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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인의 마음가짐은 오직 정성과 공경!

인광대사가언록. 수행인의 마음가짐 오직 정성과 공경

by 明鏡止水 淵靜老人 2023. 1. 1. 21:21

본문

5. 수행인의 마음가짐은 오직 정성과 공경!

 

 

 

(: 진리)에 들어가는 문은 많소. 사람들의 뜻과 취향이 일정한 법이 없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오. 그러나 모두에게 공통하는 일정한 것이 있으니, 바로 정성[]’ 공경(恭敬)’이오. 이 두 가지는 미래세가 다하도록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셔도, 결코 바꿀 수 없소. 우리 범부 중생이 업장을 단박에 해소하여 한시 바삐 무생법인을 증득하기 바라면서도, 이 두 가지에 힘쓰지 않는다면, 이는 마치 나무가 뿌리도 없이 무성하게 자라고, 새가 날개도 없이 날기를 바라는 것과 똑같소. 가능하겠소?

세속의 글공부[讀書]는 경외심(敬畏心)이 전혀 없소. 새벽에 일어나 세수와 양치질도 하지 않고, 측간(화장실)에 다녀와서는 손도 안 씻는 이가 있소. 더러 책을 엉덩이 깔개(방석)나 베개로 쓰기도 하오. 밤에 누워서 볼 때는 속옷과 함께 뒹굴고, 책상에 앉아서 볼 때도 온갖 잡동사니 물건과 뒤섞여 있기 일쑤요.

성현의 말씀 적힌 책(경전)을 그저 못 쓰게 된 휴지 조각과 같이 여겨, 조금도 개의(介意)치 않고, 공경하는 낯빛도 전혀 없소. 심지어 선비 집안에서 부녀자들이 그림 그리는 책(연습장)이 모두 경전이고, 사대부 집안에서 머슴들이 물건 닦는 걸레가 모두 책 종이라오.

책을 업신여기고 함부로 대하는 온갖 외설과 모독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소. 폐단이 하도 오래 쌓여 와서, 그 악습을 잘 살필 줄도 모른다오. 그래서 책에 관한 화복(禍福)을 특별히 지적하지 않으면, 대부분 무심코 외설과 모독을 범할 게 틀림없소. 책 내용을 읽어 이익을 얻기도 전에, 책을 함부로 대하는 불경죄(不敬罪)부터 얻을 게 뻔하오. 이처럼 무지(無知)로 범하는 죄가 불쌍하거든, 미리 잘 일깨우고 타일러야 할 것이오.

염불 법문은 지극히 간단하고 평이하면서도, 지극히 넓고 큰 법이라오. 반드시 지극히 간절하고 지성(志誠)스러워야, 바야흐로 부처님과 감응의 길이 트여 진실한 이익을 얻을 수 있다오. 만약 조금도 정성과 공경심이 없이 게으르고 싫증나게 염불한다면, 비록 먼 미래의 원인을 씨 뿌리기는 하겠지만, 태만과 불경의 죄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오. 설사 인간이나 천상에 다시 날 수야 있겠지만, 극락세계 왕생하여 연지해회(蓮池海會)에 동참하기는 결단코 어렵소.

그리고 불상(佛像)은 마땅히 진짜 부처님으로 모셔야 하며, 단지 흙이나 구리, 쇠로 빚고 나무로 깎아 만든 우상으로 간주해서는 안 되오. 또 경전(經典)은 삼세 모든 부처님의 스승이자, 여래의 법신사리(法身舍利)이므로, 역시 진짜 부처님으로 대해야 하오. 결코 종이 위에 인쇄한 먹물(잉크) 자국으로 간주해서는 안 되오.

경전과 불상을 대할 때는, 마치 충신(忠臣)이 성왕(聖王)을 받들어 모시듯 하고, 효자가 부모님의 유훈(遺訓)을 읽는 듯이, 공경과 정성을 다해야 하오. 이렇게만 한다면, 소멸하지 않을 업장이 없으며, 복록과 지혜가 부족할 리 없을 것이오.

요즘 사대부(지식인) 가운데 불교를 공부하는 자가 상당히 많소. 그러나 대부분 경전의 문장을 읽고 그 의미만 이해하여, 그걸 주둥아리[口頭]로 지껄일 화제거리나 삼는 듯하오. 아주 해박하고 통달한 대가의 명예나 얻으려고 말이오. 하지만 공경과 지성으로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자는, 정말로 찾아보기도 힘든 형편이오.

나는 늘상 불법에서 진실한 이익을 얻고 싶거든, 모름지기 공경 가운데서 찾으시오.”라고 말하오. 한 푼의 공경을 지니면, 한 푼의 죄업이 소멸하고 한 푼의 복덕과 지혜가 증가하며, 열 푼의 공경을 지니면, 열 푼의 죄업이 소멸하고 열 푼의 복덕과 지혜가 증가하기 때문이오. 물론 공경심이 전혀 없이 외설과 교만만 부린다면, 죄업만 더욱 늘어나고 복과 지혜는 더욱 줄어들 것이오. 그러니 어찌 슬프지 않겠소?

예불이나 경전 독송, 주문(진언), 염불 등의 각종 수행은, 모름지기 모두 정성과 공경을 위주로 해야 하오. 경전에서 설한 공덕이 설령 범부 중생의 지위에서 원만히 얻어질 수 없을지라도, 만약 정성과 공경만 지극하다면, 그로 말미암아 얻는 공덕만도 이미 생각하고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크다오.

그러나 정성과 공경이 없다면, 배우가 노래 부르고 연극하는 것과 같을 뿐이오. 배우의 희로애락은 마음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허위와 가식에 속하지 않소? 마찬가지로 정성과 공경이 없으면, 설령 공덕을 쌓더라도 인간과 천상의 바보스런 복덕[人天癡福]에 불과하게 되오. 이 바보스런 복덕은 반드시 악업을 짓는 원인이 되어, 장래 그칠 기약 없는 고통의 씨를 뿌리게 된다오.

