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자주 만나는 벌레들 가운데, 특히 피할 수 없이 부닥쳐야 하는 딱한 처지들이 바로 곡식에 생기는 벌레들이다. 벼농사를 직접 짓지 않아 병해충 땜에 곤혹스러운 기억은 별로 없지만, 어려서부터 장사 다니신 어머니를 대신해 손수 밥을 지어 먹기 시작한 이래 지금껏 30년 남짓 자취(自炊)하다 보니, 쌀과 보리에 생기는 벌레와 바구미는 숱하게 많이 보아왔다.
물론 철없던 시절엔 그저 귀찮은 해충으로 알고 골라 내버리면 그만이었다. 허나 서른에 수행을 시작한 뒤로는 벌레의 생명도 귀중하게 여기게 되니 함부로 내버릴 수만은 없었다. 벌레는 주로 여름철 고온다습한 장마철에 기승을 부린다. 가만있어도 공기 중의 습기가 곡식 속까지 스며드니, 벌레들이 들끓기 딱 안성맞춤이다. 예전에 보리밥을 많이 먹던 시절엔 갈색 바구미가 많이 눈에 띄었는데, 쌀을 주식으로 한 뒤론 주로 쌀나방이 알을 까서 생기는 흰 쌀벌레가 단골손님이다.
수행하면서부턴 나는 여하튼 벌레들이 되도록 다 커서 고치를 짓고 나방이로 변화해 날아가도록 배려한다고 무던히 애는 썼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 과실치사상을 당한 목숨이 또한 얼마나 많았으랴? 노력은 했어도 잘못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는 미욱한 수행의 과정일 따름이다. 그 가운데 특히 인상 깊은 경험담 두어 가지만 적어볼까 한다.
재작년 겨울에 지리산 실상들에서 친환경농법으로 지은 무농약 현미를 10 kg 한 포대 사서 먹고, 한두 됫박 남은 걸 튀밥이나 한 방 튀겨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비닐봉지에 넣어 두었다. 근데 튀밥장수가 쉬 나타나지 않고 일에 바빠 정신없이 한참 잊고 지내다가, 작년 여름에 문득 집안에 쌀 나방이 많아지기 시작한 걸 알고 살펴보니, 쌀 봉지 안에 벌써 쌀벌레들이 시글시글하였다. 이미 번식할 대로 불어 왕성하게 쌀을 갉아먹고 있는데, 어찌 차마 손댈 수 있으랴?
그래서 아예 비닐을 한 겹 덧 씌워 마음 놓고 먹으라고 내버려두었다. 작년 여름부터 연구년이라 안식하는 판인데 그냥 편히 쉬기로 했다. 작년 여름 내내 찬바람이 날 때까지 나는 집안에서 온통 쌀 나방이와 함께 살았다. 조금 작고 볼품없어서 그렇지, 쌀 나방이 나비와 다를 게 뭐람! 하면서 말이다. 벌레들이 먹고 남은 쌀은 틀림없이 못 먹게 될 테니, 겨울에 산에 새 모이나 쥐 먹이로 시식(施食)할 셈이었다.
근데 겨울이 닥치자 또 하나의 사념이 떠올랐다. 벌레들이 다 자라 나방이로 변화해 날아갔지만, 혹시라도 나방이 겨울을 나기 위해 쌀 봉지 안에 알이나 그밖에 다른 형태로 숨어 깃들어 있을지 모른다는 염려가 스친 것이다. 만약 그럴 경우 그대로 눈밭에 야생동물 먹이로 뿌리면, 그 생명의 씨앗들은 꼼짝없이 얼어죽거나 통째로 삼켜 먹힐 게 아닌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쌀봉지를 그대로 두어보기로 작정했다. 이듬해 여름까지 지켜보고 처분해도 어차피 늦지 않을 거라고 여긴 것이다.
