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참선과 염불의 관계
참선과 정토(염불)는 근본 이치상으로는 둘이 아니지만, 구체적인 수행현실을 따지자면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오. 참선은 확철 대오하고 완전히 증득(證得)하지 아니하면,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없소. 그래서 일찍이 위산(潙山) 선사도 이렇게 말씀하셨소.
[위산(潙山) 선사: 본명은 영우(靈祐). 당나라 대종(代宗) 때 복주(福州) 장계(長谿)에서 태어나 15세에 출가, 항주(杭州) 용흥사(龍興寺)에서 대소승 불교를 공부하고, 23세에 강서(江西)의 백장회해(百丈懷海) 선사 아래에서 심법(心法)을 참구한 뒤, 담주(潭州) 위산(潙山)으로 가서 불법을 전하다가, 무종(武宗: 840~846년 재위)의 훼불(毁佛) 사태가 혹심해지자, 머리를 기르고 민간에 은둔함. 선종(宣宗: 846~859 재위. 연호는 大中)이 즉위하면서 배휴(裴休)가 선사께 위산으로 복귀하도록 청하였고, 이경양(李景讓)이 주청하여 동경사(同慶寺)라는 편액을 하사받아 불법을 중흥시킴. 대중(大中) 7년(853) 83세의 나이로 입적할 때까지, 40여 년간 선교(禪敎)를 함께 펼쳤으며, 대원(大圓) 선사라는 시호를 하사 받음. 그의 법맥을 이은 제자 앙산(仰山) 선사(이름은 慧寂)와 함께 위앙종(潙仰宗)이라는 선종의 중요 유파(流派)를 이루었음. 위산경책(潙山警策)이 여러 주석본으로 전해짐.]
“돈오(頓悟)의 올바른 인연을 만나야만 비로소 홍진을 벗어나는 점진적인 계단에 들어서며, 매 생애마다 퇴보하지 않는다면 부처의 단계도 틀림없이 기약할 수 있다.”
“처음에 마음이 인연에 따라 어느 순간 자성(自性)을 단박 깨달을 수 있지만, 시작도 없는 오랜 옛날부터 쌓여온 업습(業習)의 기운은 그렇게 단박에 모두 사라질 수 없다. 그 업습이 의식에 나타나는 것을 말끔히 제거하여야만, 비로소 생사를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이는 마치 사람이 밥을 먹을 때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오. 천하의 선지식들이 열반의 경지를 증득하지 못하는 것도, 그 공덕이 성인과 가지런하지 못하기 때문이오. 그래서 오조(五祖) 사계(師戒) 선사는 소동파(蘇東坡)로 태어나고, 초당(草堂) 선청(善淸) 선사는 노공(魯公)으로 다시 출생한 거라오. 예로부터 확철대오하고서도 완전히 증득하지 못한 대종사(大宗師)들이 이처럼 수없이 많소.
이는 정말로 오직 자력(自力)에만 의지하고, 부처님의 자비 가피를 구하지 않은 탓이오. 미혹이나 업장이 말끔히 사라지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결코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라오.
반면 정토 염불은 믿음과 발원과 수행[信願行]의 삼요소만 갖추면, 업장을 짊어진 채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으며, 한번 왕생하면 생사윤회를 영원히 벗어나게 되오. 이미 깨달아 증득한 사람은 곧장 부처의 후보 자리[補處]에 오르게 되고,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이라고 할지라도 불퇴전(不退轉: 아비발치)의 경지를 증득하게 되오.
그래서 연화장(蓮華藏) 세계의 모든 중생이 한결같이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며, 선종과 교종의 수많은 선지식들이 나란히 서방 정토에 왕생하는 거라오. 이는 부처님의 자비 가피력에 완전히 의지하여 자신의 간절한 믿음과 발원을 행하기 때문에, 쌍방의 마음이 서로 교류하여 빨리 정각(正覺)을 이루는 감응이 나타나는 것이오.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참선보다는 정토 염불 수행에 전념하는 것이 마땅한 방법이오. 한 티끌도 물들지 아니한 마음 가운데서, 만 가지 공덕을 두루 갖춘 위대하고 거룩한 나무 아미타불의 명호(名號)를 지송(持誦)하는 것이오.
