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知 - 하늘이 알고 신이 알며 내가 알고 니가 안다
四知 : 하늘이 알고 신이 알며 내가 알고 니가 안다 ( 김 지 수 )
저자 소개 |
연정재 (淵靜齋) 보적 (寶積) 김지수 (金池洙)
전북 부안 곰소 출생. 전남대 법학전문대학원 동양법철학 전공. 서울대 법대(중국문학 부전공) 졸업, 국립대만대학 법률학연구소 3년간 유학, 서울대 법학박사(전통 중
국법의 情理法). 2001년부터 국립 전남대 법대, 법전원에 재직 중. 수십 편 전공 논문과 몇 권 공저 외에, 번역서로 화두 놓고 염불하세(印光大師嘉言錄), 운명을 뛰어 넘는 길(了凡四訓), 절옥귀감(折獄龜鑑), 불가록(不可錄), 의심 끊고 염불하세, 중국의 법조윤리 규범집 등이 있고, 저서로 中國의 婚姻法과 繼承法, 傳統 中國法의 精神(2006년 文光部 추천 학술도서), 전통법과 광주 반정, 유불선(儒佛仙) 인생관(人生觀), 채식 명상 20년, 공자가 들려주는 관계의 미학, 선진 법사상사, 법 없이도 잘사는 법 등이 있음.
책 소개 |
四知 : 하늘이 알고 신이 알며 내가 알고 니가 안다 - 책 소개
본서는 후한 때 4代에 걸친 유명한 청백리 양진楊震의 명언 “하늘이 알고 신이 알며 내가 알고 니가 안다!”는 ‘사지四知’를 중심으로, 한부터 청까지 2천년간 청렴강직 화신들을 역사기록에 충실하게 생생히 조명한다. 주연30인 조연1백인 남짓 방대한 장편 역사대하드라마다!
한문제 때 신도가‧장석지, 무제 때 급암, 광무제 이후 동선‧공수‧황패‧소광‧류총, 전진 부견 때 왕맹, 동진 오은지, 당 측천 때 서유공‧적인걸, 남송 고종 때 악비, 원 세조 때 렴희헌, 명 태조 때 죽임당한 전당‧왕박‧섭백거, 청명한 목민관 주침‧황종, 중기 구국명신 우겸, 세종 때 목숨 걸고 직간한 해서, 청 강희제 때 청렴제일 우성룡과 3대 유학명신이 죽 이어진다. 그들 혼불이 청사에 길이 밝힌 휘황찬란한 빛을 따라 위대한 정신과 걸출한 인간미가 펼쳐진다. 특히 절대 생살권을 휘두른 황제한테 국가‧군주와 인민 모두를 위해 도덕과 정의를 밝힌 강직한 기개에 경탄을 금치 못하며, 몇몇 흥미로운 교유 일화와 후대 역사평론을 뒤적여 후세에 끼친 영향과 깨우침도 폭넓게 드러난다. 불교전적에 관련기록도 역사 실존인물의 생생한 진면목 조명에 빛을 더할 것이다!
추천사 |
21세기에 들어선 요즘의 독자들은 긴 글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특히 김지수 교수의 <<하늘이 알고 신이 알며 내가 알고 니가 안다>>처럼, 한문 원문 사료에 충실한 책은 어렵다는 이유로 독자들이 더 기피한다고 알려져 있다.
부분적으로는 일견 이해가 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한국、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전통사회에서 역사를 어떻게 이해해 왔고、어떻게 바라보아 왔는지를 알면, 긴 글을 선호하지 않는 요즈음의 독자들이라도 충분히 생각이 변할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큰 역할을 했던 공자는, 역사는 기본적으로 “술이부작述而不作”해야 한다고 했다. 소위 역사란 “서술은 하되 창작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는 말이다. 서양의 역사가들은 흔히 역사를 비교적 쉽게 해석하고 평가하며, 역사가의 입장에서 역사를 스토리 위주로 재구성하는 데 동양의 역사가들보다는 훨씬 탁월한 능력이 있어 보인다. 그래서 일반 독자들은 동양의 학자들이 저술한 책보다는 서양학자들이 쓴 책을 많이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재미있게 잘 읽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누가 뭐라고 해도 왜곡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객관적 사실”이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닐까? 서양 역사학자들이 선호하는 사실에 대한 평가나 해석、혹은 스토리 위주의 재구성은 그 다음의 문제가 아닌가? 그런 면에서 보면 공자가 역사는 모름지기 “술이부작”해야 한다고 지적한 것은 지극히 타당해 보인다.