 

[이는 바울이 설령 인간의 모든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게 없다(고린도전서 13: 1 참조).”고 말한 내용과 실질상 일맥상통한다. 불성평등(佛性平等)의 근본 바탕 위에 진리[]와 중생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정성과 공경이 나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성 공경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말이지만, 또한 온 세상 사람이 잘 (행할 줄) 모르는 길[]이기도 하오. 나는 죄업이 몹시 무거워서, 그 죄업을 해소하고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려고, 고승 대덕들의 훌륭한 수행 모범을 무던히도 찾아보았소. 그래서 비로소 정성과 공경이야말로, 정말 평범을 초월하여 성인에 들어가고, 생사윤회를 해탈할 수 있는 지극히 미묘한 비결임을 알게 되었다오. 그 뒤로 나는 인연 있는 사람을 만나면, 항상 이것을 간곡히 말해 주고 있소.

 

[노자(老子)도 일찍이 큰 길은 몹시 평탄한데, 백성들은 지름길(샛길)만 좋아한다(큰 도는 몹시 평범하고 쉬운데, 사람들은 기이한 술수만 좋아한다. 大道甚夷, 而民好徑.).”고 말했고,  내 말은 알기도 몹시 쉽고 행하기도 몹시 쉬운데, 천하 사람들은 알 줄도 모르고 행할 줄도 모른다[吾言甚易知, 甚易行, 天下莫能知, 莫能行.].”고 탄식한 적이 있다. 신원행(信願行)으로 염불하여 극락왕생하는 정토 법문이야말로 노자의 대도(大道)와 똑같다.]

 

[참고로, 우리나라 조선시대 때 성리학에서, 율곡(栗谷)은 정성을 위주[主誠說]로 하고, 퇴계(退溪)는 공경을 위주[主敬說]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성과 공경은 본디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마치 동전의 앞뒤와 같은 관계이다. 다만 어감상, 정성은 내면의 마음에, 공경은 외부의 언행에, 각각 치중하는 느낌을 준다. 정성이 밖으로 나타날 때 공경이 되고, 공경의 안(밑바탕)에 정성이 자리한다고 보면 좋겠다.]

 

경전 공부[閱經], 만약 법사(法師)가 되어 중생에게 가르쳐 주고자 한다면, 먼저 경전 원문[經文]을 읽은 뒤 주석과 해설[註疏]을 연구해야 하오. 그래서 정신력이 충분히 넘치고 견해와 안목이 남달리 뛰어나지 않으면, 마음과 정력만 헛되이 소모하고 세월만 낭비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오.

그러나 만약 분수에 맞추어 몸소 경전에서 진실한 이익을 얻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지성스럽고 간절하며 몸··생각의 삼업을 청정히 가다듬어야 하오. 혹은 먼저 한참 동안 단정히 앉아, 몸과 마음을 안정시키고 정신을 집중한 다음, 부처님께 예배드리고 낭송이나 묵송하든지, 아니면 먼저 부처님께 예배드린 뒤 잠시 단정히 앉아 있다가 경전을 펼치든, 순서야 모두 괜찮소.

경전을 독송할 때는, 반드시 몸을 단정히 앉은 다음, 성인(불보살)의 얼굴을 직접 대하고 자상한 가르침의 목소리를 몸소 듣듯이 해야 하오. 혹시라도 감히 한 순간 권태나 시비 분별의 생각도 일으켜서는 안 되오. 처음부터 끝까지 죽 읽어 내려가되, 문자든 의미든 전혀 따지거나 음미하지 않는 거요.

이와 같이 경전을 독송하면, 근기가 뛰어난 사람은 곧 두 가지 텅 빈 공[二空]의 이치를 깨닫고, 실상법(實相法)을 증득할 수 있소. 또 근기가 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업장을 소멸시키고 복과 지혜를 증진시키는 실익을 얻게 되오.

 

[두 가지 텅빈 공[二空]:  인공(人空): 또는 아공(我空생공(生空)이라고도 하는데, 나와 남, 중생이 텅 비어 실재함이 없다는 진리. 이승(二乘: 성문·벽지불)이 이를 깨달아 무아의 진리에 들어감.  법공(法空): 모든 법이 텅 비어 없다는 진리로, 보살이 깨닫는 대상임. 이 밖에도 법에 진실한 성품이 없다는 성공(性空), 그로 말미암아 가지는 이름과 모습(名相)도 진실하지 않은 거짓이라는 상공(相空)으로 나누어 말하기도 한다.]

 

육조(六祖) 혜능(慧能) 대사가 단지 금강경을 보기만 하면, 곧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볼 수 있다[但看金剛經, 卽能明心見性.].”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와 같이 보는 방법을 가리킬 따름이오. 그래서 단지[]’라고 말씀하신 것이오. 이와 같이 보기만 한다면, 모든 대승 경전이 다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보게 해 줄 것이오. 어찌 꼭 금강경만 그러하겠소?

만약 이 구절은 무슨 의미이고, 이 단락은 무슨 취지라고 해석하면서, 계속 분별만 해보시오. 이는 완전히 범부의 속된 감정과 망상으로 추측하고 헤아리는 짓에 불과하오. 어떻게 부처님의 본래 뜻에 그윽이 부합하고, 경전의 본래 취지를 원만히 깨달을 수 있겠소? 하물며 업장이 소멸하고 복과 지혜가 높이 증가하길 바랄 수 있겠소?

만약 공경할 줄 안다면, 독송 자체로 착한 뿌리[善根]를 다소나마 심을 수 있다오. 하지만 세간의 일반 서생들이 책 읽듯 대한다면, 외설과 태만의 죄가 산처럼 높아지고 연못처럼 깊어질 것이오. 바로 착한 원인(동기)으로 악한 결과를 초래하는, 어리석은 무리들이오.

