다는 뜻이나, 다른 일은 돌보지 않고 오직 (부모 상례같이) 그 일에만 마음과 정신을 집중한다는 뜻으로 확장하였다.]

 

[사주(四洲): 수미산(須彌山) 사방의 바다에 떠 있는 네 대륙. 우리 사바세계가 속해 있는 남섬부주(南贍部洲)를 비롯해, 동승신주(東勝神洲서우화주(西牛貨洲북구로주(北瞿盧洲)를 일컬음.]

 

그리고 오역 십악(五逆十惡)을 지은 중대 죄인이라도, 임종 때 지옥의 모습이 나타나거든 뜻과 마음을 다해 염불하면, 곧장 부처님의 영접 인도를 받아 왕생할 수 있소. 정말로 부처님은 중생을 모두 똑같은 한 자녀처럼 보시기 때문에, 착하고 순종하는 이만 자비롭게 보살필 뿐만 아니라, 거역과 죄악을 일삼는 자들에게도 연민의 정을 배로 느끼신다오. 자식이 아무리 불효막심하다가도, 한 순간 마음을 돌이켜 부모에게 찾아오면, 부모는 틀림없이 자비로이 맞이할 것이오.

자기 힘만 믿고 수행하여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기란 정말 쉽지 않소. 보는 미혹[見惑)만 끊기도 폭이 40리나 되는 큰 강물 줄기를 가로막는 것처럼 어렵거늘, 하물며 생각하는 미혹[思惑]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소? 그렇게 보는 미혹을 완전히 끊어야, 겨우 초과(初果: 수다원)를 증득하여, 비로소 성인의 축에 낄 수 있소. 물론 그 후로도 일곱 번 천상에 생겨나고 일곱 번 지상 인간 세계에 태어나길 반복 왕래하며 수행하여야, 바야흐로 생각하는 미혹까지 완전히 끊어 사과(四果: 아라한)를 증득할 수 있다오.

비록 열네 번의 생사만 반복하면 된다고 하지만, 천상의 수명이 무척 길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세월 개념으로 따지기가 정말 쉽지 않소. 초과를 증득한 성인이 생사를 벗어나기가 오히려 이처럼 어렵거늘, 하물며 미혹과 업장을 온통 갖춘 범부 중생은 오죽하겠소?

사과를 증득하여 아라한이 되어야만, 생사의 뿌리가 영원히 끊어져 육도 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오. 그 후 대자비심을 발하여 세상에 다시 들어와 중생을 제도하고 싶으면, 원력에 따라 생사를 나토어 보인다오. 미혹과 업장을 두루 갖춘 범부 중생이, 선악의 업력에 이끌려 육도 중생계를 들락날락하면서, 터럭 끝만큼도 자신이 주인 노릇을 못하는 윤회와는 천양지차라오.

자기 힘으로 생사를 해탈하는 일은, 숙세의 선근(善根)이 몹시 깊고 두터운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하오. 말세의 중생이 어떻게 감히 넘볼 수 있겠소? 그래서 여래께서 특별히 정토 법문을 여시어, 성인이나 범부나 상중하 세 근기의 모든 중생이, 모두 현생에 생사를 벗어나도록 배려하셨다오. 중생을 구제하고 보호하려는 자비심이, 이보다 더 지극할 수 있겠소?

물론 정토 법문 수행도 기본상으로 청정한 계율을 엄격히 지키고, 선정과 지혜를 힘써 닦아야 하오. 그 바탕 위에서, 믿음과 발원으로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여 극락왕생을 바라는 것이오. 믿음과 발원이 진실하고 간절하며, 염력(念力: 염불하는 정신력)을 순수하고 오롯이 집중하면, 현생에도 성인의 경지를 증득할 수 있고, 임종 때 곧장 최상품의 연화에 올라 불퇴전(不退轉: 아비발치)의 보살 지위에 들게 된다오.

설령 근기가 다소 뒤떨어져 이렇게까지 수행 증득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단지 지성스런 마음으로 염불하기만 하면, 자기 마음이 부처와 서로 딱 들어맞아 감응의 길이 트이게 되고, 임종에 틀림없이 부처님의 자비로운 인도로 업장을 짊어진 채 왕생하게 된다오.

또 최하의 오역 십악(五逆十惡) 죄인이라도, 임종에 지옥의 모습이 나타날 때 정신과 의식을 잃지 말고, 선지식이 염불을 가르쳐 주거든 커다란 두려움과 부끄러움으로 깊이 참회하면서, 간절하게 염불하시오. 그러면 고작 몇 번의 염불 소리와 함께 목숨이 끊어질지라도, 부처님의 자비로운 가피력으로 극락왕생할 수 있다오.

누구든 한 번 왕생만 하면, 생사윤회를 영원히 벗어나 연지해회성중(蓮池海會聖衆)에 동참하고, 점차 수행 정진하여 반드시 부처의 과보를 증득하게 된다오. 자기 힘에 의지하여 생사를 벗어나기는 그렇게도 어렵고, 부처님의 힘에 의지해 생사를 해탈하기는 이처럼 쉽소.

누구든 마음만 있으면 모두 염불할 수 있고, 모두 극락왕생할 수 있소. 혈기와 성품을 지닌 만물의 영장이라면, 누구든 본디 갖추고 태어난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청정한 깨달음의 인연을 등지고 혼탁한 미혹의 인연에만 이끌려 가면서, 영겁토록 육도 중생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윤회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오.