공자의 “술이부작” 관점에서 보면 김지수 교수의 이 책은, 역사는 어떻게 써야한다는 점을 아주 잘 보여주는 수작이다. 특히 한문 문장에 능통한 김지수 교수가 하나의 오역도 없이 아주 정확하게 그리고 맛깔스럽게 한글로 잘 번역해서, 이 분야 독자들의 갈증을 풀어주는 데 상당히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전통시대나 지금이나 정치는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다. 물론 제도도 중요하지만 바로 그 제도도 바로 사람이 운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이 제도를 운용하는데 가장 큰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 바로 그 정치 담당자들이 부당한 부富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역사에서는 부의 유혹을 잘 이겨낸 청백리를 그토록 찬양했던 것이다. 김지수 교수는 이 책에서 한漢부터 청淸까지 2천여년에 이르는 시기 동안의 청렴정직한 청백리 30명 가까이를 가려서 소개하고 있다. 관련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동아시아의 청백리나 청렴정직 문제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에게는 거의 사료에 가까운 이 책이 많은 도움과 시사점을 제공할 것이다.
먼저 읽어본 사람으로서 감히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순천대 사학과 차웅환(車雄煥)
목차 |
추천사_차웅환 4
머리말 11
-한漢 신도가申屠嘉 16
총신寵臣을 호통 쳐 황제가 대신 사과한 승상
-한漢 장석지張釋之 21
법은 천자가 천하와 함께 지키는 공기公器
법관은 천하에 공평한 저울!
-한漢 급암汲黯 33
존재 자체로 회남왕 역모가 멎다!
급암과 공손홍에 대한 역사 평론 _45║급암 존재가 회남왕 역모를 단념시키다 _47║강직한 급암, 불우不遇한 소박疏薄-후래거상後來居上 _58║개인적 존경과 흠모, 급암의 후예들 _61║과유불급과 기타 일화 _65║불교 전적 어록에 등장하는 급암 _71
-한漢 공수龔遂 74
개망나니 왕이 천자에 추대되었다 쫓겨나도
끝까지 지극정성 간언한 충신
-한漢 황패黃霸 84
현명한 교화 펼친 으뜸 목민관 태수
-한漢 소광疏廣 소수疏受 96
만족할 줄 알아 영예롭게 물러난 태자스승
-후한後漢 신도강申屠剛 103
수레바퀴 밑에 머리 박아 어가 막은 강골!
-후한後漢 동선董宣 110
공주 노비 목 치고 천자한테 머리 숙이지 않은 강항령强項令!
-후한後漢 류총劉寵 116
성의로 한 푼 받고 자신도 잊은 무위 군자!
-사지四知 명공明公 양진楊震과 그 후손들 122
하늘이 알고 신이 알며 내가 알고 니가 안다!
양진楊震 _122║양진의 자손들 _135║양진楊震 아들 양병楊秉 _137║양진楊震 손자 양사楊賜 _146║양진楊震 증손曾孫 양표楊彪 _157║양진楊震 현손 양수楊修 _163║양수보다 지혜가 35리 뒤쳐진 조조 _175║양진 일가에 대한 역사평론과 불교계 평가 _179║양진의 후예들과 역사 평론 기록 _181
-전진前秦 왕맹王猛 203
태연자약 이(蝨) 잡으며 천하 도모한 호걸!