그렇게 잊고 한 해가 꼬박 지나 올 여름에 문득 생각나서 쌀봉지를 살펴보니, 이런 기막힌 기적이 있는가? 두 겹의 비닐 봉지는 작년 벌레들이 갉아먹어, 숭늉 풀기 마른 엷은 막처럼 힘없이 부스러져 내렸고, 누런 현미는 온데간데없이 하얀 쌀이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닌가? 게다가 올해는 새로 쌀벌레가 생긴 낌새가 전혀 없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손으로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글자 그대로 괄목상대(刮目相對)했다. 분명히 현미였었는데, 틀림없이 백미였다. 아주 희지는 않고 군데군데 누런 기운이 조금씩 남아 있는 거친 흰쌀이었다.
아아! 쌀벌레들이 지난여름 내내 그 부드러운 입술로 현미를 핥고 또 핥아 깨끗이 방아 찧어 놓은 것이다! 아마도 옛날 사람들이 손수 절구통에 방아 찧은 것보다는 훨씬 정교한 멋진 도정(搗精) 작품이리라. 글쎄 3분도 내지 5분도 쌀쯤 되지 않을까? 이왕 벌레들한테 먹히기 시작한 쌀, 그냥 먹으라고 내버려두었더니, 뜻밖에도 말끔하게 방아를 찧어놓은 것이다. 이 엄청난 자연의 신비를 발견하고는, 에디슨이나 아인쉬타인의 그 어느 위대한 발명 발견 못지않은 훌륭하고 뿌듯한 기쁨의 감격을 느꼈다. 사자와 사자의 잇새 찌끼를 쪼아 먹는 작은 새 사이의 멋진 공생관계가 사람과 쌀벌레 사이에도 이뤄질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마저 일었다. 다만 유일한 아쉬움은 쌀눈까지 먹어치워 버린 거였다. 근데 어쩌랴? 벌레들이 생존본능에서 가장 맛있는 자연영양만 다 갉아먹은 걸. 그리고는 영양이 바닥나서였을까? 올핸 더 이상 벌레가 생기지 않은 것이다.
오랜만에 내 집을 찾아오신 일흔다섯 살 어머님께 이런 사연을 말씀드리니, 참으로 희한한 일이라 여기며 깜짝 놀라신다. 그리고 그 쌀로 밥을 지어 먹어보니 구수하니 맛있었다. 헌데 아직까지 이런 사실을 관찰하여 발견한 사람이 전혀 없었을까? 아마도 절구통 방아와 온갖 방앗간 시설이 쌀벌레들의 입방아 작품을 보고 영감을 얻어 생겨나고 발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거미줄을 보고 그물을 짜서 쓰게 되었듯이 말이다. 참신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道)를 하나 체험한 아름다운 인연이었다.
근데 출판편집원고를 초교(初校)한 뒤, 작년 겨울 팔아 미처 먹지 못한 채 보관하던 메 현미 포대를 열어보고 또 다시 깜짝 놀랐다. 찰 현미와 메 현미를 각각 10kg씩 팔아, 찰 현미로 밥을 지어먹느라 메 현미는 봉지도 트지 않고 벌레가 나지 않도록 비닐봉지로 두 겹이나 잘 갈무리해 두었다. 올 여름엔 쌀 나방이 거의 안 날아다니기에, 이번엔 무사한 줄로만 짐작하고 이리저리 바쁜 핑계로 그냥 잊고 묵혀두었다가, 이제야 인연이 닿아 밥지어 먹으려고 종이포대를 텄더니, 이게 또 웬일인가? 이번엔 흰 쌀벌레는 전혀 없고, 대신 갈색 바구미들이 득실대는 게 아닌가? 참 귀신 곡할 만한 기막힌 자연의 조화다. 지금 집에서 9년째 살면서 바구미는 처음 본 것이니, 방앗간에서 포장할 때 바구미 알이라도 끼어들었단 말인가?