더러 소리 내어 염송하기도 하고, 더러 소리 없이 조용히 암송하기도 하되, 끊어짐이나 잡념 망상이 없도록 하오. 반드시 생각[念]이 마음에서 일어나, 소리가 자기 귀로 들어가면서 한 글자 한 글자가 또렷또렷 살아 있고, 한 구절 한 구절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염송해야 하오.
이렇게 염불을 오래 계속하다 보면 저절로 한 덩어리가 되어, 염불삼매(念佛三昧)를 몸소 증험(證驗)하고 서방 정토의 풍취를 스스로 알게 될 것이오. 그래서 대세지보살이 육근(六根: 눈·귀·코·혀·몸·생각)을 모두 추슬러 청정한 생각을 끊임없이 이어가는 수행을, 삼매에 이르는 최상의 원통(圓通) 법문으로 삼은 것이오. 정토 염불로 곧장 선정(禪定)에 드는 방편이, 이보다 더 묘한 게 또 어디 있겠소?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힘[自力]에만 의지하고, 부처님의 가피력을 구하지 않소. 그래서 공부에 힘이 붙어 진짜와 가짜가 서로 뒤섞여 공격해 올 때, 여러 가지 경계(境界)가 번쩍 나타났다가 번쩍 사라지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기 쉽소. 그러한 경계들은, 마치 잔뜩 흐리고 비 오던 날씨가 장차 개려고 할 때, 두터운 구름장이 터지면서 문득 햇빛이 눈부시게 비치다가 눈 깜박할 사이 다시 어두컴컴해지기를 반복하여, 도대체 날씨 변화를 예측할 수 없는 경우와 비슷하오.
이러한 상황은 진짜 도안(道眼)이 뜨인 자가 아니면 식별해낼 수가 없소. 이 때 만약 한 소식(消息) 얻은 걸로 착각하면, 악마에 집착[走火入魔]하여 미쳐 날뛰게 되고, 어떤 의약으로도 고칠 수 없게 되오.
염불 수행하는 사람이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으로, 온갖 공덕을 갖춘 위대한 명호[萬德洪名: 南無阿彌陀佛]를 염송하는 방법은, 마치 밝은 해가 중천에 걸린 대낮에 큰 길을 가는 것과 같아서, 단지 마귀나 요정·도깨비들이 얼씬도 못하고 자취를 감출 뿐만 아니라, 샛길로 빠지거나 옳고 그름을 따질 염두조차 일어날 여지가 없다오.
이러한 염불 수행을 꾸준히 계속하여, 공부가 순수해지고 힘이 지극히 붙으면, 결국 “온 마음이 부처이고 온 부처가 마음이 되어, 마음과 부처가 둘이 아니고 마음과 부처가 하나가 되는[全心是佛, 全佛是心, 心佛不二, 心佛一如]” 경지에 이르는 것이오.
이러한 이치와 이러한 수행을 사람들이 잘 몰라서, 부처님이 중생을 두루 제도하시고자 한 원력에 부합하지 못할까 걱정스러울 따름이오. 그러니 어찌 은밀히 숨겨 두고 전해 주지 않거나, 또는 어떤 특정인에게만 전해 주는 일이 있겠소? 만약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입과 마음으로만 전수하는 미묘한 비결이 있다면, 이는 삿된 악마나 외도(外道)일 것이며, 불법은 아니라오.
법당(法幢) 화상은 숙세에 영특한 근기를 타고나, 처음에는 진실한 유학자[眞儒]였다가, 나중에 진실한 스님[眞僧]이 되셨소. 그러니 글공부하고 도 닦은 게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칭송할 만하오. 세상에 진짜 유학자가 있어야, 비로소 진짜 스님이 있게 되오. 별 볼일 없이 어중이떠중이로 노닐던 무뢰한(無賴漢)들이 출가하면, 정말로 거의 모두 불법을 파괴하는 마왕(魔王)과 외도가 되기 십상이오.
법당 화상의 어록은 모두 사람들 마음의 눈을 곧장 통쾌하게 확 뜨게 해 주는 훌륭한 법문으로, 인쇄하여 널리 유통시키고 선가(禪家)의 보배로도 삼을 만하오. 그러나 이는 오직 사람의 마음을 곧장 가리켜, 본성을 보고 부처가 되게 하는[直指人心, 見性成佛] 길을 밝혀 놓았을 따름이오.