큰 뜻을 품고 때를 기다리다 _203║환온이 락양에 입성해 왕맹과 담론하다 _204║부견의 즉위와 왕맹의 출세 _208║왕맹의 엄격한 법치 _211║경조윤으로서 토호를 전격 처단하다 _214║내란 평정 _217║환온 북벌과 모용수 망명 _219║전연 모용위를 정벌하다 _222║상호 치열한 외교첩보전 _229║승상 왕맹의 최고 절정기 _234║왕맹의 성품과 국궁진췌 최후 _238║왕맹의 옥에 티, 과오 남살 _239║왕맹 사후 벌어진 일들 _241║인과응보 복수에 화근이 싹트다 _242║부견의 남정 고집과 각계 반대만류 _244║부융의 걸출한 지혜와 재판 일화 _247║첩 장씨의 간곡한 만류와 순사殉死 _250║교만한 병력은 반드시 패한다! _251║물고기와 양(鮮卑)의 반란: 모용씨의 복수극 _257║부견의 최후 _263║왕맹의 아들과 손자들 _265║부견과 왕맹에 대한 역사 평가 _269║불교 관련 기록 자료 _276
-동진東晉 오은지吳隱之 278
탐천貪泉 마시고도 평상심 지킨 지극한 효성 청백리!
-당唐 서유공徐有功 286
살벌한 혁명 칼바람에 목숨 맡긴 공평정직!
-당唐 적인걸狄仁傑 297
온유한 효성으로 측천무후 움직인 반정 초석!
불상 건립공사를 만류한 마지막 간언 _311║적인걸의 언행에 대한 불교계 평가 _314║불상 건립공사 기록과 불교사료 _316║이전 불상 건립과 화재 사건-설회의 질투 방화? _319║반정 중흥을 예비한 인재 천거 _323║인걸의 교유와 인사에 얽힌 일화 _325║인걸의 저술과 사당제사 및 후손 _327║효심으로 역지사지한 간언과 중종 복위 _329║적인걸에 대한 역사적 총평 _333
-송宋 악비岳飛 338
“문신 돈타령 않고 무신 죽음 각오하면 천하태평!”
장준張浚의 불협화음과 진회의 화친론 _365║기막힌 북벌작전과 절호의 수복 기회 _370║진회의 농간과 통한의 철군 _375║금사金史에서 본 악비의 패전 _378║세 장군의 불화와 진회의 농간 _382║‘막수유莫須有’ 억울한 모함과 의연한 최후 _385║진회秦檜 전에 나타난 경위 _388║“문신이 돈타령 않고 무신이 죽음 각오하면 천하태평!” _393║악비 아들들 _397║송사宋史 평론 _399║악비 사후 악영향과 부메랑 _401║악비 신원伸寃과 사당 건립 및 무묘武廟 배향 _406║“악비와 문천상은 어떻게 민족영웅으로 뻥 튀겨졌는가?” _408║“악비와 문천상에 대한 폄훼에 대하여” (강姜 군) _427║유튜브와 누리망에 악비 평론 _432║민간신앙 도교에서 신격화한 악비 _437
-원元 렴희헌廉希憲 445
렴방사 아들로 ‘렴’씨 시조 된 청렴결백한 유생공신
-명明 전당錢唐 왕박王朴 섭백거葉伯巨 474
태조한테 강직간언으로 목숨 바친 유생들!
-명明 주침周忱과 황종況鍾 489
청명한 조세재정으로 민생 증진한 목민관
-명明 우겸于謙 511
문무겸비로 살신성인한 구국 명신!
-명明 해서海瑞 531
스스로 관을 대령해 직간한 강골!
-청淸 우성룡于成龍 556
강희제가 칭찬한 천하으뜸 청렴관리와 그 분신
-청淸 탕빈湯斌 륙롱기陸隴其 장백행張伯行 576
문묘 배향된 강희제 3대 유학명신
꼬리말 599
찾아보기 608
책 속으로 |
머리말
진리는 본질상 일반보편성을 갖지만, 현상세계 사물로 나타날 적에는 시공간과 인간사회에 따라 개별특수성을 띤다.