현미의 표피가 좀 부스러지긴 하지만, 아직 흰 쌀벌레처럼 흰 색 나게 방아까지 찧진 못했다. 두 벌레의 생태와 식성이 다르니까 여러 모로 대비가 된다. 바구미는 얼맹이 체로 쳐서, 따로 먹고 살만한 조그만 숙주 공간만 마련해주면 쌀은 곧 식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예로부터 부엌을 맡아 밥 짓고 반찬 마련하는 주부들이 알게 모르게 얼마나 많은 생명을 살상하게 되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값진 생활체험이다. 문명의 이기(利器)가 거의 없던 옛날엔 오죽했으랴?
이와 함께 또 하나 뜻밖에 발견한 사실이 있다. 재작년 여름에 나는 말바우시장서 민들레를 뿌리째 뽑아다 파는 걸 보고 8천원 어친가 꽤 많은 양을 사다가 물에 깨끗이 씻어 빨래 건조대에 하나하나 펴서 걸어 말렸다. 어려서부터 상추는 흰 뜨물이 나기에 벌레가 잘 타지 않는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상추보다 독하게 쓴 민들레는 더더욱 벌레가 타지 않는 줄로 믿었다. 사실 야생 민들레에 벌레나 뜨물 같은 게 낀 걸 본 적이 없다.
근데 또 뜻밖에 희한한 체험을 했다. 민들레가 잘 말라 큰 비닐봉지에 잘 쟁여 넣어 보관하는데, 현미에 벌레가 난 걸 알아챌 무렵 민들레 봉지에도 쌀 나방이 기웃대는 걸 보고 열어보니, 이게 무슨 변고람? 민들레 속에도 온통 쌀벌레가 들끓고 있는 게 아닌가? 생 민들레의 흰 뜨물이 녹말(탄수화물)일 테니, 조금 쓴맛이 나더라도 바싹 말라 전분으로 저장되면, 벌레들의 멋진 식량으로 별미가 되는가 보다 라고 그저 지레짐작할 뿐이었다.
하여 민들레도 현미처럼 함께 내팽개쳐 두었다. 빛도 누렇게 변하고 벌레가 갉아먹고 남은 찌끼는 더욱 앙상하게 부스러져 볼품없는지라, 아예 내다 버릴 생각이었다. 8천원과 힘든 품삯만 낭비한 셈 치면 되니까. 철이 지난 뒤에 민들레 속에도 나방이 알이라도 슬어 놓았을까 염려스러워 역시 현미와 함께 한 해 동안 묵혔다. 올 여름에 더 이상 벌레가 생기지 않길래, 버리기 아깝기도 하거니와, 벌레가 슬어먹고 간 잔재에 무슨 맛이나 약효라도 서렸을까 호기심에서 물 끓여 마셔보았다. 특별히 멋진 맛이나 효험이 느껴지는 건 아니고, 그저 빛바랜 씁쓸한 맛에 누르튀튀한 향이 배인 민들레차(茶)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돈 주며 마시라고 해도 고개를 돌릴 것 같다. 혹시 무슨 특효성분이라도 검출하여 입증한다면 모르겠지만. 남은 것도 겨울에 이따금씩 차로 끓여 마시려고 한다.
또 한 가지 벌레들의 인연을 소개하련다. 바로 밤과 상수리(도토리)에 깃들어 겨울을 나는 벌레다. 밤과 상수리는 두텁고 가시 돋친 열매 집에 갇혀 생겨나는데, 씨방이 생길 초기부터 일찌감치 무슨 나방인지는 모르지만 벌 쏘듯 주사 놓듯 수정란을 밤이나 도토리 씨방 안에 주입시킨다고 한다. 그것도 정확히 한 알씩만! 얼마나 기막힌 자연의 신비요 먹이사슬의 장관인가? 나방한테 쏘인 밤이나 도토리는 ‘선천성 기생충’을 타고나는 셈이다.