옛 사람들은 경전 듣기[聽經]에 오로지 치중했다오. 마음에 분별을 일으킬 수 없는 장점 때문이었소. 한 사람이 소리를 내어 경전을 독송하면, 다른 사람이 옆에서 마음을 집중해서 잘 듣는 방법이오. 한 글자 한 구절마다 또렷하고 분명히 듣도록 마음을 오롯이 집중시키고, 바깥 사물의 소리나 빛은 일체 끼어들지 못하게 막는 것이오. 만약 조금이라도 느슨해지거나 한눈팔면, 금방 끊어져 경전의 문장이 죽 관통할 수 없소. 때문에 고도의 정신 집중력을 요구하는 것이라오.

경전을 독송하는 사람은 눈으로 문장을 따라가며 보기 때문에, 마음을 크게 가다듬지 않아도 대강 뚜렷하게 독송할 수가 있소. 그러나 듣는 사람은 오직 소리에만 의탁하기 때문에, 한 순간만 정신을 놓거나 딴전 피우면, 곧 문맥이 끊어져 연결되지 못하게 되오.

만약 이와 같이만 듣는다면, 지성으로 공경스럽게 독송하는 공덕과 같게 되오. 그리고 독송자가 별로 공경스럽지 못하게 독송한다면, 그 공덕이 오히려 공경스럽게 듣는 자보다도 못하게 될 것이오. 요즘 사람들은 불경 보기를 마치 헌 종이처럼 여기고, 경전 올려놓는 책상 위에도 온갖 잡다한 물건을 경전과 함께 어지럽게 쌓아 놓는 경우가 많소. 경전을 독송할 때도 손도 씻지 않고, 입 속도 헹구지 않으며, 더러 몸을 이리 저리 흔들기도 하고, 더러 발을 높이 치켜 올리기도 하오. 그 밖의 온갖 방자한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하면서, 경전을 독송하여 죄업을 소멸하고 복을 얻으려고 하는구려. 아마도 오직 불법을 파괴·소멸시키려는 마왕(魔王)이나 이를 기뻐하고 찬탄하면서, “아주 활기 발랄하고 융통성 있으며 원만하여, 대승 불교의 집착 없는 미묘한 도에 딱 부합한다.”고 증명할 것이오. 그러나 진실로 수행하는 불자가 이를 보면, 혼자 암담하니 마음만 상하여 눈물이나 흘리며, 악마의 권속들이 창궐함에 어찌할 줄 모르고 탄식할 게 틀림없소.

지혜로운 자는 경전을 독송하여 활연히 크게 깨닫고 고요히 선정에 들기도 하는데, 이러한 경지를 어떻게 분별심으로 얻을 수 있겠소? 어떤 고승 대덕은 법화경을 쓰는데[寫經], 어찌나 한 마음으로 오롯이 정신 집중했던지, 모든 분별 감정이 텅 비어 버려, 하늘이 이미 어두컴컴해졌는데도 계속 써 내려갔다오. 한참 뒤 시자(侍者)가 들어와 보고는 깜짝 놀라며, “하늘이 이미 어두컴컴해 졌는데 어떻게 글씨를 쓰십니까?”라고 묻자, 그때서야 손을 펴 보았으나, 손바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고 전하오.

이처럼 경전을 보고 쓰면, 참선으로 화두를 드는 것이나 주문을 외고 염불하는 수행과 무엇이 다르겠소? 모두 한결같이 한 마음으로 뜻을 집중하는 것이라오. 공부를 오래 지속하다 보면, 저절로 확 크게 트이는 날이 있을 것이오.

() 나라 때 설교(雪嶠) 원신(圓信) 대사는 영파부(寧波府) 소재지 사람으로, 낫 놓고 기역자도 몰랐다오. 중년에야 출가하여 아주 고생하며 힘써 참구했다오. 남들이 참을 수 없는 걸 죄다 참고, 남들이 할 수 없는 일도 모두 했다오. 그 고행은 정말 어지간한 수행자도 하기 어려운 것이었는데, 오래 지속하여 결국 확철대오하였다오.

그 뒤 그의 입에서 거침없이 나오는 말은, 모두 선기(禪機)에 미묘하게 들어맞는 설법이 되었소. 그때만 해도 아직 글자를 모르고 쓸 줄도 몰랐는데, 한참 지나 글자를 저절로 알게 되었고, 다시 한참 뒤에는 손에 붓을 잡고 종횡무진으로 글씨를 써 내려가는 대서예가 명필이 되었다오.

이러한 모든 이익은 한결같이, 분별심 없이 오롯이 정신 집중하여 참구하는 수행 안에서 나온 것들이오. 경전을 보고 독송하는 공부도, 마땅히 이러한 방법을 최고 모범으로 삼아야 하오.

경전을 볼 때는 절대로 분별심을 일으켜서는 안 되오. 그러면 자연히 잡념 망상이 스러지고 천진(天眞)스러움이 드러나게 되오. 만약 경전 내용의 이치(의미)를 연구하거나 주석 해설을 뒤적여 보고 싶거든, 마땅히 별도의 시간을 내서 연구에만 종사하는 게 좋겠소.

물론 연구할 때는 독송할 때만큼 엄숙하지 않아도 괜찮소. 그렇지만 전혀 공경스럽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오. 다만 독송할 때에 비해서 다소 편안하고 자유스러울 수 있다는 의미라오. 아직 업장이 해소하고 지혜가 밝아지기 이전에는, 모름지기 독송을 위주로 삼으시오. 연구는 대략 간단히 수반하는 정도로 하는 게 좋소.

그렇지 않으면 온 종일, 그리고 한평생 단지 연구에만 종사해도 끝이 없소. 설령 그렇게 연구하여 구름을 헤치고 달을 본다고 할지라도, 이는 방문을 열고 먼 산을 한 번 쳐다보는 것과 같아서, 단지 입만 살아 있는 꼴[口頭活計: 口頭禪과 비슷한 의미]이 되고 마오. 마음과 성품 수행이나 생사 해탈 같은 근본 문제와는, 조금도 상관이 없게 되오. 그래서 섣달 그믐날(임종의 상징 비유)이 들이닥치면, 터럭 끝만큼도 쓸모가 없는 물건으로 판명 날 게 틀림없소.