법은 좁게는 국가실정법으로 구체화하지만, 넓게는 우주자연법으로 추상화한다. 불교에서 진리를 가리키는 ‘다르마(Dharma, 達磨)’를 ‘법法’으로 의역함도 그런 까닭이다.
필자는 한문漢文을 좋아한 인연으로 우리 동아시아 전통문화에 친근감을 느꼈고, 서울대 법대에 들어가 법을 배우게 된 인연으로 우리 동아시아 전통법문화를 탐구하게 되었다. 전통법을 공부하면서 맨 처음 탐구한 주제는, 조선 초기 북방 변경에 4군6진 설치와 주권확립 및 안정된 영토화 정책으로 시작된 사민실변徙民實邊에 후속적 보완책으로 등장한 ‘전가사변률全家徙邊律’이란 아주 특수한 개별법이었다. 그 법이 2백여년간 펼쳐진 역사를 통관해 정치・경제・사회적 여러 측면을 살피면서, 그 법에 담긴 정신과 철학사상도 어렴풋이 음미하게 되었다. 이어 조선시대 기본법전인 경국대전과 그 일반법으로 의용依用한 대명률의 관계를 살피면서, 우리나라 전통법에 중요한 연원으로서 동아시아 역대 율령체계와 전통법문화 전반을 살필 필요와 가치를 느꼈다. ‘전통 중국법의 역사철학적 연원’이란 거창한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초고를 작성했고, 그중 일부를 아주 구체로 심화한 실증적 연구로 학위를 받았다.
전통법문화-율령체계의 역사철학 전반을 통관하면서, 법의 기본정신은 동서고금이 일맥상통하여, 크게 ‘공평公平 정의正義’로 요약됨을 알았다. 미국 연방대법원에 기본명제인 ‘Equal Justice under Law’와 같다. 물론 법의 실질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절차상 적용도 포함한다. 실체법과 절차법, 실질정의와 형식(절차)정의를 아우르는 법의 이념이자 목적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법의 정신과 이념목적 자체도 아주 고귀하고 중요하지만, 이를 법제화하고 구체 현실에서 집행하면서 해석적용상 이견과 다툼을 정리해 최종 유권적 심판을 담당하는 개별 인간으로서 법조인도 매우 중요한 핵심인소가 된다. 바로 ‘법치法治’와 ‘인치人治’ 문제이기도 하다. 법도 결국 사람이 서로 평화롭게 잘살자고 필요해서 나타난 것이고, 그 법을 만들어 시행하고 적용하는 것도 사람이기 때문에, 법과 사람은 밀접불가분의 일체성을 지니고 ‘법치’와 ‘인치’도 사실상 서로 밀접히 관련될 수밖에 없다.
하여 법과 밀접히 관련된 ‘인간’을 중시하는 전통법문화의 정신도 동아시아법의 역사철학도로서 깊은 관심을 가졌다. 전통법문화가 지향한 이상적 법조인상은 한 마디로 중용中庸에서 삼달덕三達德으로 일컫는 ‘지혜・인애・용기(智仁勇)’를 겸비하고, 당唐 대 과거시험에서 인재선발 기준으로 내세운 ‘신언서판身言書判’을 고루 갖춘 사군자士君子라 할 것이다. 이러한 특색을 극명히 잘 반영하는 전통시대 명판례집 ‘절옥귀감折獄龜鑑’을 번역 평석해 소개한 소이所以다.
법은 정치・경제・사회・교육・군사 등 전반을 총괄하는 문화적 결정이므로, 좁은 의미에서 법조인에 국한된 전유물은 결코 아니다. 국가공무원이라면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모두 법을 적용 집행하는 행정실무가로서, 법조인만큼은 아니지만 법을 해박하게 알고 이해하며 법과 인간의 관계에 깊은 성찰과 진지한 고민을 지녀야 한다. 법치주의 사회에서 기업이나 회사 자영업까지도 정도 차이는 있지만 법의 적용을 받고 준법의무가 있기에 지위에 걸맞은 자질이 필요하다.