밤이나 도토리는 나무뿌리가 뽑아 올리는 물과 광물질, 그리고 잎사귀가 광합성해 보내주는 녹말과 탄닌을 차곡차곡 고스란히 저장하면서 몸집이 토실토실 살쪄가지만, 그 속에 깃들어서 부화한 애벌레는 밤이나 도토리 열매를 자양분 삼아 조금씩 자란다. 가을이 되어 열매가 무르익어 땅에 떨어지면, 낙엽에 뒤덮여 땅의 습기와 온기로 감싸여 무사히 겨울을 나길 기다린다. 봄이 되면 이제 애벌레들이 기지개를 켜고 밤이나 도토리 밖으로 나와 고치를 짓고 나방으로 탈바꿈해, 정말로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되어 창공을 자유자재로 노니는 이른바 ‘우화이등선(羽化而登仙)’ 하리라.
물론 그 사이에 벌레의 숙주(宿主)인 밤이나 도토리가 운 나쁘게 다람쥐나 그 밖의 야생동물 눈에 띄어 월동양식으로 갈무리되면, 밤이나 도토리 살과 함께 그대로 먹혀 뱃속의 염산에 녹아 없어지겠지. 게다가 요즘엔 가을 산에 사람쥐가 창궐하여 다람쥐나 야생동물과 도토리 쟁탈전을 벌이는 판이니, 벌레들의 운명은 억수로 참담해진 셈이다. 더욱 기막히게 얽히고설킨 자연의 먹이사슬에 다시 한 번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채식을 하기 시작한 뒤로 나는 밤을 잘 먹지 않는다. 특히 삶은 밤을 까먹다가 그 안에 벌레까지 화석처럼 고스란히 쪄진 모습이 눈에 띄면 저절로 소름이 끼친다. 사실 ‘밤’은 한글로는 어두운 ‘밤(夜)’과 같은 글자고, 한자로는 밤 ‘율(栗)’자가 ‘전율(戰慄)’의 ‘율’자와 통한다. 논어에 보면, 노나라 애공(哀公)이 공자 제자인 재아(宰我)한테 토지신(토지에 알맞은 나무를 골라 심으며 나라의 주(主: 사직)로 삼는 것을 가리킴)에 대해 묻자, 재아가 “하(夏)나라는 소나무로 삼고, 은나라는 잣나무로 삼았으나, 주나라는 밤나무로 삼았는데, 바로 인민으로 하여금 두려워 떨게(戰栗) 하려는 뜻이었다.”고 대답했다. 이에 공자가 지나간 일은 탓하지 않는다고 탄식하고 말았다고 한다.-주1) 고공단보와 문왕의 덕으로 은나라 주(紂)임금의 포학무도한 혼란을 바로잡아 천하 민심이 귀순한 주나라가 어찌 백성을 두려워 떨게 하려는 의도였겠느냐는 뜻이리라.
어쨌든, 몇 번 밤을 먹다가 벌레가 도사린 모습을 보고 소름이 끼친 그런 경험을 한 뒤론, 밤 율(栗) 자가 ‘전율’과 통하는 문자상의 의미가 새삼스러워졌다. 그래서 나는 밤은 되도록 사양한다. 삶은 밤은 까기조차 망설여지고, 생 밤 같으면 조금 껍질을 까보다가 성하면 먹고, 벌레가 들었으면 그대로 덮어 자연 속에 던져준다. 자연의 인연 따라 제 운명을 찾아가라고!
올 가을에 교정의 참나무에서 떨어진 상수리 몇 톨을 주웠다. 시민들이 때때로 드나들며 보이는 족족 주워가기 때문에 내 눈에 띄는 게 거의 없는데, 어쩌다 여기저기서 몇 톨이 내 손에 들어왔다. 연구실에 갖다 놓고, 작년 법학전문대학원 건물을 새로 건축하느라 버혀진 두 그루 아름드리 참나무의 빈자리가 남긴 허전함을 조금이나마 메꿀까 하는 바람에서, 이 도토리를 어디다 심으려 했다. 이리저리 바쁘다고 정신없이 며칠 지나는 사이, 창가에 놓인 도토리는 선명한 갈색이 점차 바래지면서 말라갔다.