우리들이 생사윤회 중에 오랜 겁 동안 지어온 악업은 끝없이 많소. 만약 자기 수행의 힘에만 의지해, 그 번뇌와 미혹의 악업을 모두 소멸시키고 생사를 해탈하려고 한다면, 이는 하늘에 오르기보다 훨씬 더 어렵소.

그러나 부처님께서 설하신 정토 법문을 믿고,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으로 아미타불 명호를 염송하여 극락왕생을 구한다면, 업력의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모두 부처님의 자비력에 의지해 왕생할 수 있소.

비유하자면, 한 톨의 모래알은 제아무리 작고 가벼워도, 물에 넣으면 곧장 가라앉고 마오. 그러나 설령 수천 근이나 나가는 무거운 암석이라도 큰 배에 실으면, 물속에 가라앉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먼 곳까지 운반하여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소. 암석은 중생의 업력이 몹시 크고 무거움을 비유하고, 큰 배는 아미타불의 자비력이 매우 크고 넓음을 비유하오.

만약 염불하지 않고 자기의 수행력에 의지해서 생사를 해탈하려 든다면, 모름지기 업장이 다 소멸하고 감정이 텅 빈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오. 그렇지 못하고 번뇌나 미혹이 터럭 끝만큼만 남아 있어도, 생사고해를 벗어날 수 없소. 마치 제아무리 미세하고 가벼운 흙먼지라도, 반드시 물속에 가라앉으며, 결코 물 밖()으로 벗어날() 수 없는 것과 같다오.

그러니 오직 믿음을 가지고 염불하여 극락왕생하길 구하고, 다른 생각일랑 아예 품지도 마시오. 정말 이렇게만 한다면, 아무리 중병에 걸린 환자라도, 수명이 아직 다하지 않았으면, 빨리 나을 것이오. 오로지 일념으로 지성스럽게 염불한 공덕이, 숙세의 악업을 소멸시켜 주기 때문이오. 마치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면, 서리가 이내 녹아 없어지는 것과 비슷하오.

또 환자의 수명이 다 되었다면, 곧장 극락왕생할 것이오. 마음에 다른 생각을 품지 않고 오롯이 염불한 공덕으로, 부처님과 감응의 길이 트여 부처님의 자비력을 가피 받기 때문이오. 이 말만 믿고 따른다면, 살아도 큰 이익을 얻고, 설사 죽더라도 역시 큰 이익을 받을 것이오.

지금 세상은 환난과 재앙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말세요. 만약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을 믿고 의지하며 늘 염송하지 않는다면, 환난이 갑자기 닥쳐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경우에, 어떻게 하겠소? 발등에 불이 떨어진 뒤 부랴부랴 불러대 봤자, 그때는 이미 어찌할 수가 없다오.

 

[중국 속담에 평소에는 향도 사르지 않다가, 급할 때에는 부처님 발을 껴안는다.[平時不燒香, 急時抱佛脚.]”는 명언이 있다.]

 

평소에 미리 염송을 지속한다면, 틀림없이 은연중에 환난이 옮아가거나 풀릴 것이오. 하물며 생사의 기로는 사람마다 반드시 맞이해야 할 운명이거늘, 항상 임종을 생각하는 습관을 지녀야 하지 않겠소?

분수에 어긋나는 일체의 잡념망상이나, 생사해탈에 도움이 될 수 없는 잡다한 법문일랑, 일찌감치 집어치우시오. 그런 데다 시간과 정신력을 낭비하지 않는 게 상책이오. 그래야 확실히 의지하여 생사를 해탈할 수 있는 이 정토 염불 법문의 수행에, 소홀함 없이 전념할 수 있기 때문이오. 이 말이 세상 물정에 어두운 고리타분한 이야기라고 여기지 않는다면, 정말 다행이겠소.

염불하는 사람이 병에 들거든, 두려워 말고 한 마음으로 죽음을 기다리는[一心待死) 자세가 마땅하오. 그리고 자신과 가족·세간을 온통 다 놓아 버리고 일심으로 염불하여야, 업장을 가장 잘 소멸시킬 수 있소. 그래서 만약 세간의 수명이 아직 다하지 않았으면, 업장의 소멸로 병도 금방 낫게 될 것이오. 그러나 모든 세상 인연을 놓아버리지 못하고 그저 낫기만 바란다면, 병이 호전하지 못하는 경우 틀림없이 극락왕생도 못할 것이오. 왜냐하면, 가장 긴요한 임종에 왕생을 발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이러한 도리(道理)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부처님의 자비 가피력을 받아 의지할 수 있겠소?

그러니 질병이 위독할수록, 환자에게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극락왕생을 구하도록 간곡히 권해야 한다오. 그래야 수명이 아직 다하지 않은 경우, 왕생을 구하는 간절한 염불 덕분에 질병이 재빨리 나을 수 있다오. 염불하는 마음이 하도 지성스러워, 부처님의 자비 가피력을 듬뿍 얻기 때문이오. 이러한 이치를 환자에게 완곡히 말해 주어, 혹시라도 바보들이 지껄이는 어리석은 말을 절대 따르지 않도록 조심하기 바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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