우리들은 오로지 정토 염불을 수행하기만 하면 되니, 그 말씀의 구절들을 붙잡고 씨름하여 둘 다 손해 보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기 바라오. 선가에서 주창하는 것은 오직 근본 요지에 국한하며, 그 밖에는 일체 밝히지 않소. 원인을 닦아 과보를 얻고, 미혹을 끊어 진아(眞我)를 증득하는 일은, 모두 스스로 묵묵히 수행해 나가야 할 공부라오. 그런데 문외한들은 선가에서 이러한 수행과 증득의 도리를 뚜렷하게 언급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선가에서 이러한 방법을 쓰지 않는다고 말하는구려. 이는 곧 선가를 비방하고 부처님과 불법을 비방하는 죄악이오.
교리를 좀 아는 총명한 사람들은 으레 염불 수행이 왜 굳이 서방의 극락정토에 왕생하려고 선택하는지 따져 묻곤 하오. 마치 상대적인 분별과 취사선택을 완전히 초월한 수행만이 절대 궁극인 양 여기는가 보오. 그러나 이는,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는 궁극의 경지는 부처가 된 다음의 일이라는 걸 모르기 때문이오.
아직 부처가 되지 못했다면, 설령 미혹을 완전히 끊고 진리를 증득하는 것조차, 모두 취사선택의 편에 속하오. 미혹을 완전히 끊고 진리를 증득하는 취사선택을 인정한다면, 염불 법문이 동방 대신 서방을 향하고, 혼탁한 사바 고해를 떠나 극락정토에 왕생하려는 발원을, 어찌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이오? 참선 법문 같으면 취사선택이 모두 잘못이지만, 염불 법문에서는 취사선택이 모두 옳다오. 참선은 오로지 자기 마음[自心]만 참구하는 것이고, 염불은 부처님의 힘을 함께 믿고 의지하기 때문이오.
그런데 이렇게 서로 판이한 법문의 근본 원리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망령되이 참선 법문을 가지고 염불 법문을 공격 비판하는 것은, 그 의도가 몹시 잘못 되었소. 참선에서 취사선택을 안 하는 것은 본디 최상의 정수이지만, 염불에서도 취사선택을 없애려 한다면 곧 독약이 되고 만다오.
여름에 모시옷 입고 겨울에 털 가죽옷 입으며, 목마르면 물 마시고 배고프면 밥 먹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순리 아니겠소? 서로는 비난할 수도 없거니와, 또 어느 한 쪽만 옳다고 고집해서도 안 되오. 오직 각자의 근기와 본성에 적합한 방편을 골라잡는다면, 폐해가 없이 유익할 것이오.
동방을 버리고 서방을 취하는 것이 생멸(生滅)이라고 비방하는 자들은, 거꾸로 동방을 고집하여 서방을 버리는 것이 단멸(斷滅)임을 모르고 있소. 대저 아직 미묘한 무상정각을 증득하지 못한 중생이라면, 누가 취사선택을 벗어날 수 있겠소?
3아승기겁을 수련하고 백겁 동안 원인 자리를 닦아, 위로 불도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하며,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는 일체의 수행과정이, 어느 것 하나 취사선택의 연속이 아니겠소? 모름지기 여래께서 모든 중생이 한시 바삐 진리의 몸[法身]과 고요한 광명[寂光]을 증득할 수 있도록 이끌기 위하여, 특별히 나무 아미타불 명호를 지송(持誦)하여 서방 정토에 왕생하라고 간곡히 권하셨음을 잘 알고 명심해야 되오.
여래께서 설하신 일체의 법문은, 모두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여야만 비로소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으며, 미혹과 업장을 다 끊지 않고서 생사를 벗어날 수 있는 법문은 결코 없음을 알아야 하오. 그런데 염불 법문은, 미혹을 끊은 자가 왕생하면 법신(法身)을 곧장 증득하고, 미혹과 업장을 짊어지고 왕생하더라도 이미 성인의 경지에 우뚝 올라서게 되니, 이 아니 수승(殊勝)하오?