법 자체의 본질내용상 ‘공평정의’ 못지않게, 법과 관련한 인간의 자질품격상 ‘청렴정직’이 요긴한 소이다. 이러한 연유에서 필자는 법의 ‘공평정의’ 실현을 담보할 인간의 ‘청렴정직’을 높이 널리 선양할 의도와 발원에서, 2017년 “포청천과 청렴정직 문화”를 저술해 이듬해(2018) 봄 발행했다. 20년전 ‘시민과 변호사’에 발표한 ‘전통법의 뇌물범죄와 청렴윤리’를 바탕으로, 우리한테 ‘청렴’에 상징적 대표로 친숙한 ‘포청천’의 청렴강직을 자세히 탐구하고, 백이숙제부터 굴원屈原까지 선진先秦 시대에 청렴정신을 발현한 현인들 행적 전기와 선진 제자백가의 청렴정신-철학사상도 소개했다. 끝으로 근대 서양 “뇌물의 역사”(한글 번역판)에 대한 서평을 곁들였다.
이어 2019년에는 “제갈량 평전”을 간행했다. 당초 한漢초부터 청淸말까지 청백리 열전을 엮으려 했으나, 제갈량을 깊이 자세히 탐구하다 보니, 내용과 분량이 너무 방대해져 단행본으로 냈다. 하여 올해 비로소 후한 청백리 양진楊震의 명언 “하늘이 알고 신이 알며 내가 알고 니가 안다!(天知, 神知, 我知, 子知.)”는 주제로, 한부터 청까지 2천여년에 이르는 청렴정직 위인전을 펴내게 되었다. 표제 위인만도 한 6인, 후한 3인과 양진 일가 5대代, 전진前秦과 동진東晋 각 1인, 당 2인, 송과 원 각1인, 명 7인, 청 5인, 총 30여인이나 된다. 거기다 역사상 관련 기사나 일화의 주인공까지 합하면 1백인 가까이 될 것이다. 당초 원말 명초 주원장 창업건국을 보좌한 지략가 류기劉基와 정난靖難에 순절한 충신 방효유方孝孺를 포함했으나, 분량이 너무 방대해져 ‘정난靖難’ 전후 이야기는 따로 펴낼 심산에서 이번에 빼기로 했다.
구체 위인 선정에서 정확한 객관적 기준은 없다고 말하는 편이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당초 유명한 청렴강직 대표 위인 몇 분으로 구상해, 다분히 필자 개인의 주관적 선호도와 집필 과정에서 우연히 이어진 미묘한 인연이 함께 어우러져 이루어진 책이라고 보아주면 좋겠다. 각 위인별로 생존 시기의 원근과 사료기록 자체의 다과多寡 차이가 현저한지라, 서술 분량과 체제도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었던 점도 밝히고 싶다. 분량과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급암과 양진 일가, 왕맹과 적인걸, 그리고 악비가 단연 핵심중추를 이룬다.(류기도 좀 상세히 다뤘으나 뺐다.) 이 다섯 위인은 관련 사료와 후대 역사평론 및 심지어 불교 전적까지 다소 광범위하게 섭렵해 정리했다. 나머지 위인들은 정사正史 본전本傳 기록을 위주로 충실히 소개하되, 관련 기록을 찾아 조금 보충하는 방식을 취했다.
형식체제상 한 가지 밝힐 사항은, 중국고대사에 관한 문헌자료가 주류인 만큼, 인명・지명 등 고유명사 한자어 독음에서 한글 두음법칙을 따르지 않고 고대 자전 반절半切식 독음으로 표기한 점이다. 또 원음과 달리 착오 및 와전으로 우리가 잘못 발음하는 한자도 원칙상 원음으로 적고 그 연유를 각주로 밝혀둔다. 조금 어색하고 낯설지라도 독자들 해량을 바란다.