만약 앞에서 말한 대로만 경전을 독송한다면, 반드시 업장이 소멸하고 지혜가 밝아지며, 세 가지 감정 견해[三種情見]가 언제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르게 텅 비어 버릴 것이오. 그러나 만약 그렇게 독송하지 않는다면, 세 가지 감정 견해가 생기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도 없거니와, 숙세의 업력이 발동하여 사견(邪見)을 일으키고, 인과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면 부정하게 될지도 모르오.

 

[ 세 가지 감정견해[三種情見]: 세 가지 보는 미혹[三種見惑]을 가리키는 듯함. 출생과 함께 타고 나는 보는 미혹[俱生見惑], 각종 사건에 부닥쳐 이치로 미루어 생기는 보는 미혹[推理見惑], 학문 따위를 닦아 아주 견고해진 보는 미혹[發得見惑]으로 일컬어진다.]

 

나아가 사음·살해·절도 따위의 온갖 흉악한 번뇌 죄업이 불길처럼 치열하게 솟아 이어지는데도, 오히려 대승 수행인은 일체 걸림이 없는 법이라고 스스로 강변할 것이오. 마침내는 마음이 평안하면 어찌 계율을 지키는 수고로움이 있겠는가?[心平何勞持戒?]”라는 육조 혜능 대사의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인용하면서, 모든 계율은 깨뜨리면서도 깨뜨림이 없어야 비로소 진짜 지키는 것이라고 견강부회할 것이오.

수행인이 진실한 정법을 얻기란 정말로 몹시 어렵소. 그래서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이 한결같이 정토 법문을 주장하고 권하신 것이오. 부처님의 자비력을 받아서, 업력이 발동하지 못하도록 제압하고 조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마땅히 염불을 주요 수행으로 삼고, 경전 독송을 보조 수행으로 곁들여야 하겠소.

무릇 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뒤, 남아 있는 것은 오직 경전과 불상뿐이오. 그래서 만약 흙이나 나무·금속·물감으로 조성한 불상을 진짜 부처님으로 여기고 받든다면, 업장을 소멸시키고 번뇌와 미혹도 깨뜨리며, 삼매를 얻어 생사윤회도 벗어날 수가 있다오. 그러나 만약 흙이나 나무·금속·물감 따위로 간주한다면, 그저 평범한 흙·나무·금속·물감 덩어리에 불과하게 되오. 문제는 단순한 흙·나무·금속·물감 덩어리라면 모독해도 허물이 없지만, ·나무·금속·물감으로 조성한 불상을 모독하면, 그 죄가 하늘을 가득 채운다는 점에 있소.

그리고 불경이나 조사 어록을 독송할 때도, 바로 눈앞에 부처나 조사들이 나타나 나에게 친히 설법해 주시는 것처럼 여기고, 조금도 소홀함이나 태만함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오. 정말 이와 같이 행하는 이가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이 반드시 구품연화 위에 우뚝 올라, 진리를 철두철미하게 증득할 것이라고 감히 말하겠소.

그렇지 않다면, 이는 문자 유희(文字遊戱: 글자놀음, 말장난)의 법문일 따름이며, 그로부터 얻는 이익도 단지 박학다식에 불과하게 되오. 말하기는 청산유수처럼 또렷하고 명료한데, 조금도 진실로 받아 쓰지[受用]는 못하오. 길거리에서 주워듣고 길거리에서 지껄이는 것을 능사(能事)로 삼는 자들이오.

옛 사람들은 삼보(三寶)에 대해서 모두 진실한 공경심을 품었으며, 결코 입으로 빈말이나 그럴 듯하게 지껄이지는 않았소.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입으로조차 굽힐 굴() 자 하나 말하려고 하지 않는구려. 하물며 몸소 굽혀 실행하기를 기대하겠소?

나는 최근 손가락을 찔러 흘러나오는 피로 경전을 쓰는[寫經] 사람을 보았는데, 단지 업장만 지을 뿐 공경심이라곤 전혀 없었소. 피를 내어 경전을 쓰려면, 한 번에 상당히 많은 피를 흘려야 하오. 그런데 봄가을에는 이삼일 지나면 냄새가 나고, 여름 같으면 반나절만 되면 금방 악취가 나기 마련이오.

또 피가 말라 붙으면, 글씨를 쓸 때 물로 다시 개어 써야 하오. 그렇게 쓴 글씨는 거칠기 짝이 없어, 전혀 공경스럽지 못한 것이오. 이는 혈서(血書)로 자신의 의지와 정성을 표현한 것이라기보다는, 아마도 단지 자기가 피로 경전을 쓸 정도로 진실한 수행을 하고 있다는, 헛된 명성을 널리 떨치려고 하는 과시욕의 소치로 보이오.

사경(寫經: 경전 쓰기)은 병풍 서예와 다르오. 그 정신은 본받되, 그 기법은 꼭 따를 필요가 없소. 사경은 마치 진사(進士)가 조정에서 책문(策文)을 쓰듯이, 한 글자 한 획도 생략하거나 적당히 흘려서는 안 되오. 필체는 반드시 정자체(正字體: 楷書)에 따라야 하며, 일반인들이 보통 쓰는 서간체는 절대 써서는 안 되오. 예로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행서(行書)와 초서(草書)체로 사경하여 왔는데, 나는 절대로 찬성하지 않소.

 

[책문(策文): ()은 옛날 과거 시험의 한 체제로, 주로 조정의 과거시험(會試 또는 殿試)에서 내리는 정치 사회 경제적인 현안(또는 가상) 문제에 대해, 해결 방안을 논술하는 방식임. 대책(對策정책(政策)이라는 용어도 여기서 나왔음.]