하나는 오로지 자신의 힘에 의지하고, 하나는 오로지 부처님의 힘에 의지하면서 자신의 힘을 아울러 보태니, 두 가지 법문의 쉽고 어려움은 어찌 하늘과 땅 차이가 아니겠소?
으레히 보면, 총명한 사람들이 선서(禪書) 좀 섭렵하다 재미있는 걸 느끼고는, 마침내 참선을 최고로 여기고 마치 사방으로 통달한 도인처럼 자처하는 경우가 많소. 대부분 참선과 염불의 이치를 제대로 모르고, 스스로 과대망상에 잠긴 부류라오. 이러한 생각과 견해는 결코 따라서는 안 되오. 만약 이들을 따르면,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일은 티끌처럼 수많은 겁(劫)이 지나도록 전혀 가망이 없을 것이오.
권(權)이란 여래께서 중생의 근기를 굽어보시고 거기에 맞춰 드리운 방편 법문(臨機應變)을 일컫고, 실(實)이란 부처님께서 마음으로부터 증득한 도의(道義) 그대로 설법하심을 일컫소. 또 돈(頓)이란 점차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빠르게 단박에 뛰어 넘어 들어감을 일컫고, 점(漸)이란 점차 닦아 나아가고 점차 증험해 들어가, 반드시 많은 세월과 생명의 과정을 거쳐 바야흐로 실상(實相)을 몸소 증득하는 것이오.
[유가에서도 임기응변의 융통성을 권(權)이라고 부르는데, 항상 불변의 원칙 도리는 경(經)이라고 함. 종교의 기본 고전을 경(經)이라고 일컫는 것도, 항상 불변의 진리·도(道)·정법(正法)을 담은 책이라는 뜻임.]
그런데 참선하는 사람들은, 참선의 법문이야말로 사람 마음을 곧장 가리켜[直指人心] 본성을 보고 불도를 이루게 하는[見性成佛] 법문으로, 정말로 실(實)이고 돈(頓) 그 자체의 수행이라고 으레히 자랑하는구료. 설사 참선으로 확철대오하여 마음을 밝히고 본성을 본다[明心見性]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마음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진리와 본성상의 부처[理性佛]를 보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오.
만약 대보살의 근기와 성품을 지닌 사람이라면, 확철 대오하면서 증득하여 스스로 삼계 고해를 벗어나 영원히 생사윤회를 해탈함과 동시에, 위로 불도를 추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하여 복덕과 지혜의 기초를 튼튼히 다질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이러한 대보살의 근기와 성품을 갖춘 경우는, 이른바 확철대오했다는 사람들 가운데서 백천 분의 일이나 될까 말까 할 따름이라오.
그 나머지 근기가 조금이라도 처지는 사람은 제아무리 미묘한 도를 확철대오했을지라도, 보고 생각하는 번뇌[見思煩惱]를 완전히 끊을 수 없어서, 여전히 삼계고해에서 생사윤회를 되풀이해야 한다오. 그렇게 생사를 되풀이하다 보면, 깨달음에서 미혹으로 빠지는 경우가 훨씬 많고, 미궁에서 벗어나 깨달음으로 나아가기는 무척이나 어려운 게, 사바세계 수행의 현실이오. 이러한 즉, 참선 법문이 비록 제아무리 실(實)이고 돈(頓) 그 자체의 수행이라고 할지라도, 정말로 근기가 몹시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면, 그 실(實)과 돈(頓)의 진짜 이익을 받지 못하고, 결국 권(權)과 점(漸)의 방편 법문이 되고 마는 게 아니겠소?
왜 그런가 하면, 바로 자신의 힘[自力]에만 의지하기 때문이오. 자신의 힘이 100% 완전히 갖추어져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소? 그러나 현실상 조금이라도 부족하게 되면, 진리와 본성을 단지 깨달을 수 있을 뿐, 몸소 증득할 수는 없게 되오. 지금 말법 시대에 확철대오한 사람도 눈 씻고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인데, 하물며 확철대오한 바를 증득한 사람은 말할 나위가 있겠소?
여기에 비하면, 염불(念佛) 법문은 위로도 통하고 맨 밑바닥까지 통하며, 임기응변의 권(權)이면서 항상 불변의 실(實)이기도 하고, 점진[漸]적이면서 단박에 뛰어넘는[頓] 수행법이기 때문에, 보통의 교리로 시비 우열을 따질 수가 없다오. 위로는 부처와 같은 깨달음을 얻은 보살[等覺菩薩]로부터, 아래로는 아비지옥의 중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닦아 익혀야 할 법문이오.
