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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이 몹시 중요하고 절실함을 알림

인광대사가언록. 생사 해탈을 위한 보리심

by 明鏡止水 淵靜老人 2023. 1. 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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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임종이 몹시 중요하고 절실함을 알림

 

임종의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요긴한 관건이라오.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은 부모나 친족들의 임종 때 정신없이 비통하게 울고불며, 우선 당장 시신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는 일부터 하기 일쑤요. 단지 세상 사람 보기 좋으라는 체면만 생각했지, 돌아가신 분께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치는지는 고려하지 않는 것이오. 염불 수행을 하지 않는 자들이야 놓아 둡시다. 하지만 극락왕생에 간절한 뜻을 둔 수행자조차, 임종에 친족들의 무지한 소행으로 거의 대부분 정념(正念)이 부서지고 흐트러져, 여전히 이 사바 고해에 머물러야 한다면, 얼마나 통탄할 일이겠소?

임종에 염불로 도와 주는 일[臨終助念], 마치 겁 많은 사람이 산에 올라가는데 자기 힘이 부쳐 헐떡거릴 때, 다행히 주위에 있던 착한 사람들이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며 좌우에서 부축해 준 덕택으로, 무사히 정상까지 이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소.

반면 임종에 본인의 정념(正念)이 밝게 드러나는데, 불행히 악마 권속들이 그릇된 세속 애정으로 몸을 만지고 움직여, 그 정념을 파괴하는 일은 어떻겠소? 마치 힘센 용사가 자기 힘으로 혼자 충분히 산에 오를 수 있는데, 가족이나 친지들이 각각 자신의 물건(업장)을 그에게 함께 짊어지고 올라가라고 얹어 주어, 지나친 하중 때문에 힘이 다 빠지고 지쳐버려, 결국 정상을 눈앞에 둔 채 물러 내려 와야 하는 상황에 비유할 수 있겠소.

물론 이러한 상반된 이해득실은, 표면상으로는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아 벌어지는 듯하오. 하지만 실질상으로는 죽음을 맞이하는 본인 자신이, 과거 오랜 겁 동안 다른 사람의 선악을 완성시키거나 파괴시켜 온 업력 때문에, 돌려받는 결과일 따름이오.

그러므로 무릇 정토 염불을 수행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정념이 원만히 완성되도록 도와주어야 함은 물론, 평소부터 가족 친지들에게 임종 때 조치의 이해득실을 잘 주지시킬 필요가 있소. 그래서 중요한 것은, 죽는 이의 정신의식[神識]이 제자리를 제대로 찾아가는 일이며, 결코 세상 주위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체면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도록 해야 하오. 그래야 임종의 큰 일이 어그러질 염려가 없게 되오.

77(7×7) 49() 기간 중에는, 어떤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모든 일에 한결같이 염불을 중심으로 삼아야 하오. 어찌 꼭 장례 치르는 동안뿐이겠소? 요즘의 스님들은 대부분 게을러져서, 경전 독송[誦經]을 할 줄 모르는 이가 많소. 그렇지 않은 스님은 물 흐르듯 빨리 하거나, 아니면 하더라도 익숙하지 못해, 함께 따라 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오. 설령 수십 명의 스님이 모이더라도, 경전 독송할 줄 아는 이는 몇 안 되오.

오직 염불만큼은, 할 마음을 내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누구든지 함께 염송할 수 없는 폐단이 결코 없소. 또 설령 염송하고 싶지 않은 자라도, ‘나무 아미타불 명호 한 구절이 귀로 들어가 마음에 닿으면, 스스로 얻어지는 이익도 또한 결코 적지 않소. 그래서 나는 죽은 이를 위해서, 염불 이외의 다른 도량(道場: 법회)은 열어주기를 전혀 주장하지 않는 것이오.

사람이 임종에 닥치면, 오직 한 목소리로 염불해 주는 것이 가장 유익하오. 만약 마음의식이 아직 완전히 떠나가기 이전에 시신을 목욕시키고 (이른바 소렴: 小殮) 통곡 따위를 하면, 아주 큰 장애가 된다오.