 

요즘 사람들은 경전을 쓸 때 마음 내키는 대로 휘갈겨 쓰는데, 이는 사경이 아니오. 단지 경전 쓰는 것으로 습자(習字: 서예 연습)를 삼거나, 아니면 자기 필적을 후세에 남기고 싶어서 쓰는 것뿐이오. 그런 식으로 경전을 쓰더라도, 물론 전혀 이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미래세에 제도 받을 수 있는 원인을 심는 데 불과하오. 그러나 불경(不敬)과 오만의 죄도 또한 결코 작지 않음을 유념해야 하오.

그대가 쓴 법화경을 보니, 그 필법이 굳세고 힘이 넘치며 아주 빼어나, 경탄을 금할 수 없었소. 그러나 붓놀림[用筆]이 아직도 문인(文人)의 습기(習氣: 버릇)를 다 버리지는 못하였소. 또 속체(俗體)나 첩체(帖體변체(變體) 등을 섞어 써, 통속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오. 때문에 불법(佛法)의 도()를 널리 유통시키기에는 적합하지 못한 듯하오.

또 고체(古體)를 고집하여 쓴 글자도 많았소. 예컨대, (마귀 마) 자를 (갈 마)로 쓰고, (걸 현) 자를 (고을 현)으로 썼으며, 瑪瑙(마노차거) 馬腦車渠로 쓰고,  으로 쓴 것 등인데, 이는 시대에 어긋나는 폐단이 있소.

반드시 모두 고문(古文)에 따르겠다고 고집한다면, 지금 통용하는 정자체(正字體)를 거의 다 쓸 수 없을 것이오. 거의 모든 글자를 옛 글자체로 바꾸다 보면, 한 글자도 그대로 쓰기 어려울 것이오. 그래서 양인산(楊仁山)은 옛 것에 집착하는 이를 비판하면서, “글자는 모름지기 시대에 따라야 하지, 어찌 꼭 옛날에 집착한단 말인가?[字須遵時, 何必泥古?]”고 반문하였소.

 

[양인산(楊仁山: 18371911) 청말의 불교학자. 본명은 문회(文會), 인산(仁山)은 자(). 안휘성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박학다식하고 노장(老莊)의 학문에도 통달하였으며, 글도 잘 씀. 27세 때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보고 불학(佛學)에 뜻을 둠. 나중에 남경(南京)으로 이주하여 금릉각경처(金陵刻經處)를 창립, 불경을 간행하기 시작함. 동시에 기원정사(祇洹精舍)와 불학연구회(佛學硏究會)를 창설하여, 중국 불교학교의 효시가 됨. 일본의 유명한 승려인 南條文雄과 친구였는데, 그의 도움으로 중국에 없는 많은 불교 서적을 일본에서 입수하여 다시 간행함. 대종지현문본론략주(大宗地玄文本論略注), 등부등관잡록(等不等觀雜錄), 불교초학과본(佛敎初學課本: 불교입문 교과서) 등의 저서가 있으며, 금릉각경처에 전국 각지에서 간행한 불교 서적 목판(木版) 십여 만 장을 모아 소장함.]

 

만약 반드시 고체를 따르고자 한다면, 먼저 사람 인() 자와 들 입()자부터 고쳐 보는 게 어떻겠소? 옛날에  자는 로 썼고,  자는 으로 썼다오. 만약   두 글자를 고칠 수 없다면, 다른 글자들만 어찌 특별히 고칠 필요가 있단 말이오?

또 고체(古體)라는 것도, 맨 처음에 창힐(蒼頡)이 창제한 글자는 결코 아니오. 문자가 처음 만들어진 뒤, 몇 번이나 바뀌어 지금의 글자체가 되었는지도 알 수 없소. 그대가 옛 것을 좋아하여 벌레 무늬와 새 글자[蟲文鳥書]를 정자체로 삼는다면, 나는 더 이상 가타부타하지 않겠소.

그렇지 않다면, 결국 아무 일 없어도 되는데, 공연히 일을 만드는 꼴이 되고, 별 공덕도 없으면서 헛수고만 할 것이오. 지금 시대에 순응하고 옛 것을 따르지 않음은, 일찍이 성현들도 분명한 가르침을 남기셨소. () 거사가 경전의 유통(보급)에 뜻이 있다면, 마땅히 문인(文人)들의 고질 버릇을 내버리고, 글자마다 시대에 따라 써야 할 것이오. 속자체(俗字體)나 약자체(略字體) 따위는 일체 쓰지 말고, 한 글자 한 획을 모두 법도에 맞게 써야 하리다.

경전 독송은 오직 공경을 다해야, 바야흐로 이익을 얻을 수 있소. 만약 공경스럽지 못하다면, 설령 이익을 얻더라도, 자구의 의미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이익에 불과하게 되오. 업장이 소멸하고 지혜가 밝아져, 자기 마음을 확연히 깨닫는 커다란 이익은, 결단코 적당히 스쳐 지나가는 경전 읽기로 요행히 얻을 수 없소. 더구나 불경(不敬)과 태만의 허물만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게 짓게 되오. 이는 온 세상 사람들의 공통된 고질병이라,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며 길이 탄식할 일이라오.

예불 의식은, 몹시 바쁜 사람의 경우, 특별히 정해 둘 필요가 없소. 다만 간절하고 지성스럽게 입으로 부처님 명호를 염송하면서, 몸으로 부처님 발아래에 예배드리면 충분하오. 부처님이 바로 앞에 나타나 계신 것처럼 정성만 다하면 되오.

부처님 진신사리(眞身舍利)에 예배드릴 수 없고, 총림(叢林)의 선지식들을 찾아가 친견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무슨 아쉬움이 있겠소? 단지 불상을 보고도 진짜 부처님처럼 생각하고, 불경과 조사 어록을 보면서 부처님이나 조사들이 직접 눈앞에서 자기에게 설법해 주신다고 생각하면서, 소홀함이나 태만함 없이 공경과 정성만 다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오. 그러면 온 종일 부처님과 보살·조사·선지식들을 친견하고 설법을 듣는 셈이니, 사리나 총림을 따로 말할 필요가 있겠소?