여래께서 중생에게 설법하심은, 오직 생사윤회를 끝마치고 벗어나도록 이끌기 위함일 뿐이오. 다른 법문들은 최상의 근기를 지닌 자만이 그 일생에 생사를 마칠 수 있으며, 낮은 근기의 중생은 수많은 겁을 닦아도 해탈하기 어렵소. 오직 염불 법문 하나만은 어떤 종류의 근기와 성품을 타고난 중생이든지, 모두 현생(現生)에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생사윤회를 끝마칠 수 있다오. 이처럼 곧장 빠르게 갈 수 있는데, 어찌 점진적[漸] 수행법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겠소? 비록 제아무리 뛰어난 근기로 참선수행을 하더라도, 보통의 근기로 원만하고 곧장 닦아가는 염불만은 못할 것이오. 겉보기에는 느리고 둔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법문의 위력과 여래의 서원이 평범한 중하근기 중생도 막대한 이익을 단박에 얻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니, 그 이익은 완전히 부처님의 자비광명 가피력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라오.
무릇 참선하거나 강경(講經)하는 사람들이 정토 염불 법문을 깊이 연구해 보지 않으면, 너무 평범하고 쉽다고 여겨 가볍게 보거나 거들떠보지도 않기 일쑤라오. 만약 그들이 염불 법문을 한번만 제대로 깊이 연구해 본다면, 마음과 힘을 다해 널리 펼치게 될 것이 틀림없소. 그런데 어찌 권(權)이네 실(實)이네, 돈오돈수네 돈오점수네 하는 잘못된 시비 논쟁에 끄달려, 스스로 자신을 망치고 중생까지 혼란에 빠뜨리는 어리석은 짓만 저지르고 있겠소?
‘집착하지 말라[不執着]’거나 또는 ‘집착을 놓아 버리라[放下着]’는 따위의 말은 추상 이치로는 지극히 옳지만, 구체 현실 상황은 보통 평범한 중생이 행할 수 있는 바가 결코 아니오. 온 종일 따뜻한 옷을 입고 배불리 먹으면서, “굶주림과 추위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사치스럽게 지껄이는 것은, 며칠 동안 물 한 잔 쌀 한 톨 얻어먹지 못하여,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허기져 금방 쓰러져 죽게 생긴 사람이, “나는 용의 간이나 봉황의 골수조차 더러운 쓰레기로 보기 때문에, 생각만 해도 헛구역질이 나는 판인데, 하물며 그보다 못한 물건들을 거들떠보기라도 할쏘냐?”고 허풍 떠는 것과 똑같은 빈말[空談]에 지나지 않소.
요즘 세상에 불교의 이치[敎理]를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고 곧장 참선에만 파고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텅 빈 해탈병[空解脫病]에 걸려 있소. 좌선 좀 하여 생각이 맑아지고 텅 빈 경계[空境]가 앞에 나타나는 것은 잡념 망상을 고요하고 맑게 가라앉혀 어쩌다 펼쳐지는 환상의 경계[幻境]에 지나지 않다오. 그런데 이를 마치 무슨 소식(消息)이라도 얻은 것처럼 착각하여 크게 환희심을 내면, 마음을 잃어버리고 미쳐 날뛰게 되어, 부처님도 고칠 수 없게 된다오. 다행히 수행자가 이를 몸소 알아차리고 집착하지 않으면서 환상과 망상을 내버리면, 마침내 모든 법문을 일관회통(一貫會通)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소. 비유하자면, 오랫동안 가시밭길을 헤쳐 걸은 뒤, 문득 사통팔달의 큰 길에 도달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소.
말법 시대의 우리 중생은 근기가 형편없는데다가, 선지식조차 매우 드물다오. 만약 부처님의 자비 가피력에 의지하여 정토 염불 법문 수행에 전념하지 않고서, 단지 자신의 힘만 믿고 참선에만 매달린다면, 마음을 밝혀 본성을 보고[明心見性] 미혹을 끊어 진리를 증득[斷惑證眞]하는 이가 매우 적을 것이오. 뿐만 아니라, 환상을 진짜로 착각하며 홀림을 깨달음으로 오인하고, 악마에 집착하여 미쳐 날뛰는 자들이 정말 많아질 것이오. 그래서 영명(永明) 선사나 연지(蓮池) 대사 같은 선지식들이 시절 인연과 중생 근기를 관찰하여, 염불하자고 정토 법문을 적극 힘써 펼친 것이라오.