그래서 정토 법문을 수행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평소에 가족들에게 이러한 이치와 까닭을 상세히 일러두어야 하오. 가장 중요한 시각에 애정을 잘못 발휘하여, 극락왕생을 방해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오. 물론 능력이 아주 뛰어난 대인이나 비범한 호걸이야, 이러한 애정의 장애에도 걸려 넘어지지 않을 것이오.

불법은 아주 크고도 넓어서, 오직 부처가 된 다음에야 비로소 손을 놓을 수가 있소. (부모 조상들께서) 틀림없이 극락왕생하길 바란다면, 항상 간절히 염불하여 천도(薦度)를 회향 기도해 드려도 괜찮소. 바로 불경에서 말씀하신 대로, “비록 죄악의 성품이 본래 텅 빈 줄은 알지만, 항상 이전의 죄를 참회하며, 이미 (죄가 다 소멸하여) 청정함을 얻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雖知罪性本空, 而常悔先罪, 不說已得淸淨.)”는 뜻이오.

그래서 연지(蓮池) 대사도 “1년 내내 항상 선망(先亡) 부모 조상들을 천도해 드려야 하며, 이미 해탈을 얻으셨다고 자부하고 천도재를 행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소.

우리는 흔히 염불이나 경전 독송이 조상 천도를 위한다.’고 말하오. 하지만 사실은 현재 생존하고 있는 가족 친지들도 동시에 위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서, 마음자리를 활짝 열고 착한 뿌리[善根]를 열심히 심어야 한다오. 그리고 조상 천도의 일체 공덕을 법계의 모든 중생에게 회향 기도해야 하오.

나와 남, 산 자와 죽은 이를 모두 위하는 크고 넓은 마음 도량으로, 나와 남, 산 자와 죽은 이의 분별 집착을 소멸시키는 것일 따름이오. 그러나 정성을 다하지 않은 채, 오직 호화 사치로 다른 사람들에게 체면치레하거나 부귀를 과시해서는 안 되오. 부모상[親喪]을 이른바 한바탕 잔치쯤으로 치르는 것은, 절대 자식된 도리가 아니라오.

부모의 몸에 중한 병이 닥쳐 생존을 보장하기 어려운 때에는, 자녀들이 각자 부모를 위해 지성으로 나무 아미타불을 염송해야 하오. 그래서 수명이 아직 다하지 않았거든 빨리 나으시고, 수명이 이미 다했거든 빨리 극락왕생하실 수 있도록 회향 기도해 드려야 하오.

자녀들의 심성이 효성스럽고 순박하다면, 반드시 모두 머리카락에 붙은 불을 끄는 심정으로, 항상 나무 아미타불을 지송할 것이오. 그러면 병석에 있는 부모에게도 유익할 뿐만 아니라, 염불하는 자녀 본인들에게도 아주 이롭소.

무릇 사람이 약으로 치료할 수 있는 질병에 걸린 경우까지, 모두 절대로 약을 쓰지 말라는 뜻은 아니오. 그러나 약으로 치료할 수 없는 경우에는, 비록 선단(仙丹)이라도 소용이 없는데, 하물며 인간 세상의 약이 듣겠소? 치료할 수 있는 병이든 불치의 병이든, 모두 아가타약(阿伽陀藥)을 복용해야 좋소. 이 약은 절대로 사람을 해치거나 그르치는 법이 없소. 복용하기만 하면, 몸으로든 마음으로든 반드시 큰 효험을 볼 것이오.

 

[아가타(阿伽陀): 아게타(阿揭陀)로도 쓰는 약 이름으로, 뜻으로 번역하면 보거(普去: 모든 병을 제거함무가(無價: 가치를 셈할 수 없이 고귀함무병(無病)이 되며, 더러 불사약(不死藥: 죽지 않는 약)으로 일컫기도 함. 여기서는 물론 나무 아미타불염불을 뜻함.]