특히 악비岳飛는 최근 중국에 동북공정 역사왜곡 시도와 관련해 상당히 열띤 논란공방이 펼쳐진 위인인지라, 누리망(인터넷)에서 흥미로운 평론 하나 찾아 완역해 소개하고, 2018년 2학기 전남대 법전원(로스쿨) ‘전통법의 정신’ 과목 수업에서 필자의 번역문을 읽고 과제로 제출한 강姜 동학同學의 개인 감상평도 곁들였다. 필자의 정신에 호응한 강군의 정성에 고마움과 격려를 보낸다.
끝으로, 앞서 펴낸 책들과는 달리, 이 책은 출간 전에 순천대 중국사 전공 차웅환車雄煥 선배교수님이 원고 상태로 정성껏 열독해 교정의견을 제시하고 게다가 추천사까지 써주셔서 특히 감사하다. 필자의 저역著譯 작업에 처음 있는 일이다. 차 교수님은 서울대 기숙사에 묵을 때 처음 알게 되었는데, 나중에 필자가 국립대만대학 유학을 간 1년 뒤 국립정치대학에 유학 와서 2년간 친밀히 지낸 두터운 교분 인연으로, 학기 중 많은 강의와 과중한 교학 외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꼼꼼히 정독하고 중국사 전문가로서 아주 중요한 교정의견을 보내주었다. 차 교수님 정성과 호의에 깊이 감사드린다.
본서에 직접 간접으로 등장한 수많은 선현들과 관련 사료기록을 남겨 전하신 숱한 사군자들, 그리고 지금까지 필자 학문수양에 직간접으로 노심초사 지도편달 헌신하신 스승님들을 비롯한 모든 분들께도 충심으로 존경과 감사와 수희찬탄을 정성껏 바친다. 갈수록 책이 읽히지 않는 시대환경에서 수지도 맞지 않을 졸고를 간행해주는 마로니에(전남대출판문화원) 관계자 여러분께도 심심한 사의를 보낸다. 앞으로 우리나라와 인류사회가 더욱 청렴 정직한 의식개혁으로 공평정의를 잘 실현해 다함께 잘사는 행복한 문화가 꽃피길 간절히 염원하며, 인연 있는 모든 분들과 시대정신을 공유하고자 이 글을 바친다.
기해년己亥年 상강霜降 사오巳午시
빛고을 운암골 철거를 앞둔 19년 우거寓居 연정재淵靜齋에서
보적寶積 김지수金池洙 공경합장_()_
한漢 신도가申屠嘉
총신寵臣을 호통 쳐 황제가 대신 사과한 승상
신도가申屠嘉( ???전 155)는 량(梁: 현재 하남성 상구商丘) 사람으로, ‘신도’가 복성이고 이름이 ‘가’이다. 일찍이 힘센 재관材官으로 류방을 따라 쇠뇌를 발로 밟아 항적을 공격해서 한 부대를 통솔하는 부대장이 되었고, 나중에 경포?布를 공격해 그 공훈으로 도위都尉가 되었다.
혜제 때 회양태수를 거쳐, 문제 원년(전 179)에 5백호 식읍을 특별 하사 받고 관내후가 되었으며, 16년(전 164)에 어사대부가 되었다.
문제 후원後元 2년(전 162) 8월, 장창이 승상 자리에서 물러났다. 문제는 황후 아우인 두광국竇廣?이 현명하고 덕행을 갖추어 승상으로 임명하려다가, “천하 인심이 사사로운 인척관계를 의심”할까 저어해 한참 망설였다. 이에 고조 때 대신 가운데 물색하다가 마땅한 인재가 없다며, 마침내 어사대부 신도가를 승상으로 임명했다.
신도가는 청렴 정직하여 사적인 만남이나 알현을 전혀 받지 않았다.
당시 태중대부 등통鄧通이 문제의 총애를 받아 특별포상으로 수만금을 하사받았다. 문제가 곧잘 등통 집에 가서 술잔치를 벌일 정도로 총애가 지극하자, 등통은 조정에서도 황제 옆에 앉아 무례하게 태만하곤 했다. 신도가가 주청할 사안을 마친 다음 문제한테 그 자리서 아뢰었다.