참선이라는 법문을 어찌 그리 쉽게 말할 수 있겠소? 옛날 위대한 수행자 가운데 조주 종심(趙州從諶) 선사 같은 분은, 어려서 출가하여 나이 여든이 넘도록 행각(行脚)을 계속했다오. 그래서 그를 칭송한 시에도 “조주는 여든에 여전히 행각하였으니, 단지 마음자리가 아직 고요해지지 않아서였네.”라는 구절이 있소. 장경(長慶) 선사는 좌선으로 방석 일곱 개를 닳아뜨린 뒤 돌아다녔으며, 설봉(雪峯) 선사는 세 번 투자산(投子山: 舒州 소재)에 올랐고 아홉 번이나 동산(洞山)에 오르기도 하였소. 이처럼 위대한 조사들도 확철대오하기가 그토록 어려웠거늘, 악마에 들린 무리들은 악마의 말을 한번 듣고서 모두 다 깨쳤다고 날뛰고들 있으니, 앞에 말한 조사들이 몸소 이들의 신발을 들어준다고 할지라도 쓸데가 없구료.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것은, 부처님의 마음 새김[佛心印]을 전하고 사람 마음을 곧장 가리켜서[直指人心], 본성을 보고 부처가 되게[見性成佛] 하기 위함이었소. 그러나 여기서 보고 이룬다는 것은, 우리 사람들의 마음에 본래 갖추어진 천진 불성(天眞佛性)을 가리켜 말함이오. 사람들에게 먼저 그 근본을 알아차리게 하면, 수행과 증득의 법문은 모두 그 인식을 바탕으로 스스로 나아갈 수 있으며, 마침내 더 이상 닦을 게 없고 더 이상 증득할 것도 없는, 궁극의 경지에서 저절로 그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오. 한번 깨달음과 동시에, 곧장 복덕과 지혜가 함께 나란히 갖추어지고 궁극의 불도(佛道)가 원만히 이루어진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라오. 마치 용을 그리고 눈동자를 찍어 넣으면[畵龍點睛], 용이 곧장 살아나 천지를 진동시킬 만큼 휘황찬란하게 날아오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소. 그 효용은 각자 몸소 받아 느낄 수밖에 없소. 그래서 그대로 곧장 마음이면서 부처인 도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법이, 함께 나란히 온 세상에 쫙 퍼지게 되었소.
타고난 근기가 뛰어난 자는, 한 경계 한 기미에 곧장 낌새를 알아채고, 진리의 말을 토해 내며 평범의 소굴에서 스스로 벗어나, 나고 죽음에 걸림이 없이 대자유와 대해탈을 누리게 되오. 그러나 근기가 조금만 처지는 자는, 설령 확철대오할지라도 번뇌 업습의 기운이 말끔히 사라질 수는 없기 때문에, 여전히 생사의 바퀴를 돌게 되오. 그러면 중음(中陰)을 거치고 태반(胎盤)을 나오면서, 대부분 혼미와 후퇴를 거듭하기 마련이오. 확철대오한 사람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깨닫지도 못한 사람이야 말해 무엇 하겠소? 정말로 부처님의 자비 가피력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정토 염불 법문에 전심 진력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온당한 계책이라오.
율종(律宗)이나 교종(敎宗)·선종(禪宗)은 맨 처음 교리(敎理)를 분명히 배운 뒤 그에 따라 수행하여야 하오. 수행 공부가 깊어져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여야만, 바야흐로 생사윤회를 벗어나게 된다오. 그런데 교리조차 잘 알지 못하면 눈 먼 소경 수행[盲修瞎煉]이 되어, 뭔가 조금 얻으면 다 통했다고 착각하거나, 악마에 들려 미쳐 날뛰기 십상이오.