그러던 며칠 전 의자에 앉았다가 일어나 바닥을 보는 순간 이미 한쪽이 으깨져 죽은 애벌레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살펴보니 창가 도토리가 메마르면서 굳어지자, 애벌레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그 딱딱한 도토리 껍질을 그 연한 입술로 갉아 구멍을 뚫고, 그 자그만 구멍 사이로 그 두툼한 몸통을 통과시켜 빠져나온 뒤, 바닥 아래로 굴러 떨어져 헤매다가 회전의자 바퀴에 치여 죽은 것이다. 나는 또 한 목숨을 과실치사하고 말았다. 전에도 그런 적이 한두 번 있었을 텐데, 깜박 잊고 일에 휘둘리다 또 한 번 잘못을 되풀이한 것이다. 그날 곧장 도토리 몇 톨을 법전원 주변 빈자리에 심었다.
근데 며칠 지나지 않아 이번엔 집 마루에 애벌레들이 몇씩이나 뒹구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가만히 찾아보니, 지난 10월초 관악산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계곡서 주운 도토리에서 빠져나온 피난충(避難蟲)이었다. 아차 싶었다. 올핸 무등산이나 관악산이나 도토리 풍년인 모양이다. 산행하다 보면 여기저기서 떽데구르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수없이 들렸다. 법전원 주위 성근 자리에 심어볼까 하고 주웠는데, 바쁘다고 잊고 게으름 피우는 사이 건조한 실내에서 메마르다 보니 열매 속에 깃든 벌레들이 죽지 않으려고 피난 나온 것이다.
이내 곧 도토리와 애벌레를 수습한 다음, 학교 주변 새로 옮겨 심은 나무 밑둥지에 마른 풀 섶이 수북이 덮여 있는 걸 보고, 그 풀 섶 아래 깊숙이 잘 숨겨주었다.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무사히 겨울을 나고 새봄에 고치를 짓고 나방이 되어 날아가길 간절히 염원하면서! 그리고 이어 나머지 성한 서른 톨 남짓 도토리를 가지고 곧장 법전원 주변을 시계방향으로 돌며, 새로 조경한 뜨락의 빈틈을 눈여겨보고 적절한 곳을 골라 심었다. 청소하던 아저씨 한 분이 궁금했는지 뭘 심느냐고 묻는다. “도토리요!” 아마도 싱겁게 들렸을지 모른다. 이 도토리가 제대로 싹 터서 어느 세월에 아름드리 참나무로 자라날지 알 수는 없다. 그냥 심고 싶어서 심을 따름이다.
재작년 7월 임시국회 회기 마지막 날 한밤중에 법학전문대학원(Law School) 법안이 전격 통과하면서, 미적미적 미루던 전남대 법전원 건물 문제가 갑자기 다급해져, 법대 주변 빈터에 전용건물 한 동을 신축하기로 가닥이 잡혔다. 그 자리는 커다란 아름드리 참나무 두 그루와 그 밖의 몇 그루 나무로 제법 녹음이 울창한 숲이었다. 나는 등교 길에 쪽문으로 들어와 논둑과 탱자나무 울타리 사이를 걸어 수의대 정원을 가로지른 다음, 짧지만 이 숲 오솔길을 지나 뒷 계단을 통해 연구실에 들어가곤 했다. 버젓한 정문과 현관을 놔두고서.
근데, 몇 해 전 쪽문 진입로 차량통행이 많아지자 사람의 안전을 확보한다는 미명아래 보도를 만든다고 그 고아한 탱자나무 울타리를 몽땅 베어버렸다. 기능적 편리만 생각하고 감성적 가치는 몰각한 처사다. 마음이 텅 비어버린 허전함이 가시기도 전에, 이번엔 참나무 숲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들어, 미리 교내 게시판 아르미에 “자르기는 순간이요, 자라기는 수십 년이라. 천지자연의 호연정기를 머금은 아름드리나무를 되도록 살립시다.”고 짤막한 호소문을 올렸다.