보살의 명호가 새겨진 베를 예배용 방석에 쓰는 것도 이미 지극한 모독죄가 되는데, 하물며 좌선용 방석에 쓴단 말이오. 내가 광서(光緖) 20(1894) 보타산(普陀山)에서 한 번 본 일이 있는데, 이듬해 육왕(育王)에서 다시 보고는 몹시 괴이하게 여겨, 사리전(舍利殿) 전주(殿主)에게 말을 꺼냈소. 그랬더니 그는 이것이 영파(寧波)의 풍속입니다.”고 답해 왔소.

나는 이러한 잘못된 악습을 뜯어 고칠 힘이 없어 몹시 부끄러웠소. 만약 내가 한 지방의 주인이 된다면, 반드시 이러한 행위의 잘못을 널리 크게 알리겠소. 그래서 신심 있는 불자들이 무지로 인한 손해를 당하지 않고, 오직 이익만 보도록 하고 싶소.

크게 깨달으신 세존께서 설하신 일체의 존귀한 대승 경전은, 현교(顯敎)나 밀교(密敎)를 막론하고, 모두 그 근본 도리(道理)가 유심(唯心)에 바탕하고 실상(實相)에 부합하오. 그래서 과거·현재·미래 삼세가 다하도록 바뀌지 아니하고, 십법계가 모두 함께 준수한다오. 원시 근본으로 되돌아가니 모든 부처님을 인도하는 스승이시고, 고통을 제거하고 즐거움을 주니, 중생의 자비로운 아버지시오.

이러한 대승 경전을 정성과 공경을 다해 받아 지니고 독송할 수만 있다면, 자신과 남이 함께 수승한 이익을 받고, 유명(幽冥: 무형의 陰界)과 현명(顯明: 유형의 陽界) 중생 모두 자비 광명의 은혜를 입게 되오. 마치 여의주(如意珠)가 아무리 원해도 부족함이 없고, 아무리 써도 다함이 없이, 마음대로 나토어 소원을 채워 주는 무진장(無盡藏)의 보배이듯 말이오.

능엄경(楞嚴經)에서 말한 대로, 아내를 구하면 아내를 얻고, 자식을 구하면 자식을 얻으며, 삼매를 구하면 삼매를 얻고, 장수를 구하면 장수를 얻으며, 이렇듯이 계속 나아가 대열반을 구하면 대열반조차 구할 수 있소. 대열반이란 바로 궁극의 과보 공덕이지 않소?

만약 여래의 본래 마음을 논하자면, 계경(契經)의 모든 위신력이 바로 여기에 해당하오. 다만 중생의 의지와 발원이 너무도 형편없이 약하고 작은데다가, 정성조차 지극하지 못해, 경전의 위신력(공덕력)에 곧장 그대로 계합(契合)하지 못하는 것뿐이오. 그래서 각자 마음 쓰는 대로, 자기 소원만큼만 채우는 것이오.

 

[계경(契經): 계범(契範계선(契線)이라고 부르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록한 경전을 가리킴. ()는 계합(契合부합(符合)의 뜻으로, 경전의 가르침(내용)이 중생의 근기에도 들어맞고, 정법의 이치에도 부합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숙세의 근기가 몹시 깊고 두터운 선비 같으면, 자신의 성품을 단박 깨닫고 유심(唯心)의 도리를 철저히 증득하여, 번뇌와 미혹을 쳐부수고 곧장 보리(菩提)로 달려 나갈 수 있소. 그래서 복과 지혜를 원만히 갖추고, 깨달음의 도를 재빨리 성취할 것이오. 이것이 바로 계경(契經)의 온전한 이익을 획득하고, 여래의 본래 회포를 활짝 풀어 펼치는 길이오.

비유하자면, 똑 같은 비가 내려 만물을 두루 적시매, 모든 초목이 함께 무성히 자라는데, 뿌리가 큰 나무는 구름을 꿰뚫고 태양을 뒤덮을 정도로 성장하기도 하고, 뿌리가 작은 나무는 고작 한 치나 반 푼밖에 못 자라기도 하는 것과 비슷하오. ()는 본디 유일의 진여(眞如)인데, 중생이 거기서 얻는 이익은, 각자의 마음(근기)에 따라 우열이 달라지는 것이오.

그렇지만 착한 뿌리를 심어만 놓으면, 부처의 과보가 끝내 완성되고 만다오. 설령 곧장 거대한 이익을 얻지는 못할지라도, 틀림없이 이 착한 인연으로 말미암아 해탈하게 되오. 독약을 바른 북 소리는 멀리서나 가까이서나 듣는 자가 모두 죽고, 금강(金剛) 조각은 아무리 조금만 먹어도 결코 소화시킬 수가 없소. 처음에 욕망의 갈고리로 끌어당기다가, 나중에 부처님 지혜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걸 일컫지 않겠소?

경전에 보면, “사람 몸 얻기 어렵고, 부처님 법 듣기 어렵다[人身難得, 佛法難聞.].”고 말씀하셨소. 숙세의 인연이 있지 아니한 중생은, 불경의 이름자조차도 들을 수 없거늘, 하물며 불경을 받아 지녀 독송하고, 착한 인연을 닦아 과보를 증득할 수까지 있겠소?

그렇지만 여래께서 설하신 가르침은, 실지로 중생이 마음에 본디 갖추고 있는 이치에 의한 것이며, 마음과 성품 밖에서는 어떠한 법도 전혀 얻을 수가 없소. 다만 중생이 미혹해 있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뿐이오. 그래서 진여실상(眞如實相) 가운데서 잡념 망상과 집착을 헛되이 내는 것이오. 여기서부터 탐욕·성냄·어리석음의 삼독(三毒)이 일어나고, 살생·사음·도적질의 죄악이 저질러지기 시작하오. 지혜를 잃어 번뇌가 되고, 상주(常住: 항상 머무름) 안에서 생멸(生滅: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여, 영겁토록 되돌이킬 줄 모르고 있소.