설사 교리를 분명히 알고 수행 공부가 깊어졌다고 할지라도, 미혹을 다 끊지 못하고 터럭 끝만큼만 남겨 두면, 여전히 윤회 고해를 벗어날 수 없소. 미혹과 업장이 깨끗이 사라져 생사고해 벗어나기를 계속 기대하는 것은, 부처님의 경지와는 너무도 멀리 동떨어져, 얼마나 수많은 겁(劫)을 더 수행하여야 비로소 부처의 과보를 원만히 이룰 수 있을지 모르오.
비유하자면, 평범한 서민이 태어나면서부터 몹시 총명하고 지혜로워, 책 읽고 글공부 시작한 지 십여 년 만에 갖은 고생 끝에 어느 정도 학문이 이루어져,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르는 것과 같소. 그가 아주 큰 재주와 능력이 있다면, 낮은 관직부터 점차 승진하여 재상까지 오를 수 있을 것이오. 재상은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최고 정점의 관직으로, 모든 신하 중의 으뜸 자리라오. 그러나 재상도 만약 태자에 비교한다면, 귀천이 하늘과 땅처럼 현격히 차이 나오. 하물며 황제에 빗대겠소? 평생 신하로서 군주의 명령을 받들어 행하며, 신명을 다 바쳐 나라 다스림을 도와야 할 운명일 따름이오.
그러나 이러한 재상 직위도 오르기가 정말 쉽지 않소. 반평생 힘과 재주를 다해 수고하면서 온몸으로 감당한 뒤, 운 좋게 황제에게 인정받아야 말년에 잠시 그 자리에 오를까 말까 하는 거요. 만약 학문이나 재능이 조금이라도 모자라는 점이 있다면, 그 자리에 이름조차 들먹이지 못할 것은 당연하오. 그러한 자가 백천만억이나 되는데, 이는 곧 자신의 힘[自力]에만 의존하는 것이라오.
학문과 재능은 교리를 분명히 알아 그에 따라 수행함을 비유하고, 직위가 재상까지 승진하는 것은 수행 공부가 깊어져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함을 비유하오. 또 단지 신하로 일컬어질 뿐 끝내 군주가 될 수 없는 것은, 비록 생사윤회를 벗어날지라도 아직 불도를 이루지는 못함을 비유하오.(신하는 결코 황제가 될 수 없소. 황실에 託生하여 황태자로 태어나지 않는 한. 마찬가지 이치로 기타 법문을 수행하여도 부처가 될 수 있지만, 다만 정토 염불 법문과 서로 비교하면 너무 동떨어진 차이가 나게 되오. 독자들은 이 비유가 함축하는 뜻을 잘 음미하고, 문자에 얽매이지 않기 바라오.
그런데 『화엄경』의 맨 끝에 보면, 부처와 같은 깨달음을 얻은 보살조차 오히려 十大願王으로 극락정토에 왕생하길 회향하고 있으니, 이는 바로 재상이 황실에 탁생하여 황태자로 태어나겠다는 비유와 의미가 서로 통한다고 볼 수 있소. 염불 법문이 『화엄경』을 얻음으로써, 마치 큰 바다가 온 강물을 집어 삼키고, 너른 허공이 삼라만상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밝혀졌으니, 정말로 위대하지 않을 수 없소.)
그리고 학문이나 재능이 조금이라도 모자라 재상이 되지 못하는 자가 몹시 많다는 것은, 미혹을 완전히 끊지 못하여 생사고해를 벗어나지 못하는 중생이 너무도 많음을 비유하는 것이 되겠소. 그런데 염불 법문은 설령 교리를 잘 모르고 미혹과 업장을 다 끊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단지 믿음과 발원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만 지송(持誦)하여 극락왕생을 구하면, 임종 때 틀림없이 부처님께서 친히 맞이해 서방 정토에 왕생하게 되오.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부처님을 뵙고 법문을 들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달은 뒤, 바로 그 생애에 부처 후보의 지위에 오른다오.
이는 부처님의 힘(佛力)이자, 또 자신의 힘[自力)을 겸비하는 것이오. 믿음과 발원으로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부처님을 감동시킴이요, 48대서원으로 극락왕생을 바라는 모든 중생을 자비로이 맞이하시는 것은, 부처님의 힘이 나에게 호응(응집)하심이라오. 감동과 호응[感應]의 통로가 서로 교차하여, 이와 같은 효험을 얻게 되오.