 

그러나 어쨌든 사람이면 누구나 이 세상에서 조만간 반드시 한 번 죽음을 맞이해야 하오. 그런 죽음 자체야 안타까워할 게 못 되지만, 죽은 뒤 돌아가야 할 곳조차 미리 잘 정돈해 두지 않을 수야 없지 않소? 자기 능력이 충분하여 스스로 미리 잘 준비 정돈해 놓는다면, 임종에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니 가장 좋겠소. 그런데 주위에서 도와주기까지 한다면, 더욱 힘을 얻을 것이오.

그러나 자신의 능력이 없는 사람은, 사전에 가족들에게 대신 염불해 주도록 당부하여야 마땅하리다. 가족들의 염불 도움으로라도 정념(正念)을 또렷이 세워 지켜야, 애정과 원한의 굴레에 얽매여 사바 고해를 벗어나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오.

환자의 쾌유와 망자(亡者) 천도를 위한 기도에,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경전 독송[誦經]이나 예불 참회(禮懺) 또는 수륙재(水陸齋)를 일삼는 듯하오. 그러나 나는 아는 사람들에게 모두 염불을 하라고 권한다오. 염불의 이익이 경전 독송이나 예불 참회 또는 수륙재보다 훨씬 크고 많기 때문이오. 왜 이렇게 말하겠소?

 

[수륙재(水陸齋): 수륙의 모든 유정(有情) 중생에게 재식(齋食: 몸과 마음을 청정히 가다듬어 올리는 음식)을 공양하는 법회를 보통 수륙이라고 함. 량무제(梁武帝)/() 무제(武帝) 꿈에 한 신령스런 스님이 나타나, “육도의 네 종류 모든 중생이 무한한 고통을 받고 있는데, 어찌 수륙의 중생을 두루 제도하지 않는가!”라고 권하여, 무제가 경전에서 아난이 귀왕을 만나 한 가마 곡식 공양 올린다는 내용을 찾아, 금산사(金山寺)에서 처음으로 실시했다고 전해짐. 신선에게는 흐르는 물에 음식을 공양하고, 귀신에게는 깨끗한 땅에 음식을 공양하는 뜻에서 수륙(水陸)’이라고 함.]

 

경전은 글자를 모르는 사람은 독송할 수가 없소. 설사 글자를 안다고 할지라도, 흐르는 물처럼 빨리 독송하면, 혀가 좀 둔하고 느린 사람은 역시 함께 따라 독송하기가 어렵소. 게으르고 성의 없는 사람은, 비록 독송할 줄 알아도 독송하려 들지 않기 때문에, 유명무실(有名無實)해지오. 예불 참회와 수륙재도, 마찬가지 이치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게오.

그러나 염불은 할 수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소. 설사 게을러빠지고 성의 없는 사람이 함께 따라 염불하고 싶지 않더라도,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염불하면, 그 사람이 귀만 틀어막지 않는 한, ‘나무 아미타불 명호 한 구절이 진실로 또렷또렷 분명히 그의 마음속에 깊이 울려 새겨질 것이오.

비록 본인이 스스로 염불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결국 염불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게 되오. 마치 난초 가까이에 있어 향기가 물씬 배인 사람은, 몸에서 그윽한 난초 향기가 풍겨 나오는 것과 같소. 그가 특별히 난초 향기를 풍기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오. 친족의 질병 쾌유나 망자의 천도를 위해 기도하려는 사람들은, 누구나 꼭 이 점을 알아 두어야 하오. (옮긴이 보충: 念佛의 통일 조화, 음악적인 화성(和聲: harmony)이 가져오는 상승(시너지) 효과를 주목하는 중요한 내용임. 소리의 파동이 정확히 일치하여 공명(共鳴) 동조(同調)할 때, 그 진동은 몇 배로 증폭하고 웅장한 감명을 자아내지 않는가? 염불 합창의 장엄 정토.)