“폐하께서 특정 신하를 총애하여 부귀를 하사하심은 좋으나, 조정에 예법은 정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자 문제는 “이 문제는 내가 잘 알아서 훈계하고 처리할 테니, 군은 더 이상 말하지 마시오.”라고 대꾸했다. 조회가 파하고 승상부에 돌아오자, 신도가는 곧바로 격문을 써서 등통을 승상부로 오라고 불렀다. 등통이 오지 않자 목을 치려고 했다. 등통이 공포에 떨며 황제한테 간청하자, 문제는 “너는 일단 가라. 내가 바로 사람을 보내 너를 부르겠다.”고 위로했다. 등통이 승상부에 가서 관을 벗고 맨발로 머리를 땅바닥에 조아려 사죄하자, 신도가는 태연자약하니 앉아 답례도 하지 않고 크게 꾸짖었다.
“무릇 이 조정은 고황제의 조정이다. 통은 소신으로 전상을 희롱해 대불경죄를 저질렀으니 마땅히 참해야 한다. 담당관은 지금 당장 참형을 시행하라!”
등통이 황급히 머리를 어찌나 찧어댔던지, 머리가 온통 유혈이 낭자했으나 풀려날 기미가 없었다. 황제는 승상이 이미 등통을 곤욕스럽게 책망했으리라 짐작하고, 이내 부절을 지닌 사절을 보내 등통을 부르며 승상한테 대신 사과했다.
“이는 내가 희롱하는 신하니, 군은 풀어주시오.”
등통이 돌아와 문제한테 울면서 하소연했다.
“승상이 신하를 거의 다 죽였습니다.”
신도가가 승상에 재직한 지 5년이 되어(전 157) 문제가 서거하고 경제가 즉위했다. 경제 2년(전 155), 조착晁?이 내사?史로 황제 총애를 믿고 국정을 좌지우지하며, 법령변경과 제후약화 등 현안 의론에 승상 의견을 무시하였다. 조착은 내사로 동문으로 출입하는데, 불편하다고 새로 남문을 하나 더 낸다며 태상황 종묘 담장을 뚫었다. 이 소식을 들은 신도가는 조착을 주륙해야 한다는 글을 써 올렸다. 누군가 이 말을 조착한테 전하자, 조착은 두려워 밤중에 궁궐에 들어가 황제를 알현하고 하소연했다. 조회 때 신도가가 내사 주착을 주륙해야 한다고 주청하자, 경제는 이렇게 해명했다.
“주착이 뚫은 곳은 진짜 종묘 담장이 아니고 외곽 담장으로, 용관(冗官: 散官)이 거처하는 곳이오. 또 내가 시킨 일이라, 조착은 죄가 없소.”
조회가 끝난 뒤 신도가는 장사長史한테 탄식하며 말했다.
“내 먼저 주착을 참하지 않고 주청하느라 주착한테 매도(농락) 당한 게 통탄스럽다!”
그렇게 회한을 이기지 못하고 귀가해 피를 토하고 죽었다. 시호는 절후節侯다.
신도가 사후에 뒤를 이은 승상들은 그저 청렴근신으로 자리만 지키고 후세에 공명 드리울 능력을 발휘한 자가 없었다. 마치 현대 대한민국 국무총리처럼 얼굴마담으로 전락했나 보다. 한서를 기록한 사관은 신도가가 강직하고 굳세게 절개를 지켰으나, 특별한 술수나 학문이 없어서 소하、조참、진평 등과 견줄 수는 없다고 평론한다.