또 만약 교리를 깊이 분명하게 알고 미혹을 끊어 진리를 증득한 사람이 극락에 왕생하게 되면, 그 품위(品位)가 더욱 높고 불도를 훨씬 빨리 원만하게 성취하게 되오. 그래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포함한 화장(華藏) 세계의 대중이나, 마명(馬鳴)과 용수(龍樹) 같은 역대 위대한 종사(宗師)와 조사(祖師)들이, 한결같이 극락왕생을 발원한 것이오.
비유하자면, 황실에 태어나면 한번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면서부터, 고귀한 태자로 모든 신하를 거느리게 되는 이치와 비슷하오. 이는 바로 황제의 힘이오. 태자가 자라면서 점차 학문과 재능이 하나씩 갖추어지면, 마침내 황제의 지위를 물려받아 천하를 다스리게 되고, 모든 신하와 백성이 그의 말을 따르게 될 것이오. 이는 황제의 힘과 자신의 힘을 겸비한 것이라오.
염불 법문 또한 이와 같소. 미혹과 업장을 완전히 끊지 못한 채, 부처님의 자비 가피력으로 서방 정토에 왕생하면서 바로 생사고해를 벗어남은, 태자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신하를 압도하는 것과 비슷하오. 그리고 왕생한 뒤 미혹과 업장이 저절로 끊어져 부처 후보의 지위에 오름은, 태자가 자라면서 학문과 재능을 갖추어 황제 지위를 물려받음과 비슷하오. 또 이미 미혹과 업장을 끊은 이는 마명이나 용수 같은 역대 조사와 같고, 벌써 부처 후보의 지위에 오른 이는 문수보살이나 보현보살과 같소. 화장 세계 대중이 모두 왕생을 발원한 것은, 마치 예전에는 변방 시골에 처박혀 감히 황제 자리를 물려받을 엄두도 못 내던 이들이, 지금은 동궁(東宮)에 거처하면서 머지않아 등극(登極)할 차례를 기다리는 것과 비슷하오.
우리 중생의 심성은 부처와 똑같소. 단지 미혹하여 진리를 등짐으로써 끊임없이 윤회하고 있을 따름이오. 이를 불쌍히 여기신 여래께서 자비로이 근기에 맞춰 설법하심으로써, 모든 생명에게 본래의 집에 되돌아갈 길을 열어 주셨소. 그 법문이 비록 많긴 하지만, 크게 둘로 요약할 수 있소. 바로 참선과 정토 염불이오. 둘 모두 해탈이 가장 쉽지만, 참선은 오직 자신의 힘만 의지하고 염불은 부처님의 힘을 겸비하기 때문에, 양자를 서로 비교하면 염불 법문이 시절 인연과 중생 근기에 가장 잘 들어맞는 셈이오. 비유하자면, 사람이 강이나 바다를 건널 때, 직접 헤엄치지 않고 배에 올라타야만, 안전하고 재빨리 저쪽 언덕[彼岸]에 도달하면서, 몸과 마음 모두 가뿐한 것과 같은 이치라오.
말법 시대의 중생은 오직 크고 안전한 배와 같은 염불 법문에 의지해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오. 그렇지 않고 한 번 근기에 어긋난 법문에 들어서 시절인연을 놓치면, 애써 수고만 다할 뿐 도를 이루기는 어려울 것이오.
대보리심을 발하고 진실한 믿음과 서원을 내어, 평생토록 오직 ‘나무 아미타불’ 명호만 굳게 지니고 염송하기 바라오. 염송이 지극해지면, 모든 감정을 잊어버리고 염송 그 자체가 무념(無念)이 되어, 선종과 교종의 미묘한 의리(義理)가 저절로 철저히 나타나게 될 것이오. 그러다가 임종에 이르면 부처님과 보살님이 몸소 오시어 직접 맞이해 갈 것이니, 곧장 최상의 품위에 올라 앉아 무생법인을 증득하게 되오. 오직 한 가지 비결이 있을 따름이니, 정말 간절히 일러 주겠소.
정성을 다하고 공경을 다하면, 미묘하고 미묘하며, 또 미묘하고 미묘하리로다![竭誠盡敬, 妙妙妙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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