불사(佛事)를 할 때, 꼭 경전 독송이나 예불 참회 또는 수륙재를 할 필요는 없소. 이러한 일들은 대부분 밖으로 남에게 잘 보이려는 의식의 성향이 강하오. 오로지 한 마음으로 염불에 집중하는 것이 가장 좋소. 집안의 남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법회에 참석하여 함께 염불하도록 하며, 여인들은 스님 뒷자리에 따라서지 말고, 각자 자기 방 안에서 함께 염불하면 되오.

이와 같이 한다면, 집안의 어른과 가족 모두 실제 이익을 얻을 뿐만 아니라, 염불하러 오신 스님이나 주위에서 보고 듣는 사람 모두 이익을 얻게 된다오. 무릇 불사를 거행할 때, 주인이 법단(法壇)에 몸소 정성껏 임한다면, 스님도 저절로 진실한 마음을 내게 되오. 그러나 주인이 그저 형식적인 체면치레로나 여긴다면, 스님 또한 의례적인 법회 참석 정도로 대하게 되오. 그래서 한 바탕 불사 의식이 끝나고, 밤에 입으로 불꽃을 품는 아귀들에게 음식이나 놓아 주면 다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오.

 

[방염구[放燄口]: 아난이 혼자 정좌(靜坐)하다가, 한밤중[三更]에 염구[燄口]라는 아귀를 보았다. 몸은 삐쩍 마르고 목구멍은 바늘귀처럼 가는데, 입에 불꽃을 품으며 아난에게 사흘 후 목숨이 다해 아귀로 생겨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아난이 두려워하며 피할 방법을 묻자, 아귀가 그대가 내일 우리들 백천 아귀와 바라문·선인(仙人) 등을 위해 각각 한 가마니 곡식을 보시하고, 우리를 위해 삼보께 공양을 올려 주면, 그대 수명이 늘어나고 나중에 천상에 나게 된다.”고 일러 주었다. 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여쭙자, 부처님께서 아귀들에게 무량 백천 음식 보시를 충족시킬 수 있는 다라니를 설해 주었다고 한다. ‘염구 면연(面然)’이라고도 한다. (불설구발)염구아귀(다라니)(佛說救拔燄口餓鬼陀羅尼經)에 나온다. 스님이 법회[佛事] 후 아귀들에게 음식 보시하는 것을 방염구라고 한다.]

 

부모님의 임종 때는, 온 가족이 울지 않고 함께 염불할 수 있으면 가장 유익하오. 그리고 그 시간은 짧아도 세 시간 동안은 염불 소리가 끊이지 않게 계속하며, 통곡이나 시신 접촉 따위는 절대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 명심하시오.

설사 돌아가신 분께서 진실로 극락왕생하신 게 확실하더라도, 지성으로 염불하여 높은 품계의 연화로 승진하고, 한시라도 빨리 무생법인을 증득하도록, 효성스런 마음을 다해야 하오. 우리가 비록 돌아가신 분을 이롭게 하기 위해 염불하지만, 사실은 염불하는 자손들도 함께 착한 뿌리를 심는 것이라오. 그러므로 손자들도 염불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함께 따라 하는 것이 좋소.

사람이 죽기 전에, 본인 스스로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을 수 있으면 아주 좋소. 만약 그럴 수 없는 경우에는, 절대 억지로 미리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게 하지 마시오. 한기(寒氣)와 고통을 받아 감당하지 못하고, 그만 정념(正念)을 잃을까 염려스럽기 때문이오. 더구나 법의(法衣)를 갖추어 입고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임종하지 못하는 것을 서운하게 여길 필요도 없소.

임종의 순간에는 단지 한 마음 한 소리로 염불하기만 하는 것이 가장 좋소. 목욕이나 옷 갈아입히기 따위의 법석을 절대로 떨지 말아야 하오. 만약 그런 법석을 떨면, 우물 속에 빠뜨리고 돌을 떨어뜨리는 격이 되니, 꼭 명심하기 바라오.