신도가가 청렴해 승상으로서 사적인 만남이나 알현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와 관련해 아주 흥미로운 일화가 사기 및 한서 원앙袁? 전에 전한다. 원앙도 자주 직간하여 조정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지방 관직을 두루 순회했는데, 롱서도위와 제상齊相、오상吳相을 거쳐 다시 조정으로 귀환하는 길에 승상 신도가를 만났다. 원앙이 수레에서 내려 정중히 배알하자, 승상은 그냥 마차 위에서 답례만 했다. 원앙이 귀가해 부하 관리한테 몹시 민망하고 자괴심이 들어, 이내 승상 집에 찾아가 알현을 청했다. 승상이 한참 만에 나와 만나주자, 원앙은 무릎을 꿇고 말했다.
“원컨대 잠시 틈을 내주시길 청합니다.”
승상이 말했다.
“가사 군께서 말씀하실 게 공적인 일이면, 공부에 가서 담당관(長史?)과 의론해 두시면, 제가 알아서 주청하겠습니다. 허나 만약 사적인 일이라면, 저는 사적인 말은 아예 듣지 않습니다.”
이에 원앙이 무릎을 꿇은 채로 여쭈었다.
“군께서 승상이신데, 스스로 생각하시기에 진평陳平이나 강후絳侯와 비교해 어떠하십니까?”
승상이 답했다.
“그야 제가 그분들만 못하지요.”
그러자 원앙이 말했다.
“좋습니다. 군께서 정말 스스로 그들만 못하다고 인정하십니다. 대저 진평과 강후는 고조를 보필해 천하를 평정하고, 장상이 되어 려태후 족속들을 주륙해 류씨 종실을 보존했습니다. 군께서는 힘센 재관材官으로 발로 쇠뇌를 발사해 부대장이 되고, 공적을 쌓아 회양태수에 이르렀으니, 기묘한 계책으로 성을 공격하거나 야전에 승리한 혁혁한 공훈은 아닙니다. 또 폐하(문제)께서 대왕代王에서 와서 즉위한 이래, 매번 조회 때마다 랑관?官이 상소문을 올리면, 수레를 멈추고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쓸 만한 말이 아니면 방치하고, 쓸 만한 말은 채택해 훌륭하다고 칭찬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천하에 현명한 사대부를 불러들이고자 하심입니다. 황제께서는 날마다 듣지 못했던 걸 새로 들으시고, 알지 못하던 걸 새로 밝히 아시어, 날로 거룩한 지혜를 더해 가시는데, 군께서는 지금 스스로 천하의 입을 재갈 물려 닫게 하고 날로 어리석음을 더해 가십니다. 무릇 거룩한 군주께서는 어리석은 승상을 책망하시리니, 군께서 머지않아 화를 당하실 것입니다.”
그러자 승상이 얼른 일어나 두 번 절하며 말했다.
“가嘉가 비천한 야인이라 잘 몰랐는데, 다행히 장군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방안으로 들게 하여 마주 앉아 최상빈객(上客)으로 모시고 대담했다.
원앙의 뜻인즉, 자신의 청렴결백만 지킨답시고, 승상으로서 본분직책을 스스로 제한해 가두는 어리석음과 폐해는, 승상 관직 설치의 본래 목적과 기능을 외면해 유명무실한 얼굴마담으로 전락할 거라는 우려도 담고 있다. 속된 말로,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랴?’이다. 사람이 만나다 보면 온갖 말이 나오고, 예의를 빙자한 선물이 오가기 마련인데, 거기에 또 갖가지 인정ㆍ사정이 얽히다 보면, 정치적 반대파의 비판공격에 틈새와 실마리ㆍ빌미를 제공하기 십상이다. 그러니 실권이나 능력이 없는 자는 자칫 직무 범위를 벗어나 사알私謁 청탁 및 수뢰의 강력한 올무??법망에 걸려들기 안성맞춤이다. 실제로 역사상 수많은 현인군자들이 그런 함정과 덫에 걸려 희생되었고, 현대에도 정치적 숙청과 사회적 매장에 재물과 남녀관계는 치명적 미끼가 되지 않은가?
한편, 신도가의 7대손인 신도강申屠剛도 후한 초 광무제 때 청렴강직으로 유명했는데, 참고로 뒤에 따로 소개한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