다행히 여래께서 설하신 현교(顯敎)와 밀교(密敎)의 각종 대승 경전을 만나서, 바야흐로 옷 속에 구슬이 본래 있었고, 불성(佛性)이 여전히 존재함을 알게 되었소. 객지에서 허름한 나그네 신세로 떠돌던 사람이, 원래는 부귀한 장자(長者)의 진짜 아들이었던 것이오.

마찬가지로, 인간과 천상의 육도 중생계가 결코 우리 자신의 거주처가 아니며, 실보(實報) 적광(寂光)의 극락정토야말로 본래 고향인 것이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시작도 없는 과거세부터 여태까지 불법을 제대로 듣지 못했기 때문에, 이처럼 진귀한 마음과 성품을 본래 지니고 있으면서도, 아무 까닭도 없이 억울하게 윤회 고통을 받아 왔소.

정말로 눈물을 펑펑 쏟으며 대성통곡하여 소리가 삼천대천세계를 진동하고,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며 창자가 조각조각 끊어질 일이오. 그러니 부처님의 이러한 은혜와 공덕을 생각하면, 어찌 천지자연이나 부모의 백천만 배밖에 안 되겠소? 설령 이 몸이 다 부서지고 뼈가 가루가 되도록 보답할지라도, 부처님의 은혜는 다 갚을 수 없을 것이오.

요즘 사람들은 승가나 속세를 막론하고, 불경을 펼쳐 봄에 전혀 정성과 공경이 없소. 온갖 태만과 모독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라오. 이런 나쁜 습관이 하도 오래 계속되어 왔기에, 너나할 것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소. 여래의 가르침이 담긴 글을, 그저 못쓰는 휴지 조각처럼 여기기 일쑤요. 경전의 뜻을 모르는 사람에게 전혀 이익이 없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설사 여래의 진실한 의미를 깊이 안다고 할지라도, 고작 구두삼매(口頭三昧)와 번지르르한 낯빛에 지나지 않소. 마치 굶주린 자가 밥을 말하고, 가난한 자가 보배를 세어 보기만 하는 것과 같소.

비록 연구의 공덕은 있을지라도, 실증(實證)의 이익은 절대로 없소. 하물며 태만과 모독의 죄가 하늘을 가득 채워, 그 고통을 오랜 겁토록 기약 없이 받아야 한다면, 오죽하겠소? 착한 원인(동기)으로 악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오. 설령 장래에 제도 받는 원인이야 되겠지만, 그때까지 받을 고통이 얼마나 크겠소? 그래서 안쓰럽고 슬픈 마음에서, 경전 독송 자세의 이해득실을 간략하게나마 감히 말하는 것이오. 부처님 가르침대로 받들어 행하여, 손해는 보지 않고 이익만 얻기를 바라는 뜻에서라오.

금강경에 보면, “만약 이 경전이 있는 곳이면, 곧 부처님이나 존귀한 제자가 계신 것 같다.” “어느 곳이나 이 경전이 있으면, 일체 세간의 천상·인간·아수라 등이 마땅히 공경해야 한다. 이곳이 바로 탑이므로, 모두 공경스럽게 예배드리고 주위를 돌며 온갖 꽃과 향을 뿌려야 하리라.”는 등의 말씀이 여러 번 나오지 않소?

왜 이와 같이 하도록 말씀하셨겠소? 일체의 부처님과 부처님의 아누다라삼먁삼보리(阿褥多羅三三菩提)법이, 모두 이 경전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라오. 모든 대승경전이 도처에서 사람들에게 경전을 공경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한두 군데가 아니라오.

 

[ 아누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三菩提): 전에는 무상정변지(無上正知무상정변도(無上正道진정변지(眞正知)로 번역했으나, 지금은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으로 옮긴다. 진정 평등한 깨달음의 지혜로, 일체 진리의 무상 지혜를 뜻한다. 범어(梵語)로는 Anuttara-samyak-saṁbodhi(또는 anuttarāyāṁ samyaksaṁbodhau: 최봉수 편 극락장엄경)이다.

는 중국 한문자전(漢文字典)에는 주로 乃豆切’()로 읽되, 더러 奴沃切’()으로도 읽는다고 정의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한문 옥편에는 로 적혀 있으며 국어사전에도 분명히 아누다라삼먁삼보리로 실려 있다. 원어로 보나 보통 한문 발음으로 보나 로 읽어야 적절할 듯한데, 정작 우리 불교계에서는 거의 다 으로 읽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초판이 나온 뒤 규장각(奎章閣)에서 조선시대 묘법연화경 언해본을 찾아볼 인연이 있었는데, 거기서 우연히 (奴沃切)’으로 표기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생각하건대, 조선시대 불경언해 작업시 의 음을 일반적인 보다는, 덜 보편적이지만 연상(기억)하기 쉬운 으로 선택했을 것 같으며(당시 범어 원음의 대조가 잘 안 되었을지 모름), 일제시대부터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불경을 새로이 번역하면서, 조선시대 줄곧 으로 발음하던 관행과 의 오른쪽 글자가 으로 읽히는 사실이 묘하게 뒤섞여, 어느새 으로 잘못 와전하여 굳어진 게 아닌가 여겨진다. 구체적인 과정과 내용은 좀더 자세한 연구가 필요하다.