임종 때 삐쩍 여위고 질병으로 고통을 겪는 것은, 아마도 틀림없이 오랜 겁 동안 지어온 업장 탓이오. 본디 나중에 더욱 무겁게 받아야 할 과보가, 독실한 염불 수행 덕분에 현재의 가벼운 과보로 앞당겨져 나타나는 것이오. 그러므로 수행에 정진하여 몸이 날로 쇠약해졌다는 말은, 사리에 합당하지 않소. 뿐만 아니라, 아직 신심이 얕은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염불 수행에서 물러나지나 않을까 염려스럽기도 하오.

염불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업장을 해소할 수 있소. 그 업장이 당장 나타나는 것은, 장래 삼악도에 떨어질 악보가 현재의 병고로 앞당겨져 대체되기 때문임을 알아야 하오. 그래서 금강경에서도, “금강경을 지송한다고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사람은, 그 가벼운 모욕으로 말미암아 오랜 겁 동안 겪어야 할 삼악도의 고통이 대신 소멸한다.”고 말씀하셨소.

그러니 임종의 자그만 병고로, 무량 겁 동안 지어온 업장의 악보가 소멸하여 극락왕생하는 것은, 정말로 얼마나 큰 다행이겠소? 도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세간 사람들처럼, 수행으로 말미암아 질병을 얻고 죽음에까지 이르렀다는 헛소리는 하지 않아야 하오.

당나라 때 유명한 고승 현장(玄奘) 법사도 임종에 약간의 병고를 겪어, 마음속으로 자기가 번역한 경전에 혹시라도 잘못이 있지는 않나 의심했다오. 그러자 한 보살이 나타나, “그대의 전생 죄악 과보가 이 자그만 병고로 모두 소멸하였으니, 의심하지 말라.”고 그를 위로했다오.

이러한 이치와 실례를 가지고, 임종에 병고를 겪는 염불 수행인들을 위안하고 격려해 줄 필요가 있소. 그래야 그가 원한이나 의심을 품지 않고 신심과 환희심에 넘쳐, 부처님의 자비 가피를 확실히 받을 수 있기 때문이오. 수명이 다하지 않았다면 하루 빨리 나을 것이고, 수명이 다했다면 편안히 극락왕생할 것이오.

무릇 사람이 질병으로 고통을 받을 때에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생각해 보면, 한없이 편안하고 즐거워질 수 있소. 근래 도처에 천재지변과 전쟁 사고가 끊임없이 발생하는데도, 우리가 직접 당하지 않는 것만도 얼마나 큰 다행이오. 비록 질병으로 고통을 겪지만, 생사고해를 벗어나는 경책(警策)으로 삼을 수 있지요. 그러니 단지 감격스런 마음으로 수행에 정진하여, 스스로 진실한 이익을 얻어야 하지 않겠소?

그렇지 않고 하늘을 원망하며 남을 탓한다면, 숙세의 업장을 해소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늘을 원망하며 남을 탓한 업장까지 더욱 가중할 것이오. 진실로 하늘을 원망하지도 않고 남을 탓하지도 않으면서, 청정한 마음으로 염불할 수만 있다면, 숙세의 업장은 끓는 물에 눈송이 녹듯이 말끔히 소멸할 것이오.

장례와 제사 때 음식은 모름지기 완전히 채식을 써야 하오. 세속의 관행에 따라 술과 고기를 써서는 절대 안 되오. 설령 뭘 모르는 사람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우기거나 비웃어도, 그냥 못 들은 척하고 자기 원칙을 관철하면 되오. 특히 장례는 지나치게 떠벌려서는 안 되오.

불사(佛事)를 거행하려거든, 단지 지성으로 염불이나 하고, 그 밖의 다른 불사는 벌이지 마시오. 재력에 여유가 있으면, 공덕을 많이 지어 주는 것은 좋소. 하지만 경제상 여력이 없다면, 초상이나 원만히 잘 치르도록 하오. 절대로 체면치레하느라 억지로 비용을 끌어 대고, 나중에 궁핍을 당하거나 부담을 떠안을 필요는 없소.