뜻밖에 반응이 있었다. 당시 교수협의회장 겸 평의회장이 나무가 잘리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격려와 성원의 글을 보내왔다. 그래서 내가 믿고 안심하고 방심했는지 모른다. 작년 초 건축부지에 말뚝은 박았으나 한동안 착공하지 않은 상태서, 조바심이 일어 총무과 식수 담당 직원한테 전화해 물었다. 자르지 않고 옮겨 심을 예정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답변하기에, 다소 안심은 했으나 불안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새봄이 무르익어 두터운 참나무 가지에도 연하고 무른 새잎이 돋기 시작하는데도 옮겨 심을 낌새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상태에서 5월 16일(금)에 착공식을 한다고 한창 부산을 떠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5월 18일 일요일 학생들을 데리고 지리산에 다녀온 뒤, 밤에 아주 거친 폭풍우가 몰아치더니만, 월요일 아침 등교하는데 보니, 숲은 온데간데없고 대지는 난자질 당한 듯 온통 파헤쳐져 붉은 황토 속살을 드러내고, 버혀진 나무줄기와 가지는 토막 난 시체처럼 어즈러이 널려 있었다. 갓 피어나다가 짓이겨진 연록색의 이파리는 풋풋한 향내라기보다는, 차라리 푸른 피투성이가 되어 피비린내를 물씬 풍겼다. 간밤에 몰아친 폭풍우로 도륙(屠戮)의 벌목현장은 폐허가 된 전쟁터를 방불케 할 만큼 극적인 시각효과를 연출했다.
눈앞에 펼쳐진 인공의 상림황폐(橡林荒廢)는 자연스런 상전벽해(桑田碧海)와 달리 극도의 비탄과 비분강개를 자아냈다. 입에서 욕이 저절로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곧장 글을 써서 당국을 고발하고 성토하는 강렬한 격문(檄文)을 올렸다. 당연히 공감하고 호응하는 댓글이 여럿 올랐고, 사회학과 아무개교수가 내 글을 심하게 힐난하는 반론도 올라올 정도였다. 너무 분하고 어처구니없어, 그 반론에 대해 정중한 예의형식을 갖추면서 조목조목 신랄하게 반박하는 장문의 글을 다시 써서 올렸다. 당시 미국 프린스턴대학에 방문 연구 중이던 인류학과 최교수는 그 대학 정원의 참나무 살리기 운동 사진까지 찍어 올리면서 화답했다.
나는 이 상황을 중문학 부전공 인연으로 만난 이병한 선생님께 글로 알렸다. 선생님은 원로 중문학자답게 중후하고 우아한 글로 위로의 화답을 보내오셨다. 앞으로 법전원에 들어와 공부할 학생들한테 나무의 희생을 잊지 않고 나무보다 훨씬 훌륭하고 값진 인재로 자라도록 간곡히 당부하라는 가르침이셨다. 불과 7개월만에 날림으로 세운 건물의 그럴듯한 허우대를 뒷받침해 주기 위하여, 물론 주변 조경도 대강 마친 상태지만, 내 마음 한켠의 허전함은 쉽사리 달래지지 않는다. 그나마 내가 권청하여 잣나무 스무 그루 남짓 심어 푸르름이 감도는 걸로 위안을 삼아야 한다. 앞으로 이나마 잘 자라면 늠름한 기상을 보태주길 기대하면서, 도토리 서른 톨 남짓 군데군데 심어 몇 십 년 뒤 내가 떠나고 없을 자리나마 짙게 울창해지길 염원한다. 그 와중에도 도토리 속에 깃들었던 벌레들의 수난이 그나마 도토리 심기를 재촉해 이루어진 인연임을 솔직히 고백하면서, 벌레들의 영혼도 해원소업하고 리고득락하길 기원한다.
주1) 論語, 八佾편: 哀公問社於宰我. 宰我對曰: “夏后氏以松, 殷人以栢, 周人以栗, 曰使民戰栗.” 子聞之曰: “成事不說, 遂事不諫, 旣往不咎.”