옮긴이도 성륜사(聖輪寺) 청화(淸華) 큰스님의 정확하고 세심한 법문으로 비로소 알아차리게 되었으며, 이 자리를 빌려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다행히 최근(2009) 조계종 교육원에서 공식으로 편역해 발행한 조계종 표준 금강반야바라밀경(조계종출판사 주석본, 18)에서는 산스끄리뜨 음가(아눗다라)와도 가깝고 한문 독음도 이기 때문 () 로 통일해서 읽는다.”고 정식으로 정정했다. 늦었지만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에서 공식으로 바로잡은 역경(譯經) 불사에 수희찬탄의 박수갈채를 보낸다. ]

 

진실로 모든 대승경전은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이고 보살들의 스승님이며, 삼세 여래의 법신사리(法身舍利)이자, 구계(九界: 보살·벽지불·성문과 육도) 중생이 고해를 벗어나도록 인도하는 자비로운 배[慈船]라오. 비록 가장 높은 부처의 과보를 증득할지라도, 여전히 법을 공경해야 하오. 근본을 잊지 않고, 그 은혜에 보답해야 하기 때문이오.

그래서 열반경(涅槃經)에서도 법은 부처님의 어머니이니, 부처님은 법으로부터 생겨난다. 삼세 여래께서 모두 법을 공양한다[法是佛母, 佛從法生, 三世如來, 皆供養法.].”고 말씀하셨소. (그런데 요즘은 불화(탱화)를 그리는 화사(畵師)흫 불모(佛母)라고 부르는가 보다.) 하물며 우리 범부 중생은 온 몸이 업장투성이로 뒤덮여, 마치 중대 죄수가 오래도록 감옥에 갇혀 풀려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신세인데, 어찌 법을 경시할 수 있겠소?

그런 처지에서나마, 숙세에 심은 착한 뿌리의 복덕 인연으로 불경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이오? 마치 장기수가 사면 조서를 받기라도 한 것 같으니, 경사와 행운이 끝없이 크오. 그러니 진실로 불경에 의지하여 삼계에 길이 하직 인사를 올리고, 생사윤회의 감옥을 영원히 벗어나서, 몸소 세 가지 몸[化身·報身·法身]을 증득하고, 곧장 열반의 고향까지 도달해야 하지 않겠소? 이렇게 끝없는 이익이 모두 경전을 듣는[聞經] 데에서 얻어지오. 그런데 어찌 망령되고 방자한 편견으로, 경외심을 품지 않고, 마치 속세의 유생들이 책 읽듯이, 태만과 모독을 자행할 수 있겠소?

만약 법회를 청하는 재주(齋主)나 법회를 여는 스님들이 모두 각자 정성과 공경을 다한다면, 그 이익은 정말 말할 수 없이 크오. 마치 봄이 대지에 돌아오면 초목이 무성히 소생하고, 달이 하늘 한복판에 떠오르면 모든 강물에 달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과 같소. 그래서 당사자는 업장이 소멸하고 지혜가 밝아지며, 복록이 높아지고 구하는 게 모두 뜻대로 이루어지게 되오. 또 돌아가신 부모와 조상들은 모두 극락정토에 왕생하고, 오랜 겁 동안 원한과 은혜를 맺어온 법계의 의식 머금은[含識] 중생 모두가 함께 삼보의 자비 광명을 받아 보리(菩提) 인연의 종자를 뿌리게 되오.

그러나 만약 재주(齋主)가 정성스럽지 않으면, 금전을 보시한 공덕은 유한하고, 불법을 업신여긴 죄는 무궁하게 되오. 또 스님들이 정성스럽지 못하면, 이는 북이나 바라·피리(法會에 쓰는 악기) 따위를 경전으로 삼고, 북채나 휘두르는 일로 의식을 치르는 것에 불과하오. 삼보(三寶)와 천룡(天龍)이 강림하시는 때와 장소에서, 거칠고 서툴며 성의 없는 지루한 행동으로 책임이나 때우려고 한다면, 어찌 되겠소? 그 죄악의 산이 우뚝 솟아오르고, 복덕의 바다가 바짝 말라 버리며, 생전에는 온갖 재앙을 당하다가, 사후에는 무거운 견책을 받지 않고 배길 수 있겠소?

인간 세상에서 재주를 닦고 공덕을 쌓아, 집안을 꾸리고 나라를 다스리며 살아가는 바탕은, 모두 글자[文字]의 힘으로 이루어지오. 글자는 세간의 지극한 보배라오. 평범한 사람을 성인으로 만들고,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 만들며, 가난하고 천한 사람을 부귀롭게 만들고, 질병에 걸린 이를 건강하고 평안하게 회복시켜 주기도 하오.

성현의 도맥(道脈: 道統)을 만고의 세월 속에서 얻고, 가문의 경영과 업적을 자손만대에 물려주는 일도, 모두 글자의 힘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소. 만약 세상에 문자가 없다면, 어떠한 일이나 이치도 모두 성립하지 못하며, 인간이 짐승과 다를 바 없어질 것이오. (근데 근래 우리 불교계는 불립문자(不立文字)와 이심전심(以心傳心)을 최고로 숭상하는 간화선의 영향으로 교학을 천시하고 글과 글쟁이를 얕보는 기풍이 강한 듯하다.)

글자에 이와 같은 공덕과 힘이 있을진대, 마땅히 애지중지하고 공경해야 할 것이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요즘 사람들은 글자를 제멋대로 더럽히고 모독하기 일쑤요. 이는 지극한 보배를 똥처럼 대하는 것이오. 그렇게 해서 현생에 복과 수명을 깎아 먹고, 내생에 무식하고 무지하지 않을 수 있겠소?

또 단지 유형(有形)의 글자만 더럽히거나 내버릴 수 없는 것이 아니오. 무형(無形)의 글자도 더럽히거나 내버려서는 더욱 안 되오. 효도[우애[충실[신의[예절[정의[청렴[수치[] 같은 무형의 글자(실질상 人倫道德)를 만약 실천궁행하지 않는다면, 여덟 덕목의 글자가 죽는 것과 같소. 이 여덟 덕목의 글자가 죽으면, 인간은 살아서는 옷 입고 모자 쓴 짐승과 다름없고, 죽은 뒤에는 삼악도에 떨어져 고통받을 것이오. 그러니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