사람이 한평생 사는 동안 하는 일들은, 모두 거짓으로 꾸밀 수 있소. 하지만 오직 죽음에 닥친 순간만큼은, 절대로 거짓으로 꾸밀 수가 없소. 하물며 세속 인연에 애착이나 미련의 감정이 전혀 없이, 기쁜 기색으로 평안히 앉아 흔연히 떠나간다면 오죽 좋겠소? 정토 염불 수행이 무르익지 않고서, 어떻게 그런 상서로운 임종을 맞이할 수 있겠소?

다만 온 집안 식구들이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진지하게 염불해 드리길 바라오. 부처님께서 사람들에게 가르치시기를, 독경이나 주문 지송 염불 등의 모든 공덕은, 한결같이 법계 중생을 위해 회향하라고 말씀하셨소. 평상시에 자기와 전혀 상관없는 법계 중생을 위해 회향한다면, 하물며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지극한 정성과 효심으로 염불하지 않겠소?

일체 중생을 위해 회향할 수 있다면, 불보살의 서원과 서로 부합하게 되오. 마치 한 방울의 물이 큰 바다에 흘러 들어가면, 곧장 큰 바다와 똑 같은 깊이와 넓이를 지니는 것과 비슷한 이치요. 그러나 바다에 흘러들어가지 못한다면, 한 방울의 물은 말할 것도 없고, 황하나 양자강조차도 바다와는 천양지차가 날 수밖에 없소.

그래서 무릇 부모나 일체 중생에게 베푸는 일이, 모두 결국 자기 복덕을 스스로 쌓는 것임을 알게 되오. 이러한 이치를 안다면, 효심이 있는 사람은 효심이 더욱 증대할 것이고, 효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효심을 일으켜야 하리다. 스님을 초청해 49재 염불을 올려드린다면 아주 좋겠소. 물론 형제자매 가족 모두 함께 따라 염불해야 하오. 부녀자들은 꼭 스님 뒤에 따라 서서 할 필요가 없소. 여러 날 계속 염불하다 보면 사람 감정이 친숙해져, 혹시라도 남들에게 오해나 의심을 살까 염려스럽기 때문이오. 부녀자들은 따로 한 곳을 마련하거나, 또는 중간에 칸막이(커튼)를 치고, 각각 다른 문으로 출입하여 서로 얼굴을 마주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좋소. 이 방법이 도시나 농촌 모두에 통용할 수 있는 모범적인 의식일 듯하오. 아무 기준과 한계도 없이 산만하게 치르다가, 다른 사람들도 보고 본받는다면, 세월이 지나면서 폐단이 생길 게 뻔하기 때문이오. 예로부터 예법(禮法)을 처음 제정하는 사람은 물론 최고 최상의 성현이지만, 그 예법을 지켜야 할 제일 최하의 중생까지 모두 포함시켜 배려하여야 폐단이 없다오.

질병이 위독해져 죽음이 임박하거든, 일체 세상사와 자기의 육신까지 모두 온통 놓아버리시오. 그리고 한 티끌도 물들지 아니한 텅 빈 마음으로, 만 가지 공덕을 두루 갖춘 위대하고 성스러운 나무 아미타불 명호를 염송하시오. 곧 죽는다는 생각을 하며, 염불로 아미타불의 영접을 구한다는 일념 이외에는, 어떠한 잡념 망상도 일으키지 않아야 하오. 이와 같이만 한다면, 수명이 이미 다한 경우 틀림없이 극락왕생하여 성현의 경지에 들 것이오. 그리고 수명이 아직 다하지 않는 경우에는, 틀림없이 업장이 해소되어 질병이 낫고 지혜와 복덕이 높아질 것이오.

그렇지 않고 어리석게도 오직 병 낫기만 바란다면, 병이 빨리 낫기는커녕, 오히려 병을 더욱 악화시키게 되오. 또 수명이 다했다면 극락왕생하지 못하고, 업장에 끌려 사바 고해를 끊임없이 표류할 것이오. 홍진의 수고 속에서 불사(佛事)를 행하는 공덕이, 보통의 불사보다 천만 배 수승하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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